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레이디 1 - Navie 260
김신형 지음 / 신영미디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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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신형 (인터넷 필명: 하현달)

2012년 10월 16일에 읽다.

 

 

가까운 미래에 석유를 둘러싸고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나고 그 와중에 러시아가 내전으로 패망한다. 패망한 러시아를 대신해서 군인들의 나라 ‘세빌’이 세워진다. ‘세빌’의 정권을 잡은 군부는 내전으로 피폐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자신들의 전투 능력을 용병이라는 형태로 외국에 내다판다.

    

아일린 엘레노크   

내전으로 고아가 된 수많은 아이들 중 하나였던 아일린은 어느 날 고아 수용소를 찾은 한스 대령의 눈에 띄어 그의 양녀가 된다. 한스 대령의 아내 린다와 딸 로이라는 그녀를 따뜻하게 맞아 가족이 되어준다. 하지만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그녀의 행복은 어느 날 갑자기 양부인 한스 대령이 죽으면서 끝이 난다.

어릴 때 한스 대령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던 아일린은 세빌을 세운 국민 영웅 중 하나였던 그가 모종의 음모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것을 알게 된다. 그의 죽음으로부터 20년 후, 아일린은 군인이 되어 양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히려 한다.

     

블랙, 에반 사타르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된 아일린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녀 앞에 블랙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뛰어난 군인이 나타난다. 그의 본명은 에반 사타르로 최고의 스나이퍼이자 군수사업이 핵심 사업인 국제적 기업인 사타르 기업의 총수였다. 어릴 적 불의의 사고로 양친을 모두 잃은 그는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런 그를 도운 사람이 한스 대령이었다.

사건이 진행되면서 에반이 한스 대령의 죽음과 아일린의 과거에 깊이 얽혀 있는 것이 밝혀진다. 결국 그와 아일린은 한스 대령을 죽인 범인을 찾아 나서게 된다.

   

내가 읽은 로맨스소설 가운데도 손에 꽂힐만큼 특이한 소재와 인물 설정이 무척 흥미로웠다. 이야기의 스케일도 커서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러시아, 콜럼비아, 아프가니스탄, 세 나라를 넘나들며 펼쳐진다.  

특히 낯선 소재들에 대한 꼼꼼한 조사와 묘사가 돋보였다. 스나이퍼의 움직임이나 사막의 전투, 밀림 속의 추격전 등은 정말 생생하게 그려졌다. 군인들이 주인공들이고 스릴러적인 면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탓에 상대적으로 남녀 두 주인공 사이의 심리나 애정 묘사에 할애된 이야기 분량이 그리 많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시간과 생사의 고비를 함께하는 끈끈한 관계가 설득력 있게 잘 묘사되었다.

 

조금은 특이하고 색다른 로맨스를 읽고 싶은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다.

 

간간이 햇빛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지만, 정글은 대부분 그늘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신을 잠깐 놓는 순간 이곳에서는 방향을 잃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내민 군장을 짊어진 에반을 보는 순간, 린은 그런 걱정을 모두 지워 버렸다.

그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가지.”

먼저 앞장선 에반이 그늘에서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

린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pg. 184)

 

그의 말에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이 남자는 귓가에 끊임없이 미래를 속삭인다. 꿈만 꿔도 달콤할 것 같은 그 미래를 그녀가 잊지 않도록 쉼 없이 말해 준다. 그러다가 린은 문득 깨닫게 된다.

자신에게도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미래를 그려 주는 그로 인해 불현 듯 그 미래를 살고 싶어하는 현실 속의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말한 건 그런 게 아니잖아.”

떨리듯 나온 린의 목소리에 에반이 낮게 웃었다. 그의 탄탄한 가슴이 린의 등에 닿아 있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린의 가슴도 조금씩 울려 왔다.

“그런 피곤함만 내 곁에서 견뎌 줘. 그럼 원래 네가 누려야 했던 모든 것을 내가 되찾아 줄게.”

