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 카페에서 우리가 만난다면
황주리 지음 / 파람북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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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만난 적 없으면서 편지만 주고받았는데 사랑에 빠진다? 웬 펜팔시절 이야기인가 할 것이다. 보고 싶으면 바로 만나면 될 터이다. 만약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1분, 아니 수초 안에 문자로 소통 가능한 세상이다. 얼굴이 보고 싶으면 영상통화를 하면 된다. 이런 시대에 편지로 사랑하는 서간소설이라니! 소설 <바그다드 카페에서 우리가 만난다면>은 오히려 그래서 관심이 갔다.​​

이야기는 오래전 뉴욕의 한 화랑에서 스쳐 지났던 두 사람이 SNS에서 다시 만나 대화를 이어가며 전개된다. 화가와 의사라는 이질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를 신뢰하고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촉매가 되었던 건 영화 〈바그다드 카페〉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게 되지만, 단 한 번의 만남도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위 출판사 책 소개를 보고 서평단에 신청했다. 급하게 만나고, 즉각적 소통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듯 치부하는 시대에 이런 소설을 쓴 이가 누구일지 궁금했다. 작가는 화가이면서 소설을 쓰는 황주리씨이고 소설 속에 실린 그림 몇몇은 소설 장면이 바로 연상되었다. 이런 소재의 소설이 요즘 독자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지 조금은 우려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작가가 꾸며낸 그 가상의 세계가 마음에 들었고, 두 주인공의 편지를 인상 깊게 읽었다.



아프가니스탄계 미국인 외과 의사가 뉴욕 소호의 어느 화랑에서 인사만 나누었던 한국인 여성 화가의 그림을 사게 된다. 그 뒤로 몇 번 화랑을 찾았지만 그녀를 다시 만날 순 없었고, 그 즈음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보다가 그녀가 생각났다. 영화 속 여성 주인공과는 어떤 접점도 없는데 왜 어눌한 영어로 인사 몇 마디 나눈 한국 여성을 떠올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페이스북에서 본 박경아가 그때 그녀임을 확인하고 긴 편지를 보낸다. 그 남자 A는 당시의 상황과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연결해 이야기를 이어나가는데 현재는 테러가 일상인 아프가니스탄에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의 편지에 박경아도 답장을 보냈고 이제 그들의 편지왕래가 시작된다.

나는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본 적도 없으면서 각종 미디어에서 소개하거나 인용한 것만을 보고 듣고선 마치 본 것마냥 느끼고 있었다. 주제음악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이 책에서 주인공 남녀가 영화 내용을 언급할 때마다 고개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러나 한편 그들의 심정이 다 공감되지 않는 미진함은 두 주인공과의 거리감을 만들었다. 아마 영화를 본 사람이 이 소설을 읽는다면 한층 몰입감을 느낄 것이다. 책을 다 읽은 후 꼭 영화를 보고 리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건만 주말 이틀간 지방에 다녀오느라 영화를 못 봤고 결국은 그냥 리뷰를 쓰게 되었다.

서로 아는 사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 한번 나눠본 적 없는 남녀가 어떤 말을 주고 받으면 감정의 교류가 일어날까. ‘그들은 이러이러하게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었답니다’ 라고는 쓰지 못하겠다. 내가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니 여기까지의 소개로도 책 내용이 궁금하다면 읽어보길 추천한다. 대면한 적 없는 사람들이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설정이 억지스럽다고 생각한다면 역시 읽어보길 권한다.

이 소설 속 남녀의 감정에 공감하기 어렵다고 할 독자들도 있겠으나 나는 납득이 되었다. 예전에 지인에게서 목소리(전화 통화)만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연을 들을 당시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처음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여성은 자신이 그에게 반응한 것에 깜짝 놀랐지만 이내 그들은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여기서 놀라운 건 그들의 첫 통화는 일 때문에 연결된 것이었고 전혀 낯모르는 사이였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예전에 들었던 그 이야기가 오버랩 되었고, 그들과 소설 속 편지를 주고 받는 남녀 모두 이해가 되었다. 소설 속 남녀가 쓰는 편지 내용은 영화 <바그다드 카페> 이야기와 자신의 생활, 전배우자, 그리고 테러(혹은 전쟁 같은 일상)에 대한 것들이다. 이 소설의 장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자신의 이야기와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테러, 책이나 작가의 이야기가 이렇게 자연스레 연결되니 말이다. 그리고 같은 사안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나누며 책의 문구나 유명인의 말을 빌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그것은 고도의 은유다. 남자가 자신의 감정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남자가 만약 소호거리에서 다시 만났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가정의 뒤에 소세키의 소설 <마음>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죽기 전에 단 한 사람이라도 믿어보고 죽고 싶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 돼줄 수 있습니까?’

