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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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야만인들 없이 우리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사람들이 모종의 해결책이었는데." 

- 콘스탄티노스 페트루 카바피스 시전집 中



작가 존 맥스웰 쿳시는 카바피스의 시 <야만을 기다리며>에서 소설의 제목뿐만 아니라 주요 모티브까지 차용했다. 소설의 화자인 ''는 어느 이름 모를 제국의 변경 도시를 통치하는 치안판사다. 평화롭던 이곳에 어느 날 수도의 제3국에서 파견된 졸 대령이 시찰을 나오게 되고, 이들은 국경 너머의 야만인들에 대한 대중의 공포심리를 조장한다. 공포를 이용한 선동에 현혹된 대중들은 야만인의 존재를 두려워하고, 제국에 변고가 생길 때마다 그 배후에 야만인이 있다고 여긴다. 졸 대령은 시민들에게 야만인은 실재하는 적이라고 공표하고 그 증거로 그가 포획된 포로들을 내세우지만, 그들은 물고기를 잡거나 물물교환을 통해 근근이 살아가는 힘없는 부족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적대감과 공포에 휩싸인 시민들의 눈에 비친 그들은 방화, 약탈, 강간을 일삼는 자신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피에 굶주린 적이다.



"야만인들이에요. 그들이 저쪽 둑의 일부를 터서 들판을 물바다로 만들었답니다. 아무도 그들을 본 사람은 없었지만요." (163)



제국주의에는 태생적으로 폭력과 억압, 강제성이 내포되어 있다. 전쟁은 국가를 만들고 국가는 전쟁을 일으키는 반복 속에서 제국주의는 확산되었고, 국가의 경계가 바뀔 때마다 주변부의 인간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국가의 틀 안으로 끌려 들어가거나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제국은 내부 결속을 다지고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국경 밖의 타자들을 억압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를 위해 동원되는 것이 공포다. 생존과 안전을 겁박 당하는 공포는 가장 강력한 원초적 감정이기 때문이다. 공포의 대상은 국경 밖에 존재하는 타자 (他者) , 야만인들이다. 제국은 진실의 은폐, 거짓 선동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지의 공포의 대상을 확대 재생산해낸다.



"제국은 재앙에 대한 상상을 먹고 산다. 말도 안 되는 미친 상상이지만 전염성이 강하다." (220)



많은 시민들이 침묵하거나 제국의 방침에 동조한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이 제국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 야만인들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미래에 대해 걱정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아요." (250)라는 어느 여인의 외침이 소시민의 목소리에 가깝다. 그렇다면 대중들의 침묵과 동조의 의미는 무엇일까? 대중들이 그러한 선택을 하는 이유는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다. 화해와 공존을 추구하는 시민들은 제국의 배신자로 모함 받기 때문이다. 야만인은 국경 밖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제국의 체제를 위협하는 이들은 국경 안에 있어도 '야만인'으로 규정되고, 이들을 야만인으로 규정한 이들은 자연스레 '문명인'으로 격상된다. 결국 제국에의 동조는 생존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삶의 방편이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상상 속 존재인 야만인들은 거대한 먼지와 자욱한 모래구름을 뚫고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제국주의의 상징인 졸 대령이 있다. 그는 색안경을 쓰고 자신만의 프레임으로 야만인들을 바라보고,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그만의 진실을 찾아 제국주의 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한다. 치안판사인 ''도 도시의 통치자로서 제국의 유지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에 제국으로 인해 파생되는 부조리에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는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며 마치 먼지 속에서 숨을 쉬는 것 같은 이물감을 느낀다. ''는 경험을 통해, 한 세대에 한 번씩은 꼭 야만인들에 대한 히스테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19), 문명이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문명에 반대하며, 자신은 이러한 입장에서 행정 업무를 수행해왔다고 주장한다. (66) 또한, 그는 역사의 바깥에 살면서 (254), 다양하고 풍요로운 세계가 저 너머에 있다고 스스로에게 일깨워주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음을 밝힘으로써 (141), 제국과 거리를 두기도 한다.



"지금 이순간 군중으로부터 큰 걸음으로 멀어지는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해진 건, 막 일어나려고 하는 잔혹행위에 내가 오염되지 않아야 하며, 또한 가해자들의 무기력한 증오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 제국의 변방 오지에도 마음속에서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는 얘기를 할 수 있도록 하자." (172)



''는 고문 후유증으로 눈이 먼 젊은 야만인 여자에게 마음이 끌린다. 하지만 그가 그녀에게 끌리는 이유는 그녀로부터 얻을 수 있는 희열 때문이 아니라, 그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제국주의의 모순과 부조리의 흔적 즉, 그녀의 몸에 난 상처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건 그녀일까, 아니면 그녀의 몸에 배어 있는 역사의 자취들일까?" (108)



