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돈을 좀 아껴보겠다고 서울과 경기를 이리저리 오가며 발품을 팔았다. 시간은 금이라는데, 금쪽같은 시간을 써서 돈을 좀 아꼈다고 생각하니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금보다 비싼 게 지금이라던데. 요즘 같으면 그런 아재개그 누가 하냐고 비웃음 당할 일이지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만해도 난 그게 좀 센스있다고 생각했다.(지금도 아재 개그 좋아함..) 그렇게 종일 고생한 다리를 이끌고 허름한 분식집에 들어갔다. 카카오 지도를 켜고 살펴보면 별점 4점 이상의 맛집 리스트가 즐비하건만, 왜 하필 그곳이 눈에 띄었을지. 그러나 선택은 옳았다. 마약김밥과 떡볶이, 돈까스를 주문해서 둘이서 해치웠다. 역시 금중의 최고는 야금이다.



1


"생쥐가 불쌍하다고 꼬리를 잡아당기다 멈추거나 천천히 잡아당기면 오히려 더 큰 고통을 줄 수 있어요. 반드시 단숨에 확 잡아당겨서 한 번에 경추를 끊어야 합니다. 명심하세요. 꼬리만 끊어지지 않게 조심하고요."

- 김준, <쓸모없는 것들이 우리를 구할 거야> 中



많은 것들을 가소로워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나 혼자 누군가를 가소로워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었는데 정작 세상도 그렇게 바뀌니 이렇게 혼란스러울 수가 없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확신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예전엔 맞다, 아니다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일에 주춤하게 되는 일. 


생명 윤리 또한 그렇다. 이를테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화학약품을 만드는 일에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할 순 없잖아요. 그러니 동물 실험을 하는 거죠."라는 말을 듣고 '아, 그렇지.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하는 건 더더욱 위험하잖아.' 라고 설득되었던 어린 나는 '동물들에게도 '위험'한 일이라는 걸 자각하는 시기'를 지나 이제는 그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가져볼 수도 있게 되었다. 사람이 쓰는 물건을 만들기 위해 동물의 목숨이 희생된다는 건 인간중심적인 사고라는 것을.....(많이 컸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열심히 육류를 먹는다. 심지어 돈까스를 먹으며 감탄하지 않았는가. 이중인격이 아닐 수 없다. 육류없는 삶은 번거롭고 즐겁지 않다는 것을 겪어보지도 않은 채 확신하고 만다. 그래서 어른이 된 나는 확신을 잃는 쪽을 택한다. 얼마나 잔혹한 방식으로 우리의 식탁 위에 계란이 올라오는지를 알고 있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계속해서 먹을 수 있느냐고 아무개가 묻는다면 나는 그 아무개에게 변명하듯 웅얼거리다가 억지 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모면하려 할지도 모르겠다. 확신있는 삶을 향한 내 갈망은 딱 반쪽자리인 것 같다.


그러니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누는 수많은 문장들의 대부분이 어딘가 한쪽으로 쏠려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삶이 아니겠는가.... 라는 속편한 생각을 하기로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2

하지만 인생도 그렇듯 해보기 전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특히 과학 연구에서는 더욱 그렇다. 설치류 연구들은 짧게 보면 다른 의생명 연구와는 결이 너무나 다르고 상업성이 훨씬 떨어져 보인다. 그렇지만 이처럼 비록 지금은 쓸모없다고 손가락질받는 것들이 어쩌면 지식의 한계를 부술 결정적인 연구가 될 수도 있다. 인류가 오랫동안 그토록 애타게 찾던 정답은 아마도 아직 누구도 가보지 않은 저 너머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김준, <쓸모없는 것들이 우리를 구할 거야> 中



과학을 사랑한다. 그리고 과학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좋은 성과를 냈건 못냈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필요나 성과를 요하지 않고, 그저 순수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애정을 품은 이들을 향한 동경같은 것이다. 주식이나 부동산, 재력과 명예 물론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마음 속에 세상에 대한 애정을 품지 않은 이는 정말이지 영 마음이 가질 않는다. 마음이 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혐오(싫어하는 단어라 잘 쓰지 않지만 지금 상황에선 내 마음을 정확히 묘사한 단어다)하는 정도다. 애정하던 친구가 문학과 과학의 가치를, 무용한 것들의 가치를 깎아내렸을 때도, 같은 이유로 나는 얼떨떨한 마음이었다. 