이 편지에 대한 답으로 여자는 이렇게 시작한다. ​​

당신의 편지를 읽고 내내 이 구절이 마음속에 맴돌았어요. “죽기 전에 단 한 사람이라도 믿어보고 싶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할 만큼 과연 운이 나빴던 걸까?


과연 우리는 믿어보고 싶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걸까? 여기서 믿어보고 싶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꾸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며 읽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여자의 편지 내용은 너무나 흔해서 당연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믿는다는 건 나에 대한 그 사람의 정절, 혹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같이 공유하는 그 많은 믿음에 관한 수많은 정의겠지요.

(……)

사랑이란 믿음이라기보다는 그냥 주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가 오면 우산을, 감기 걸리면 감기약을, 따뜻한 이부자리와 먹음직한 빵과 고기를. 이 유물론의 한 가운데서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음을 벗어날 수 없는 우리들 인간의 사랑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사랑하면 뭐든 주려고 한다. 마음보다는 물건을 줄 때 더 뿌듯함을 느끼고, 명품백이나 보석을 받으면 그만큼 사랑받는다고 여긴다. 헌데 이들의 사랑은 어떤가? 아무 것도 주고 받을 수 없는 관계인 이 남녀의 사랑은 어쩜 무의미 그 자체다. 여자가 쓴 저 문장이 품은 역설은 편지로만 사랑을 나누는 둘이 지독한 모순 속에 있음을 방증하고 있다. 그러니 사랑하면 무엇이든 주고 싶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속물적이니 뭐니 해도 말이다.

소설 말미에는 페소아의 <불안의 책>이 여러 번 인용되고 있다. 남자는 이 책을 여자의 편지를 읽듯 아껴서 읽고 있다고 말한다. ​​

<불안의 책>을 펼치니 밑줄을 쳐 놓은 구절 중에 이런 구절이 눈에 띕니다. “나는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도 나처럼 이길 수 없는 전쟁에 깃발도 없이 참전한 군대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내가 지금 딱 그런 기분이네요. 이길 수 없는 전쟁에 깃발도 없이 참전한 군대 속의 탈영병, 이제 나는 군복을 벗고 모하비사막으로 달려가 당신과 함께 ‘바그다드 카페’를 운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문득 이 행복한 꿈이 진짜 현실로 바뀔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저녁입니다.


테러가 만연한 곳에서 탈영병이 된 것만 같은 심정이 든 어느 날, 남자는 그녀와 카페를 함께 하는 꿈으로 현실을 잊는다. 남자는 여자의 손을 꼭 잡아보는 상상을 하고, 그녀를 만나러 한국에 가볼까 마음을 먹기도 하면서 그녀와 함께 하는 일상을 꿈꾼다. 남자는 편지 말미마다 희망을 드러내지만 실천은 한 번도 하지 못한다. 서로의 목소리조차 들어보지 못한 채 둘의 편지는 종료된다. 100세까지 편지를 쓰며 살 수 있을까 예상해본 여자의 기대가 무색하게...



남자는 마지막 편지에서 <불안의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이렇게 마무리한다.​​

“더 좋은 시절의 왕자여. 나는 한때 당신의 공주였고, 우리는 다른 종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했다. 그 기억은 지금도 나를 아프게 한다.”

그 길고 지루하고 끝이 없는 우리들 인생의 불안을 묘사한 ‘불안의 책’ 속에서 나는 많은 위안을 느꼈다는 걸 고백합니다.

(……)

나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아니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한순간도 신을 믿지 않았던 나는 이제야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합니다. 어쩌면 정말 신은 나를 위한 당신의 기도로 인해 존재할지도 모르니까요.



무신론자인 나도 기도를 할 때가 있다. 특정한 어떤 신에게 빌지는 않지만 누군가를 위하는 심정이 클 때는 기도라는 형식을 쓴다. 남자는 신을 믿지 않았으나 마지막 문장에서, ‘나를 위한 당신의 기도로 인해’ 신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당신의 기도’에 방점을 둔 문장이 신의 존재보다 더 중요한 의미인 셈이다.

