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끝이 바다에 닿으면
하승민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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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고양이 루키가 내 주위를 맴돈다. 오전에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오랜만에 봐서일까. 내 옆에서 냥냥거리다가 무릎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내 무릎이 그리 편하지 않아서 그런지 금방 내려가 버린다. 루키에게 말을 걸어보지만 특별히 대답하진 않았다.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은 늘 이렇다. 고양이들이 냥냥거릴 때마다 내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항상 궁금했다. 동물의 감정을 읽는다는 사람의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믿기 어려웠다. 눈물까지 흘리니 더욱 그랬다. 사기꾼 같았다. 그럼에도 동물의 언어를 인간이 알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그들의 감정을 읽는다면 정말 육식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승민 작가의 신작 소설 <발끝이 바다에 닿으면>에는 고래가 내는 소리를 인간의 언어로 변환시키는 커뮤니케이터라는 기계가 나온다. 완성체는 아니고 주인공 성원이 아내 승희의 연구를 이어 계속하는 와중에 고래 ‘이드’를 만나 커뮤니케이터로 번역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나처럼 반려동물과 소통하고 싶어서 기계를 만들고 실험한다는 내용은 아니다. 이번 소설은 심오했다. 작가의 데뷔작이 아주 강렬한 장르물이었기에 이 소설도 미스터리하고 하드코어한 작품일 것으로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순전히 내 오해였다. 신간 소개를 대충 읽었던 것이다. 내 맘대로 미스터리한 내용일 거라 기대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분량의 3분의 1이 지나도록 등장인물 소개만 이어지는 게 아닌가. 다시 작품 소개를 읽어보았고 명백한 내 오독임을 확인했다. 이번 소설은 SF장르다. 크게 세 덩어리로 나뉘는데 각기 다른 일을 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따로 진행되다가 소설의 절반 즈음에 이르러서야 접점이 생기고 비로소 몰입을 돕는다. 소설 중반 이후부터 돌마가 무사히 히말라야를 넘고 이드와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하게 만드는 쫀쫀한 구성이 펼쳐진다.

이 책으로 작가를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면 빌드업을 제법 길게 한 후에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하승민 작가의 스타일이라 여길 것이고, 줄거리와 작품 소개를 자세히 읽은 독자라면 나처럼 오해하지 않고 천천히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성원은 과학자이며 울성이라는 동해안의 어느 가상도시에서 일본학자 유코, 미국학자 퍼시와 함께 고래 커뮤니케이션 연구를 위해 모였다. 가상도시 울성은 마치 김정한의 소설 사하촌처럼 대대로 위정자들의 놀음터로 이용만 당한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울분에 차있다. 늘 마음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어서 어떤 계기만 주어진다면 화르르 타오를 것 같은 상태다. 그러한 인물로 그려지는 사람이 뱃사람 석기이고 해풍호로 조업을 하고 있다. 울성 앞바다에서 고래를 두고 전혀 다른 시각으로 대치중인 두 그룹이 해풍호와 유자호다.

또 다른 그룹으로는 목숨을 걸고 전 세계로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다니는 현지다. 그는 히말라야를 넘는 티베트 사람들을 찍으려고 가이드 쿠날과 함께 인도에서 티베트로 이동 중이다. 선배 성원과 종종 통화를 하는데 티베트에 가기 전에 통화를 했기 때문에 성원은 고래 이드가 발화한 티베트어의 단어 의미를 현지에게 물어봤고 현지는 이드가 언급한 소녀 돌마를 기적처럼 만나게 된다. 울성에서 직선거리 2500km에 살고 있는 돌마는 이드와 소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서평을 쓰면서 줄거리를 길게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이번 소설은 등장인물 소개부터 길다. 어떤 인물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소개하지 않은 채 줄거리만 간단 소개하기엔 힘들어서 이렇게 길어져버렸다.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욕심을 좀 부린 것 같다. 종을 넘어서는 소통과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짧은 생을 가열차게 살았던 승희가 뿜어낸 언어에 대한 사고를 성원이 이드와 대화를 하며 깨닫는 계기가 된다. 마지막에 성원은 임사체험과 유사한 방식으로 승희를 만나 그녀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눈다. 이 부분이 가장 SF적이다.