남자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진심이 아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pg. 236) 

 

현대로맨스소설, 블랙레이디, 김신형, 하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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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er 서머 - NaVie 37
조강은 지음 / 신영미디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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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12년 10월 9일에 종이책으로 읽다.

 

 

이 책은 로맨스 소설을 좀 읽었다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유명세의 이유가 씁쓸하면서 안타깝다.

책이 출간 된 후 그 일부가 다른 작가에 의해 두 차례나 표절을 당했고 작가분이 다시는 로맨스 소설을 쓰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절필을 하셨다. 덕분에 이 책은 이 분의 첫 출간작이자 유일한 출간작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재판이 되거나 이북으로 출간 될 가능성도 거의 없는 탓에 이 책은 절판본 중에서도 몸값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미 들어 알고 있었던 이야기지만 책을 읽고 나니 더욱 안타깝다.

 

첫 25장 정도를 읽고 다시 한 번 책표지를 살펴보았다. 감탄이 절로 났다. 제목이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텁텁하면서도 끈적거리는, 또 한편 몽환적인 느낌을 끌어내는 글들이 한여름의 열대야와 장마를 연상시켰다. 

 

어린 시절 가장 믿었던 부모에게 버림을 받고 사람에 대한 기대를 놓아버린 채 살아가는 여자와 집착으로 얼룩진 부친의 사랑을 목격하고 사랑을 원치 않게 된 남자. 두 사람이 만났다.

 

-서정연

그럼에도 그 사람들마저 자신을 버릴까봐, 늘 전전긍긍했다. 숨소리, 발소리조차 죽이며,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고분고분 지냈다. 그러는 자신이 구질구질하고 싫었음에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살아가야 했으니까. 버림받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 때는 그렇게 사는 것이 버림받는 것보다 더 나쁜 상태였음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정연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제일 경멸한다. 비굴하게 납작 엎드려 살아온 자신.

(중략)

정연에게는 슬픔은 그런 것이었다. 지난날의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 가두어 놓은 탓에, 오래 잠복해 있는 슬픔은 더욱 깊어져 결국 마음에 낡고 녹슨 칼날이 되었다. 불현 듯 생각날 때마다 그 칼은 지금처럼 몇 번이고 비비듯 쑤셔 댔다.

(pg. 73-74)

 

-백준하

여름은 사나운 계절이다. 폭풍은 무자비하고, 폭염은 잔인하다. 차에 바이올린 소리가 터질 듯 가득 찼다. 준하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눈을 감았다. 오감이 생생하게 반응한다. 이건 미친 짓이다. 이 미친 질주를 그만둘 때는 싫증이 날 때이거나, 이대로 가드레일을 들이박고 죽을 때,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pg. 29)

 

-첫 만남

남자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잔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정연은 꽉 잡힌 손에서 땀이 솟는 것 같았다.

뜨겁고, 질척거린다.

“뭐예요, 이름?”

이어진 남자의 질문에 정연은 활짝 웃어 보였지만 눈이 마주치자 이내 얼굴이 붉어졌다. 입가에서 웃음이 서서히 지워졌다.

당혹스러웠다. 남자의 눈은 단순히 이름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통째로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이 남자는 분명 모든 여자들을 이런 눈빛으로 쳐다볼 터였다.

(pg. 10)

 

소파에 앉아 여기저기 둘러보던 여자와 자신의 눈이 마주쳤을 때 둘이 눈으로 나눈 대화. 그 생소한 친밀감. 손에 잡지를 들고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손을 뻗어 여자의 얼굴을 만져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 여자가 아무리 흥미를 끈다 해도, 그가 정한 선은 분명했다. 무료한 일상에 작은 즐거움을 주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자의 분홍빛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해도, 방금 전의 수줍은 웃음에 가슴이 슬쩍 두근대었다 해도. 준하는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6월 초의 햇볕은 맑고 뜨거웠으며 짙은 풀 냄새가 정원에 진동하고 있었다.