이 책을 처음 읽게된 것도 책의 제목 때문이다. 쓸모없는 것들이 우리를 구할 거라고 생각하면, 그 상상만으로도 행복감에 벅차오른다. 누군가가 내게 손을 내밀었을 때, 자존심 강한 나는 쉽사리 그 손을 잡지 않겠지만, 그게, 내게 손을 내미는 그것이, 쓸모없는 것이라면 나 스스로 '쓸모없음'을 끌어안고 오롯히 나를 맡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책을 펼치자마자 등장하는 것이 '예쁜꼬마선충'이라니. 맙소사.........누가봐도 가장 쓸모없어 보이잖아. 


3

그렇지만 세상을 뒤흔든 과학의 발견은 때로는 우연히 찾아오기도 한다. 실험 도중 실수로 방치한 푸른곰팡이에서 발견한 항생물질 '페니실린', 내복용 살균제를 개발하다가 탄생한 해열진통제 '아스피린', 그리고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금을 만들어내려다가 정작 금은 못 만들고 수많은 새로운 물질을 발견해 근대 화학의 발달을 이끈 연금술사들의 사례도 있다.

- 김준, <쓸모없는 것들이 우리를 구할 거야> 中


그런데 그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 정말로 우리를 구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구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는 기술력에 비해 새로운 과학을 창조하는 능력은 부족하게 보인다. 그게 능력이 없어서인가 하면 그게 아니다. 능력있는 인재를 길러낼 줄 모르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일 거다. 초 6년, 중3년, 고3년의 오랜 기간 동안 탄탄한 기초없이 암기만 하게 만드는 대입 구조는 대한민국의 가장 큰 손실이다. 수많은 지금들을 쓰레기통에 넣고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듯 대학원생들을 값싼 노동으로 사용하는 문제도 한 몫 한다. 무엇보다도 유행하는 과학 기술이 등장하면 뒤늦게 따라하기 바쁜 잘못된 연구비 지원도 크게 한 몫 한다. 그들은 연구원들이 과학자가 아니라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드넓은 갯벌에서 진주 하나 찾는 것과 같은 어려운 과학의 발견을 그저 자판기 뽑듯 나올 거라고 믿는 그 신념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4


상대성이론이 물리학자들에게 일상이나 고전 물리학에서 가져온 용어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는 일의 위험을 알려주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양자론을 이해하는 일은 훨씬 힘들어졌을 것이다.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물리와 철학> 中



야금야금 먹는 게 돈까스만은 아니다. 이놈의 물리와 철학은 처음 읽기 시작한 게 자그마치 2018년 9월인데. 


1905년, 아인슈타인이 기적의 해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안 그래도 무시받았던 양자론이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때로는 앞서 길을 터 준 사건들 덕분에 그 뒤의 일들이 수월해진다. 누구보다도 양자론을 거부했던 아인슈타인이 그 길을 텄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고 재미난 포인트다.




5


머리 위로는 꽃 흐드러진 밤나무 가지가 드리워져 있었고, 그 위로는 맑은 하늘에 커다란 양털구름이 거의 움직임 없이 떠 있었다. 그 아래 풀밭에 흩어져 있는 우리는 도시의 거무죽죽한 쓰레기 같았다. 우리는 풍경을 더럽히는 존재였다. 바닷가에 흩어져 있는 정어리 통조림이나 종이봉투처럼.

- 조지오웰, <나는 왜 쓰는가> 中


책의 내용과는 맞지 않지만, 그의 문장을 읽는 순간 과거의 감정에 빠져들었다. 어렸을 때 나는 비에 젖어 죽죽 쳐져있는 낙엽을 보면 그게 때때로 나같다는 생각을 했다. 바람 많이 부는 날에는 비닐 봉지 같은 것이 나무에 걸려있었는데 그것도 나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뭇가지에 뒤엉켜 오도가도 못한 채 펄럭이는 검은 그것을 보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아렸다. 