한편 중국의 티베트 탄압과 인권문제(우리나라 현대사 포함)를 현지와 티베트 소녀 돌마를 통해 펼쳐낸다. 다루기 민감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다큐 영상을 찍는 현지의 눈을 통해 그곳의 혹독한 자연과 정치적으로 억눌려있는 첨예한 분위기를 표현했다. 동물의 언어를 번역해낼 수 있는 인공지능의 개발도 물론이겠으나 티베트 문제는 심층 조사가 힘들었을 것 같다. 울성이라는 가상도시는 장생포구가 있는 울산이 연상되는데 석기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인간 부류는 지금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이 책의 주제는 독자마다 다르게 찾을 수 있다. 등장인물 분류를 셋으로 했듯 각 부류의 인물들이 하는 말이 다르기 때문이다. 독자가 책을 읽는 시점에 신경 쓰고 있는 사안이 무엇이냐에 따라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이 있을 것이다. 나는 성원과 승희의 관계와 대화에 집중해서 읽었다. 승희의 몸은 없지만 성원은 그녀의 언어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가 연구하는 것이 그녀가 하던 것에서 이어졌기도 하고 안타깝게도 너무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12살, 처음 봤을 때부터 승희는 반짝반짝 빛났다. 대학생이 되어 다시 만났을 때도 여전했고 “다 덤비라고 해”라며 거침이 없었으며 자신의 연구에 자부심이 있었다.

아래 인용은 모두 승희의 말이다.

p.269

승희는 언어가 모든 생명을 연결하는 도구라고 했다. 육천 개로 쪼개진 언어의 기원은 하나일 거라고. 생명체에 내재된 언어 창조 체계를 이해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세상을 이해하고 싶다고 했다. 그 꿈을 위한 커뮤니케이터였다.

p.337

언어는 창조야. 언어는 사고의 기준이야. 스스로를 정화하는 주문이면서 상대를 조종하고 상처 입히는 무기이기도 해. 의미의 집합이고 공동체를 구성하는 체계야. 언어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도구야. 기억해 인간은 언어야. 살아있는 모든 건 언어야. 우리는 전체의 부분이고 언어는 세계의 파편이야. 우리는 언어야.

p.347

난 혼자가 아니야. 많은 사람과 함께 지내. 여기서도 웃고, 여기서도 농담을 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세계를 탐험해 하지만 네 몸은 아직 바다에 있어. 돌아가.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 옳은 일을 해. 지지마. 하지만 즐겨. 웃고 울어. 감정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있는 힘껏, 살아. 나는 나를 부르는 곳에 있어.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나는 있어. 네가 부르면 내가 있을 거야. 발끝이 바다에 닿으면 나는 널 만날 거야.

승희의 무덤앞에서 성원은 장인과 만난다. 그녀의 기일이었다. 성원은 승희를 만났던 일을 장인에게 들려준다. 사내 둘은 국밥을 앞에 두고 술잔을 기울이며 꺼이꺼이 울 수밖에 없었다.

p.371

사람의 마음에도 해일이 일고 지진이 난다. 태풍이 불고 땅이 뒤집어진다. 성원은 오랫동안 그 사실을 잊고 살았다. 연구만 생각하느라, 사람이 아닌 것들만 생각하느라 사람을 잊고 지냈다. 이제 겨우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됐는데 승희는 세상에 없고 장인은 울고 있었다. 뭘 어찌할지 몰라 성원은 그저 무릎 위에 얌전히 손을 올렸다. 한 교수가 썩은 것들을 게워 낼 때까지, 문드러진 상처에 새 살이 돋을 때까지 조금씩 무너지는 것을 지켜만 봤다.

