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헨리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0
오 헨리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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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9


작년 읽은 책 양의 반도 못 읽었는데 어느덧 2020이 끝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놀라서 집어 들은 책. 

단편이라 바빠도 틈틈이 읽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한 건 오산이었다.

이래서 고전, 고전 하는 건가. 뭔 놈의 문장들이 다 이리도 농축되어있담...?


교도소 복역 중 '오 헨리' 라는 필명으로 단편 소설을 내고 전업 작가로 돌아섰다는 그는

문장의 대가가 틀림없다. 대체 뭐하는 사람이어서 이렇게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이런 다양한 소재로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생각하며 다시 책 날개를 펼쳐보니

제도사, 기자, 약사 등의 직업을 전전하면서 그림을 그리거나 틈틈이 글을 쓰다가 잡지를 창간했다가 폐지했으며 지인의 소개로 은행에 취직해 일하다가 횡령혐의로 고소당했고 재판을 피해 도피생활을 하다가 자수하여 교도소 복역을 한 것이라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선 책을 많이 읽을 게 아니라 세상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했던 그 누군가의 말은 이번에도 입증되었다!반전의 귀재, 묘사의 귀재! 비판적이지만 비관적이지 않고 풍자적이지만 기품이 있다.


난 그가 쓴 글은, 마지막 잎새만 알고 있었던 지라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유머스러운 글이었다. (심지어 누가 썼는지 모르고 있었던 몇몇 이야기들이 그의 작품이었음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세상의 웃픈 이야기들을 어디서 그렇게 다 긁어모았는지, 그리고 인물 묘사가 어쩜 그렇게 세세하고 탁월한지. 계절에 대한 언급이 안 되어있는 글에서조차 이상하게 겨울냄새가 난다. 그게 마냥 슬프고 짠내나는 느낌은 아니고, 가끔은 그 짠내에서 아름다움조차 느껴지는데 그게 참 희한하다.


나는 잔에 무언가 채워져있으면 그걸 호로록 빨리 마셔버려야 하는 사람이라서

책도 애매하게 읽는 걸 싫어하는 편인데,

이 책은 왠지 연말까지 아껴 읽고 싶은 생각도 들고

근데 또 빨리 다 읽어서 '오 헨리 책 다 읽었다!' 떠들어대고 싶기도 하고

근데 또 아껴 읽고 싶고 근데 또 끝내고 싶은. 뭔지 알죠, 다들?


책을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건 책 좋아하는 사람들의 로망 중 하나인데(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대부분은 실패하기 때문이다. 근데 이 책은 호불호가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설핏 했다.

선물을 해주고 싶다는 잘못된 환상이 또 스물스물 올라오는 중.

이런 유혹에 또 한 번 속아 크리스마스 선물 교환식 같은 것에 이 책을 내는 실책이 있어선 안될텐데............


p.156

젊은 시절의 슬픔과 노년의 슬픔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다. 젊은 시절의 짐은 다른 사람과 나누면 그만큼 가벼워진다. 그런데 노년에는 나눠 주고 또 나눠 줘도 슬픔이 항상 그대로 남아 있다.



p. 332

카터는 여점원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는 그녀들이 사는 집이 대개 간신히 살 수 있을 만한 아주 작은 방 한 칸이거나 일가친척으로 넘쳐나는 거주지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녀들에게는 길모퉁이가 응접실이고, 공원이 거실이며, 큰길이 정원에 난 산책로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태피스트리가 걸린 방에 사는 귀부인이 그런 것처럼 여점원도 앞서 나열한 공간에서는 존중받아 마땅한 집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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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5-03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오디오로 다시 들었는데 성우가 점 안습 ㅜㅜ 그래도 좋았습니다.
좋은 밤 되세여~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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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알기를 거부한다’
(띠지에 적힌 말.)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프리모 레비‘의 책이다. 그는 86년에 이 책을 출간했고, 87년에 토리노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돌연 자살했다.