편지만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힘들다고 본다. 그러나 이 소설 <바그다드 카페에서 우리가 만난다면>에서는 가능했다. 문학, 영화, 음악 등으로 표현하는 사랑의 은유를 읽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

**위 리뷰는 네이버카페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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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의 깃털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82
윤해연 지음 / 비룡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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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비룡소 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윤해연 작가는 그동안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주로 발표해왔다. 이번에 6편의 단편을 모은 단편집 <녀석의 깃털>이 비룡소에서 나왔다. 청소년이 주인공이고 한 편의 분량이 30쪽 정도로 짧지만 주제는 간단치 않다. 출판사의 익숙한 감각을 낯설게 깨우는 여섯 편의 이야기라는 소개처럼 시각, 청각, 후각 같은 감각과 연결되는 몸에서 발견되는 이상한 징후들이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작가는 고단한 세상을 살아야 하는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깃털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어떤 강연에서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자기는 날 수 있다고 사뭇 진지하게 말하던 아이에게 깃털을 주었다.(이 책을 통해) 이 책의 청소년들에게 벌어지는 상황은 일반적이지 않다. 책을 읽는 청소년들이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럴 일이 전혀 없지는 않다. 직접 겪어보지 않았더라도 한번쯤은 나도 이렇다면? 하고 생각해본 적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집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와 열린 결말이 기존 청소년 소설과 차별점이 있다. 내게 특이한 감각이 하나 있다면 어떤 것이 좋을까? 그저 재미로만 상상하기엔 주저하게 된다. 책 속에서처럼 우리 사회는 조금만 다르면 이상한 취급을 하기 때문이다. 개성을 강조하지만 통일성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없어질 줄 알았던 중고생 교복착용이 지속되는 것만 봐도 그러하다.


표제작인 <녀석의 깃털>의 경우 친구의 날갯죽지 아래에 돋아나는 깃털을 일주일에 한 번씩 뽑아준다. 그런데 그것을 스터디카페 화장실에서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남학생 둘이 화장실에 같이 들어갔고 신음소리도 났기 때문에 음란행위를 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는다. 사장에게 신고한 사람에게 따져 묻는다. 우리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 직접 봤냐고? 보진 않아도 예상 가능한 거 아니냐고 더 큰소리친다. 아무리해도 말이 안 통해서 결국은 깃털이 나오는 등을 보여주고 나서야 수긍을 하기에 이른다. 나는 게 꿈이라고 한 깃털이 나던 그 친구는 어느 날 사라진다.


p.61


순간 깨달았다. 녀석은 사라진 게 아니라 꿈을 이룬 것이라고. 이루어지면 더는 꿈이 아니라고 했지만 녀석은 꿈을 이룬 게 분명했다. 세상에서 꿈을 이룬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도 되니까.

나는 정말 믿기로 했다. 녀석이 환한 저 하늘 위로 거대한 날개를 힘차게 펼쳐서 날아간 게 틀림없다고, 그래서 영영 이 지구에 발을 딛지 않고 살게 되었다고 말이다.



이루어질 수도 있는 건 꿈이 아니라 목표라고 했던 친구가 사라졌는데 날아갔을 거라고, 분명 꿈을 이루었을 거라고 예상하는 마지막에선 제발 그랬길! 독자도 같이 기도하게 만든다. 목표든 꿈이든, 우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날갯짓을 하다보면 언젠간 날 수 있을 거라는 꿈을 믿어줄 이가 몇 명이나 될까? 그보다 남자 둘이 화장실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면 게이일거라고 확신하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사고 테두리 안에서 세상을 보고 믿는다. 꿈과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나 실은 우리의 편협한 사고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여섯 번째 손가락><페이머스 양>은 남들이 못 본 것과 못 들은 것에 대한 이야기다. <여섯 번째 손가락>은 손가락이 여섯 개인 2학년 오지수가 1학년 체육시간에 들어와 같이 농구를 한다. 주인공은 오지수의 손가락이 여섯 개이니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경기가 끝난 후 주인공은 분명 보았던 오지수의 여섯 번째 손가락을 다른 아이들은 아무도 못 봤다는 사실! 경기는 졌지만 모두 즐겁게 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왜 그 손가락이 자신에게만 보였을까? 결과에 상관없이 즐기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페이머스 양>에서는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이 공중화장실에서 혼자 출산한 뒤 아이를 방치한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의 당사자 B양은 상담 중에 양의 소리가 들려서 화장실로 갔다고 진술한다. 상담자 박소장은 B양이 출산 후 아기 울음소리가 듣기 싫어서 살해한 것으로 사건을 정리하려고 유도한다. 그러나 B양은 계속 양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부검 결과 아기는 출산 과정에서 사망했고, B양이 직접 죽음에 관여한 바는 없다고 나왔다. 박소장은 결과지를 보고 B가 죄책감 때문에 계속 양의 울음소리를 듣는다고 짐작한다.


