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아니 몇 개월을 책을 덜 읽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지냈다. SF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글 하나를 완성했고, 투고하기 위해 기다리는 중인데 어디에 내는 것이 적절할지는 여전히 고민중이다. 가벼운 글쓰기를 하는 작가들을 혐오한다. 그런데 글을 다 쓰고 나면 이상하게 내가 쓴 글이 세상에서 가장 유치한 글인 것만 같다. 작가들이 그토록 절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나는 다를 줄 알았는데, 다르지가 않다. 유일무이한 글을 쓰고 싶었는데 천편일률적인 글, 천편일률적인 사람이다. 그 존재의 가벼움, 무가치와 무의미의 향연이 인간을 고독하게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일들이 있었고, 또 한 번 나 자신을 믿어줘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새로운 사람들은 객관적인 일에 대해서도 늘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는 법이 없기 때문에, 안목이 없는 것은 그들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지 않으면, 내가 갖고 있던 진실을 나 스스로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웬만해선 진솔하게 내 마음을 여는 법이 없지만, 올해는 조금 달랐다. 사람들에게 진솔하게 대해보기로 했지만, 여전히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작자들이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나를 시험하려 들었다. 나는 곧바로 마음을 열겠다고 다짐한 걸 후회했다. 그들은 정상과 비정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미소짓지만, 영원히 자기들의 영역이 정상이라고 오해하며 살 것이다. 우아하고 기품있는 태도. 여유로운 말투. 상대방을 배려하는 제스처. 나는 이제 그런 것엔 속지 않는다. 오히려 우스워지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상대의 불행 앞에 가련한 척 훌쩍이지 않는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어른이 되었다고 믿는다.


세상은 여전히 엉망이고, 꽃의 아름다움도 여전하다. 기온이 제맘대로 오르락내리락거리면서 어떤 나무는 벚꽃잎이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어느 나무들은 헐벗은 채 줄지어 서있다. 3월의 끝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2023이라는, 언뜻 미래 시대처럼 여겨지는 숫자도. 

chatGPT? 과거의 시점에 그런 AI를 상상이라도 한 적 있었나. 인간을 대체할 인간처럼 생긴 로봇들은 상상해봤어도, 컴퓨터 안에 있는 수많은 프로그램 중 하나가 직장들의 자리를 차지할 거라고 상상이라도 했던가. 인플루언서의 시대. 광고의 시대. 보이스피싱과 부수입의 시대! 주식, 집, 금리 인상. 사람들은 이슈가 생길 때마다 그게 이득인지 손해인지 따지느라 바쁘기만 하다. 조금만 웃자. 조금만 덜 불행하고 조금만 더 웃자! 조만간 직장에서 chatGPT를 이용한 행사를 해볼까 한다. 행사의 목적은, 조금 웃기 위해서.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면 항상 누굴 제일 좋아하냐고 묻는데 그때마다 너무 많은 작가들을 말하느라 힘들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랄 게 없어서 적당히 좋아하는 작가들을 나열하다보니 복잡했다. 앞으로는 사강이라고 말하기로 했다. 나태하고, 도발적이고 뻔뻔한 태도가 마음에 든다. 최근에는 최승자 시인의 글을 읽고 있다. 마치 어렸을 적 머물렀던 터널을 다시 구경하는 기분이다. 최근 느끼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내가 행복이란 게 뭔지 알게 되면서 어떤 문장들을 영영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특별히 떠올리지 않아도 카니발처럼, 폭죽 터지듯 쏟아내리던 문장들이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글을 쓸 땐 아쉬운 점이지만, 인생이란 측면에선 다행스럽다. 