(pg. 25)

 

-도발

“베를리오즈까지 그렇게 계산적으로 연주하다니, 남자랑 잘 때도 그래요?”

백준하가 짐짓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잘못 눌러져 어긋난 피아노 음이 꼴사납게 거실을 울렸다.

커튼이 크게 물결쳤다.

서늘한 공기와 후텁지근한 공기가 뒤섞여 들어왔다.

정연은 백준하를 쏘아보았다.

남자의 얼굴엔 재미있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친놈.

(pg. 14)

 

-서정연

갑자기 흐려지는 시야에 정연은 두 팔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눅눅한 저녁 공기가 맨팔에 감겨 왔다. 백준하가 생각났다. 나른한 검은 눈동자, 나지막한 웃음소리, 건들건들한 몸짓, 무례한 말, 뜨겁던 손끝.

정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시작부터 지치는 여름이다.

(pg. 19)

 

난에게 백준하와의 사랑은 단막극 같은 거거든. 50분짜리의, 굳이 해피엔딩으로 끝낼 생각도 없었던 여름 특집 단막극.

아무리 슬펐던들, 아무리 기뻣던들, 아무리 재미있었던들, 50분이 지나면 어김없이 끝나는 베스트극장 같은 거였어.

(pg. 236)

 

-백준하

준하는 자신의 삶이 순식간에 늪에 빠졌다고 느꼈다.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검은 진흙물에 흔적도 없이 잠겨 버렸다.

(중략)

너는 모른다, 내 마음 속의 지옥을. 일렁이는 불길을, 성난 분노를, 내 두려움과 쓸쓸함을. 너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알지 못한다. 네 앞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내가 얼마나 안간힘을 쓰는지, 넌 알지 못한다. 쾌락의 천국에서도 절대 사랑한다 말하지 않는 너 때문에 매일 밤 절망하는 나를, 넌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난 너를 사랑한다.

자신은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을 뿐이었다. 준하는 그 사실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옷을 입은 채 물 속에 빠진 기분도 썩 괜찮았다.

(pg. 304)

 

일반소설만 주로 읽는 분들이 어쩌다 로맨스 소설을 읽으면 너무 오글거려서 못 읽겠다고들 한다. 아마 이글은 이런 쪽으로는 최고가 아닐까 싶다. 글들이 무척 감각적이다.

감각적이고 서정적인 문장이 이 글의 장점이라면 스토리 면에서는 조금 아쉬운 느낌도 있다. 중반을 넘어서부터는 전개가 너무 빤하고 앞부분에 꽤 비중 있게 나왔던 백준하의 옛 연인이자 새어머니인 강수진이 흐지부지 사라져 버린다.

 

그럼에도 역시 탐나는 책이다.

이전부터 얘기를 들어오다 구할 길이 없어 볼 수 없었는데 우연히 아는 분께 빌려서 읽게 되었다. 책을 꿀꺽하고 연락을 두절…… 이라는 생각을 잠시잠깐 했다. 그만큼 언젠가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글이다. 특히 여름 열대야 밤에 읽으면 딱 일 것 같다.

아…… 책을 돌려줘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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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장미
이서형 지음 / 신영미디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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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12년 9월 18일에 종이책으로 읽다. 

 

 

이 작가분의 글은 ‘에고이스트’, ‘차가운 열정’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이다. 그리고 이 글이 내게 있어서는 그중 최고였다.

 

평생 바라오던 발레리나로써의 꿈이 좌절되고 부모로부터도 차갑게 외면당한 김은서는 밤에 ‘블루로즈’라는 재즈 클럽에서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후배가 운영하는 클럽 ‘블루로즈’를 찾은 강석주는 여리고 가냘픈 외모와 우수어린 눈동자, 우아한 몸짓을 가진 김은서에게 첫눈에 반하게 된다. 그는 당당하고 오만한 겉모습과 달리 재벌가의 사생아로 태어나 버려진 후 자수성가한 기업가였다.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결국 버려지는 경험을 한 은서와 사생아로 태어나 버려진 후 고아로 자란 석주는 서로에게 매혹되었으면서도 선뜻 다가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감정들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당기고 밀어내며 조금씩 다가간다.

