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는 알고 있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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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의 딸 리타가 사망한 채 발견된다. 그녀의 죽음은 자살로 종결된다. 그러나 엘레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리타는 분명 타살된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자 엘레나는 이사벨을 찾아간다. 그녀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도와주게끔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게 전부다. 소설은 엘레나가 이사벨의 집으로 향하는 여정에 관해 8할 이상의 분량을 할애한다. 이사벨은 마지막에서야 겨우 모습을 드러낸다.
왜 이런 구성을 취한 걸까? 그 이유는 주인공인 엘레나에게 달려 있다. 엘레나는 파킨슨병 환자이다.
소설의 첫 문단은 다음과 같다.

우선 오른발을 바닥에서 몇 센티미터가량 들어 올려 허공에 내디디면서 왼발을 어느 정도 지났다 싶으면 거기에 발을 내려 놓는 것이 요령이지. 그게 전부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엘레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고, 그녀의 뇌 역시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오른발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발이 올라가지 않는다. 허공에 내디뎌지지 않는다. 다시 바닥으로 내려가지도 않는다. 아주 단순한 동작이지만 발은 그것마저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엘레나는 자리에 앉아 기다리기로 한다. 그녀의 집 부엌에서. (후략) (13쪽)

엘레나는 한 걸음을 떼는 것조차 힘들다. 소설에서는 이렇게 그녀의 한 걸음에 관해 집요하게 서술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방식으로. 읽다 보면 엘레나의 사소한 동작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집중하게 된다. 그녀의 움직임은 매우 더딜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독자는 엘레나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머리에서 명령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 그에 대한 답답함과 고통을.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내려가는 행위 자체가 힘겹게 느껴진다. 문장은 간결한데 길고 느린 호흡으로 읽게 되었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진실이 드러난다. 그러나 진실보다 무거운 것은 질문이다.
‘엘레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정보라 작가님의 추천사 제목이기도 한 이 질문은 묵직하게 독자들을 향해 던져진다.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기 위해 다시 앞으로 돌아가야 한다. 엘레나는 왜 이사벨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도와주게끔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을까? 그것은 과거에 리타와 그녀가 이사벨을 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엘레나는 그것을 ‘빚’이라고 생각한다. 이사벨이 갚아야 할 빚. 그래서 초반부부터 이사벨에게는 ‘빚을 청산하는 대신’, ‘빚을 받아내려고 한다’ 따위의 설명이 붙는다. 독자는 ‘빚’의 정체를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그녀에게 멋대로 빚을 지운 엘레나의 행동을 어떻게 봐야 하나. 도움받는 사람이 원치 않는 도움도 도움이라고 할 수 있나. 내가 도움이라고 생각하는 행위가 타인에게는 ‘범죄’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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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와 리타를 보며 나 같다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엄마와 나.

그들은 말다툼을 벌였다. 매일 저녁만 되면 어김없이, 어떤 문제든 가리지 않고. 사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택한 대화 방식, 즉 싸움을 통해 자기의 생각을 전달하려고 하는 대화 방식이었다. (27-28쪽)

특히 이 장면이 그랬다. 모녀 관계란 정말, 어떤 단어 안에 가둘 수 없을 것 같다. 이토록 기이하고 모순적인 관계가 세상에 또 존재할까. 왜 다른 관계보다도 모녀만 유독 그럴까.

부모님한테 받은 걸 되돌려드릴 때가 된 것 같구나. 오래전에 네가 어머니를 필요로 했던 것처럼 지금 어머니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로 너야. 리타, 이제는 네가 어머니의 어머니가 될 차례라고. (233쪽)

의사가 리타에게 한 말이다. 여기서 질문을 안 할 수가 없다. 만약 리타가 남자였어도 똑같이 말했을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실제로 돌봄 노동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다. 과거보다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이다.

외할머니께서 수술 후 거동을 못 하신 적이 있었다. 요양보호사를 구하기 전까지 엄마와 이모가 번갈아가며 할머니를 돌봤다. 병실의 간이 침대에서 쪽잠을 자가며. 먹여 주고 씻겨 주는 건 물론 화장실 갈 때도 붙어 있어야 했다. 남자 형제가 셋이나 있음에도 그들은 가끔 한 시간 남짓 병실에 머물다 떠났다.
할머니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편찮으셨어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엘레나와 리타를 보며, 할머니와 엄마와 이모를 보며 생각했다. 모녀에 대해. 모성애에 대해. 여성의 육체에 대해.

엘레나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무엇을 알았는지 궁금하다면 소설을 직접 읽어보길 권한다. 개인적으로 서평을 읽는 것과 직접 읽는 것의 격차가 큰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읽고 나서 거대한 질문의 무게를 절감해 봤으면 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인쇄물을 제공 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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