예전에는 스스로가 너무 부정적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좋게 생각해도 되는데,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나 스스로를 절벽으로 몰아붙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최승자 시인의 말대로 불확실한 희망을 버리고 순도 높은 희망을 가지려 했던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내 손에 들려 있었던 불행들을 거르고 걸러 그 안에 있는 작은 희망들을 모아 순도 100%의 희망을 제련한 것이다. 그 덕에 지금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하다. 앞으로의 날들도 희망과 기대뿐이다. 사람들이 미운 오리 새끼라고 말해도 신경쓰이지 않는다. 아파트 값이며 월세며 아이를 키우기 위한 비용이며 오염되는 지구며 대기 환경, 인구 절벽 등등. 사람들은 늘 그런 소리뿐이다. 나는 백조다. 우스워지길 두려워하지 않고, 불행으로 훌쩍거리는 오리들을 일순간 부리로 콕 찍어 날려버리는, 강인한 백조다.



p.135

생각해보면 우울증을 피할 수 있다고, 적어도 그 병에서 회복될 수 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려는 게 아니라면 왜 글을 쓰겠는가? 모든 텍스트의 절대적인, 고유의 존재 이유는, 그것이 소설이든, 에세이든, 심지어 논문이든, 이처럼 늘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 프랑수아즈 사강, <마음의 푸른 상흔> 중


p.22 

말하자면 나는 애초에 내 인생을 눈치챘다. 그래서 사람들이 희망을 떠들어댈 때에도 나는 믿지 않았다.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언제나 확실한 절망을 택했다. 그러나 애초에 나는 내가 백조라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미운 오리 새끼라고 손가락질할 때에도 나는 속으로 코웃음만 친다. 그리고 잡균 섞인 절망보다는 언제나 순도 높은 희망을 산다.

- 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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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3-05-29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봄밤 님의 원픽은 사강이군요. 저는 최근에 사강을 접했는데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남들 시선에 끼워맞춰 사는 삶을 거부하는 사강의 인생론이 참 좋았습니다. 이렇게 적고 보니 언급하신 백조랑도 닮은 듯 하네요. 건강하시고 적당히 파이팅 하며 사시길 바랄게요 ^^

봄밤 2023-05-30 14:23   좋아요 1 | URL
물감님의 리뷰 잘 읽고 있습니다. 자기복제한다는 작가 중 하나인 것 같다지만, 그래도 전 아직 질리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연이어서 줄줄이 읽고 싶을만큼 문장이나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가 좋더라고요. 물감님도 적당한 파이팅으로 꾸준히 즐겁길 바랍니다!
 

희망


                                                  봄밤


그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어떤 잘못 때문에 끊임없이 아래로 끌려가는지 그는 모른다.

가라앉는 동안에도 수면을 향한 시선은 거두지 않는다.

찰나의 순간 수면 위에서 반짝이는 물결을 보았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그를 지켜보고 있단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것이 그를 건져내리라.

그래서 끝까지 수면 위를 노려본다. 죽어라고 노려본다.


바다의 품은 고요하지 않다.

아래로 떨어지면서, 끊임없이 절망하면서 

그는 갈가리 찢긴다. 피죽이 될 때까지 침잠한다.

그러나 그의 눈은 위를 향한다. 수면 위를 향한다.

그 깊은 물 속으로 태양의 어머니가 그를 구원할 때까지,

수많은 윤슬이 그를 떠안아 올릴 때까지.

그것이 그를 건져낸다면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이 원망스럽겠는가.

그는 신음하지 않는다. 그저 수면 위를 노려볼 뿐이다.

건져내라고, 어서 나를 건져내라고.

















새해에 들어서면서 슬픔과 이별하고 싶어서 그간 미루고 미뤘던 사강의 글을 읽었다. 읽으면서 설마 '안녕'이 헤어짐의 안녕이 아니라, 슬픔이라는 존재의 발견을 의미하는 안녕인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말로 그런 모양이다. 정말 세련된 제목이다. 너무 세련되서 낚여버렸다. 새해부터 슬픈 책을 읽다니. 사강 참 너무하네. 소설 속 주인공과 대화하고 싶어지는 건 참 오랜만이다. 세실이 꼭 사강처럼 느껴져서 그런 건지도.


정말 바보같은 세실. 어리석은 세실. 불쌍한 세실. 