지금은 그런 봉투 따위에 감정이입을 하진 않지만, 날이 아주 맑은 날, 그의 문장대로 꽃이 흐드러지는 나뭇가지, 맑은 하늘, 새털 구름, 그리고 풀밭같은 것들과 함께 하는 날에 사진을 찍으면 거기서 지워야할 것은 나뿐인 것 같다는 생각은 종종 한다. 나만 빠지면 완벽한 사진이 되었을 텐데 정말이지 '다 된 사진에 나 뿌리기'를 한 것만 같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러니 써야하지 않을까. 보이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워 종이봉투같은 인간이 함께할 수 없으니. 누가 그랬던가.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을 쓰거나, 그게 아니면 쓸 가치가 있는 삶을 살라고. 그러나 세상에 쓸 가치가 없는 삶은 없다. 확신할 수 없는 인생에서 그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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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9-12 1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금보다 비싼 거이
지금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와 닿는지
모르겠습니다.

야금야금 먹는 돈까스
땡기네요 - 오늘 저녁
은 김밥입니다.

봄밤 2021-09-13 00:09   좋아요 0 | URL
후회없는 지금을 살아야할텐데 무의미한 지금들만 스쳐지나가네요 흑

그레이스 2021-09-12 2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지 오웰의 글쓰기 좋아해요~

봄밤 2021-09-13 00:10   좋아요 1 | URL
읽어야지 생각하고는 한참을 안 읽었던 책이에요. 그래도 이젠 정말로 읽어보려고요. 앞부분은 정말 좋은데 계속 좋을지 기대가 됩니다!
 


1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일주일동안 사랑이 무엇인가 생각하다 시집을 꺼내 읽었다. 자연스레 시집을 선물받았던 순간도 떠올랐다. 시집의 제목을 속으로 읽고는 꼭 그가 그 말을 한 것처럼 어색해하던 그날의 미묘한 감정 변화도 떠오르는 듯 했다. 책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건 분명 글자보다는 목소리에 가까웠다.


그 이후 그는 떠났지만 이 새는 책장에 남았다. 새가 보일 때마다 그가 보이는 것 같아 두꺼운 책들 사이에 시집을 숨겨두었는데 그렇게 해도 그 문장은 여전히 눈에 들어와 마음을 찔러댔다. 방에서 거실로 나올 때마다, 거실에서 방으로 들어갈 때마다 시선이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울었고, 하필이면 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고작 이별을 했다고 운다고 놀림을 당했는데 황당하게도 그날부터 그 문장이, 그 새가 생각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꺼낸 이 시집의 새는 여전히 소리를 내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이다. 쉽게 지저귀는 새들과는 달리 꾹 다문 부리는 아무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그 어떤 따뜻한 고백의 말도 하지 않을 것만 같다. 사랑을 시작할 땐 품어주고 싶었던 그 새가 사랑이 끝날 땐 까맣게 타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난 절대 연인에게 시집만은 선물하지 말아야지. 그 시절의 나는 다짐했었다.


지금은 목소리가 아닌 글자로 그 문장을 읽는다. 곁에 있어도 그리움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에리히 프롬이 말한 사랑의 기술을 아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이른다. 꽃을 보면 물을 주듯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사랑을 줘야지. 이번 주말에, 아니 당장 내일 사랑한다는 고백의 말을 듬뿍 해주어야지. 


2


남들이 다 이해할 수 없는 내 몫의 슬픔이라는 것이 있다. 그 같은 슬픔은 타인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이 그들의 잣대로 규정짓고 재단하려 할 때 슬픔을 견뎌야 하는 사람에게 더 큰 슬픔이 되곤 한다. 아버지를 잃는 것도, 아버지 없이 홀로 신부 입장을 해야 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딸들의 몫이다. 그리고 그 슬픔은 영원할 것 같지만 영원하지 않다. 어느 시점이 되면 다른 형태로 각자의 삶에 녹아들어서 새로운 형태로 전환한다.

- 김범석,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中


난 슬픔으로 유세를 떠는 아이였다. 아주 어렸을 때는 슬픔이 부끄러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아무도 없을 때 울고, 울던 나를 다그치며 울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슬픔이 부끄럽지 않아졌다. 얼마나 유세를 떨 게 없으면 슬픔으로 유세를 떠나 싶겠지만, 지금의 나를 키운 것은 구 할이 슬픔이다. 나는 철썩같이 그렇게 믿고 있다.