1.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게임

전쟁의 게임적 속성에 대해 궁금해져서 ‘전쟁 게임‘이라고 검색했는데 키워드를 잘못 고른 탓인지 여러 가지 게임들이 떴다. ‘2차 세계대전 게임‘이라는 키워드마저 떠 있다. 사람들은 은연 중에 승자와 패자를 가르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게임이 인기가 있는 거라나. 그런 경향을 은연 중에 이용하는 것이 전쟁이 아닐까 싶다. 나 또한 게임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특히나 다양한 전략으로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을 때는 짜릿함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게임과 전쟁은 아주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둘 다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지만, 전쟁은 피해자가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는 것이다. 소설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에는 겁에 질려 자신의 역할을 순순히 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소설을 읽은 후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의 띠지를 읽는 순간, 정말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해자가 된 것인가 라는 물음이 떠올랐다.

p.15 라거의 악행을 알고 있던 수많은 잠재적 ‘민간인‘ 증인들 역시 의도적인 무지와 두려움으로 침묵했다. 특히 전쟁 마지막 몇 해 동안 라거들은 복합적이고 확장된, 지역사회의 일상생활 속으로 깊숙이 스며든 체계를 구축했다. 사람들이 ˝수용소 세계˝라고 부른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실제 그곳은 폐쇄적인 세계가 아니었다. 크고 작은 공산품 기업과 농산품 회사, 군수공장들이 수용소가 공급하는 공짜나 다름없는 노동력으로부터 이윤을 뽑아갔다.


위에 적어둔 15쪽의 문장처럼, 수용소에서 사는 사람들의 끔찍한 삶을 독일인들은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이를 이용했다고 레비는 주장한다. 그거야 뭐 당연한 소리 아닌가.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상세하다. 그는 라거에서의 그 불행들이 유지될 수 있었던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로 의식주 그리고 목숨의 문제다. 그 규모의 인원에 비해 말도 안 되게 적은 금액으로 책정된 식재료의 값만 봐도 얼마나 많은 인원이 배고픔에 굶주리다가 죽어야했는지 그 거래처는 알았으리라는 것이 레비의 주장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생명을 앗아갔던 바로 그 가스는, 기존에 필요로 했던 양보다 훨씬 더 많이 주문이 들어갔고 그 주문을 받은 거래처가 모를 리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이야기는 64쪽에 있는 소설 ‘약혼자들‘에 대한 이야기와도 연결이 된다.



p.64 소설 『약혼자들』에서 페스트로 죽은 어린아이 체칠리아의 어머니는 마차 위, 다른 시체들 사이에 딸의 시신이 아무렇게나 던져지는 것을 거부한다. 그런 체칠리아 앞에서, 그런 개별적인 경우에 맞닥뜨렸을 때 ‘추악한 페스트 시체운반자‘가 보인 망설임과 ‘이례적인 존중‘을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위의 내용은 소설의 내용이지만, 63쪽에는 소설에 앞서 이와 똑같은 상황의 일화를 레비는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악행‘에 대해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을 때, 그래서 알기를 거부할 수 있을 때 악행을 좀 더 손쉽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악행들 속에서 하나의 개인을 발견하는 순간, 그래서 개인 대 개인으로서 자기 자신이 드러났을 때는 더 많은 죄책감을 느끼는 듯 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개인이 숨을 수 있는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악마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라거를 통해 많은 이익을 챙겼던 그 당시의 많은 업자들이 대표적인 예다.


2. 괴롭힘은 아래로 향한다

네덜란드에서 여행을 할 때 재밌었던 점 중 하나는, 오리 중에서도 센 오리가 있어서 그 오리가 나타나면 다른 오리들이 겁을 먹고 쉽사리 먹이를 먹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우세함도 잠시, 백조가 나타나면 센 오리조차 도망다녔다. 백조가 센 오리를 공격하면 센 오리는 마치 기분이 상한 듯 작은 오리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게 꼭 우리나라의 많은 직장인들의 모습같다는 생각을 했다.