어렸을 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문장에 매력을 느껴서 자기파괴적인 삶을 살 뻔하기도 했었는데, 그로부터 약 5년쯤 되었나. 그 문장의 기원지가 궁금해서 검색을 하다가 김영하 작가님의 동일 제목 소설을 읽다가 실망해서 관뒀었고. (그때까지도 김영하 작가님이 한 말인 줄 알았지.) 그로부터 약 3-4년쯤 뒤에 그게 프랑수아즈 사강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라는 걸, 이름부터 멋진 사강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더랬지. 그리고 그로부터 또 몇 년 후에 그 이름이 필명이라는 걸 알았고 사강이 얼마나 자신을 파괴하며 살았는지 깨달았고. 사강씨는 정말 모든 면에서 세련된 사람이었다. 필명까지도. 


사강은 열여덟살에 알았던 '슬픔과의 조우'라는 감정을 난 최근에야 깨닫고 있다. 삶이 얼마나 많은 슬픔과 일그러짐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그리고 슬픔을 가장 잘 견디는 방법은 '그래, 너 여기 있었구나.'라고 받아들이는 자세라는 걸. 잘 받아들이고 나면 또 다시 다른 슬픔이가 내게 찾아와 '나도 있었어'하며 씨익 웃는다는 게 공포 스릴러긴 하지만.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코믹이 되기도 하니까.


나이를 먹을수록 나에 대해서 점점 잘 알게 되고 있는데, 최근에나 안 것 중 하나는 내가 여럿일 때보다 혼자일 때 더 행복한 사람이라는 거다. 혼자 외로워지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여러 사람들 속에서 외로워지는 일은 다반사로 있었다. 스스로를 혼자로 만드는 병이라도 걸린 건지, 뜬금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고백을 받던 황금기도 있었는데 그때도 굳이 그들과 선을 그으며 외로운 역할을 제발로 하려고 했고, 사람들이 무리 안에 나를 넣으려고 할 때도 굳이 선을 그으면서 그 무리를 빠져 나오곤 했다.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니 결국엔 나를 둘러싼, 다른 사람은 모르는 작은 불행 조각들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그 불행에 대해 모르면서 어떻게 나를 이해하느냐고 돌이라도 던지고 싶었던 모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외친 사강의 말 속에서 중요한 건 '파괴'라는 단어라고 어렸을 땐 생각했는데, 지금은 '나는'이라는 단어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나를 '파괴'할 수 있어!" 가 아니라


"너 이 새끼들아, 너네는 나를 파괴할 자격이 없어. 그건 나만이 가진 자격이야."를 요약한 외침이 아닐지. 내가 나를 파괴하겠다는데 '너희가 어떤 권리로 날 막느냐'는 거지. 사실 이건 사람들이 도덕 운운할 때마다 내가 세상에 하고 싶은 얘기.


그렇다고 자기파괴적 행위를 무작정 옹호하겠단 건 아니지만.


새해 첫 책부터 글렀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차피 그른 김에 그냥 내리 사강 책을 읽어볼까 하는 마음도 든다.

마음의 안식처, 북플. 리뷰 쓴지 오래됐는데, 종종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외치고 싶을 때마다 생각난다. 인간에게는 자기만의 방도 방이지만 자기만의 대나무숲도 필요한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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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3-01-10 0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밤님 글 오랜만에 봐서 넘 반가워요. 전에 제가 쓴 인프제 관련 글에 댓글 주셨을 때, 봄밤 님도 저랑 비슷한 유형일 것 같았는데요. 이 글을 읽으니 더욱 확신이 들어요. 스스로를 혼자로 만든다는 것도, 자기파괴적인 것도요. 저도 이 책 읽어야겠어요. 대나무숲에 종종 와주세요🙂