슬픔에 단단히 대비를 하고 살다보면 정작 슬픔이 찾아왔을 때 아무렇지 않은 척 굴 수 있게 된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같은 심정으로, 나를 찾아온 슬픔을 맞이해주면 슬픔과 내가 만나 슬픈 내가 되는데 난 그런 나마저도 사랑했던 것 같다. 비오는 날 비를 맞으며 집에 가기도 하고(그래서 생긴 일화가 많다..) 야자시간마다 우수에 젖은 표정으로 멍을 때리며 창문 밖을 내다보면서 슬픔을 온전히 만끽했던 걸 보면. 선생님들이 보기엔 중2병 말기 환자처럼 보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니 슬픔이 나를 키웠다고 철썩같이 믿을 수밖에.


그러다가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슬픔이 있다는 것을 2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알게됐다. 처음에는 그 몫이 절대적으로 같은 양이 아니라는 사실에 탄식하고 신에게 주먹을 들이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언제부턴가는 절대적인 양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건 정말로 자기 몫만큼 찾아오는 법이라는 걸 무던하게 인정하게 됐다. 그래서 누군가가 사소한 슬픔으로 코를 찡긋거리더라도 그를 미워하거나 질투하지 않게 됐다. 그렇게 된 건 정말이지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에 슬픔은 절대적인 크기로 판단하고 말아버리지만, 때때로 그건 눈덩이처럼 불어버리기도 하고 진눈깨비처럼 흩뿌려지기도 하고, 녹아서 내 삶의 모든 국면에 스며들어버리기도 한다. 가끔 그건 끔찍한 핵폭탄으로 둔갑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영양가 있는 흙으로 바뀌어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채연이 싸이월드에 적었던 '난....ㄱ ㅏ끔.. 눈물을 흘린ㄷ ㅏ...'로 시작되는 그 글도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다.


3


떠난 이들은 남지 못한 게 아니라 남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묵묵히 그 길을 걸으면 된다는 것을. 파도에 이겨도 보고 져도 보는 경험이 나를 노련한 뱃사공으로 만들어주리라는 것을.

- 심채경,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中


이제는 모든 것을 인정할 수 있다. 자기 몫의 슬픔, 자기 몫의 행복, 자기 몫의 인성. 아니 마지막은 제외다.


주간문학동네에 연재되던 글이 묶여 나온 책인데 기대했던 과학 내용은 별로 없다, 라고 쓰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딱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는 그녀의 이야기와 들어맞는 것 같아 조금 웃긴 느낌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오해하며 살고 있을까. 현실은 이상이나 예상과는 늘 다르게 간다. 그러다보니 예상치못한 재미가 불쑥 나타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예상치못함'에게 내 뒤통수를 내주어야 한다. 올해 초만 하더라도 올 한 해 내가 이런 식으로 일하고 있으리라곤 예상치 못했는데. 물 위에 떠있는 여러 개의 작은 튜브들을 위태롭게 걸어가면서 "그래도 걷고 있잖아!"를 외치는 느낌이다. 지난 일기에서 변화를 주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 같은데 역시 다짐 따위는 하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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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고싶은 책은 많지만 정작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 재미없는 책들이 많다. 빌리지 않고 구매한 책이 재미가 없을 땐 통장 잔고를 도둑질당한 느낌이 들고, 선물 받아 읽기 시작한 책이 재미가 없을 땐 선물이라는 이유로 어쨌든 조금이라도 읽으려 노력하기 때문에 시간을 도둑질당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종종 북태기에 빠진다. 그래도 결국 다시 책으로 돌아오는 이유는 그래도 몇 권 뒤적거리다보면 꽤 근사한 문장을 하나쯤 건져내리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문장을 발견하는 날에는 하루종일 기분이 좋다. 마음에 드는 노래를 출근길에 만났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다. 비록 복권 긁는 심정으로 그 하나의 문장을 기다리며 나와 결이 맞지 않는 책들을 펼쳐야만 하지만, 그래도 책은 끝없이 나오고 있고 나도 책을 계속 읽기야 할테니 희망은 있는 것이다.



2




원자라는 새로운 개념을 따르면, 물질은 '포만'만이 아니라 원자가 움직이는 빈 공간인 '공허' 또한 구성한다.

