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렸을 때는, 아니 그 이후로도 꽤 오랜 시간을,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티를 내지 못한 채 지냈었다. "걔 좀 멋있지 않아?" 누가 그렇게 물으면 내 눈에만 멋져보인 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는 게 1단계. 그리곤 내 마음을 들여다볼 여지도 없이 "내 스타일은 아니야."라고 쉽게 부정하기를 2단계. 마지막 3단계는 상대방이 인기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정말로 그 사람으로부터 멀어지기. 당연한 결과이지만, 잘 될 일은 없었다.



2


행실이 나쁜 게 아니야무지한 소리다.

그럼 대체 뭔데요?

자유로워지겠다는 일종의 결단이지그건 우리 나이에도 가능한 일이란다.

십대 소년처럼 구시네요.

십대 시절에도 이러지 못했다그럴 엄두조차 못 냈지하라는 일만 하며 자랐으니까내 생각엔 너도 너무 그렇게 살아왔어나는 네가 자발적이고 추진력 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함께 이탈리아에 가고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면 널 산으로 데려가 눈도 맞혀주고 집에 돌아오면 충만한 생활을 누리게 해줄 그런 사람 말이야.

- 켄트 하루프, <밤에 우리 영혼은> 中



3

켄트 하루프의 글을 읽고 생각났던,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뒷부분. 


네가 새로운 걸 보고 새로운 걸 느꼈으면 좋겠다. 너와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후회없는 삶을 살면 좋겠구나.조금이라도 후회가 생긴다면 용기를 내서.. 

다시 시작하렴.

-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中



4

대체 뭐가 두려워서? 

후회나 죽음보다 두려운 게 뭐가 있다고?

아 그런 식이라면 나이를 먹고 90살 할머니가 된다면 좀 더 용기있을 수 있겠네. 어렸을 적 백문백답에서 물었던 대로, "당신이 내일 죽는다면 오늘 하고 싶은 일은?"이라는 물음이 현실에 가까워질 테니까. 언제라도 죽을 지 모른다는 확신이 들면 좀 더 용감해질 수 있겠지.



5

두 잔의 커피를 마시면서 연이어서 완독해버린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애초에 모든 것에 잘 지루해하는 편이고 금방 질려하는 편이라서 완독 자체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닌데, 켄트 하루프의 글은 딱히 극적이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어디선가 살고있을 그들의 사랑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든달까. 수려하고 밀도있는 문장들만 아름다운 소설을 만드는 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소설.



6

노인과 어린 꼬마아이의 조합은 늘 사랑스럽다. 노인은 꼬마만큼이나 순수하고, 꼬마는 노인만큼이나 용감하다. 그들이 용감해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면 우리의 삶이 더 나은 방향을 향해 가고있다는 확신이 든다. 나이를 먹더라도 다시 어린이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나이를 먹는 일을 두렵지 않게 한다. 언제라도 돌아갈 텐트가, 다시 나를 바라봐주는 시선이 있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그 어떤 시선도 두렵지 않게 만들어준다. 


샛강을 따라 걷다 우리 텐트로 돌아오거라할머니와 내가 기다리고 있으마한번 해보렴조금 갔다가 돌아오면 되니까보니랑 함께.

- 켄트 하루프, <밤에 우리 영혼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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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뱅의 책을 읽고 별점을 4점을 주었다가 다시 5점을 주었다가 4점을 주었다가 또 다시 5점을 주었다. 시인이 쓴 글을 보면 도대체가 자기도 잘 모르면서 나불대는 것만 같다. 도대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궁시렁대면서 의식 불명의 상태로 문장들을 따라가는데, 어느 순간 환상의 세계가 펼쳐졌다. 내가 있던 작은 방의 풍경은 사라지고, 수많은 생각들로 가득찬 시간의 방에 들어선 것만 같았다. 


이제는 책에서 나와 세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어려운 일이다무용한 독서에서 유용한 거짓으로 건너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 크리스티앙 보뱅, <작은 파티 드레스> 中


책을 읽으면서 생긴 변화 중 하나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가소로워졌다는 것이다. 



