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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ㅣ 트리플 28
김남숙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11월
평점 :
김남숙은 2015년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소설집 '아이젠'으로 독자들에게 주목받은 한국문학의 새로운 목소리입니다. 2024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파주"는 그의 두 번째 소설집의 타이틀작으로, 비루한 일상과 폭력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는 인물들을 탐구하며 독창적인 서사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글은 ‘시시함’을 주제로 삼아, 인생의 무게와 삶의 본질을 날카로운 감각으로 포착합니다. 특히 젊은 세대의 불안정한 현실과 내면의 상처를 소재로, 평범한 일상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서사 구조를 보여줍니다. 작가의 작품은 현실적이면서도 고요한 반전의 감각을 지녔습니다.
작가는 "파주"를 통해, 우리 삶의 사건과 기억이 때로는 시시하게 느껴질지라도 그것이 우리 존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주려 합니다. 인물들의 시선에서 삶의 비루함과 시시함을 복기하는 과정은, 오히려 독자들에게 삶을 지속할 힘을 제공합니다.
김남숙의 "파주"는 평범하고 어둡고 건조한 일상 속에서 시시한 듯 보이는 사건들을 통해 인간의 내면과 삶의 의미를 들여다봅니다. 세 단편 소설, '파주', '그런 사람', '보통의 경우'는 삶의 비루함과 복잡한 관계를 예리한 감성으로 그려내며, 인물들의 내적 갈등과 선택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무겁고 쓸쓸하지만, 그 안에서 묘한 산뜻함을 발견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표제작 '파주'는 군대 시절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현철’과 이를 부인하는 ‘정호’, 그리고 정호와 동거 중인 ‘나’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현철은 1년간 매달 100만 원을 요구하며 자신이 겪었던 과거의 상처에 대해 보상을 받으려 합니다. 이 복수는 “너무 시시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시시함이야말로 현철의 상처와 무력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현철은 📌“가끔씩은 보게 될 거야”라는 말을 남기며 사라지지만, 정호와 나는 끝내 그의 상처의 깊이를 알지 못합니다. 삶은 그렇게 끝내 닿을 수 없는 이해와 무의미한 갈등의 반복 속에서 계속됩니다. 여기서 독자는 '복수'라는 테마가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단지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선택으로 변모한 현실적 시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현철은 그때도 시시하게 말하면서 시시한 인사를 했다."
그러나 이 시시한 복수의 이야기는 묵직한 잔상을 남깁니다. 현철은 자신의 삶을 복구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지만, 그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독자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작가는 여기서 삶이 필연적으로 지니는 허무함과 이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끈질김을 조명합니다.
'그런 사람'은 태국 후아힌의 리조트에서 휴식을 취하는 ‘나’가 자신을 스토커처럼 집요하게 따라오는 과거 제자 ‘원석 씨’를 만나며 겪는 갈등을 그립니다.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나’와 자신이 잊고 싶어 했던 상처를 끄집어내려는 원석 씨의 대립은, 과거와의 관계를 끊고자 하는 ‘나’의 필사적인 노력을 보여줍니다.
📌“저는 아니에요, 그런 사람이”라고 외치는 주인공의 말은, 타인의 기대 속에서 부여된 정체성에 저항하려는 몸부림입니다. 그러나 작가는 그러한 저항조차도 명쾌한 해결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후아힌은 더 이상 도피처가 될 수 없으며, 주인공은 끊임없이 타인에게 자신의 상처를 강요받는 현실과 대면해야 합니다.
작가는 원석 씨라는 존재를 통해 기억과 폭력이 어떻게 현재를 침범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치유나 복수를 기대하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이 소설은 과거를 굳이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가는 한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보통의 경우'는 방송 작가로 일하는 ‘지수’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끊임없는 스트레스와 탈모, 동료들의 조롱 속에서 점차 자존감을 잃어갑니다. 과로와 괴롭힘으로 상처받는 그녀의 이야기는 현대 사회에서의 노동과 생존의 문제를 날카롭게 고발합니다.
📌"화면 속의 내가 화면 밖의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아무도 나를 사랑할 수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는 문장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겪는 사람의 내면을 직관적으로 드러냅니다. 지수는 모든 상황을 감내하며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비참함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하며, 동시에 현대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고발합니다.
작가는 일상의 고통을 이처럼 신체적인 가려움과 탈모라는 구체적 이미지로 압축하며, 독자들에게 체감할 수 있는 생생한 무게감을 전달합니다.
"파주"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모든 사건이 겉으로는 시시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현철의 복수는 거창하지 않으며, 후아힌의 사건도 극적인 해결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김남숙 작가는 그 시시함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본질임을 강조합니다. 삶은 크고 화려한 사건들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가벼운 복수, 반복되는 일상, 그리고 작고 보잘것없는 충돌들이 우리의 궤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글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파주"는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삶만이 가치 있는가?' 그녀의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시시한 일상과 무기력함 속에서 헤매지만, 그들 역시 삶이라는 무대를 한 발짝씩 걸어나가고 있습니다.
특히 ‘파주’라는 배경 자체가 상징적으로 다가옵니다. 제목에 담긴 이 평범한 지명은, 비록 사건의 중요성을 크게 좌우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소설의 분위기를 상징하는 장치로 사용됩니다. 이는 곧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많은 것들이 실상 시시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고 생각됩니다.
작가는 삶은 거대한 비극이나 드라마틱한 성공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오히려 작은 실패와 시시한 순간들이 모여 우리 삶의 궤적을 만들어낸다는 그런 삶을, 그 시시한 아름다움을 잔잔히 노래하고 있습니다. 비루함 속에서도 살아가는 힘을 보여주는 이 책은 그 속에서 우리 각자가 시시함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가게 되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