p.43
멸시받는 연장자 무리는 새로 들어온 신입으로부터 자신의 굴욕감을 배설할 대상을 발견하고 그를 희생시켜 보상을 받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신입을 희생양 삼아 위에서 받은 모욕의 무게를 떠넘길 더 낮은 계층의 사람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태어났을 때 그 사람의 심성이 결정되어 있다는 쪽에 의견이 기울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가끔씩 내 안의 천사와 악마가 내게 귓속말로 유혹하지는 않는지? 받은 만큼 돌려주자는 마음을 느낀 적이 없는지? 내 중학교 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우리에겐 화장이 금지되어 있었고 틴트나 색깔있는 선크림을 바르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소위 날라리라 불리던 몇몇 아이들은 화장을 하고 와선 화장을 하지 않았다고 우겼고, 쫄보인 나는 틴트 한 번 바르고는 누가 눈치채는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해하며 하루를 보냈었다. 우리가 틴트를 바르는 게 어른들한테 무슨 나쁜 점이 있다고? 우리는 억울했는데 그 억울함이 선생님들의 마음에 와닿은 것인지 어느 날 화장에 대한 규제가 우리의 후배들부터는 약화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우리가 어떻게 했냐고? 화장을 하는 건 학생의 도리가 아니지 않냐고 단체로 소리를 질렀다. 나는 누구보다도 크게 야유 소리를 내며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외쳤다. 보다 더 유사한 이야기를 생각해볼까? 따돌림을 당하는 어떤 아이들은 종종 자신에게 기회가 생겼을 때 같은 방식으로 아이를 괴롭히는 행위를 하기도 한다. 그게 43쪽에 적힌 저 구절처럼 보상을 받으려는 심리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건, 저런 일들이 분명 빈번히 일어난다는 것이다.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하지만 그런 보상심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어난다면? 죽고싶다는 자아조차 사라져 자살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그곳에서 더 낮은 계층을 향한 괴롭힘이 생긴다면, 그만한 지옥이 또 있을까.


3. 수용소에서의 언어

p.113 보르트샤츠는 ‘어휘 유산‘을 의미하지만 글자 그대로는 ‘말이라는 보물‘을 뜻한다. 이보다 더 적절한 용어는 없었다. 독일어를 안다는 것은 곧 생명이었다. (중략) 독일어를 모르는 이탈리아인 동료들, 그러니까 트리에스테 출신 몇몇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은 ‘못 알아들음‘이라는 폭풍우 몰아치는 거센 바다에 빠져 한 사람씩 죽어가고 있었다.

p.108 소나 노새가 그러하듯, 우리에게는 고함이나 주먹질이나 근본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책에서 그가 자주 언급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언어가 생존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이다. 110쪽에서 그는 독일어를 모르는 포로들 대부분이 도착한 지 10~15일 안에 죽었다고 이야기한다. 108쪽에서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머뭇거리는 이들에게 주먹세례가 쏟아졌다는 이야기 또한 적혀있다. 레비는 같은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에게 빵을 조금 주고 독일어를 배웠다고 한다. 언어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할 것이라는 걸 깨닫고 일종의 투자를 한 것이다. 그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수용소에 적응하려 했던 레비의 노력도 놀랍지만 사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그 반대편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즉, 언어를 몰라서 죽어야만 했던 삶들 말이다.

특히 108쪽에 적힌 위의 문장, ‘소나 노새가 그러하듯, 우리에게는 고함이나 주먹질이나 근본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는 문장을 바꿔 말하면 독일어를 모르는 그곳에서의 삶이 소의 삶이나 노새의 삶과 같았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아주 무식할 것이라고, 혹은 어딘가 지적으로 결함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가장 흔한 실수는 언어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에게 유치원생 대하듯 마치 구연동화를 하는 것 같은 친절한 말투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말투가 어눌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생각까지 어눌한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수용소에서 언어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말귀를 알아듣는지 아닌지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64쪽에 설명되어 있던 그 이야기처럼, 언어가 있어야만 사람 대 사람으로써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특히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언어를 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중 누구를 더 외면하기 쉬울지 맞추는 것은 뻔한 일이다.