''는 그녀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그녀에게 문명의 편안함을 제공한다. 또한, 험난하고 열악한 상황, 개인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그녀의 부족에게 데려다 주기까지 한다. 그로 인해 ''는 야만인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생각지도 못한 치욕까지 겪지만 그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문명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폭력과 상처를 위로하고 용서를 구하는 동시에 진실과 정의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그 나름의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편안한 시절에 제국이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거짓말이고, 대령은 거친 바람이 불며 세상이 험악해질 때 제국이 얘기하는 진실이다. 제국의 통치술의 양면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223쪽)



치안판사는 졸 대령 뿐만 아니라 자신도 제국주의를 이루는 한 부분이며, 체제 유지에 기여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결국 졸 대령은 강압과 폭력을 통해서, 치안판사는 호의와 온정을 통해서 제국주의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에 공조하는 동시에 모순과 부조리도 인식하고 있는 치안판사는 제국과 문명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를 내포한다. 하지만 우리는 치안판사에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인간성 회복의 희망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위대한 생명의 기적이야. 그러나 이 기적적인 몸조차도 어떤 타격을 받으면 회복이 불가능할 수 있다. 이 사람들을 봐라! 사람들이다!" (177)

"당신은 사람들을 그렇게 다룬 다음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가 있지? 그게 가능하오?"207쪽)



인간은 의도의 유무를 떠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해를 끼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다. 서로의 고유한 존재 방식, 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들지만, 우리는 삶의 흔적, 아픔을 매개로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이해하고 위로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서로간에 존재하는 적당한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과 온기로 서로를 알아보고 오직 사람에게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을 공유한다. '사람' 그리고 ''은 결코 이데올로기만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이다.



조지 오웰은 <동물 농장>에서 특정시대만의 산물이 아닌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근원으로 반복되는 사회구조와 역사에 주목하였고, 이는 <동물농장>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유이다. <동물농장>의 풍자 대상은 당시의 전체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국민을 착취하는 모든 형태의 독재체제에 확대 적용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동물농장>은 반세기 이전의 과거에 일어난, 이미 확정되어버린 결말을 향해 질주하는 이야기가 아닌 현재진행형의 우리 삶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작가 존 쿳시는 특정 시대와 공간을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제국주의로 인해 생겨나는 폭력과 억압, 부조리가 특정 시대와 장소에 국한된 게 아니라 과거부터 현재까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편적인 일임을 암시한다



또한 소설은 치안 판사인 ''가 소설의 화자가 되어 현재시점으로 자기고백적인 내러티브를 전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작가는 이를 통해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면서 지금 현재에도 벌어지고 있는 부조리 앞에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이냐고 독자에게 묻는다. 과거는 객관적 진실의 영역이 아니고, 기록의 조작과 기억의 통제를 통해 왜곡이 가능하다. 대중의 기억을 조작하여 과거를 지우거나 왜곡한 사례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수없이 지켜봐 왔다. 작가가 과거가 아닌 현재 시점을 선택한 이유이다



작가의 지적처럼 부조리와 모순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발생하고 있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현재 한반도에는 적대적으로 공존하는 하나의 민족, 두 개의 한국이 공존한다. 남북한의 이념적 군사적 대결이 빚어낸 전쟁과 분단, 그 상처와 두려움은 아직까지도 민족의 의식 밑바닥 깊숙이 망령처럼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공포는 대한민국이 직면한 북한이라는 현실적 위험 보다 존재 여부도 확실하지 않는 내부에 존재하는 가상의 적이었다.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 내부에 이념적 배신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단순한 반공을 넘어 레드 콤플렉스를 만들어냈다. 배신자와 잠재적 협력자로 몰려 자신 뿐 아니라 가족의 생존까지 위협 당할 수 있다는 공포는 양심의 자유와 기본적 권리마저 포기하게 만들었다. 남한이 반공주의 속에서 군사 쿠데타에 이은 군부독재를 겪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기다려야하는 '야만'은 상상 속에 존재하는 적이 아니라 머리맡에 내리쬐는 햇살의 온기, 맨발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호숫바닥의 감촉, 서로에게 건네는 따스한 미소 같은 것 아닐까? 진정한 삶의 의미는 문명화의 물결 속에서 사라져가는 원초적 자연에서, 또 관계와 소통으로 대표되는 인간 고유의 속성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타락한 존재다.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법을 지키는 것뿐이다. 정의에 대한 기억이 퇴색하지 않도록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문명인으로 남기 위해 타자를 야만인으로 규정해 온 건 아닐까? 타락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원칙 (Principle)을 지키며, 진실과 정의, 인간 고유의 본성을 회복하기 위해 타인을 향해 작지만 흔들림 없는 발걸음을 묵묵히 내딛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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