봄밤 2023-01-10 16:45   좋아요 1 | URL
사실 이 독후감은 책과는 크게 상관이 없답니다. 추천하기엔 책이 조금 유치한 부분도 있고요. 그래도 열여덟살의 사강이 어땠는가는 대충 알 것 같아서 재밌어요. 반짝반짝 빛나거든요.
물감님은 잘 지내고 계셨나요? 대나무숲에 종종 즐거운 외침도 하러 오겠습니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경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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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재독. 읽을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이 있는 책.
쉽게 쓰인 글이 가장 좋은 글이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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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 p.17

밀란 쿤데라는 어떤 사람?🤔


1929년 4월 1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출생
1950년, 당에 반하는 활동을 했단 이유로 당에서 추방
1968년, 민주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에 참여했단 이유로 저서가 압수되고 집필과 강연 활동에 고초를 겪음
1975년, 프랑스 망명
1979년, 체코슬로바키아의 국적 박탈
1981년, 프랑스 시민권 취득
1984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집필
1989년, 체코에서 쿤데라의 일부 저서 및 영화에 대한 판금조치 해제
2019년, 체코 국적을 회복 : 현재 체코 국적이며, 프랑스와 체코 두 개의 시민권을 보유중



예전에 이 책을 읽었을 땐, 프라하의 역사를 제외하고 사랑 이야기로만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이번에 읽을 땐, 완벽하게 소설을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 저런 자료를 찾아보고 읽었는데 그렇게 읽으니 그가 쓴 모든 구절들이 좀 더 섬세하게 와닿았던 것 같다. 좀 더 책을 잘 이해하고 싶다면 아래의 유튜브를 추천!


https://youtu.be/WgdyMPBsn_o



작가는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라는 네 명의 인물을 통해 인생이란 가벼운 것인지 무거운 것인지를, 둘 중 어떤 것이 좋은지 우리에게 묻는다. 책을 읽을수록 삶이 이렇게 덧없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 그러면서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되지?'라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생각할 거리 1 : 사랑의 경중은 어디에 있을까?🤔

책에서 토마시와 사비나는 '가벼움'의 대표로, 테레자와 프란츠는 '무거움'으로 대표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1) 토마시


토마시는 사랑과 성행위는 서로 다른 두 세계라는 생각을 그녀에게 이해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p.231




토마시는 많은 여자들과 잠자리를 하는 바람둥이다. 책 속에서는 두 종류의 바람둥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 토마시는 다양한 여자들의 잠자리를 수집하는 부류로 나뉜다. 그는 테레자가 자기의 바람기로 고통받는다는 점에 괴로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들과 만나는 일을 멈추지는 않는다. 그는 단순히 우표를 수집하듯 여자들을 만날 뿐이며 그가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은 테레자이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이 사랑하는 테레자가 괴로워하기 때문에 그 마음에 공감하여 괴로울뿐인 것이다. 그에게 잠자리는 가벼운 수집이다.

외적인 이야기로만 보면 토마시는 사랑에 있어서 가벼움을 추구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토마시야말로 사랑에 헌신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래야만 할까?' 라는 물음을 스스로 던지면서 결국엔 안정을 버리고 테레자가 있는 체코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물론, 체코로 돌아와 정말 그래야만 했는가에 대해, 그건 참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는지 고민하는 듯한 모습도 드러난다.



테레자의 호흡이 한두 번인가 가벼운 코 고는 소리로 변했다. 토마시는 추호도 동정심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느낀 유일한 것은 위를 누르는 압박감, 귀향으로 인한 절망감뿐이었다-p.65




그럼에도 그가 테레자를 대하는 태도는 다른 여자들에게 대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태도처럼 보인다. 테레자는 그가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다. 과연 토마시의 사랑은 가벼운 것일까?




2) 사비나

사비나는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는 사람이다.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 어깨에 짐이 얹혔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 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 p.201




문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사랑은 저물기 마련이고 저문 사랑은 끝을 맺어야한다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그 이치를 실현할 때 다시 사랑이 시작될 수 있는가는 '그 헤어짐의 끝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아닌가'에 있다. 이별을 결정한 것은 사비나지만, '헤어지자'는 말에 '그러자'는 동의가 뒤따라온다면 그들의 만남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녀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만약 그 남자가 그녀를 뒤따라왔다면, 그녀는 좀 더 달라질 수도 있었을까?



