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 트리플 31
장아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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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이름부터 이미 이 책의 정서를 함축하고 있다.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말은 자유로움 같지만, 동시에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 편의 이야기는 모두 그 미묘한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는다. 현실과 환상, 인간과 비인간, 사랑과 두려움 사이에서.

첫 번째 이야기 「고양이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의 시작은 일상적인 순간이다. 은비는 함께 사는 고양이 ‘포’를 따라 창밖을 바라보다 약속을 떠올리고, 오랜만에 재희를 만나러 나선다. 평범했던 하루는 산모퉁이의 이상한 불빛과 낯선 웃음소리로 인해 점점 현실 너머로 기울기 시작한다. 결국 은비는 금줄을 넘어, 인간이 쉽게 들어갈 수 없는 영역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의 경험은 꿈같고 기이하다. 독자로서도 현실 감각이 무뎌진 채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고양이로 변해 돌아온 은비는, 이전과 같은 집에 돌아왔지만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퍼즐처럼 맞춰지는 이야기의 조각들은, 마치 졸음과 햇살 사이에서 눈을 뜨는 순간처럼 기묘한 여운을 남긴다.

두 번째 이야기 「산중호걸」은 신들의 생일잔치로 시작된다. 백운, 개화, 파도, 그리고 직녀. 인간과는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지만, 그들의 감정은 의외로 인간적이다. 오랜 친구의 부고는 잔치의 분위기를 가라앉히지만, 이내 먹고 마시며 웃는 이들의 소리로 다시 채워진다. 그 속에는 사라짐에 대한 애도와 덧없음이 담겨 있다. 직녀가 짜는 편물의 무늬처럼, 그들의 삶도 사랑도 계속 이어지고 지워지기를 반복한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분명 존재했던 무언가를 믿게 만드는 이야기다.

마지막 이야기 「능금」은 가장 조용하고도 깊다. 산속에 홀로 살아가던 능금이 상처 입은 해수를 발견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의 형체에서 멀어져가는 해수, 그런 그를 곁에 두고 지켜보는 능금. 둘 사이에는 말보다 침묵이 많고, 이해보다 망설임이 깊다. 해수가 누구인지보다 중요한 것은, 그를 떠나지 않으려는 능금의 마음이다. 이 사랑은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저 곁에 있는 것, 두려우면서도 품어내는 것이 전부다.

이 책은 세 편 모두 ‘사랑’이라는 감정의 또 다른 얼굴을 들여다보게 한다. 때로는 쉽게 정의되지 않고, 설명할 수 없는 마음들. 그것들이 ‘고양이’라는 존재를 통해 비현실적인 서사의 껍질을 쓰고, 결국 우리의 현실적인 감정에 닿는다. 세 이야기를 모두 읽고 나면 마치 짧은 잠에서 막 깨어난 듯,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진 채로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다.

말로 다 하지 못한 사랑, 끝내 설명되지 않는 감정, 그 모든 ‘망설임’과 ‘멈칫’의 순간이 이 책 안에서 조용히 살아 숨 쉰다. 지금 이 계절, 당신을 위해 준비된 고요한 변신담. 꼭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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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떡과 초콜릿, 경성에 오다 - 식민지 조선을 위로한 8가지 디저트
박현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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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떡과 초콜릿. 몇 번이고 끊어보려고 다짐했던 마음은 결국 익숙한 중독에 휘말려 내내 간식을 달고 살게 한다. 겨울이 조금 덜 매서운 건 호떡 덕분이고, 초콜릿은 하나만 먹기엔 늘 아쉽다. 그렇다면 100년 전 디저트에 담긴 '먹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말 그대로 혀끝의 기억을 자극하면서도, 그 기억 너머의 시간과 공간을 향해 상상력을 확장시키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호떡과 초콜릿, 경성에 오다>이다.

책은 얼핏 사랑스럽고 아기자기한 100년 전의 디저트를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그 배경은 식민지 조선이라는 무겁고 고단한 현실이다. '먹는다'는 행위가 단순한 생존을 넘어 위안이자 체면, 때로는 정치적 상징이 되기도 했다는 사실을 책은 날카롭고도 따뜻하게 짚어낸다.