이 소설에서는 잊을 만하면 뉴스에 등장하는 10대의 출산과 인터넷 댓글 문제를 같이 다룬다. 짧은 분량 안에 두 가지를 다루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작가는 청소년들이 직접 겪고 고민하는 문제와 사회 문제를 자연스레 연결했다. 이 소설에서도 사건은 영아출산 및 유기 사건인데 기사의 댓글에서 B양이라는 호칭으로 설왕설래하다가 양들의 침묵이라는 영화 얘기로 넘어간다. 급기야 B양의 신상을 털자고 하다가 양이 뭔지 찾아야 한다며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댓글 장면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각 소설들의 마무리는 명쾌하지 않다. 그렇기에 독후 활동을 다양하게 해 볼 수 있다.청소년 독자들이 작가가 되어 결말을 바꾼다든지 뒷이야기를 상상해 보자. 각기 독립된 소설이지만 연작 시리즈가 되도록 등장인물들을 연결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활동이 될 수 있다. 또 작가가 왜 이렇게 결말을 썼을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고 토론거리를 찾아 토론해보는 것도 좋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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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욘더
김장환 지음 / 비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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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년 전 세상을 떠난 아내에게서 나 여기 있어. 사라지지 않았어. 이곳으로 와줄래?”라는 홀로그램 메시지를 받고,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베일에 싸인 공간 욘더로 나아가는 한 남자. 소설은 상실의 슬픔과 절절한 그리움, 다시 만나기 위해 무엇이든 감내하겠다는 용기 등 사랑과 관련된 다양한 감정을 섬세하게 어루만지며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출판사의 <굿바이, 욘더> 소개 중 위 내용이 내 시선을 끌었다. 사랑을 믿지 않는 나는 위와 유사한 소재를 다루는 미디어에 늘 회의적이었다. 사랑이 얼마나 지극하면 죽었는데도 잊지 못하는 걸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지만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만나겠다고?


나는 기대했다.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절절했을지, 작가가 만들어낸 스토리텔링에 적극 동감하겠다는 열린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주인공 홀은 아내 이후에게서 온 메시지를 받고 바이앤바이(가상 현실 기술을 바탕으로 세워진 추모 사이트)에 가서 아내를 만난다. 그러나 홀은 아내로 현현한 아바타와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는 존재감을 인정할 수 없었다. 욘더라는 다른 세상, 아내 이후가 있는 곳으로 간다. 욘더에 간다는 뜻은 그곳에 가 있는 사람이 초청을 해야만 갈 수 있는데 실은 자살을 선택하는 행위이다. 즉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욘더라는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내가 기대했던 애절한 러브스토리는 나오지 않았으나 근미래 유비쿼터스가 상용화된 세상에 쓰인 기술들을 현재와 비교하며 읽는 재미가 있었다. 고래로부터 인간이 꿈꿔온 불멸, 내세, 천국 같은 소재들이 자연스레 기술과 연결되어 감탄했다. 허황되게 느껴지지 않았고 개연성을 따질 구석도 없었다. 이 소설이 2011년에 쓰여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더욱 놀랐다. 그제서야 작가 김장환씨의 이력을 확인했더니 철학 전공자였다. 어릴 때부터 소설, SF 장르문학을 탐독했으며 뉴질랜드의 심심한 환경을 바탕으로 무한한 상상력을 펼쳐낸 소설이 <굿바이, 욘더>이다.