"당신 힘을 가끔 내게 쓰지 않는 이유가 뭐야?"
"사랑한다는 것은 힘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지."라고 프란츠가 부드럽게 말했다.
사비나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이 말은 아름답고 진실하다. 둘째, 이 말 때문에 프란츠는 그녀의 에로틱한 삶에서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 p.186




토마시의 사랑을 막는 장애물이 '호기심'이라면, 사비나의 사랑을 막는 장애물은 '견디지 못함'이다. 그녀는 그녀에게 명령을 내리는 남자, 지배하려 드는 남자를 견딜 수 없다고 적혀있다. 즉, 힘으로 그녀를 지배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녀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힘을 포기하는 허약한 사람도 견딜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녀는 프란츠에게 에로틱함을 느끼지 못하고, 그래서 그를 견딜 수 없다.

더군다나 153쪽에서 시작되는 '이해받지 못한 말들의 조그만 어휘집' 챕터에서 볼 수 있듯이 사비나와 프란츠 간에는 너무나 많은 이해의 거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에서 배우듯이, 처음부터 이해할 수 있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의 삶의 악보를 이해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사비나는 그가 떠난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자기에게 참을성이 없었던 것을 후회했다. 함께 더 오래 있었더라면 그들은 조금씩 그들이 사용했던 단어들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어휘는 너무도 수줍은 연인들처럼 천천히 수줍게 가까워지고, 두 사람 각각의 음악도 상대편의 음악 속에 녹아들 수도 있었을 텐데. - p.205




그녀가 견딜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사실 그녀 자신에게서 기인했다고 본다. 존재가 무거워지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녀는 프란츠가 그녀의 삶의 사전을 이해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고, '힘을 포기하는' 그의 헌신적 사랑을 알아볼 능력이 없었다. 20대에 이 책을 읽었을 땐, 토마시의 바람기와 테레자의 괴로움에 특히 몰입했던 것 같은데, 30대가 되어 다시 읽어보니 사비나의 마음에 좀 더 몰입하며 읽었던 듯 하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주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사비나의 이야기를 통해 배울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토마시는 '호기심' 때문에 사랑에 실패하고 사비나는 '견디지 못함' 때문에 실패한다. 우리가 사랑에 실패한다면, 무엇이 우리를 실패하게 만들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그 깨달음이 우리를 좀 더 온전한 사랑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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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가들이란 같은 시대 사람들이 잊고 싶어 하는 것을 전문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이다.'

에릭 홉스봄의 말이다. 이 말이 너무 좋았던 나머지 최근 쓰는 글의 한 모퉁이에 슬쩍 기록해두었다. 여기서 '전문적으로'라는 말을 '끈질기게'로 바꾸고 역사가를 '소설가'라고 바꾸어 적으면 그것도 꽤 괜찮은 문장이 된다. 


한강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작가가 나라는 독자보다 앞서 울고 있다는 생각에 불편할 때가 많았다. 눈물범벅으로 얼굴이 엉망이 된 채 글 속에서 울고 있는 작가를 보며 난 아직 그런 무게의 슬픔을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하고 죄책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녀의 작품 중 '작별'이 좋았던 이유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작별에서의 주인공은 어느날 갑자기 눈사람이 되었지만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오열하지도, 큰 아쉬움을 보이지도 않는다. 카프카의 '변신'과 유사한 느낌이지만 주인공은 물론 주변 사람들이 무덤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슬픔은 대사로 나타나지 않고 냉기 가득한 풍경으로 느껴진다.