- 하이젠베르크, <물리와 철학> 中


때때로 내가 만지고 있는 것들이 공허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을 하면 쓸데없이 아련해진다. 안그래도 단 한 번의 생을 살다가는 인간의 삶도 서글픈데, 만지는 것들마다 족족 공허라니 손에 닿는 감각들마저 아련해지고 서글퍼지기를 반복한다. 하필이면 지금 나오고 있는 노래도 Rainy Season이라는 곡이다. 후두두둑, 하고 비 내리는 소리가 맑은 피아노 선율 위로 떨어진다. 이렇게 명랑한 선율에 빗소리가 더해지면 그 곡은 기어코 슬퍼지고만다. 꼭 나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우울한 사람이라 그 어떤 즐겁고 행복한 일에서도 슬픈 생각을 해내는 재주가 있다. 그 어떤 밝은 사람도 차분하게 만들 줄 안다. 그래도 사회 생활을 하며 나름의 잔뼈를 키우고 나름의 성격 개조를 하면서 어느 정도의 가면을 찾아 쓸 줄은 알게 되었다. 삶의 많은 시간들 또한 포만이 아닌 공허에 가깝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러나 원자 안에서도 공허가 의미있듯 우리 삶에서도 공허가 마냥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다. 실은 그 공허조차 나의 일부인 법이다.



3



동물이나 꽃에 대한 사랑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 여자를 본다면, 우리는 그녀가 꽃을 '사랑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이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中



사랑에 대해 가장 적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문장이 아닐까. 사랑의 기술 개정판이 나왔길래 집에 있는 책을 무심히 펴서 들여다보았다. 아무 포스트잇이나 집고 펼치니 저 문장이 튀어나온다. 문장과 함께 오래된 책에서 나는 책 냄새가 함께 튀어나온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 들어선 헌책방에서 맡았던 바로 그 냄새다. 개정판이 너무 예뻐서 한 권 더 사둘까 싶었지만 약간의 허세가 발동한다. 개정판이 나오기 전부터 이 책을 알고 있었다는 묘한 자부심 같은 거다. 꼭 함께 아는 지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안 지 얼마나 오래됐는지를 두고 은근한 뿌듯함을 느끼는 것과 유사한, 그야말로 쓸데없는 자부심이다. 


나는 그 사람이 내게 했던 말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 당신은 어떤 때 사랑이 식는 것을 느끼냐고 내가 물었었다. 그 사람은 그런 일은 없었다고 손사레를 치다가 어느 순간 무언가 번쩍, 하고 생각난 듯 하더니만 내게 말했다. "날 대하는 모습이 변했다고 느낄 때." 나는 그 말이 신기했다. 자고로 사랑이 식는다면 이성으로서의 매력이 떨어지는 순간일텐데 자신을 대하는 모습이 변했다고 해서 그 매력이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인가 의아했다. 


하지만 그 말은 내게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날 이후 그에게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조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를 처음 만난 날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우리 둘 사이에 친밀하게 느껴지면서도 어색한 그 공기를 다시 떠올렸다. 소년같던 그의 모습을. 서로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그 소중한 시간들을. 그러면 그에 대한 익숙함은 사라지고, 그에 대한 적극적 관심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아마도 프롬이 말한 사랑의 기술은,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리라. 멈춰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관심을 쏟아 붓는 그런 사랑 말이다.



4

요즘 퇴근을 하고 오면 멍을 때리며 하루를 보낸다. 좋아하는 음악을 연속재생 시켜놓고 멍을 때리거나 눕거나 늘어져있거나 읽지도 않을 책을 잠깐씩 펼쳐 보면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데 어떤 변화로 시작해야 재밌을까 고민만 줄곧 하고 있다. 운동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무언가 배우게 될 수도 있겠다. 의욕의 신이 나타나 내게 에너지드링크 한 사발을 쏟고 가 주기만을 기다리는 중인데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걸 보면 퍽이나 하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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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1-08-31 0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봄밤님이 단 하나라도 찾겠다고 책을 들쑤시는 그 문장을 저는 봄밤님의 글에서 찾네요. 그것도 무더기로.....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글을, 문장을 정말 잘 쓰세요. 리스풱...

봄밤 2021-08-31 23:54   좋아요 1 | URL
syo님에게 칭찬을 듣다니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네요!