2

지난 번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크게 다툴 뻔 했다. 전세가가 폭등한 게 너무 다행한 일이라는 거다. 최근에 전세 계약을 맺고, 같은 건물의 갱신 계약 건 가격과 우리의 계약 가격을 비교하고 머리에서 열불이 나던 차였는지라 마음 같아선 친구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었다. 눈을 부라리면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친구는 그 전까지만 해도 부동산이나 주식에 그렇게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근데 그게 얼마나 중요한 지 이번 일로 깨달았다는 것이다. 자기는 돈을 모아 집부터 장만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자 돈에 초연한 척 굴었던 내 발언들과 순간적으로 분노에 차 눈을 부라린 모습이 동시에 떠올라 부끄러워졌다. 나는 물질엔 관심없는 척 굴면서도 누구보다도 돈을 원하는 속물인 게 분명했다.



3

주식을 한다. 부동산 정보를 찾아본다.

사업 아이템을 생각해본다. 

같은 날, Hotel Califormia를 들으면서 보뱅의 책을 읽는다.

Mirrors on the ceiling,

The pink champagne on ice


And she said, 'we are all just prisoners here, of our own device'


And in the master's chambers,


They gathered for the feast


They stab it with their steely knives,


But they just can't kill the beast

- The Eagles, <Hotel California> 中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의 없다. 가난한 삶만 있으면 된다. 너무 가난해 아무도 원치 않는 삶, 신 혹은 사물들을 피난철 삼는 삶이다. (중략) 우리는 오로지 부재 속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고, 결핍 속에서만 제대로 말할 수 있다. 

- 크리스티앙 보뱅, <작은 파티 드레스> 中


우리는 그렇게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사이를 진동한다.




왼쪽에서는 부양해야할 영혼들이 등을 떠밀고

오른쪽에서는 지향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 목소리 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의 것도 있는 듯 하다.



4

유용함이 우리를 돕던 과거의 시절을 지나,

이제 우리는 무용함이, 무해함이 위로하는 시기를 겪고 있다.

다행한 것은, 그 무용한 것들은 언제나 곁에 있으리라는 것이다.


당신은 꼼짝하지 않는다. 기차가 하나씩 출발하는 모습을 본다. 당신은 기차에 오르는 사람들, 비즈니스맨들, 존재감 없는 창백한 인간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기차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눈다. 돈과 관련된 따분한 이야기다. 당신은 그들 바로 곁에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한 소리가 그것들을 집어삼킨다. 종이 위에서 사각대는 펜 소리. 글 쓰는 이가 무슨 일에 끝없이 몰두해 있는 듯,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온다. 약속의 땅 러시아, 작은 나무집 위로 내리는 눈처럼,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소리다.

- 크리스티앙 보뱅, <작은 파티 드레스> 中


우리가 글을 써야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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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08-01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월 중순부터는 행복한 백수를 그만 두어야할 제게 뼈와 살이되는 책과 독후감 이로군요.. 맙소사… 그렇죠, 주식, 집… 맞아요… 시작하면 끝을 낼 수 없을걸 알아 시작하지 않으려했으나 불안에 등떠밀려 시작하게 되면 포기할 수 없어지는 … ㅠㅡㅠ 페이퍼 잘 읽고 이제 “책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마음을 다지며 총총…

봄밤 2021-08-01 16:13   좋아요 1 | URL
푸하하. 하지만 이 책을 읽으시면 다시 행복한 백수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실지도 몰라요. 보뱅은 무용한 독서가 유용한 거짓보다 낫다고 하거든요. 저는 결국 중용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저같은 팔랑귀들은 늘 결론이 이 모양이더라고요.
 


1

마음 속에 담아둔 문장들을 야금야금 하나씩 꺼내어 쓰면서 언젠가 그 문장들이 바닥났을 땐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걱정한 시기가 있었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꺼내어 쓰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더 빨랐고 무엇보다도 그 문장들을 읽을 수 있었던 사람은 다섯 손가락도 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제 깊은 구석에 자리잡고 앉아 영원히 떠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2

철길에 서있는 한 명의 뚱뚱한 사내와 10명의 아이. 정확한 비교 대상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왜 하필 뚱뚱한 남자일까? 기차를 막으려면 마른 남자 한 명으로는 안 되니까 뚱뚱해야 하나?' 라고 생각했던 걸 보면 뚱뚱하다는 표현은 있었던 듯 하다. 수많은 상황을 제시하면서 마이클 형님은 결국 독자 스스로의 '정의'를 정의하게 한다. 그의 의도에 따르면, 생명의 가치를 수량으로 따질 수는 없다. 또, 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하나의 생명을 죽일 수는 없다. 하지만 전쟁통에는 살리기 '좋은' 조건의 환자 위주로 치료가 이루어졌었다는 의사들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냉정한 이타주의자>에서는 단순히 선한 마음만 가지고 이타성을 발휘했다간 많은 재화가 낭비될 거라고 지적한다. 비슷한 이야기를 <팩트풀니스>에서도 다루고 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외면한 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가는 익명의 아이들 수백 명에게 주목한다면 언뜻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극빈층 국가에서의 냉정한 계산법이다. (중략) 로트는 내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에서는 무엇이든 완벽하게 하려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더 좋은 곳에 쓸 자원을 훔치는 꼴이니까요."