4. 우리가 가야할 길은

기록하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나 많다. 포스트잇을 붙이고 붙이다가 문득 허무함이 밀려왔다. 이런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나간 일을 덮지 말고 기억합시다! 그렇게 외친 후에 일어났던 수많은 전쟁들과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악행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의 책을 읽은 독자 중에는 독일인에 대해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고 그에게 메일을 보낸 이들도 있다고 했다. 그들의 주장대로 비단 독일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이미 지나간 시대의 사람들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레비가 말한 사람들, 즉 독일의 풍족함을 두고 으시대며 말하는 사람들을 봤을 때 레비의 마음이 어땠을까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이 동떨어진 이야기같다가도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피해자들의 인분으로 쌓아올린 국력에 마냥 박수칠 수 있을 것인가. 지금도 수많은 인간 존재가 그 자리를 위협받고 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어디일까. 어떻게 해야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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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2020-11-27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20-13
 
이름 없는 사람들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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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

책과는 별 상관없는 독후감.


1. 초등학생 때 담임 선생님께서는 가계도를 적어오라고 하셨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가계도가 뭔가, 싶겠지만. 그걸 적기 위해 아빠에게 할아버지 이름, 할머니 이름, 외할아버지 이름, 외할머니 이름을 물어보면 아빠는 앞의 두 개를 알려준 후 뒤에 두 개는 모른다고 했다. 그건 엄마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같은 선상에 적어야 하는 네 개의 이름 중에 왜 아빠는 두 개밖에 모르는 걸까 싶었다. 사랑하는 엄마의 소중한 엄마, 아빠의 이름인데.


2. 내 이름의 뜻에는 신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다. 물론 엄마 뱃속에 있던 내 의중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작명이다. 학교 선생님들은 종종 이름의 의미를 물으셨기 때문에 나는 내 생각과는 상관없는 이름의 의미를 여러 번 설명했고, 그럴 때마다 선생님들은 좋은 의미라고 말하셨다. 그런 말 외에는 별달리 할 말이 없었겠지. 나이를 먹으면서는 설명할 일이 줄어들었다. 딱히 숨기려 했다기보다는 묻는 사람들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름은 그저 이름이라는 걸, 나라는 존재를 푯대에 새겨둘 수 있는 하나의 글자일 뿐이라는 것을 서서히 알았다.

p. 19
이를 악물고 핸들부터 시작해서 곳곳에 남아 있는 나의 지문을 닦아냈다. 마지막으로 내가 갖고 있던 신분증을 운전석에 던져 넣고 차에서 내렸다. 재는 그 신분증을 주며 내게 말했었다.
이번 일만 무사히 마치면 마지막 이름이 되겠군요.그러나 나는 새롭게 시작해야만 했다. 다시 누군가의 이름을 구걸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3. 이름을 바꾸면 다른 삶이 펼쳐질까? 재영(가명)이라는 내 중학교 친구는 중성적인 이름으로 오해를 사곤 했다.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친구가 SNS에서 친구 신청을 했을 때 나는 이런 친구가 있었던가,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은 소희라는 여자 아이돌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고 세월의 변화인지 화장술의 변화인지 얼굴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우리가 함께 겪은 몇 개의 일화를 메시지로 주고받으면서 나는 그 친구가 재영이었다는 것을 퍼즐 끼워 맞추듯 알게 되었다. 재영이는 이름을 바꾼 것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이름이 꽤나 콤플렉스였는데 이름을 말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아졌다고 했다. 그러니까 재영이의 삶은 이름을 바꾸고 꽤나 달라진 것이다.


4.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진우의 삶은 이름을 바꿀 때마다 달라졌을까. 조금이라도 그 이름에 이입해 살아가게 되었을까. 딱히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가 있듯이, 이름은 불러주는 사람이 있어야 의미가 있는 거니까. 서유리가 ‘진우야‘라고 부르는 순간에서야 우리는 주인공의 실체를 맞닥뜨리게 된다. ‘진우‘처럼 생긴 얼굴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 이름도 없던 주인공이, 그래서 흐릿하기만 하던 주인공의 인상이 분명한 실체로서 떠오르는 것이다. 마흔이 되면 자기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얼굴‘을 ‘이름‘으로 바꾸어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자기의 이름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름이 불리는 순간, 그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에게 나라는 실체를, 존재를 들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p.140
그러나 그들이 받은 이름 중에 사실 새로운 이름은 없었다. 그들은, 아니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맞교환하면서 점점 자유로워지고 있다는 환상에 갇혀 있었을 뿐이었다. (...) 이것은 재가 구축한 하나의 정교한 시스템이었다.