 

흔한 설정이다. 특별한 악조도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의 감정 묘사, 특히 여자주인공 김서은의 생각과 감정 변화가 정말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좋았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어제 석주가 앉아 있던 자리엔 낯선 남자가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가 아닌 다른 남자가 거기 있다는 석에 화가 났다. 빨갛게 타들어 가는 담뱃불과 함께 그는 거기 있어야 했다. 지난 1주일 동안 그랬던 것처럼, 그는 꼭 거기 있어야 했다.

푸른 조명이 비켜간 어두운 그늘 아래 검은 그림자는 항상 거기 있었다.

그림자에 가린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시선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그를 보기 전에 그녀의 몸은 그의 존재를 알아챘다. 홀을 가로질러 무대로 걸어갈 때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해 고개를 돌리면 석주가 거기에 있었다.

석주의 담배 끝이 뜨겁게 타들어 가면 그녀의 허리 아래로 짜릿한 전율이 흘러내렸다. 하얀 담배 연기가 퍼져 나가면 그녀의 속눈썹은 희미하게 떨렸다. 그는 종이에 스며드는 물처럼 그녀의 머리에, 가슴에 스며들어 지울 수 없는 자국을 남겼다.

(pg. 54-55)

 

그의 웃는 얼굴이 눈부셨다. 춤을 추는 듯한 유쾌하게 출렁이는 눈빛이 가슴 깊숙이 각인되었다. 이 사람, 싱그러운 웃음을 터뜨리는 이 남자, 온몸이 저릴 정도로 탐이 났다.

하지만 강석주는 가벼운 유희의 상대가 아니었다. 관계가 깊어지면 결국 상처를 입는 것은 그녀였다.

금기(禁忌).

하지만 저항할수록 욕구는 더 강렬해질 게 분명했다. 욕구가 집착으로 변하고 결국은 중독될 것이다. 코코아처럼…….

(pg. 86)

 

석주를 사랑했다.

그 사실을 가슴 속 깊이 받아들였다. 석주는 삶을 밝히는 아름다운 빛인 동시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지나간다.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았다. 감정이란……. 그녀는 속으로 슬프게 중얼거렸다. 얼마나 쉽게 변질되고, 또 얼마나 쉽게 대상을 바꾸는지.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은 아무리 아파도 도망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녀의 사랑을, 이 남자를 바라보리라. 그에 대한 감정을 거부하고 부정하기 위해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pg. 272)

 

저돌적이고 오만한 석주가 왠지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는 조금 소극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뒤편에 나오는 그의 고백에 그런 인상은 깨끗이 날아갔다.

 

“지난 몇 백 년 동안 식물학자들은 푸른색의 장미꽃을 만들어 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절대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겼지. 그들에게 블루 로즈는 얻을 수 없는 소망이자 불가능한 아름다움이었다.”

……

“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

……

“차가운 푸른빛 속에 감추어진 뜨거운 열정.”

……

“나에게 블루 로즈는…… 너야.”

(pg. 297-298)

 

로맨스를 위한 로맨스, 딱 로맨스같은 로맨스가 읽고 싶은 분들께 권한다. 특히 글 전반에 쓸쓸하고 쌉쌀한 느낌이 드는 것이 요즘같이 서늘해지기 시작하는 계절에 읽으면 정말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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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정신 소설향 18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 사랑이라니, 선영아

지은이: 김연수

펴낸곳: 작가정신

초판 1쇄 발행 2003년 6월 20일

2012년 8월에 종이책으로 읽다.