- 한스 로슬링, <팩트풀니스> 中


그는 자신의 병원에서 죽은 52명의 아이들이 아니라 병원에 오지도 못한 채 죽어버린 3,800여명의 아이들을 생각한다. 눈 앞의 아이가 죽어간다고 해서 밥도 먹지 않고 환자만 볼 수는 없다. 그러다가 다음 죽음은 의사 차례가 될 테니까. 의사도 밥은 먹어야 한다. 


병원에서 아이들이 죽어나간다고 해도 잠시 그 아이들의 죽음을 방치한 채 세계적인 기구에 목소리를 낸다면 미래에 몇 배나 되는 아이들을 살릴 수도 있다. 현재의 아이들을 살리는 것이 정의인가, 미래의 몇 배나 되는 아이들을 살리는 것이 정의인가. 가끔 누구보다도 정의로운 이들에게 '정의'라는 잣대로 손가락질 하는 이들을 본다. 개탄스러운 일이다. 


냉정한 계산법에 정의라는 잣대를 들이미는 사람들은, 죽을 듯한 갈증을 느껴보지 않은 것일까. 누군가를 등 떠밀지도, 혹은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 보지도 않았던 것일까. 최악과 최악 사이에서 차악을 선택해본 적이 없는 것일까. 울면서 손을 놓는 이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일까.



3

나는 겁쟁이다. 온갖 쓸데없는 걱정은 다 하고 산다. 천장이 무너져서 깔려죽는 일은 없을까, 생각할 때도 있고 밤에 누군가가 집을 몰래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어느날 소행성이 떨어져 나라가 순식간에 없어지진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불이 나면 뭐부터 챙겨나갈까 생각하기도 한다. 지하철을 타고 한강 위를 건너갈 때면 탈선이 되어 한강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럴 때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과학적으로 생존 확률이 높은가를 생각하곤 하는데, 그것부터가 이미 비과학적이다.


'저 밖'은 무수히 많은 장소의 합이고, 우리는 한곳에 산다. 물론 나쁜 일은 저 밖에서 일어난다. 저 밖은 여기보다 훨씬 크다. 따라서 저 밖에 있는 모든 장소가 우리가 사는 이곳만큼 안전해도 끔찍한 사고 수백 건은 여전히 저 밖에서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 장소를 하나하나 따로 추적햅면 대부분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깜짝 놀랄 것이다.

- 한스 로슬링, <팩트풀니스> 中


한스 로슬링은 세계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통계를 이용해 설명한다. 미디어가 전하는 이야기는 극적이고 희박한 사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 배웠던 구시대적인 세계관을 여전히 끌어안고 있는 이들을 비판하는데, 나도 그 중 하나였음을 인정한다. 책의 앞 부분에는 세계에 대한 이해도를 평가할 수 있는 문제들을 제시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침팬지보다 못한 정답률을 가진다고 한다. (3지선다이기 때문에 컴퓨터든 침팬지든 정답률은 33.333..%다.) 이 책을 읽고 내가 침팬지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4

통계를 공부한 사람들은 대체로 통계 해석 앞에 의심병이 있을 수밖에 없다. 통계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어떤 요인이 변수로 작용하는지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라는 것에 대한 의심이다. 변인 통제는 현실 세계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신뢰도'라거나 '높은 확률로' 따위의 이야기를 하며 틀릴 수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곤 하는데, 그렇다고 주장하는 내용에 항상 "~~할 가능성이 높다"라는 말을 달아선 꽤나 우유부단한 인간으로 보이기 쉽기 때문에 반박 가능성을 알면서도 "~~다, 이것들아!!" 라는 식의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는데 그런 건 알면서도 매맞는 발언이 아닐까, 싶다. 이 좋은 책에 별점 3점을 때린 나도 결국은 '변인 통제'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꽤나 대단한 인물인 것 같으니 그 정도 의심은 모두 거치면서 결론을 얻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


5


아래의 내용은 가장 감명 받은 대목.