그 바다에서 성원은 승희와 만나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또 다른 사람, 장인에게 일련의 이야기들을 들려줌으로써 그들은 비로소 승희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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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미쳐 있는 - 실비아 플라스에서 리베카 솔닛까지, 미국 여성 작가들과 페미니즘의 상상력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류경희 옮김 / 북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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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문학-정치를 잇는 가장 중요한 지도”라는 출판사 책 소개 문구는 <여전히 미쳐있는>을 소개하는 가장 적확한 표현이다. 그 지도 위에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페미니즘 관련 서적을 찾는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195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페미니즘과 정치, 글쓰기를 인물 위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인물들이 언급되었는데 나는 ‘실비아 플라스’와 ‘토니 모리슨’을 알게 됐다.


실비아 플라스는 1932년생인데 31세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7세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4세에 영국 시인 테드 휴즈와 결혼했는데 결혼생활은 힘들었다. 남편은 오랫동안 시인으로 활동했으나 아내 사후의 행동들은 자식들과 매스컴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녀의 짧았던 삶이 어떠했는지 궁금했고 그녀의 작품들을 직접 읽어보고 싶어졌다.


토니 모리슨은 1931년에 태어나 2019년에 사망했다. 1993년에 흑인 여성 미국인 중에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평생 소설과 아동문학 비평에 이르는 왕성한 활동을 했다. 1970년 데뷔작 <가장 푸른 눈>과 오프라 윈프리 주연으로 영화화된 소설 <빌러비드>를 읽어보고 싶다.


1장 20세기 중반의 성별 분화
p.73~74
신문의 구인 광고는 성별을 특정했고, 여성이 구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일자리는 지위가 낮고 저임금에 서비스업이 많았다. 비서, 접수원, 전화 교환원, 판매원이 그 예다. 운이 조금 더 좋은 여성은 교사나 간호사 같은 '핑크 칼라' 직종에 종사했다. 금융기관에서도 독신, 이혼, 과부 여성은 금융 신용을 확보할 수없었다. 우리가 지금 '재생산 자유'라고 부르는 것은 존재하지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위 주기 피임법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었지만 큰 효과는 볼 수 없는 방법인지라 적잖은 아기들이 태어났고, 뒷골목의 불법 낙태 시술로 적잖은 여성들이 목숨을 잃었다.





5장 가부장제에 저항하다

p.239

1970년대에 가장 폭넓게 읽힌 소설 중 하나는 미국의 전통적 여성성을 비판한 작품으로, 그 여성성의 모순은 우울증에 걸린 주인공/서술자를 광기로 (그리고 자살 시도로) 몰아간다. 실비아 플라스의 『벨자』는 원래 1963년 런던에서 빅토리아 루커스라는 필명으로 출간되었다. 저자가 자살하기 채 한 달도 안남은 시점이었다. 그녀가 죽고 난 후 그녀의 남편도 그녀의 어머니도 영국에서 그녀의 이름으로 이 작품이 발표되도록 허락하는 것을 주저했으며, 미국에서의 출간에 대해서는 한층 더 불안해했다. 이 소설은 마침내 1971년 미국에서 출간되면서 엇갈린 평가를 받거나 열혈 독자들을 감동시켰다. 이들 열혈 독자 다수는 이 작품의 플롯이 플라스 자신의 애틋한 개인사를 따르고 있고 그녀의 불길한 미래를 예언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詩 - 그 시절에 



사람들은 말하리라, 그 시절에, 우리는 놓쳐버렸다고
우리와 당신들이라는 말의 의미를
우리는 우리 자신이 나라는 존재로 축소되었다는 걸 깨달았지
그리고 모든 것이 바보 같고, 아이러니하고, 끔찍하게 변했어
우리는 개인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었어
그래, 그랬어, 그게 유일한 삶이었지
우리가 증언할 수 있던 삶

하지만 역사의 거대한 검은 새들은 날카롭게 울며 곤두박질쳤어
우리 개개인의 날씨 속으로
그 새들은 어딘가 다른 곳으로 머리를 향했지만 부리와 날개 끝은 돌진했어
해안가를 따라, 안개 조각구름들을 뚫고
우리가 나라고 말하면서, 서 있는 그 곳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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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에게
최현우 지음, 이윤희 그림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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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던 어느날 지하주차장 버려진 박스 속에서 발견한 강아지 한마리소년은 그냥 나왔지만 강아지가 소년을 따라왔습니다.