미미 2021-08-31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태기..저도 이런 저런 비슷한 이유로 북태기에 한번씩 빠지는데 적절한 이름입니다ㅎㅎ책을 복권으로 생각하니 책장이 새삼 다르게 보이고요~부자된기분!
잘 읽었습니다~😉

봄밤 2021-08-31 23:55   좋아요 1 | URL
책만큼 적은 돈으로 부자이기 쉽지 않죠. 일 끝나고 마시는 맥주 정도나 가능하려나요. 자주 봬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우리 세대는 여전히 과거의 감정을 지니고 살죠. 마음 한편에서 그걸 붙들고 버리지 않으려고 해요. 우리 내면에 가닿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계속 믿고 싶어 해요.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는 고유한 무언가가 있다고. 하지만 그런 건 없어요. 누구나 아는 사실이죠. 당신도 알고요. 우리 세대 사람들은 무언가 있다는 생각을 놓기 힘들어요. 하지만 그 생각을 버려야 해요, 크리시.”

- 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 中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일까. 인간의 몸이나 인간의 사고 과정이 인간성을 대표하는 것이라면, 세상이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재현할 날이 얼마 안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하느님'으로 표현된 자리에 하느님 대신 쿠팅스 머신 같은 기계가 자리잡고 있겠지만 말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소중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세뇌당하며 살아왔던 건 아닐까. 때로 인간은 전혀 존엄해보이지가 않고 어떤 때는 살 자격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한 사람의 공백이 다른 사람으로 금방 대체되는 것을 자주 보곤 한다. 프리를 선언한 후 도경완 아나운서가 예능에 나와 '나를 대체할 사람들을 반나절 만에 찾더라'라고 말할 때, '얼마나 속상할까'라는 생각보다 '그럼 대체가 안 될 줄 알았단 말야? 순진한 사람이네.'라는 생각이 먼저 든 것은 그래서였을 거다. 그러니 '대체'된다는 것은, 그게 사람이든 로봇이든 가능한 것이 아닐까.



2

'인간은 로봇으로 대체될 수 없다'라는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 가즈오 이시구로가 제시하는 이야기는 너무나 친절하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방식이 소설이기 때문에 그가 정말로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가 계속해서 책을 읽는 나와 대화하고 있다고 느꼈다. 


인간을 인간답게, 생명을 생명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결핍'이 아닐까 생각했다. 미치오 카쿠는 실리콘의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의 의식은 오랜 진화 기간 동안 비정상적인 요인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로봇에게는 이 부분이 빠져 있고 앞으로도 구현하기 어려우므로, 실리콘의식은 사람처럼 허술하거나 변덕스럽지 않을 것이다.

- 미치오 카쿠, <마음의 미래> 中




그리고 작가는 놀랍게도, 그 결핍, 불완전성마저도 모방하는 로봇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머니는 곰곰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래, 클라라. 아주 잘 아는 것 같으니까, 조시의 걸음걸이를 그대로 따라 해 볼 수 있겠어? 해 줄 수 있겠니? 지금? 우리 딸이 걷는 것처럼?"

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 中



그가 위대한 작가라고 생각이 든 데는 그런 섬세함 때문이다. 그는 미래에 대한 공포를 인간 입장에서만 제시하지 않고 로봇 입장에서도 말하고 있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할 것이다, 만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를 해칠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로봇인 클라라의 시점에서 소설을 쓴 점이 돋보인다.



3

책을 읽는 동안 여러가지 고민에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로봇을 인간으로, 동료로 인정할 것인지.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을 때 우리가 로봇을 대하는 입장과 자세는 어떻게 될 지. 수많은 화학작용의 결과물인 인간의 뇌를 로봇으로 구현하여 같은 사고 과정을 거치도록 만든다면 그들의 생각은 자라나며 학습하는 인간과 같을텐데 그런데도 그 로봇을 로봇으로 치부할 수 있는지. 그 로봇을 생명체로 대하지 않을 거라면 어떤 윤리적인 준비가 필요한지. 우리가 그런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는 것은 맞는지. 아니, 애초에 인간의 사고를 학습하는 로봇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4

작가는 마치 '로봇은 로봇일 뿐이다'라고 쉽게 말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불완전성이 인간의 조건이라고 생각해? 자, 너희들이 말하는 불완전성도 학습하는 로봇이야. 이 로봇에겐 어떻게 대할 거지?"

그러면 나를 포함한 그들은 변명하듯 말할 것이다.

"그런 신체적인 불완전성 말고. 보다 복잡한 불완전성이지. 사고와 정서의 불완전성."