"그러니까 나는 누구의 면상도 갈기지 못할 거야. 주주를 만나지는 못할 테니까. 그런데 학생은 만날 거야. 이번 주말에 할머니를 찾아가서 면상을 갈겨드려. 비난할 대상이나 때릴 대상이 필요하다 싶으면 그건 노인과 안정된 주식이 필요한 노인의 탐욕이란 걸 기억해. 그리고 지난여름 자네가 배낭여행을 하는 데 할머니가 경비를 조금 보태주셨지? 이제 그 돈을 돌려드려야 할 거야. 그래야 할머니가 그 돈을 노바르티스에 가져다주며 가난한 사람들의 건강에 투자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 테니까. 그 돈을 이미 다 써버렸다면 자네가 자네 면상을 갈겨야겠지."

- 한스 로슬링, <팩트풀니스> 中


나도 저런 방법을 써볼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높은 확률로, 할머니의 면상을 갈기는 놈이 나올 것 같아서 일단은 보류하기로. 이런 해학이 담긴 깨달음을 주려면 둘의 케미가 환상적으로 잘 맞아야겠지. 우리나라에선 일단 신고감이 아닐까 싶다................


5

이 책의 단점: 침팬지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책을 다 읽고나면 침팬지가 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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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라 그래 (양장)
양희은 지음 / 김영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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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별점의 기준이 흔들리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점 1점 = 이 책은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별점 2점 = 왜 이것밖에 쓰지 못하니

별점 3점 = 나쁘지 않지만 나까지 읽을 필요는 없었군

별점 4점 = 추천

별점 5점 = 책 때문에 행복했음

이라는 느낌으로 별점을 매겼다(고 생각했다) 

근데 오늘보니 꽤 괜찮은 책에 3점이 매겨져 있고, 놀라서 한참 전에 매겼던 3점짜리 책을 봤다가 혼잣말이 삐죽 새어나왔다. 이 거지같은 책에 3점을 줬다고? 

아무래도 점수의 기준이 매번 달라지는 것 같다. 이래서 훌륭한 몇몇 이들은 책에 별점을 매기지 않는다고 했던가. 별점 기준이 강화된 건지 아니면 그냥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다르게 주는 건지 모르겠음. 아무튼 별점은 믿을 게 못된다는 결론. 그나마 다행인 건 5점짜리 책은 아무리 그 기준이 바뀌어도 좋다는 거. 최소한 내 취향엔 맞으니까 살면서 다시 읽어볼 필요는 있겠지.



2

그 후로 열흘을 더 만났는데 참 이상했다. 남자 앞에 서면 으레 발동하는 치기가 묘하게 잠잠한 것이었다. '이래도 떠나지 않겠다고? 이래도 계속 내 옆에 있겠다면 그때는 봐줄 수도 있지' 하던 식의 치기가 이 사람 앞에서는 생기질 않았다.

- 양희은, <그러라 그래> 中


연애를 하면 늘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확인도 적당히여야 하는데, 상대의 마음을 믿지를 못하고 

이래도? (통과)

이래도 안 떠날 거야? (통과)

이번엔 떠나겠지 (통과)

라는 식으로 산 넘어 산인 격의 테스트를 무수히도 거쳤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 어리석은 연애들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R.I.P..)


지금의 남자친구와는 연애초부터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길래 나도 어리둥절한 마음이었다. 

'내가 연애에 드디어 지친 건가?'

'아님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건가?'

지쳤다고 하기엔 난 '사랑'이란 단어에도 설레는 로맨티스트였고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기엔 엎드려서 그와 통화할 때마다 내 발이 공중에서 자주 퍼덕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는 우리의 선택이 엇갈렸을 때, 내 선택을 비판하지 않고 천천히 이유를 들어주었다.

날 여자가 아닌 인간으로서도 존중해주었다. 

여자에겐 이래야 한다, 라는 교과서적인 행동으로 감동을 주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진솔하게 마음을 전하곤 했다. 더군다나 그는 나를 온전히 신뢰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신뢰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을 거였다.



3

Q. 동시대 작가들의 소설을 읽을 시간이 있습니까?

A. 그럴 시간은 별로 없어요. 소설가가 된 뒤에 제가 편견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새로운 소설이 제 것보다 형편없다고 생각되면 그 소설을 안 좋아하지요. 혹은 그것이 제 소설보다 낫다고 생각하면 역시 그 소설을 안 좋아한답니다.