5. 이름을 받으면서 진우는 0에 도달하고 있다고, 자유를 향해 가고 있다고 믿지만 그건 140쪽의 말처럼 환상이었을 뿐이다. 그는 자기의 이름을 잃어버린 순간에, 돌아갈 존재의 자리를 잃었다. 그는 재의 세계에 갇혀 나올 수 없다. 그 세계는 이름들 위를 옮겨 다니는 세계다. 거기에는 튼튼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존재의 보금자리가 없다. 존재들은 유령처럼 이름 위를 옮겨 다닌다.


6. 여기까지 읽다 보면 꼭 존재가 이름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작가는 예상과 달리 후반부에서 이야기의 방향을 튼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식인귀의 존재가 사실은 이름 없는 사람들일 뿐이고, 그들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 식인귀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결국 재가 만든 하나의 정교한 그 시스템은 재의 세계가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의 세계에 있다는 것을. 더더욱 큰 반전은 마지막 문장이다. ˝그들은 모두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름이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저‘산다는 것이 아니라 밥 익는 냄새를 맡고 허기를 느끼면서,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법당의 문을 나서면서, 불빛 아래 둘러앉아 밥을 먹으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금은 뜬금없게 느껴지는 해피엔딩이다. 글을 쓰던 작가는 조금이라도 희망적인 미래를 진우에게 주고 싶어 졌는지도 모르겠다.


7. 이름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존재는 어떻게 될까. 유령처럼 자기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떠돌게 될까 아니면 둘러앉아 밥을 먹으면서 나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8. 곰곰이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때 썼던 그 가계도에서 정작 그 네 명의 이름을 모두 몰랐던 건 나뿐이었다. 외할아버지,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지금도 나는 그분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할아버지가 손녀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정말이지 모르겠다는 어색한 표정으로 사탕을 건넬 때 느껴졌던 그 따뜻한 눈빛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남동생만 예뻐한다고 싫어했던 친할머니는 내가 먹어선 안 되는 것을 먹었을 때 그 어느 때보다도 놀란 표정으로, 울 것 같은 몸짓으로 119를 부르고 아빠를 불렀더랬다. 그런 눈빛이나 표정들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가 않는다. 때로는 이름이 아닌 나와의 관계가 그들을 규정한다. 그들은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다.


9. 이름을 기억해야겠다고 다시 생각해본다. 이름에서 존재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어도, 존재가 있으니 푯대를 세우자는 마음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관계 안에서의 그분들이 아니라 어린 시절 나와 똑같은 마음으로 뛰어놀고 청춘의 사랑을 했었을 두 존재들을 위하여.

10. 내가 기억하는 이름들을 생각한다. 누군가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준 적이 언제였는지 생각해본다. 엄마와 아빠의 이름을 더 많이 말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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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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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8

외면하던 진실을 마주했을 때의 고독감. 크게 바뀌기를 기대하지만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편협함. 자기만의 기준에 갇혀 타인의 행복을 재단하는 오만함. 주인공인 조앤의 우스운 면모들이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아쉬운 점은 조앤이 자기 스스로를 깨닫게 되는 과정이 뜬금없게 느껴진다는 것. 전체적으로 번역이 어색해서 아쉬웠으나 뒤로 가면 갈수록 몰입하게 됐다. 특히나 로드니의 에필로그와 마지막 문장이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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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일
고미영 외 지음 / 북노마드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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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

내가 모르는 일은 그 일이 무엇이든 매력적이다. 특히나 글과 종이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집자의 일이라니 말해 뭐해!
가볍게 읽기에 좋은 책이었다. 편집자에 따라 실무적인 일에 초점을 맞춰 인터뷰한 내용이 있었고 글과 사람에 맞춰 인터뷰한 내용도 있었는데 그 두 가지 말이 달라서, 같은 물음에 돌아오는 답변들이 달라서 흥미로웠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찍어두었다.
너무 욕심을 부리면 곤란하니 딱 일주일만 ‘이 정도면 됐어.’라는 마음없이 살아보기로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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