여염에서
겨우내 모란이 나무줄기 세워
제 영역을 표시하고 있을 때
작약은 지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산중 땅속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모란 가지에 새 순 올려 꽃 만들 때도
작약은 땅속에서 겨우
갓난아이 손 같은 빨간 움을 쥐고 있었다
모란이 화려한 자태로 호박벌을 불러들일 때
작약은 미약한 봉오리였다
모란이 지고 난 후에야
산작약은 심도 없는 풀줄기 끝에
화려할 것도 없는 화관 몇 장
뿌리는 제 속살 뜨거운 볕에 바래면
비로소 보이는 하얀 뼈의 색을
지상에 밀어 올린다
작약은 꽃을 피우기 위해
매년 새 줄기를 세워야 한다
단단한 지각을 파고드는 새봄
다시 시작하는 팔뚝에 새기는 가녀린 다짐
통증 다스리려 토해내던 흰 진액으로
지상의 꽃을 피우는 것이다
매년 지상의 소멸을 기억하면서도
새 봄마다
작약의 개화를 예언하는 것은
낮은 곳으로만 향하는 땅굽성
구심을 향한 인내의 내성을 믿기 때문이다
줄기에 세월을 기록하진 못하지만
겨울을 한 번씩 더 견디어 낼수록
꽃이 더 희고 아름다운 것은
뿌리에 담긴 진액이 연년이 더 쓰디쓰기 때문이다
한 해를 새로 맞을 때마다
작약 흰 꽃이 지상에서 더 빛나는 것은
내핵에 근접하는 뿌리의 어둠이
조금씩 더 농익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