바이앤바이에서 만난 아내 아바타 대신 진짜 아내가 있다는 욘더로 떠나는 주인공에게, 나는 설득되지 못했다. 홀이 이후가 죽은지 2년이 지나도록 못잊는다는 게 지극한 사랑의 표현인지 다른 표현이 더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캐치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욘더에서 아내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홀을 보며 의문이 들었다. 아무 근심 걱정 없이 늘 행복하기만 한 욘더가 천국이라는데 과연 저렇게 지내면 진짜 행복할까? 우리는 하루하루 걱정과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 일상 속에서 찾는 기쁨을 행복이라 여기고 감사한다. 어려움과 결핍, 불안이 없이 행복감만 있는 곳이 천국은 아니다.


결국 이후가 먼저 욘더에서 느끼는 행복감에 의문을 제기한다. 실체 없고 의미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둘은 결정한다. 자신만의 천국을 소거하기로. 이후는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이 부분에서 작가는 독자들이 딴지를 걸 수 없도록 과학기술로 세팅해 놓았다. 미래에 이루어질 과학, 의료기술을 소설 속에서 구현시켰는데 그런 세상이 현실에서 곧 이루어 질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게 했다. 인간은 언제나 꿈을 꾸었다. 아무리 허황된 꿈이어도 이루어져왔다. 현재를 산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미래를 산다. 당장 오늘 저녁 뭐 먹을까부터 무슨 대학에 갈 것이고 졸업을 하면 어디에 취직을 하겠다는 계획은 모두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렇게 미래를 상상하며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을 구호처럼 외치며 살아간다.


상상하는 미래가 이루어질 것임을 알기에 우리는 무한대로 상상한다. 작가는 전반부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는 외상 거래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개인의 삶을 추동하는 것인 반면 진보하는 기술이 가져올 파급에 대해서는 도외시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한 파급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면 파국이 오는 것인데 외상에 외상을 거듭하다 파산하게 될 것이라며 장진호 박사의 입을 빌어 경고한다. 기술의 디스토피아는 기술이 약속했던 것을 배달하지 못할 때가 아니라 전혀 엉뚱한 것을 배달해 왔을 때라고. 어떤 형태일지는 몰라도.


마지막에 이후와 홀이 자신들의 천국을 소거하겠다는 멘트, “이걸 원하지 않아.”는 완벽한 행복이란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기술문명을 거부하겠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욘더로 가려고 자살자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계속 늘어난다. 이것이 기술 발전의 명암이다. 누군가는 적극 수용하고 즐기는 반면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을 거부할 권리도 있다. 이 좋은 걸 왜 누리지 않느냐고 강요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랑을 믿지 않아도 사랑에 목숨 거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궁금해서 이 책을 읽었다. 그러나 사랑보다는 미래사회를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었고 깊이 있는 생각들도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사랑했더라도 죽은 사람은 망각하고, 행복만 있는 세상보다는 매일을 아등바등 살며 가끔 누리는 행복에 감사하는 삶이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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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 - 플뢰르 펠르랭 에세이
플뢰르 펠르랭 지음, 권지현 옮김 / 김영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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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수잔 브링크라는 여성을 다룬 프로그램을 보았을 때의 충격을 기억하고 있다. 영문도 모른 채 피부색이 다른 나라에 입양된 아동의 삶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이후 해외 입양 관련 뉴스나 프로그램을 관심 있게 보아왔다. 한국전쟁으로 고아수출국이 된 우리나라가 세계 경제 10위권인 현재까지도 중국에 이어 고아 수출국 2위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몹시 부끄럽다.


