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변 직후 궁핍한 시절

왜 그리도 잔병치례가 심했는지

취학통지서도 아직 안 나온 손주는

장딴지 피부병이 손바닥만 해져야

할머니 손에 끌려 도립병원엘 갔다

손주를 꼭 잡고 있으라고 했을 때도 몰랐다

보랏빛마저 도는 새파란 물약

진물 난 상처에 바르자

처음 맛본 공포였다

꼭 피부를 벗겨 내는 따가움이었다

 

팔팔 뛰는 손주의 울부짖음에

우리 강아지 얼마나 아플꼬 얼마나 아플꼬

그렁그렁 눈물 가득한 손주는

의자 앞 쪼그려 제 두 무릎을 꼭 잡고

불이 난 상처

호호

불어주는 할머니 황망한 손을 보았다

 

숨마저 잊어버렸던 순간

제 몸의 통증과는 또 다른 통각 때문

놀란 손주는 울음을 삼켰다

그 후 할머니의 아픔은 내 눈물이 되지 못해

참으로 애달픈 기억이다

 

꼭 한 갑자의 시간이 흘렸다

그 기억 속의 나이만한 어린 손녀와 꽃씨를 뿌린다

엄지와 검지만으로도 다 집을 수 있을 것 같은

봉지 속 석죽씨앗

땅을 골라주고 뿌리라고 했더니

누구에게서 배웠을까

작고 통통한 제 손바닥에 꽃씨 모아 들고

호호

철모르는 여린 입김을 불어 넣는다

 

올 해부터

무더기무더기 핀 석죽 꽃을 보는 사람들

모두 다 행복할 것이다

석죽은 제 온몸을 감싼 다스한 입김을

모두의 가슴에 향기로

호호

불어 넣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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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순 2016-05-09 0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할머니와의 추억이 손주의 삶을 밀어가는 힘이 되는듯 합니다
힘겨웠던 시절은 어느새 따듯하고 아름다운 때로는 아프고 아련한
추억이 되어 손주의 삶을 빛나게 합니다
이 시를 읽는 짧은 시간 동안 내 할머니와의 수많은 추억이
한꺼번에 밀물 처럼 밀려옵니다 아름다운 시 한편에 삶이 촉촉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