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를 재발명하라"

기획회의(277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격주로 쓰는 서평거리로 이번에 고른 건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이다. 리뷰가 별로 없는 책을 고른다는 게 한 가지 원칙이었지만, 이번엔 충분하지 않은 책이란 원칙을 적용했다. 많이 주목받은 편이지만, 그래도 충분한 건 아니라는 게 나의 판단이다. 그렇다고, 이 리뷰가 부족한 부분을 다 채워주는 건 아니다. 나머지는 '당신'의 몫이다(개인적으론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연재에서 이 책도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기획회의(10. 08. 05) 세계의 종말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처음에는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MTV 철학자’였다. 이제는 ‘현존하는 가장 위험한 철학자’이다. 가공할 만한 열정으로 시대를 사유하고 있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느 샌가 국내에서도 단기간에 가장 많이 번역된 철학자가 됐기에, 그의 책이 한권 더 소개되는 일이 더이상 ‘뉴스’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독자들에겐 언제나 ‘흥분’되는 일이다.  

 

21세기 첫 십년의 교훈을 되새겨보는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또한 예외가 아니다. 제목에서 ‘비극’과 ‘희극’은 각각 그 첫 십년을 열고 마감하는 두 사건, 2001년 9월 11일의 공격과 2008년의 금융붕괴를 가리킨다. 헤겔의 말대로 철학이 ‘개념으로 포착한 자기 시대’라면, 지젝이야말로 그러한 정의에 가장 충실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포착하여 보여준다. 

책은 두 가지 목표에 따라 2부로 구성돼 있다. 1부에서는 현재 진행 중인 세계 금융위기를 통해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유토피아적 핵심을 분석하고, 2부에서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새로운 형태의 공산주의적 실천이 어떻게 가능한지 탐색한다. 물론 그가 제시하는 건 중립적인 분석이 아닌 대단히 ‘편파적인’ 분석이다. 진리란 편파적이며, 진정한 보편성은 오직 편파성을 통해서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오랜 주장이다. 이러한 입장을 확인해둠과 동시에 지젝이 자신의 핵심적인 테제를 끌어내고 있는 농담 한 가지를 음미해보는 것도 좋겠다.  

농담의 배경은 몽골 지배하에 있던 15세기 러시아이다. 한 농군이 아내와 함께 시골길을 걸어가다 말을 타고 오던 몽골의 전사를 만나게 됐다. 이 전사는 농군의 아내를 강간하겠다고 이르고는 “땅에 흙먼지가 많으니 내가 네 아내를 강간할 동안 네놈이 내 고환을 받치고 있어야겠다. 거기가 더러워지면 안되니까!”라고 덧붙였다. 몽골군이 일을 마치고 떠나자 농군은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다. 아내가 어이없어 하며 뭐가 기뻐서 난리냐고 묻자 농군은 이렇게 답했다. “그놈한테 한방 먹였다고! 그놈 불알이 먼지로 뒤덮였던 말이야!”  

현실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반체제인사들이 놓인 곤경을 잘 보여주는 이 농담이 지젝은 오늘날의 비판적 좌파에게도 잘 맞아떨어지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래서 포이어바흐에 관한 제11테제를 그는 이렇게 비튼다. “우리의 사회들에서 비판적 좌파는 지금까지 권력자들에게 때를 묻히는 데에 성공했을 뿐이나, 진정 중요한 것은 그들을 거세하는 것이다.”  

그 ‘거세’는 어떻게 가능한가. 일단 ‘20세기 좌파정치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지젝이 베케트의 말을 인용하며 다시 강조하는 그 교훈이란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이다. 혁명의 과정이란 점진적 진보가 아니라 몇번이고 시작을 반복하는 운동이다. 그리하여 다시 소환되는 것이 ‘공산주의적 가설’이다. 지젝의 절친한 동료이기도 한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적 가설은 여전히 올바른 가설이며 나로서는 그외의 어떤 올바른 가설도 발견할 수 없다. 만일 이 가설이 포기되어야 한다면 집단행동 차원의 어떤 일도 행할 가치가 없다. 공산주의의 관점 없이는, 이 이념 없이는 역사적, 정치적 미래의 어떤 것도 철학자의 흥미를 끌 만한 종류가 되지 못한다.”  

물론 공산주의 이념에 계속 충실하기만 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이념에 실천적 긴박함을 부여하는 적대를 역사적 현실 안에서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의 세계자본주의 체제에는 어떤 적대가 내재해 있는가. 지젝은 네 가지를 꼽는다.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소위 ‘지적 재산권’과 관련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새로운 과학기술 발전의 사회․윤리적 함의, 새로운 장벽(Walls)과 빈민가라는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 생성. 이러한 파국적 위협과 불평등, 그리고 분리에 맞선 투쟁이 공유하는 것은 ‘공통적인 것’(the commons)을 둘러막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인류가 파멸해 봉착할 수 있다는 자각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시장의 실패”로도 불리는 기후위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때문에 ‘세계시민성’과 ‘공통관심’을 바탕으로 “시장메커니즘을 조절하고 제압하면서 엄밀하게 공산주의적인 관점을 표현하는 세계적 정치조직을 창설할 필요”가 제기된다. 그것이 ‘세계의 종말’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다(<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 이어서 지젝이 올해 펴낸 두툼한 책 제목이 <Living in the End Times(종말의 시대 살아가기)>이다).  

지젝의 공산주의론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구별이다.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한 칼럼에서 “사회주의는 실패했고 자본주의는 파산상태다. 다음에 올 것은 무엇인가?”라고 던진 질문에 대하여 그 답이 ‘공산주의’라고 그가 말하는 이유다. 지젝이 보기에, 세계자본주의 체제가 내속적인 장기적 적대를 넘어 존속하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적 해결책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모종의 사회주의를 재발명하는 것뿐이다(공동체주의나 포퓰리즘, 아시아적 자본주의 등). 경제적 자유주의의 보루 미국에서조차 자본주의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를 재발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다. “미국은 더욱더 프랑스처럼 될 것”이라는 일종의 ‘유러피언 드림’이 그것이다. 또는 빌 클린턴이 추천사를 쓰기도 한 <박애자본주의>(사월의책, 2010) 같은 책을 그 징후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이 내세운 모토가 “승자만을 위한 자본주의에서 모두를 위한 자본주의로”이다.   

하지만 사회주의에는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핵심적 적대를 다루지 않는다. 그럴 경우 “생태학은 지속가능한 발전의 문제로 변하고, 지적재산권은 복잡한 법률적 사안으로, 유전자공학은 윤리적 쟁점으로 변한다.” 더불어 빌 게이츠는 빈곤과 질병에 맞서 싸우는 ‘위대한 인도주의자’가 되며, 미디어 제국을 동원하는 루퍼트 머독은 ‘위대한 환경주의자’가 된다. 그때 사회주의는 이제 더이상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가 아니며, “공산주의의 진정한 경쟁자, 공산주의에 대한 가장 큰 위협”으로 등장한다.   

곧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유일하고 진정한 양자택일은 ‘사회주의냐 공산주의냐’이다. 혹은 보수적 헤겔과 아이티의 헤겔, 노년 헤겔주의와 청년 헤겔주의 사이의 선택이다. 물론 지젝이 어느 편을 들고 있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그린비, 2009)라는 네그리의 책 제목을 그는 이렇게 완성한다. “잘 가시오, 사회주의 씨…… 어서 오시오, 공산주의 동지!”  

10. 08.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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