박근혜 정부 당시 프랑스로 입양된 여성(플뢰르 펠르랭)이 문화부장관이 되었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었다. 버릴 때는 언제고 입양된 나라에서 장관이 된 것을 금의환향이라도 한 듯 성공한 한국인이라는 공식에 꿰맞춰 호들갑을 떨어대는 언론에 나는 치를 떨었다. 저 여성은 한국의 이런 식의 대응이 얼마나 얼떨떨할까 싶었다. 좋은 가정에 입양되어 교육을 잘 받았는가보다 정도로 생각했고 그 후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김영사에서 에세이를 냈다고 하기에 서포터즈 서평단 책으로 신청했다. 몇 년 전 뉴스에서 보도된 내용만으로는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고, 무엇보다 그는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낯이 화끈거렸다. 내가 궁금해 했던 게 과연 무엇이었나 하는 물음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다. 나는 얼평하는 사람과 남의 개인사에 시시콜콜 관심을 두는 이들을 싫어한다. 그의 개인사를 알고 싶어한 나는 내가 싫어한 사람들과 뭐가 다른가, 혹시 그의 치부 같은 걸 확인하려는 관음증적 심리가 있었던 게 아닌가...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플뢰르 펠르랭2013년 한국 방문 당시 한국인들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던 것들을 풀어낸 에세이이다. 그는 생후 6개월에 프랑스에 입양되어 어떻게 성장하여 정치인, 사업가로 활동했는지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은 그간 해외입양아 스토리에서 자주 다루던 친부모 찾기는 아니다. 첫 방한 당시 당신은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프랑스인이라고 답했던 이유를 이 책을 통해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 때의 답변에 대해, 혹은 플뢰르 펠르랭이라는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영유아기 부모의 양육태도와 건강하고 적정한 부모의 교육열이 아이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확인했다. 입양아인지 아닌지의 차이와는 상관없다. 친부모가 학대를 일삼는 경우도 있고, 입양한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내는 양부모도 많다. 그러나 해외입양의 경우 부모와는 다른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인 자신의 모습 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한다. 펠르랭은 성장하면서 자신이 프랑스인이 아니라고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입양에 대해 부정적 시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좋은 학교를 졸업했고 정부에서 일을 했다.


그런데 이혼을 하면서 딸에게서 친부를 빼앗았다는 생각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학교생활에서 도드라지지 않도록 행동하고 모범적인 학생이 되고자 했던 노력들이 자신의 상처를 부인하려고 했던 행동임을 그때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p.33


나는 그것이 상처였음을 항상 부인했기 때문에 상처를 의식하지 못한 채 아프기만 했다.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기만 하는 사람에게 공감하기 어려운 나로서는 그런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상처를 치유하려는 생각은 더더욱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친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는 아무리 친가족처럼 아껴주는 양부모 밑에서 커도 다른 성인들과 똑같이 자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의식하지 못했던 친부모에 대한 수치심, 양부모를 사랑하면서도 갚을 수 없는 채무의식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기보다는 그 한계를 이겨내려고 노력했다. 학교생활에서 특별히 차별이나 어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공부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사회에 나와 그는 게이샤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고, 문화부장관 당시 했던 인터뷰가 악의적인 편집으로 왜곡 보도되기도 했다. 정치권에서 나와 벤처사업을 시작하면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독자들에게 당부했다. 스스로 만든 내면의 한계가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 수 있으니 경계의 일부라도 깨도록 노력하길 바란다고.


이 책으로 프랑스의 교육제도와 사회 문화적 분위기, 정치권에 대해서 알 수 있다. 물론 플뢰르 펠르랭이라는 인물을 관통하는 일면이었지만 한국 출신 입양아였기에 겪을 수밖에 없었던 독특성이 있다. 해외입양아를 다루는 여느 미디어와 이 책이 차별되는 지점이다.

 


 

**위 리뷰는 김영사 서포터즈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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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인생
저우다신 지음, 홍민경 옮김 / 책과이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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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작가 저우다신의 소설 <우아한 인생>450쪽이 넘는데도 단숨에 읽어 내렸다. 노년을 위한 지침서 같아서 이런저런 정보를 취할 수 있었고, 너무나 소설적이라 현실에서 일어날 리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소설 맞다. 소설이란 걸 알고 읽으면서도 등장인물들의 상황에 설마 이럴 수가 있을까 기막혀 했다. 그건 작가의 구성능력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70대 노인의 간병인으로 들어간 20대 여성의 체험을 강연하는 형식이다. 초반에는 실버타운과 간병 로봇 홍보에 이어 노년기의 특징이 서술되어 실버타운 홍보영상을 보는 것 같았다. 노화 방지나 장수를 위한 각종 제품 소개가 이어져마치 실버타운에 들어간 노인이 되어 그런 제품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간병인 중샤오양이 나와 강연을 시작하는데 자신이 겪었던 일을 술회한다.