 

 

며칠 전에 김연수 작가의 신작 산문집인 ‘지지 않는다는 말’을 구입했다. 이 책을 몇 장 들춰보다가 문득 이 작가분의 책을 한 권 갖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오래 전에 사서 아직 읽지 않았다는 것도. 그렇게 해서 빼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사들고 와서 읽지 않고 책장에 고이 모셔둔 뒤로 벌써 한 번 개정판이 나왔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작가정신에서 펴낸 소설향이라는 시리즈의 열여덟 번째로 나온 구판이다. 책 내용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먼저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난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내용만큼이나 책의 제본과 종이질에 감탄했다. 요즘 많은 개정판들이 가격을 올려 나오지만 정작 제본이나 종이는 이전만 못해서 안타까울 때가 많다. 모든 책들이 딱 이정도만 나와 주면 정말 좋겠다.  

 

작가의 말에도 나와 있듯이 작가는 이 이야기에서 사랑에 대해 말한다. 사랑에 대해 참 많은 것은 짧은 글에 잘도 풀어놓았다고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 문장도 흘릴 것이 없다.

광수는 대학동창이었던 선영과 결혼을 한다. 

 

미혼남에서 유부남으로 바뀌는 과정은 달에서 지구로 귀환하는 일과 비슷하다. 유부남이 되면 갑자기 자신을 둘러싼 중력이 여섯 배나 강해진다는 사실에 멍멍해진다. 하지만 달에서 지구로 바로 귀환할 수는 없다. 반드시 무중력 공간을 거쳐야만 한다. 신혼여행이 바로 그런 무중력 공간에 해당한다. 아직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법적인 미혼녀의 육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탐닉할 수 있는 그 밀월여행은 확실히 무중력 상태와 닮았다.

(pg. 17)

 

미혼녀에서 유부녀로 바뀌는 건, 뭐랄가 호두를 깨무는 일과 비슷하다. 애당초 허기진 배를 채우겠다고 깨문 게 아니다. 왜 먹지 않고 놔두느냐는 주위의 채근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게 먹을 게 없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볼썽사나운 껍질뿐만 아니라 초라한 알갱이까지 갈부수고 난 뒤에야 차라리 그냥 막연하게 상상하던 때가 더 좋았다는 걸 알게 된다. 게다가 불행하게도 미혼녀와 유부녀, 그 사이에는 무중력 공간의 황홀감 따위는 없다. 그저 혼자 빗자루를 들고 정리해야 할 부서진 감정의 껍질나부랭이들만 파몰아칠 뿐이다.

(pg. 19)

 

위 구절은 결혼을 한 번이라도 해보거나 한 상태인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 순간 이 작가분이 여성인가 의심해 봤다.^^

 

‘쫀쫀한’ 광수는 자신의 결혼식에서 신부 선영 부케의 꺾어진 꽃대를 보고 자신들의 또 다른 동창이자 선영과 예전에 사귀었던 ‘얼멍얼멍’한 지우와의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쫀쫀하다’의 반대말은 ‘얼멍얼멍하다’다. 얼멍얼멍한 스웨터라면 그 털실 한 올은 옷의 일부가 되고 쫀쫀한 스웨터라면 불필요한 보풀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게 보풀 때문이었다고 악쓰면 악쓸수록 자신이 얼마나 쫀쫀한 인간인지 드러날 수밖에 없다. 다들 알겠지만, 그건 사람 됨됨이의 문제지, 불길한 예감의 문제가 아니다. 삶이 왜 죽음과 같은 절망에 이르는지 아는가? 그건 스스로 무덤을 팠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세상에 팔레노프시스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란 없다. 광수는 그 사실을 몰랐다.

(pg. 16)

 

그때부터 광수와 진우의 이야기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펼쳐진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와 함께 했던 일화들을 통해 둘의 상반된 애정관, 결혼관 등이 나온다. 서로 대비되는 두 사람의 시각을 보는 것이 재미있다. 진우의 낭만적 사랑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음모론도 흥미로웠고 거기에 대한 광수의 답변에는 실실 웃었다.

 

“주둥이가 아파야 하는데, 왜 이가 아프냐? 그런데 너만 보면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너는 닭고기하고 여자 중에 뭐가 더 좋냐?”

