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조선조 최고의 위인을 둘만 꼽으라면 문치의 전성을 이룬 세종대왕과 무관으로서의 충무공을 거론한다. 그러나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을 보면 무인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온화하고 단아한 선비상이다. 구국의 영웅, 삼도수군통제사라는 무인 최고의 지위에서 모함을 받아 옥고를 치르고 간신히 죽음의 함정에서 빠져나와 백의종군하신 분, 전함 12척의 절대적 열세에서도 명량대첩의 기적적 승리를 이룬 분,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아쉽게 목숨을 잃는 파란만장의 삶을 산 분의 모습만은 아니다. 추앙받는 위인이 갖추어야 할 내적인 숭고함까지 모두 갖추어 흠결 하나 없는 위인의 모습이 성웅 충무공 이순신이다.

 

<생각의 나무>에서 출판한 칼의 노래(소설 이순신)‘는 신화 속의 인물을 현실로 끌어내려 피와 살과 뼈를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작가 김훈은 이충무공의 난중일기 행간에서 고통받는 인간의 신음을 들었던 것이다.

 

소설은 이충무공이 백의종군에서 시작, 노량해전의 전사에서 끝난다. 작가는 영웅의 행적이나 전쟁의 승리를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애 최대의 고비에서 겪은 인간내면의 고통을 형상화하려는 것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후 석방되어 죽음의 문전에서 물러 나오는 인간의 내면 풍경은 어떠할까? 의금부에서 풀려났을 때 심문과정에서 맞은 곤장의 장독으로 엉망이 되었던 몸보다 마음이 겪는 상처가 심했을 것이다. 난중일기에서 충무공은 작은 탄식소리, 희미한 한숨 하나 내지 않는다. 이충무공은 적개심, 증오심, 외로움을 일축하고 오직 오늘 옥문을 나왔다.’라고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작가는 고통의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는 이충무공의 내면세계를 칠천량해전에서 쑥대밭이 된 한산 통제영을 통해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충무공은 원균의 패전으로 잿더미가 된 한산 수군을 재건하는 것으로 황폐한 절망적인 내면세계를 추스린다.

장군은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고 순천에 권률 도원수에게 신고하러 내려가는 도중 어머니의 부음을 듣는다. 신화 속의 영웅이 절망적이고 인간적으로 울부짖는 장면이 나온다. 모함에 의해 무고한 충무공이 의금부로 압송되어, 이를 노심초사하던 모친이 돌아가신 것이다. 효심이 지극했던 충무공이 겪어야할 내면의 갈등을 작가는 애써 외면한다. 난중일기에서 이충무공이 인간적인 모습을 직설적으로 기록한 이 장면은 자가는 오랜 전란으로 흉폭해진 인심과 아노미상태를 황폐화된 남해 포구로, 절제된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충무공은 어머니의 죽음 앞에 한탄한다. 나라의 명을 어길 수 없어 장례도 지내지 못하고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 앞에 하직을 고하며 울부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 같은 사정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어서 죽을 것만 같지 못하구나.’(정유 419) 충무공은 울부짖지만 곧 분노와 절망을 무섭게 억제하고 감정을 절제한다.

슬픔과 절망의 극한에서 자신을 억제할 수 있는 힘은 임금에 대한 복종과 정적에 대한 단순한 두려움만은 아니다. 적에 대한 첩보는 캄캄하고, 군대는 흩어졌고, 백성들은 전란 속에서 구명도생만을 기다리고, 언제든지 자신을 문초하여 죽일 수 있는 조정의 기대는 압력으로 다가온다.

이충무공이 한계상황의 절망을 견디어 낼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작가는 이것을 로 보고 있다. 살인의 무기인 칼을 가슴 속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증오의 칼, 허무의 칼, 죽음의 칼. 그래서 이충무공은 새로운 길을 깨닫게 된다. ‘살 길과 죽을 길이 다르지 않다.’며 삶도 죽음도 하나로 긍정하는 것이다.

 

충무공은 육신이 아프다. 끊임없이 식은땀이 흐르고 몸은 곤하다. 몸의 아픔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힘이다. 삶과 공존하는 고통은 세상에 내가 살아 있음을 깨닫게 해주고, 동시에 세상에 대한 증오의 힘을 길러준다. 때문에 동시에 그의 마음은 한없이 허무하다. 어머니의 죽음, 아들 면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가족의 불행은 운명적으로 다가오는 개인의 불행이다. 이는 충무공을 더 할 수 없는 허무와 고뇌의 늪에 빠뜨린다. 삶의 가치와 목적을 상실케 하며 절망스런 현실의 전면에 홀로 서게 한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어야 되는 치욕과 모멸과 절망과 허무는 회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모멸을 모멸로 여기지 않고 절망을 절망으로조차 인정하지 않는 길뿐이다. 모멸과 절망이 없는 헛된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시지프스의 프로메테우스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시지푸스는 신화일뿐이지만 난중일기는 사실의 기록이다. 작가는 이 사실의 기록을 바탕으로 이충무공의 절망과 허무에 대한 분노를 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삶에 대한 절망과 허무에 대한 분노는 삶과 죽음을 하나로 다루어 삶도 죽음도 초월하고 있다. 몸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허무감이 크면 클수록 자신의 임무를 철저히 한다. 육신이 쇠잔할 수록 정신은 더욱 뚜렷하게 목표를 설정한다. 완벽주의자의 결백성과 같은 의무감이 불타오른다. 그리고 나만이 이 어려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충무공은 자신의 지위에 따른 역할 수행을 충실한다. 삶의 허무와 절망을 이겨내는 방법은 오직 전쟁의 승리뿐이다. 멈추면 쓰러질 것 같고, 곧 한계에 이르러 끊어질 활과 같은 모습이다. 현장을 확인하고 부하를 단속하고 격려하고 벌은 준다. 무오류 인간의 연전연승이라는 신화가 탄생하는 것이다.

 

신화 속 무오류의 영웅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가치는 무엇일까? 삶과 죽음은 하나라고 생각하여, 허무를 승화시켜 나가기 때문일까? 그에게 삶과 죽음은 하나이기 때문에 타협할 수 없는 것과는 타협하지 않는다. 절대적 가치의 유지는 죽음과 교환하는 것이다. 이충무공은 퇴각로를 열어달라는 적의 협상을 거부하고 노량해전에서 하나의 칼날이 되어 날아간다.

문학적 작업은 인간의 삶을 다루는 것이다. 위대한 문학적 작업은 한계상황의 인간 삶에 내면 깊은 공감을 준다. 작가와 독자가 동시에 가지는 공명현상이 절망이든 희망이든지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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