그러나 가즈오 이시구로는 그런 것조차 학습가능한 로봇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으며 우리를 압박해온다.



그러나 좀 더 관찰해 보니 이 위험한 주제(조시의 숙제라든가 사회 활동 점수 같은 주제)를 피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불편한 감정이 흐를 수 있었다. 왜냐하면 불편한 감정이 사실은 이 주제 이면에 있는 무언가와 관련돼 있으며, 위험주제들은 어머니가 조시의 마음에 어떤 감정이 생겨나게 하려고 쓰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 中



모건 폭포를 다녀온 이후에 어머니의 태도도 달라져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나는 여행이 잘 진행되었다고 생각했고 이제 우리 사이가 더 따스해지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조시처럼 어머니도 냉랭해졌고 현관이나 계단참에서 나를 마주쳐도 전처럼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 中



5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작가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욕심을 낸 나머지, 중심 이야기로의 몰입을 방해하는 떡밥(?)을 던진 것들이 많아서 다른 가지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쓸데없는 기대를 했다는 점.(단순한 배경 정도로 설정한 것인 모양인데 그게 조금 아쉬웠음) 그리고 스포가 될까봐 내용을 이야기할 순 없지만 서사에 필연성이 부족하지 않았나, 라는 의심이 들었던 점이 아쉽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라서 명성을 보고 평가하지 말자는 생각에 더 정확히 벌점을 주고 싶기도 했고 또, 가장 중요한 '태양'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결말에 대한 아쉬움이 있어서 4점을 줄까 했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해 페이퍼를 또 작성하고 싶을 정도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기도 했고(정말 좋은 책들은 그 책에 대해 아무리 떠들어도 또 떠들고 싶어진다) 어느 순간 그를 작가로서 존경하게 되었는지라 5점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스러웠던 '인간'들의 말들을 적어둔다.



그리고 에이에프. 네 그 계획. 그게 조시를 더 나쁘게 만들면 내가 널 분해할 거야. 쓰레기통에 집어넣을 거야.”

 <클라라와 태양> 中 멜라니아의 말



희망이란 게, 지겹게도 떨쳐 버려지질 않지.” 아버지는 분한 듯이 고개를 흔들었지만 한편 새로 힘이 솟는 것도 같았다.

 <클라라와 태양> 中 아버지의 말



무슨 문제라도 있니?”

죄송합니다. 그냥 제가 좀 놀랐어요.”

? 왜 놀랐는데?”

그게, 저는…… 솔직히 말해서 릭과 관련한 헬렌 씨의 요청에 강한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놀랐어요. 사람이 자신에게 외로움을 가져올 방법을 원한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 <클라라와 태양> 中 헬렌과 클라라의 대화




덧. 

오늘 아침, 다시 한 번 생각난 가장 큰 아쉬운 점은

(그는 인간의 선함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고 하지만)

인간의 선함보다는 클라라의 선함으로 이야기가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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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미래를 대표한다는 연설이 있었다.

- 아니 에르노, <세월> 中



어렸을 때 엄마에게 저당잡힌 빚이 하나 있다. 자그마치 빌딩 한 채를 사주겠다고 한 것이다. 내가 아주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리란 걸 스스로 의심하지 않은 때였다. 처음엔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시작했었는데, 큰 걸 말할수록 엄마의 표정은 더 밝아졌고 기어코 내 입에서 '엄마 빌딩 하나 사줄게'라는 말이 나온 거였다. 어린이 시절에 대한 기억은 어쩐지 거의 다 사라졌는데,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던 그 함박미소만큼은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난다.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는다'라는 말을 그처럼 똑같이 묘사한 표정은 없었다. 그게 이렇게까지 기억할 일인가. 그리고 그게 또 그렇게 좋아할 일인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애의 아무 말 같은 건데. 


그런데도 어린 나는 그때 내뱉은 그 말을 위대한 협약 정도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겨우 과자 사먹는 돈을 아껴서는 빌딩을 못 산단 걸 깨달은 후로 초조함을 느낀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 약속을 진지하게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네가 어렸을 때 엄마한테 뭐 사준다고 말했었는지 알아?"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쯤, 엄마가 그렇게 물었다. 짐짓 모르는 척 하며 "내가 뭐 사준다고 했는데?"라고 물으니 엄마가 피식 웃었다. "빌딩 사준다고 했어, 빌딩." 