 

20대 여성 중샤오양이 70대 남성 샤오청산의 간병인으로 일하며 쓴 일지 같은 내용 속에 의학 관련 전문지식과 중국의 장수 지역, 대증요법들을 섞은 구성 방식 때문에 소설보다는 실제 경험담을 읽고 있는 느낌을 받게 했다. 우리는 이미 노년이거나 노년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제 아무리 젊었을 때 전문직으로 활약했다 하더라도 나이가 들면 판단력이 흐려진다. 소설 속 주인공 노인 샤오청산은 판사 출신임에도 노인들을 노린 사기에 번번이 당한다. 사기꾼들은 역사나 통계, 의학 지식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하여 꾀었다. 불로초를 찾는 진시황이 저랬을까 싶을 만큼 홀랑홀랑 넘어갔다. 심신이 허약해지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린다지만 주인공은 장수를 위해 맹목적이었다.

 

작가는 주인공 샤오청산을 통해 70대에서 80대까지의 나이에 노화로 인해 나타나는 변화와 발생 가능한 질병들을 보여준다. 그래서 노년기에 접어든 이들이 읽으면 자신의 상황에 깊이 감정이입하여 읽게 될 것이다. 곧 자신에게 닥칠 상황들이므로 주의 깊게 읽으며 도움이 될 정보를 얻을 수 있겠다. 노년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자신에게 다가올 일들이고 부모는 이미 노인일 것이므로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엄마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아버지께서는 생활의 불편함이나 질병에 대해 그리 표현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엄마는 여러 질환으로 자주 병원 신세를 졌고 현재도 각종 약들을 많이 복용중이다. 현재 자신의 상태가 몹시 불만스럽다. 양쪽 무릎 모두 인공관절 수술을 했음에도 통증이 있고 보행에 불편하다. 거기에 심장 석회화 때문에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도 별 무리없이 잘 걸어다니는 이들을 보면 화가 나는 모양이다. 전화 통화할 때마다 나는 왜 이 모양이냐며, 왜 이러고 사냐며, 팍 죽으면 좋겠다고 푸념을 한다.

 

그럴 때마다 마음 편하게 먹으시라고, 이렇게 살아 있는 게 좋은 거 아니겠냐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사실 지겹다. 나는 나중에 애들에게 저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고, 나이가 들어도 뭔가 몰두해서 할 일이 있어야겠다고 뼈져리게 느꼈다. 지금 하는 여러 가지들 중에 계속 하고 싶은 건 서평단 활동이다. 과연 노년이 되어서까지 할 수 있을까? 갑자기 든 생각,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늙었다고 출판사에서 신간 서평단으로 뽑아주지 않으면 내가 직접 사서 읽고 쓰면 될 일! 하고 싶은 일을 지속할 수 있다면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소설 후반부에서처럼 샤오청산에게 확연히 나타나는 노인성 질환은 거부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무래도 가장 두려운 것은 치매다. 몇 년 전 읽은 책 <조력살인>에서는 말기암이나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이가 자신의 존엄사를 선택할 수 있었다. 물론 스위스에 가야 한다. 앞으로 우리나라에도 존엄사법이 생겨나면 좋겠다. 치매에 걸려 자신을 케어할 수 없어 요양병원에 들어가면 그곳에서의 삶이 얼마나 피폐할까. 자신의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한다.

 

소설에서 샤오청산은 자살을 선택한다. 뇌출혈 수술 후에도, 청각과 시각이 사라져갈 때도, 버텨왔으나 자신의 기억이 점점 사라져가는 상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10년 넘게 가족처럼 지내온 중샤오양은 그의 자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어떻게든 치매를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 자료를 찾고 약을 찾다가 도교사원에 가서 치료법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책 후반부의 이 대목에서 독자들의 의견이 찬반으로 갈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 내용을 밝히려니 상당한 스포를 하는 것 같아서 못하겠다. ‘사랑이라는 치료법이 무엇일지, 그래서 과연 치매가 치료되었을지 예상해보는 재미를 주고 싶다. 늙고 병들면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게 되는데 그간 자신이 살던대로 똑같으리라는 건 욕심이다. 노화와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곤란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몸의 상태와 마음의 간극이 먼 사람일수록 우아하지 못한 일들이 생길 것이다.

 

책 제목처럼 누구나 우아하게 살고 싶을 것이다. 과연 <우아한 인생>이란 어떤 인생일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자신의 우아한 모습을 그려보자. 80대의 나를 상상해보았다. 외모가 단정하고 말과 행동이 구질구질하지 않으면 좋겠다. 질병이 있더라도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웃으면서 책 읽고 서평쓰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위 리뷰는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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