책에는 당시 조선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여덟 가지 디저트가 등장한다. 커피, 만주, 멜론, 호떡, 라무네, 초콜릿, 군고구마 그리고 빙수. 지금은 익숙한 간식이지만 그 시절에는 생존과 위로, 근대와 계급의 이야기가 덧입혀진 존재였다.


특히 다방이라는 공간이 인상깊게 남았다. "꿈조차 고독하면 그것은 정말 외로운 일이라며, 다방은 고독한 꿈이 다른 고독한 꿈에게 악수를 청하는 공간"(56쪽)이라는 이상의 표현은 다방이 단순한 커피집을 넘어 당대 청춘들의 마음을 붙들던 은신처였음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가 주말 오후 카페에서 즐기는 여유가, 이른 아침 바쁜 퇴근길에 한 잔의 커피를 챙기려는 보상심리가 어쩌면 그 시절의 작은 생존의 틈이자 꿈을 숨 쉴 수 있는 은신처의 역할과 이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호떡에 얽힌 이야기도 마음을 유독 오래 붙잡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겨울 간식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요즘은 겨울이면 흔히 호떡차를 마주할 수 있어 국민 간식으로 불리고 있지만. 당시에는 중국에서 유입된 음식이라는 이유로 부정적 인식이 따랐다고 한다. 값싸고 든든한 음식이었지만, 오히려 가난함을 겉으로 드러내는 음식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기에 호떡을 사 먹다 아는 사람을 마주치면 부끄러워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고 한다. 나는 여전히 집 근처 호떡집에서 가족들과 손을 비비며 호떡 반죽이 노릇노릇 구워지길 기다리지만, 내가 가장 애정하는 겨울 간식의 이전이 그렇게 마음 아플 줄은 몰랐다.

이 책은 단순히 디저트의 유래나 유행을 나열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가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가'를 물으며 먹는다는 행위에 담긴 정체성과 외로움, 식민성과 계급, 문명에 대한 욕망을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말하자면 이 책은 겉은 달지만 속은 쌉싸름한 디저트 같다. 시대의 공기 속에서 음식이라는 렌즈로 사람과 사회를 읽어내는 인문서이며,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먹고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되묻게 만든다. 음식은 여전히 관계를 만들고, 삶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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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여 봐, 기분이 좋아! - 2025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신정식 지음, 지현경 그림 / 유노랩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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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웃고 떠들며 노는 모습만큼 보기 좋은 장면이 또 있을까요?

<움직여 봐, 기분이 좋아!>는 신정식 작가의 따뜻한 글과 지현경 작가의 감성적인 그림이 어우러진 그림책으로, 놀이터에서 마음껏 뛰놀던 동물 친구들이 갑작스런 공사 소음으로 인해 놀이 공간을 잃고 마음이 울적해지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기분이 상한 아이들은 자신들의 변화된 감정에 놀라 두루미 아저씨를 찾아가고, 신기한 동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죠. 그 동굴 안에서 아이들은 각자의 상상으로 만든 공간을 떠올리며 몸을 움직이고, 자신을 들여다보고 마음을 다독이게 됩니다. 벽화를 따라 자연스럽게 따라 하게 되는 다양한 동작들은 몸의 긴장을 풀어주고,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지요.

이 책은 단순히 이야기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조절하고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실제 동작들이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 더욱 특별합니다. 요즘처럼 아이들도 바쁘고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몸을 움직이는 경험은 아이들에게 아주 좋은 감정 조절 도구가 되어줍니다.

부모님과 선생님들께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이 책을 함께 읽으며 아이의 감정을 읽어주고, 책 속 동작을 따라해보세요.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조절하는 법을 배워가게 될 것입니다. 책을 읽는 그 시간이, 아이에게는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따뜻한 시간이 되어줄 거예요.