그 대답에서 어린 나와 엄마가 함께 다진 묘한 결의와 이제는 너무 커버려서 그 말의 진짜 의미를-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서글픔이 느껴졌다면 내 착각이었을까.

아니 에르노의 문장이 뼈아프게 읽혔다.



2


이때였다. 어디서 "완서야, 완서야"하고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슴이 울렁거리고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그러나 마음 모질게 먹고 나서지 않았다. 학교에 입학하고부터 곧 이름을 일본말로 고쳐 부를 때라 '완서'가 내 이름이라고 선뜻 알 만한 아이가 없었다.

더군다나 선생님은 일본 사람이었다. 나는 어서어서 선생님이 우리들을 이끌고 어디론지 가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우리가 떠나기 전에 할머니는 마침내 내 이름을 일본말로 부르시는 것이었다.

"보꾸엔쇼야, 보꾸엔쇼야."

그것은 아마 할머니가 입에 담으신 최초의 일본말이자 마지막 일본말이었으리라. 그러니 그 발음이 오죽했겠는가.

어린 마음에도 할머니가 부르시는 소리는 목놓아 울고 싶도록 슬프게 들렸다. 아무도 할머니의 그 괴상한 발음이 내 이름이란 걸 알아듣기 전에 나는 슬픔과 미움과 사랑이 뒤죽박죽된 견딜 수 없이 절박한 마음으로 할머니한테로 뛰어갔다.

-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中


박완서 작가님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한국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인데, 하고 생각해봐도 역시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러면 다른 작가들은 어떤가 생각했는데 한국 소설은 정말이지 읽은 게 별로 없었다. 한국 소설과 외국 소설 중 무엇을 더 즐겨 읽나, 라고 누가 물으면 고민도 하지 않고 '한국 소설은 잘 읽지 않아요.'라고 하곤 했으니 당연했다.


우리나라 문학은 '한'의 정서가 들어있다고 배웠다. 그 '한'이 뭔지도 모르면서 암기만 했던 기억이 난다.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는 것도 그다지 마음에 안 들었다. 소설을 읽고 나면 작가에게 외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두 눈 뜨고 잘 보세요. 소설로 굳이 쓰지 않아도 이미 그 이야기는 현실에 있다니까요." 

현실을 반영하는 게 소설의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그땐 현실이 녹아있는 소설 속 세상이 싫었던 것 같다. 그건 곧 현실이 싫다는 얘기기도 했다. 현실이 싫어서 외국인의 삶으로, 외국의 소설로 뛰쳐나갔을 것이다. 


박완서 작가님의 위 문장들을 읽으면서 한국 문학의 가치를 재발견했다. 이곳에서 겪은 아픔은 이곳에서 치유해야 하는 법이라는 걸. 일제 강점기 시대를 겪어보지 않았어도 누군가 부르는 내 이름을 못 들은 척, 속 끓이며 지나간 경험을 많은 이들이 겪었을 것이다. 너무나 덤덤한 어투인데, 특별할 것 없는 표현들인데 저 한 쪽을 읽고 비슷한 기억들이 치유받은 기분이었다. 견딜 수 없이 절박한 뒤죽박죽된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마음이 아팠다.



3


내 안으로 돌아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암흑천지에 큰 태양 하나가 돌고 있었다. 만물이 죽은 땅에 옹달샘 하나가 춤추고 있었다. 그토록 가녀린 여자가 그렇게나 큰 자리를 차지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 크리스티앙 보뱅, <작은 파티 드레스>中



I wanna love me (Ooh)

The way that you love me (Ooh)

Ooh, for all of my pretty and all of my ugly too

I'd love to see me from your point of view

I wanna trust me (Trust me)

The way that you trust me (Trust me)

Ooh, 'cause nobody ever loved me like you do

I'd love to see me from your point of view

- Ariana Grande <pov> 中



사랑뿐이다. 모든 불행을 볼 수 없도록 큰 태양이 되어 눈을 가려주는 것도, 뛰쳐나가고 싶은 구렁텅이에 흙을 메워 꽃을 심고는 그 꽃이 자라도록 옹달샘이 되어주는 것도. 나를 귀이 여겨주어서 나 스스로도 그렇게 여길 수 있게 하는 것은. 때때로 나는 그 사람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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