강아지가 소년을 선택한 것이지요...

 


소년은 강아지를 품에 안아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강아지는 코코가 되었습니다. 마치 그 이름에 꼭 맞는 강아지가 올 것이 정해져 있었던 듯이요.

 



이제 소년과 강아지는 모든 일상을 함께 합니다.

동네 구석구석의 냄새를 맞으며,

온 동네 사람들에게 코코라 불리며,

그렇게 그렇게 코코와 소년은 자랐고, 사랑했고, 행복했습니다.

너 없인 아무 것도 아닌듯이요.

 

 



소년이 살던 동네는 재개발에 들어가고,

이제 정든 이 동네를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코코가 킁킁거리며 주워온 병뚜껑까지 챙깁니다.

 

"다 잘 챙겼지? 가자!"

 


이삿짐 차는 출발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코코가 집으로 다시 뛰어들어갑니다.

코코가 챙겨나온 건 무엇이었을까요?​​

 



뒷 면지 두 페이지에는 코코에게 쓴 편지 같기도 시 같기도 한 이 그림책의 텍스트가 인쇄되어 있습니다. 그림의 따스함을 만끽하고 이 텍스트를 시처럼 가만가만 소리내어 읽어보았습니다. 마지막에 코코가 입에 물고 온 것을 표현한 부분에선 가슴 먹먹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작은 영혼이 내게 심장을 포개어 주려고 달려오는 모습을 보며 어찌 가슴 벅차지 않을까요?

 


많은 독자들은 이 그림책 장면장면 마다 제 강아지와의 시간이 겹쳐져서 그저 행복한 눈이 될 겁니다. 만약 무지개 다릴 건너갔다면 눈물 훔칠지도 모르겠고요. 저처럼 개와 함께 산책하고 싶은 이들은 마냥 미소짓게 되겠지요. 더없이 따스하고 예쁜 책입니다.

 

이 책의 제목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늘 궁금해 

너는 나를 뭐라고 부르는지 

네가 골라 준 나의 진짜 이름은

 


흔히 불리는, 아주 쉬운, 킁킁거리기 좋아하는 강아지에게 맞춤한 이름으로, 소년은 코코라 불렀습니다. 소년은 궁금했지요. 코코는 나를 뭐라고 부를까?

 

아마도 코코는 자신이 가장 많이 들었던 말, 바로 그 이름으로 소년을 불렀을 겁니다. 소년도 바랐을 겁니다. 어쩌면 이렇게 말했을지도요...

 

"CALL ME BY YOUR NAME!"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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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골드 마음 세탁소
윤정은 지음 / 북로망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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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금잔화라 불리는 메리골드의 꽃말은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다. 어쩌면 제목이 다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꽃말을 아는 독자가 많지 않을 것이니 세탁소의 이름이 왜 메리골드일지 궁금증을 유발한다.


메리골드라는 동네에 마음세탁소를 개업한 소녀, 아니 백만번 다시 태어난 소녀 지은이 사람들 마음의 얼룩을 제거해 주는 이야기다. 사노 요코의 <100만 번 산 고양이>를 연상케했다. 이 세탁소에 오는 인물들은 요즘 젊은이들의 어려움을 표방한다고 할 수 있다. 젊은 독자층을 위한 설정으로 보인다. 대학 시절 신인 영화상을 받은 후 새 작품을 하나도 만들지 못하고 있는 재하, 연인의 배신으로 힘든 연희, 인플루언서지만 가족들 때문에 괴로운 은별 등등.