<움직여 봐, 기분이 좋아!>는 정서 조절이 필요한 유아 및 초등 저학년 아이들에게 특히 유익한 그림책입니다. 아이의 하루에 작은 평화를 더해주고 싶다면,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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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유 없이 불안할까 교양 100그램 5
하지현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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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삶은 내가 세워 놓은 계획대로 아무런 걸림돌 없이 착착 나아가지 않는다. 그런 예상치 못한 엇나감 속에서 나는 종종 불안을 느낀다. 한자로 ‘아닐 불(不)’, ‘편안할 안(安)’. 말 그대로 편안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일상에서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커다란 불안은 없지만, 문득문득 불쑥 찾아오는 낯선 감정은 분명히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예전에는 그런 불안을 마주할 때마다 짜증과 불평만을 늘어놓곤 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불안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조금은 달라졌다. “적당한 정도의 불안은 오히려 나를 지킨다.”는 문장이 특히 인상 깊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왜 불안을 느낄까?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방비 상태를 피하고, 안전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존재다. 생존을 위한 이런 기제는 뇌에서 작동하며, 바로 ‘싸울까 도망갈까 반응(fight or flight reaction)’을 일으킨다.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보다 먼저 반응하고, 이후에 세부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이처럼 위협을 감지한 뇌가 먼저 몸에 ‘움직여라’라는 신호를 보내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삶이 더 편리해진 요즘,
왜 우리는 불안을 더 자주, 더 크게 느끼는 걸까?

불안도 하나의 ‘면역’이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불편함을 제거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그만큼 불편함에 대한 내성이 낮아졌다. 예전에는 감당할 수 있었던 일들도 이제는 고통으로 느껴진다. 결국 작은 자극에도 불안이 쉽게 증폭되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위험 요소를 최소화한 사회가 오히려 낯선 위험에 더 취약하게 만든 셈이다. 그래서 스트레스의 ‘객관적인 강도’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주관적인 해석‘을 더 자세히 보아야 한다.

또한 이 책은,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는 우리의 욕망조차도 불안과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단지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뿐인데, 현재 한국 사회의 평균치는 이미 너무 높아져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욕망’은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욕구’와는 다르다. 의식주 같은 필요는 이미 충족되었기에, 이제는 더 나은 무언가를 향한 ‘비교’와 ‘경쟁’ 속에서 불안을 느끼게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면 나에게 충분한지를 스스로 정하고 만족하는 태도다.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그것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평범함에 이르는 길일지도 모른다.

💭 불안, 그런 게 있나보다. 그냥 그렇구나.

이 문장은 마치 결론처럼 남았다. 나이가 들고, 생애주기를 거치며 우리는 조금씩 변한다. 이전에 잘되던 것이 잘되지 않고, 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일이 어느 순간 마음에 걸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변화한 나를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지만, 불안을 무조건 억누르기보다, ‘아, 내가 변했구나’ 하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수 있다.

이 책은 불안이라는 감정과, 왜 우리는 그 감정에 이토록 취약한지에 대해 친절하고 쉽게 풀어낸다. 단순한 이론 설명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나의 삶에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말미에는 불안을 다스리는 세 가지 방법도 소개된다. 당연하게 들릴 수 있는 내용일지라도, 실천은 결코 쉽지 않기에 오히려 더 마음에 남았다.

현대인은 누구나 불안을 느낀다. 불안은 피할 수 없는 감정이기에, 억지로 없애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건강하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 책은 그 출발선에서 우리에게 따뜻한 조언을 건네고 있다. 나 또한 이 책을 통해 내 안의 불안을 되돌아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나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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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의 숲속 일기 - 메릴랜드 숲에서 만난 열두 달 식물 이야기
신혜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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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의 연구 방식부터 식물과 함께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식물학자의 숲속 일기>는 단순한 과학 에세이를 넘어 식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태도와 자연을 품은 삶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고 있다. 특히 식물을 둘러싼 더 큰 존재인 자연 속에서 식물학자인 저자가 얻는 깨달음들이 무척 인상깊은 책이다.

책에는 식물의 구조와 생태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은 물론 식물학자가 실제로 하는 연구 활동들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읽다 보면 연구소가 자리한 공간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자연과 식물이 어우러진 그 공간은 단순한 연구의 배경이 아니라, 저자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스승 같은 존재이기도 한 것 같다.

