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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평점 :
『더블』, 박민규, 창비, 2010
- 박민규의 우주 만나기
단편은 주로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쓴다는 그는, 『카스테라』 이후 5년 만에 두 번째 선물세트를 들고 찾아왔다. 그것도 두 배의 양, 두 배의 감동을 가진 총 18편의 단편으로 모인 이야기로. 제목도 ‘더블’이다.
18편의 단편들 중에서 첫 번째로 주목한 소설은 2007 이효석 문학상 대상 작품인「누런 강 배한 척」이었다. 이 소설은 하늘에 계신 자신의 아버지에게 선물하는 소설이라는 글을 수상 소감과 더불어 보게 되었다. 그리고서는 '자신 따위'를 키우기 위해 몇 십 년을 회사에 다니신 아버지에게 고작 소설 밖에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굉장히 미안하고 미안해했다. 부모는 누구에게나 이토록 애틋한 존재, 미안한 존재로 다가온다. 하지만 언제나 조금씩 늦게.
이 단편은 여러모로 느낄 것이 많은 소설이었다. 박민규의 글 치고는 특별한 상상력이랄지, 특별한 스토리랄지가 없이 굉장히 잔잔하고 일상적이게 흘러간다. 물론 그의 어법도, 그의 세계관도 그래도 담겨있긴 하지만 말이다. 회사를 정년퇴직한 주인공 남자에게는 치매에 걸린 아내가 있다. 뭐, 아들도 있고 며느리도 있고 딸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이 든 부모의 마음은, 자식들의 무관심으로 인한 배신감과 소외감, 사회적 박탈감 같은 것들로 힘들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그 무엇보다 ‘이제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 데, 소소하고 뻔한, 괴롭고 슬픈 하루하루를 똑같은 속도로 더디게 견뎌야 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육 개월 전부터 모은 수면제를 가지고 아내와 마지막 한 달의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소설은 그 여행에서 어떤 안마사를 만나고, 안마를 받게 되는 이야기에서 막을 내린다. 결국 그들이 정말 삶을 마감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쓴 글이라 그런지 어느 때보다 소설의 깊이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주지 말아야 한다고 느끼면서도 자꾸만 주게 되는 부모의 마음을, 큰 걸 해주는데도 도통 당연한 듯 받아내는 자식의 안일함을, 박민규는 짐짓 자신을 꾸짖듯이 덤덤하게 나무라고 있다. 이 시대의 어머니 아버지라면 비슷비슷하게 할 만한 생각을 글로 읽어버리니, 무서워졌다. 훗날, 아버지 어머니가 저런 의미의 여행을 떠나겠다고 하신다면, 온 몸으로 막아 보아야 할 것 같다. 아니 그전에 그런 여행은 없을 수 있도록 막아보아야겠지.
두 번째로 인상 깊었던 소설은 「루디」였다. 제목에 걸맞게 배경은 알래스카, 등장인물도 모두 외국인인 이 소설은 처음부터 이질적이었다. 게다가 주인공의 여행 아닌 여행으로 인해 차를 타고 이어지는 소설의 전개는 로드무비적인 낭만을 주기도 전에 길에서 한 사내를 만나면서 잔혹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총을 든 그 사내는 이유도 알 수 없는 가운데 주인공의 귀를 없애버리고,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며 주인공과 동행한다. 정말, 무엇을 위해 이토록 잔인한 행동을 하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상태에서도 사내의 악마스러운 행동은 계속된다.
주인공은 뉴욕의 증권회사에서 부사장으로 얼마 전 이혼을 했지만, 돈은 잘 벌고, 회사에서도 인정을 받았고, 세금도 꼬박꼬박 잘 냈고, 지극히 양심적이고, 아무튼 평범한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앙심을 품을 수 있게 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말이다. 하지만 굉장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주인공은 사내와 같은 의미의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도, 또한 우리도 쉽게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어낸 후에는 우리 또한 서서히 그 이유를 납득하고, 이해하게 되는 느낌이었다. 아무 잘못 없는 편의점의 가족들을, 모자라 어린아이까지 살인한 사내는 이유를 묻자 ‘약하니까’라고 답한다. 약한 것이란, 반대로 강한 것이란 무엇일까? 사내는 무엇으로 인해 그토록 고통 받았으며, 그것을 폭력으로 행사했던 것일까?
강한 임팩트만큼이나 여운도 길고, 생각할 것도 많은 소설이었다. 박민규의 가장 최근의 글이라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여기 저기 박민규식 어법이 그래도 살아있지만, 소설의 깊이가 한 층 깊어진 느낌이라서 읽는 내내 나로서도 더 진중해지는 느낌이었다.
지극히 ‘박민규’스러웠던 단편 중 하나였던 「굿바이, 제플린」은 가진 것 없이 평범한 이벤트 회사의 한 청년의 꿈에 관한 이야기다. 우선 돈을 좀 벌어서, 사랑하는 미려에게 청혼을 하고, 아파트 같은데서 즐거운 결혼 생활을 시작하고(평수의 개념은 모르겠고 남향으로), 후에 자신의 공부를 위해 홀연 유학을 떠나는 그런...... 그가 늘어놓는 꿈에 대한 이야기는 비교적 구체적이고, 그리 터무니없어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이러한 작은 꿈조차 쉽게 이루어 줄 만큼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벤트 회사의 직원인 주인공은 대형 마트의 오픈 홍보를 위해 비행선을 띄우게 된다. 일본에서 어렵게 입수한 비행선의 이름은 제플린. 하지만 미리 띄어본 제플린은 멀리, 멀리 날아가 버리고 만다. 그 때부터 박민규는 그의 꿈을 비행선 제플린에 비유하여 보여주고 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제플린처럼 주인공에게 '꿈'은 늘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그 꿈이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데도 말이다. 꿈은 왜 늘 멀게만 느껴지는 것인지...
늘, 박민규의 일인칭 시점은 박민규의 소설에 정말 탁월하게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시종 주인공이 내뱉던 혼잣말은 웃기기도 하고, 공감되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다. 꿈이라는 말이 마냥 들뜨고 행복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닿을 수 없는, 만질 수 없는 바람처럼 아프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꿈은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본다.
또다시 종합선물세트다. 주변의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해 쓰여 졌다는 소설들이 모여, 우리에게 또 다른 세계의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마음껏 들려주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의 글을 읽는 것은 매우 즐거웠다. 하지만, 5년의 시간과 ‘더블’이라는 제목이 가진 무게 때문인지, 한 층 더 깊어진 깊이를 느끼며, 『카스테라』 때와는 또 다르게 진중해지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그의 글에 깔려있는 즐거움을 깊숙이 파고들다 보면 언제나 그 끝에는 박민규의 우주가 자리 잡고 있다. 나는 그 커다란 박민규의 우주를 만나는 것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