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골을 찾아서 샘터어린이문고 83
김송순 지음, 클로이 그림 / 샘터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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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는 책장을 덮고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김송순 작가의 <바람골을 찾아서>는 그런 이야기였다. 보물을 찾아 떠난 한 아이의 발걸음은 결국 ‘기억’이라는 더 큰 보물 앞에 멈춰 선다. 전쟁을 겪은 할아버지의 상처를 그 시절을 겪지 않은 손자가 발견하고 이해해가는 이 동화는 어린이 독자에게는 쉽고도 진심 어린 문장으로 다가가고, 어른 독자에게는 오래도록 곱씹게 될 울림을 남긴다.

주인공 현준은 병상에 누운 할아버지의 ‘보물’을 찾기 위해 낯선 마을인 바람골로 향한다. 한때 사람이 살았으나 지금은 물속에 잠긴 마을. 말이 통하지 않는 이들, 총소리로 가득 찬 밤의 풍경. 현준이 도착한 곳은 단순한 옛날이 아니라 할아버지 세대가 겪은 ‘전쟁’의 한복판이다. 이 지점에서 <바람골을 찾아서>는 시간 여행이라는 판타지의 장치를 빌리되, 그것이 단지 흥미를 위한 설정에 머물지 않도록 한다. 오히려 이 장치는 ‘전쟁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는 기억’이라는 메시지를 보다 절실하게 전달한다.

작가는 매우 절제된 문체로 전쟁의 공포와 혼란을 묘사한다. 현준이 마주한 열일곱 살 소년, 즉 청소년 시절의 할아버지는 전장 한가운데에서 아이이기를 포기해야 했던 이 땅의 수많은 소년들을 상징한다. 총을 손에 쥐고 울면서 도망치고 발밑에 닿는 것이 물이 아니라 피였음을 깨닫는 장면은 차마 어린이 동화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뼈아프다. 그러나 작가는 무리하게 독자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의 시선’이라는 필터를 거쳐 그 공포가 더 선명하게 다가오도록 만든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이야기의 구성이다. 현재와 과거, 다시 현재로 이어지는 액자식 구조는 이야기의 주제를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실제 책의 페이지 테두리가 바뀌는 세심한 디자인 역시 이러한 전환을 직관적으로 보여주어 감각적인 완성도를 높인다.

책의 말미, 현준은 결국 할아버지의 보물을 찾아 돌아온다. 그러나 독자는 곧 깨닫게 된다. 그 보물은 단지 물건이 아니라 말을 잃은 사람의 기억을 듣고 마음 깊은 곳의 상처를 함께 감싸 안으려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이 작품은 ‘기억은 공유될 때 비로소 회복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어린이 독자에게도 무겁지 않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전하고 있다.

<바람골을 찾아서>는 과거를 돌아보게 하지만, 결국은 오늘을 말한다. 우리가 지금도 잊지 말아야 할 것, 그리고 앞으로의 세대와 함께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조용히 묻는다. 기억을 보물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 보물을 찾아 나서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이 시간에 해야 할 진짜 모험이 아닐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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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고 싶은 엄마에게
한시영 지음 / 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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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처음 마주했을 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죽이고 싶은 엄마에게”라니. 단지 제목만으로도 읽기 전부터 묵직한 무게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했다. 읽어 내려가며 나는 한 장 한 장, 감정을 삼키듯 책장을 넘겼다.



p.9 ) 저는 절 둘러싼 모든 문장에서 엄마를 읽어낼 수 있어요.
이 문장을 읽을 때, 저자의 삶이 어쩌면 이미 엄마라는 존재로 촘촘히 점철되어 있었겠구나 싶었다. 엄마라는 이름이 붙은 사랑과 증오, 기대와 실망이 한데 얽혀, 어느 문장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느껴졌다.