- 파리리뷰, <작가란 무엇인가>의 움베르트 에코 인터뷰 中


작가 지망생인 봄밤에겐 마음이 변화되는 3개의 단계가 있었다.

1단계 : 비판의 시기 ('정말 별로다. 고작 이런 책을 사고 읽는다고? 이 정도면 내가 쓰는 게 낫겠어.')


1단계 후에 봄밤은 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2단계 : 혼란의 시기 ('내가 썼지만 정말 잘 썼다' 라는 생각과 '이런 거지같은 글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다니'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한다)


3단계 : 정화의 시기 (제 아무리 별로인 책이라도 그 책을 쓰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생각하며 아득해진다)


지금은 그냥 독자의 시기. 쓰지 않고 읽기만 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가끔 영 별로인 책을 읽으면 여전히 배아프긴 하다. 



4

어젯밤에 저녁부터 새벽까지 하이킥을 봤다. 

유튜브에 있는 최다니엘과 황정음의 서사 몰아보기를 눌렀는데 그게 5시간짜리인 줄은 몰랐지.

말그대로 몰아보기만 할뿐 대충대충 잘라서 보여주는 건 아니었던가보다.

옆으로 누워서 노트북도 같은 방향으로 옆으로 눕히고선 낄낄거리면서 보고있으니 동생이 날 보고 '과거에 빠져 사는군'이라고 한다. 

"원래 나이들면 과거를 추억하며 사는 거야!" 라고 소리쳤더니 아빠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본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도 과거는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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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1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는 내내 지금은 잃어버린 사진들에 대한 기억으로 빠져 들어갔다. 어렸을 때 찍은 사진은 이젠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대부분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 수업에 사용되면서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정서발달을 위한 한 번의 수업을 위해 사용된 사진들은 그 뒤로 역사 속에서 사라져야 했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처럼 영 감을 못 잡는 토니 같은 인물들이 내 삶에 등장한다면, 그 역사는 앞으로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완전히 다르게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그 수업을 지도한 교사들은 자신의 수업이 많은 역사들을 지워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내겐 다행히 남아있는 몇 개의 사진이 있다. 그중 어떤 것은 작은 꼬마 아이 둘이 알록달록한 원피스를 입고 있는 사진이다. 아마도 6살쯤으로 기록되어 있는 그 사진 속에서 아이는 카메라를 응시하며 밝게 웃고 있다. 어딘가 캠핑을 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진만으로는 기억을 복구하는 일이 버겁다.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 일기장 혹은 큼직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신문 기사 같은 것. 그게 아니에르노가 '세월'을 설명하기 위해 이 책에서 접근한 방식이다. 



글의 마지막에서 옮긴이는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라는 예언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특히 책의 중반부에 접어들었을 때 내가 느낀 것은 모든 것은 분명 사라질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웠다. 아니 에르노에 의하면 페미니즘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나 어느 순간 새로운 것이 되었고, 과학기술의 발달은 두려운 것에서 익숙한 것으로, 다시 두려운 것으로 회귀한다. 정치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러니 사라짐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 자신이 그 사라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다. 영화 <코코>에서 영혼을 기억하고 있는 생존자가 없을 때 그 영혼이 사라지는 것도, 우리의 역사 속 산증인의 임종을 두려워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책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 책에 5점의 별점을 주는 건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이후 처음이다. 더군다나 <부분과 전체>의 60%쯤을 이해하고 추천했었다면,  이 책은 40% 정도밖에 이해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추천한다. 이 책은 검증되지 않은,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가치있는 역사서이기도 하며, 나이듦의 과정을 고백한 에세이이자 어느 가족의 사진첩이자 한 여자의 일기장이다. 모든 장르에 속하면서 어느 장르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은 독특한 책이다. 