저자는 그런 환경 속에서 자연의 섭리와 흐름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삶의 어떤 순간들을 맞닥뜨릴 때면, 그것을 식물과 자연의 세계에 비추어 바라보고 해답을 찾아가기도 한다. 자연의 시계에 익숙해지고 자신의 상황을 조용히 자연에 대입하며 답을 얻는 모습에서, 식물학자라는 직업이 단지 식물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이 아닌 자연의 언어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다해 응답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 새로운 곳에 가면 새로운 식물이 기다리고 있다. (p.32)

위의 말은 단순히 식물학자로서 직업적인 관찰을 넘어서, 세상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담겨 있는 문장처럼 다가왔다. 식물학자임에도 낯선 땅을 밟을 때조차 ‘탐험’이나 ‘정복’의 마음이 아니라, 그저 기다리고 있는 식물을 만나러 가는 겸손하고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게 너무 인상 깊었다.

그 마인드가 곧 자연을 대하는 태도, 나아가 식물을 대하는 자세,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이는 자세와도 닿아 있는 것 같아서 참 본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나도 뭔가 새로운 일을 앞두고 긴장될 때, 이 문장처럼 “그곳엔 나를 기다리는 무언가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를 불현듯 얻게 됐다.



🌿 우리는 살면서 자신이 지닌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씩 지식을 넓혀나간다. 경험이 많으면 더 넓고 더 쉽게 이해한다. 예측도 쉬워진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지식으로 자연은 예측할 수 있는 것일까? (p.119)

저자가 자신과 독자에게 동시에 던지는 이 질문을 보고 자연을 가까이서 오래 바라본 사람만이 던질 수 있는 물음 같다고 생각했다.

자연은 인간의 지식으로 ‘부분적으로는’ 예측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완전히 예측할 수는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전히 자연에 대해 끊임없이 관찰하고 측정하고, 과학적으로 원리를 파헤치지만 자연은 언제나 그 너머를 가진 존재라. 계절이 바뀌는 리듬처럼 익숙한 것도 있고, 기후 변화처럼 예측을 벗어나는 현상도 있는 자연은 익숙함 속에 낯섦을 늘 숨기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어쩌면 예측하려는 태도 자체가 인간 중심적인 욕망인지도 모른다. 자연은 우리가 통제하고 예측하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며 배워가는 존재고 우리는 무엇보다 자연 안에 포함된 부속이니까. 식물학자인 저자처럼 자연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갖고 예측하려는 대신 기다리고 응답하는 자세, 그게 진짜 앎에 가까운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 안개가 짙은 곳에 서 있으면 딛고 선 발 밑의 땅만 느껴진다. 주변이 보이지 않고 막막하다. 무섭고 답답한 마음에 안개를 벗어나려 뛰어본들 부딪히고 다칠 뿐이다. 차분히 조금만 기다려 안개가 걷히고 나면 하나둘 곁에 있는 풀과 나무가 보인다. 이후엔 저 멀리 산과 강도 볼 수 있고 다시 길을 찾게 될 것이다. (p.231)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이다. 늘 타국에서 연구하며 느껴온 외로움과 쓸쓸함 속에서 어떠한 사고를 계기로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들의 존재를 새삼 깨닫고 쓴 문단. 이 문단은 단순히 자연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외롭고 막막한 시기를 지나오며 삶을 마주하는 태도를 자연의 이미지에 빗대어 전한 것이기에 더욱 깊게 다가왔다.

안개 같은 시기엔 조급히 벗어나려 애쓰기보다 잠시 멈춰 서서 기다리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자연이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줬다는 것이 뭉클했다. 나의 곁에 사람이 있다는 걸 ‘사람’이 아닌 ‘식물’과 ‘자연’을 통해 더 깊이 깨닫는다는 것이, 단순한 외로움의 해소가 아니라 연결의 본질을 다시 발견하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일주일 정도 시간을 여유있게 두고 자기 전에 틈틈이 읽었다. <식물학자의 숲속 일기>는 과학과 감성, 연구와 사유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귀한 기록같단 생각이 든다. 그저 식물을 연구하는 일을 넘어 식물을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대하며 삶의 방식까지 닮아가는 한 사람의 진심 어린 일기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자연과 더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 혹은 삶의 리듬을 다시 조율하고 싶은 이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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