p.13 ) 여자나 엄마라는 것으로 한정 지을 수 없는, 그런 것에 갇힐 수 없었던 사람
엄마도 누군가의 딸이었고, 한 사람의 인생을 가진 존재였다는 사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존재가 자식에게 남긴 상처를 무조건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까? 이 책은 그런 질문을 던진다. 단순한 미화도, 일방적인 비난도 아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감정, 외면할 수 없는 기억들을 솔직하게 펼쳐놓는다.

p.40 ) 어른이 있는 집 안에서, 그들의 시야 안에 있을 때조차 나는 정서적으로 방임되기도 했으니까.
눈앞에 부모가 있어도, 정서적으로 방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토록 간결하게, 날카롭게 표현할 수 있을까. 보호받아야 할 시간에 외로움과 무력감을 겪었던 저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p.56 고작 두 시간 정도였지만 나는 나를 기른 엄마에게 내 아이를 맡길 수 없었다. 언제고 나를 두고 나가 취했던 엄마였으니까.
이 부분은 읽으며 숨이 턱 막혔다. 저자는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견뎠던 외로움을 다음 세대에는 물려주지 않기 위해 끝없이 경계하고 있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덮어버릴 수 없는 상처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 책은 담담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술에 취해 자신을 방치했던 엄마, 심지어 딸의 결혼식에도 오지 못한 엄마. 그런 엄마는 내게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부모에게 “없는 게 나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다시 생각했다. 부모라는 역할이 주어진다고 해서 모두가 그 역할에 책임을 다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낳았으니 고마워해야 한다’, ‘부모니까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 폭력을 숨기고 있었는지, 이 책을 통해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이고 싶은 엄마에게>는 그저 비극을 토로하는 에세이가 아니다.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고,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싸우는 인간의 치열한 고백이다. 그리고 그런 싸움이 얼마나 외롭고도 값진 것인지를, 책을 덮는 순간 오래도록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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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체면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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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음 보았을 때, 가장 먼저 시선을 끈 건 표지였다. 반짝이는 금빛 사과에서 과즙 대신 핏물이 흘러내리는 모습. 이 이미지는 어쩌면 ‘법’이라는 이름 아래 지켜야 할 순수성과 그 이면에 흐르는 불완전함을 상징하는 것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완벽해 보이는 껍질 속에 숨겨진 씁쓸한 진실.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정서와 딱 맞닿아 있다.

<법의 체면>은 전직 판사이자 현직 변호사인 도진기 작가님의 단편집이다. 법조인으로서의 탄탄한 경험이 녹아 있는 덕분에, 디테일이 살아 있고, 절제된 문장 덕에 책장이 가볍게 넘어간다. 무겁지 않지만,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다. 어쩌면 점점 높아지는 사법 불신의 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들이 아닐까 싶다.


가장 재미있게 읽은 단편은 표제작인 <법의 체면>. 억울하게 장물 취득 혐의를 받은 변상일은 마지막 3심을 앞두고, 냉정한 검사 출신 변호사 호연정을 찾아간다. 승소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건, 그러나 연정은 이 사건 뒤에 숨겨진 놀라운 과거를 알게 된다.

법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체면과 위선, 그리고 그 틈에 짓밟히는 한 인간의 삶. 작가님이 법정에서 느꼈던 실망과 안타까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현실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통쾌한 복수’가 이 소설 안에서는 조심스럽게 펼쳐진다. 짧은 이야기지만 읽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묵직해진다.


<법의 체면>을 읽으며 가장 강하게 느낀 건, 도진기 작가님이 법의 불완전함을 누구보다 깊이 체감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오랫동안 판사와 변호사로 일하며, 법이 반드시 정의를 실현하지는 않는다는 현실을 수없이 목격했을 것이다. ‘법’은 이상적으로는 정의의 수호자지만. 현실 속 법정에서는 체면, 권력, 인간적 약점이 뒤엉켜 진실이 묻히기도 한다.

작가님은 이런 씁쓸하고 복잡한 감정들을 소설이라는 부드럽고 깊은 방식으로 세상에 꺼내놓았다. 소설은 현실을 그대로 고발하는 것보다 더 부드럽고, 더 깊게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 수 있는 것 같다. 법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정면으로 비난하는 대신,

“법은 과연 항상 정의를 실현하는가?”
“진실은 언제, 어떻게 가려지는가?”