“당연히 여자가 좋지, 임마.”

“그럼 어떻게 한 여자보다 닭고기에 대한 사랑이 더 오래가냐? 난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pg. 51)

 

소설 여기저기에 작가의 뛰어난 지력이 현학적이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게 드러난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요즘 시대를 대표하는-나의 세대와 가깝다.-대중문화적인 이야기들이 재미있게 섞여 있다. 그 결과 정말 재미있고 흥미로운, 그리고 한편으로는 지적인 사랑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글 곳곳에는 ‘쫀쫀한’ 광수의 사랑에 대한 고찰 내지는 상념들이 있다. 그중에 꽤나 마음에 남는 글들을 몇 구절 옮겨 본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빠져들었지만, 모든 게 끝나고 나면 각자 혼자 힘으로 빠져나와야 하는 것. 그 구지레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뼛속 깊이 알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

(pg. 57)

 

꽃에는 입술이 없지만 자신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사랑에는 혀가 없지만 네가 누구인지 먼저 알아내라고 종용한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저마다 위대한 개인으로 자란다. 거울에 비친 그 위대한 개인을 사랑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해 단호한 어조로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지구에서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느냐는 미 우주항공국의 업무지만, 우리가 얼마나 깊이 사랑할 수 있느냐는 스스로 대답할 문제다.

(pg. 80)

 

이 책을 읽고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이제 나도 내 세대 작가들의 책을 읽어야 겠다는 것이다.  

 

나는 고전을 좋아한다. 그토록 많은 이들에게 오래도록 회자되고 후 세대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들이 궁금해서 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글들을 읽고 수차례 실망한 경험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한국서적을 구하기 힘든 외국에 오래 거주한 까닭도 있고 해서 내가 지금까지 읽은 한국 소설들은 주로 신경숙, 박완서, 이문열, 황석영 같은 분들의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나에게 최근에 읽은 박민규나 김애란 같은 젊은 작가들의 글은 큰 충격과 기쁨이었다. 이 책을 읽고 김연수라는 작가를 나는 처음으로 발견했다. 이미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한국에서는 유명한 분임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새로운 작가분이다. 정말 기쁘다. 앞으로 이 작가분의 많은 글들을 읽을 생각에 벌써부터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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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열정 - SYRomance 064
이서형 지음 / 신영미디어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제목: 차가운 열정

지은이: 이서형 (인터넷 필명 라니)

펴낸곳: (주)신영미디어

초판 1쇄 발행 2009년 12월 23일

2012년 8월에 종이책으로 읽다.

 

 

예전에 어떤 분이 이 작가님을 일컬어 한국 작가분들 중에서 할리퀸형 로맨스를 가장 잘 쓰시는 것 같다고 했는데 정말 그 말에 공감한다. 

  

특히 이 책은 미국 뉴욕이 배경이고 남자주인공이 미국인이어서 특히나 더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다. 거기다가 남주인 마커스 첼린지는 완벽한 외모와 배경을 갖춘 재벌 후계자이고 여주인 재인 리(이재인)는 그의 보좌관이다. 달리 말해서 재벌 후계자 부사장님과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아름답고 능력 있는 여비서의 이야기다. 줄거리도 할리퀸의 주 메뉴인 처음부터 서로 끌리는 두 남녀가 자존심을 내세우고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다가 오해와 착각을 거듭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작가님의 뛰어난 감정 묘사, 특히 여주의 감정선이 잘 살아있고 공감 있게 그려져서 나쁘지 않았다. 특히 뒤에 조금 나오는 여주와 남주의 동생들인 재희와 데릭의 이야기가 너무 흥미로웠다. 얼마나 흥미로웠는지 이 둘의 이야기가 따로 출간된 것이 있는지 따로 찾아보았다. ……못 찾았다.  

 

신파가 아닌(출생의 비밀은 있어도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고 질척거리지도 않는다.) 전형적인 로맨스를 읽고 싶은 분들께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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