그렇게나 좋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40%밖에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지루함과 무지 때문이다. 지루한 첫 번째 이유는 같은 패턴으로 인한 지루함인데, 그건 그녀가 택한 주제가 '세월'이기 때문에 오는 어쩔 수 없는 결과인지도 모른다. 두 번째 이유는 이 글이 에세이도 소설도 아닌 형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에세이였다면 글에서 느껴지는 진솔함이 글의 매력을 살려줬을 것이고, 소설이었다면 갈등이 발생하고 해소되는 지점에서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소설이 아니며, 옮긴이에 의하면 '다수의 역사'에 대해 쓰고 있기 때문에 일인청 시점으로 작성하지 않았다는 말이 적혀있다. 약간의 의아함이 든다. 다수의 역사에 대해 썼다고 해도 그 또한 일인칭의 시점으로 바라본 세상이 아닐지. 일인칭 시점을 택하지 않음으로써 독자가 그 역사에 함께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 또한 견뎌야하는 지루함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 글은 두 형식을 모두 택하지 않음으로써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세 번째 이유는 복잡한 문장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문장 자체의 복잡성 때문이다. 문장의 밀도가 높아 천천히 읽는 것은 크나큰 즐거움이지만, 문장의 복잡성 때문에 읽는 속도가 느려지는 것은 아주 지루한 일이다. 

가장 아쉬운 점은 독자인 내가 프랑스의 역사에 대해 무지하다는 점이다. 읽는 동안, '왜 난 이 책을 읽기 시작해서, 무지로 인한 답답함의 형벌을 견디고 있는걸까' 라는 생각을 수도없이 했다. 이 책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 프랑스의 역사를 공부할까, 라는 생각도 했지만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있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그 앞의 역사까지도 이해한다고 한들 그 전의 역사, 그리고 또 그 전의 역사는 연기처럼 내 앞을 어슬렁거리다 사라질 것이다. 혹은 내가 먼저 사라질 지도 모를 일이다. 차라리 역사가 되고 있는 현재에 충실하다면, 아니 에르노처럼 적어도 내가 살아낸 삶의 역사에 대해서는 쓸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언젠가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아니에르노같은 작가가 한국에서 등장하길 바라고 있다. 누군가의 삶과 한 나라의 역사가 혼합된 일기장 같은 글을 읽고 싶다. 그때는 '역사에 무지해서 책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다 읽고 난 후 가장 아이러니했던 문장.

p.31 우리가 미래를 대표한다는 연설이 있었다.


현 시대를 살며 답답한 우리들을 위로하는 문장

p.95 연설과 제도는 우리들의 욕망보다 뒤쳐졌고, 사회가 말로 표현하는 것과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격차는 당연했으며, 그것은 메울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책의 변곡점 같았던 문장

p.123 요컨대 과거와 미래가 뒤바뀐 것이다. 이제 욕망의 대상은 미래가 아닌 과거다.


이분법적 사고를 가진 우리를 긴장시키는 문장

p.131 5월은 개인을 분류하는 방식이 됐다.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그 시국에 어느 쪽에 있었는지를 물었다. 양쪽 모두 똑같이 폭력적이었으며 서로 그 어떤 것도 용서하지 않았다.


엄마를 이해하게 하는 문장

p.137 남자 없는 여자는 자전거 없는 물고기다라고 적힌 포스터를 깔고 앉았으며, 우리들의 인생을 다시 돌아봤고, 남편과 아이들을 떠날 수 있음을,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그리고 잔인한 것들을 쓸 수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면 결의는 식어버렸고 죄책감이 올라왔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지 못했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보이지 않지만 소중한 것에 대한 문장

p.171 그녀들은 자신들의 삶과 미혼, 이혼녀들의 삶을 비교했고, 기차역 앞에서 배낭을 메고 땅바닥에 앉아 천천히 우유를 마시는 젊은 여자 여행자들을 우울하게 바라봤다. 


무용하다고 느끼면서도 놓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문장

p.253 그를 단념한다는 것은 매일의 행위들과 무의미한 사건들을 누군가와 대화하고 일상을 언어로 표출하는 일을 그만둬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더 이상 기다림이 없어지는 것이고, 서랍 속의 레이스 티팬티와 스타킹을 보면서 이제 아무 쓸모 없어졌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며, Sea Sex and Sun을 들으며 몸짓과 욕망과 피로의 세상에서 배제된, 미래를 빼앗긴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상을 하면, 그 순간 이 박탈감이 그녀를 <마지막 사랑>인 것처럼 그에게 맹렬히 집착하게 만든다. 


모든 순간을 붙잡을 수 없다는 깨달음

p.280 실질적인 추억은 얼마 없는 또 다른 형태의 과거가 매끄럽게 나타났다. 하나씩 자세히 들여다보며 촬영했던 상황을 되짚어 보기에는 사진들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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