작은 이야기들을 통해 독자 스스로 질문을 품게 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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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골목의 끝에, 첼시 호텔 문학동네 청소년 76
조우리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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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인생이 끝없이 이어진 골목처럼 느껴진다. 그 골목을 발길 가는대로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느낌에 멈춰 서게 된다. 그 끝에서 낯선 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나는 과연 그 문을 열 수 있을까.

뒤돌아갈 길도 막막하고, 주저앉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을 때— 그제야 우리는 마침내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문을 조심스레 밀어보게 된다. 바로 첼시호텔.

조우리 작가님의 장편소설 <모든 골목의 끝에, 첼시 호텔>은 우리가 흔히 외면해온 감정의 파편들을 하나씩 주워 모아 보여준다. 성적과 목표를 삶의 기준점으로 삼고, 감정은 모두 대학 입학 이후로 유예해두었던 락영. 첼시 호텔이라는 이름의 공간, 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은 그녀를 처음으로 흔들고, 다시 세운다. 사랑, 우정, 배신. 그리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여름. 그 안에서 락영은 ‘성장’이 아니라 ‘변화’를 겪는다.

표지 속, 도심 야경을 등지고 한 아이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장면. 현실의 빛나는 무대 뒤편, 익숙함 너머의 낯선 공간. 그 문 너머에서 펼쳐질 것은 어떤 위로나 치유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마음이 다쳐도 괜찮고, 눈물을 흘려도 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던 감정들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공간. 첼시 호텔은 그런 장소다.

청춘이라는 말로 뭉뚱그리기엔 너무 복잡한 감정들. 그리고 그 감정들 속에서 “이제는 나 자신을 사랑할 차례”라고, 조용히 등을 떠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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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골동품점
범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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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골목 끝, 밤 11시에 문을 여는 기묘한 가게, 호랑골동품점.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독자는 단순한 호러를 기대했다가 곧 이야기에 깃든 묵직한 감정에 압도당하게 된다. 범유진 작가의 장편소설 <호랑골동품점>은 판타지와 호러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중심에는 ‘사람’과 ‘사연’이 놓여 있다.

책은 여러 에피소드로 구성된 옴니버스 형태로, 각 장마다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창이 열린다. 특히 ‘19세기, 영국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 편은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인간이 겪는 무기력, 죄책감, 그리고 연대의 가능성을 짙은 잿빛 속에서 그려낸다. 사회적 부조리와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끝내 독자에게 ‘정화’의 가능성을 건넨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단순한 기담을 넘어선다.

이야기 속 물건들은 저마다 주인을 잃고 방황하거나, 오랜 한을 품고 있다. 무섭고 기묘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인간의 그늘진 감정을 상징한다. 우리는 그 물건들을 통해 누군가의 억울함, 아픔, 그리움, 심지어는 사랑까지 엿보게 된다. 어느 순간, 그것은 곧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소름보다 먹먹함이 더 오래 남는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힐링 호러’라는 표현이 적확하다. 낯선 기이함 속에 인간적인 따뜻함이 숨어 있고, 공포 뒤에는 연민이 남는다. 무서워서 밤에 책을 덮게 되면서도, 낮이 되면 다시 펼치게 되는 힘. 그것은 작가가 사람의 마음을 정교하게 다루는 솜씨에서 비롯된다.

<호랑골동품점>은 단지 귀신이 들린 물건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깃든 물건 이야기이며, 기억과 부재를 다루는 정교한 감정의 지도이다. 오래된 것들을 유심히 바라보게 만드는 이 소설은, “지금이 아닌 것들”이 불러오는 감정의 파편을 조용히 건네준다.

읽고 나면, 책상 위 작은 소품 하나도 가볍게 보이지 않게 되는 경험. 누군가의 시간이 고여 있는 모든 것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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