이번 작품인 '작별하지 않는다'가 그녀의 '작별'이란 작품과 대비되는 것도 우연은 아닌 듯 하다. 그녀의 전작인 '작별'이 정말로 작별해야 하는 어떤 이들에겐 너무 큰 슬픔으로 다가와서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작품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최근에 있었던 붕괴 및 추락 사고들과 오래도록 우리 마음에서 작별이 되지 않는 세월호 이야기. 무덤덤한 작별이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어떤 작별이든 작별할 때의 감정은 수 년, 수십 년을 뛰어서도 생각이 나곤 하니까.


소설의 내용 중 이 책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부분은 '잘려진 손가락 안으로 찌르는 주사 바늘'이다. 그녀의 말처럼 그건 보고 싶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보게 되고, 봐야 하는 장면들이다. 우리의 역사엔 너무나 많은 불행이 있어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끔찍한 과거의 역사를 흔하디 흔한 일상을 바라보듯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잘려진 손가락들이 피 흘리며 있다는 것을. 


조금 아쉬운 점은 뒷부분에서 너무나 많은 내용을 알리려고 한 나머지, 소설을 마지막까지 끌고 온 감정선이나 분위기가 끊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또한, 왜 설명의 대상이 주인공이어야 하는지 설득이 되지 않은 감이 있었다. 하지만 신선한 자극과 함께 깨달음을 줬다는 점에서 좋은 책이었다.


2

에뒤아르가 미소를 지었다. 알아들은 걸까? 베로니카는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 연애 지침서에 따르면, 사랑은 그렇게 대놓고 고백하는 게 아니었다. 특히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남자에게는. 

하지만 그녀는 계속했다. 잃을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 파울로 코엘료,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中



나보다 앞서 많은 의사들이 그 연구를 했고, 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은 사회적 합의의 문제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죠. 달리 말하자면, 대다수 사람들이 어떤 것을 올바르다고 생각한다면 그게 올바른 게 되는 거죠.

- 같은 책 中



자그마치 13년 전에 읽고 다시 읽었다. 그때의 감상평을 보니 '하루를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싶다'라고 적어두었다. 13년 간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지냈는가 생각해보니 그렇지 못한 날들이 더 많다. 특히 직장인이 된 후 주말을 기다리며 평일을 견뎌내는 삶을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 삶의 주인으로 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죽음은 여전히 내게 가장 매력있는 소재다. 사후 세계가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도 한 몫 하지만, 그보다는 유한한 삶에서 왜 '살아있는' 선택이나 도전을 하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더 크다. 13년 전에 읽을 땐 사랑을 고백하는 베로니카의 모습에 가장 감명을 받았었다. 유한한 삶에서 왜 사랑을 위해 나 스스로를 내던지지 못하는가, 라는 자책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13년 간 나는 남들이 반대하는 사랑을 해보기도 하고,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조섞인 결론을 짓기도 하고, 사랑을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기도 하면서 사랑에 관해서는 크게 후회없는 삶을 산 것 같다. 물론 앞으로의 생에서 또 많이 배울 것들이 있겠지만.


그러면 이제 내 물음은 사랑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다. 베로니카가 원래라면 하지 못할 고백의 말을 쏟아낸 것처럼 내가 용기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이 있을까. 지금으로선 소비가 있겠다. 죽음 앞에 하고 싶은 일이 고작 소비인가, 싶지만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하면 얇지만 따뜻할 연한 노랑빛의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러플 모양의 장식이 달린 베이지색 부츠를 신은 채 을지로의 어두컴컴한 바에서 내가 좋아하는 재즈곡을 틀어달라고 요청한 채 보고싶은 사람들을 한 명씩 부르겠다. 비싸서 홀짝 거리며 마시던 술들을 원없이 마시면서, 죽는다는 소리는 하지 않고 잔을 부딪치고 낄낄거리며 쓸 데 없는 소리로 떠들겠다. 써놓고 보니 코로나 때문에 가지 못한 술자리들이 좀 그리운 모양이다.


벌써 3월이 다가오고 있다. 올해의 1/6이 지난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각오로 좀 더 치열하게 하고 싶은 일들을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삶의 동력이 필요한 요즘, 이 책을 다시 만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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