나이든 여성 독자를 위한 인물도 있다. 재하의 모친 연자인데 역시 나는 그녀에게 가장 마음이 쓰였다. 연자가 유부남에게 속아 임신을 하게 된 이야기는 전반부에서 소개되었고, 후반부에 마음세탁소에서 따뜻한 위로 차를 마시며 지우고 싶은 마음의 얼룩을 지은에게 이야기한다. 얼룩은 하나만 지울 수 있다고 어떤 얼룩을 지우겠냐고 지은이 연자에게 물었다. 이에 연자는, 자신의 아픔이나 불행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알겠다고, 모두가 다 아픔을 가지고 살더라고, 불행하다 느꼈던 상처를 지우고 싶던 때도 있었지만 이젠 그 불행을 지우고 싶지 않다고. 대신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인생 싫어하지 않아요. 전엔 나마저 내 인생 싫어하면 너무 안쓰러워. 좋아하려 애썼는데, 이젠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좋아졌어요. 좋다고 생각해보면 내 인생이 너무 예뻐 보여요. 그래도 아들이 엄마 위해서 선물 주고 싶다니까 받을게요. 지우지는 않을 건데, 떠올릴 때 덜 아프게 주름만 조금 다려주세요.”


지은은 다린 옷을 돌려주며 다시 주름이 생길 거라 말했고, 연자는 주름도 이쁜 것도 모두 자신의 삶이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살아 있는 한 모든 얼룩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좋은 생각만 하기에도 인생이 짧음을 안다는 연자의 생각은 흔하디흔한 표현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절감하는 말이기도 하다.


책의 마지막, 지은이 버스를 타보고 해인과 나누는 말은 내가 생각한 인생이 숙제의 연속이라는 것과 비슷했다.


사는 일이 때론 매번 산을 넘는 거 같잖아요. 이 산만 넘으면 편안해질 것 같은데 다시 산을 만나게 되잖아요.”


넘어야 하는 산, 풀어야 하는 숙제들은 한 인간이 죽기 전까지 계속 된다. 그것의 결과로 남은 얼룩이 고울 리 만은 없다. 허나 그 얼룩과 주름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무늬가 되고 그 결들이 쌓이면 우리가 부르는 인문이 되는 것이다. 리뷰를 쓰면서 이렇게 내 생각이 정리된 것이 나에겐 글쓰기에 도움이 된 책이었다.



**위 리뷰는 전승환 작가의 인스타그램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은 책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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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거나 죽이거나 - 나의 세렝게티
허철웅 지음 / 가디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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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물 다큐멘터리를 좋아한다. “동물의 왕국을 즐겨보는 당신은 아재!”라고 놀려도 어쩔 수 없다. 감성도 나이도 벌써부터 아저씨 반열에 올랐으니까. 극구 부인해봤자 강조하는 꼴이 될 터이니 빠른 인정이 답이다. 약육강식의 처절한 현장을 보고 있는 가장의 뒷모습은 이제는 퇴물이 되어버린 수사자의 추레한 갈기와 비슷하다는 연민어린 표현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들은 꾸며낸 드라마보다 동물 다큐에 진정 공감한다고도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동물 다큐를 즐겨봤다. 동물들의 피 튀기는 생존이 자극적이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한데 실은 다른 궁금증이 있었다. 지엽적인 것에 관심이 많아서 그랬는지 다큐를 보면서 항상 궁금했다. ‘어떻게 저렇게 가까이서 찍을 수 있지?’ ‘동물들은 배우가 아닌데 어쩜 저렇게 생생하게 연기하는 것 같지?’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어른이 되면서 그런 의문들은 하나씩 해결되었고 관심은 다른 쪽으로 이동했다. 동물들의 독특한 생존 방식이나 의사 소통법, 인간과 동물의 관계 등등.


허철웅의 소설 <죽거나 죽이거나:나의 세렝게티>는 제목과 표지에서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이 연상시킨다. 기존에 불후의 명작으로 불리는 작품이 있는데 비슷한 느낌의 소설을 내다니 대단한 자신감이구나 싶었다. 출판사의 책 소개를 보니 작가가 27년간 매달린 끝에 이 소설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특이한 작가의 이력이 소설 속에 녹아들었을 것 같아 기대되었다. 우려가 없는 건 아니었다. 생생한 동영상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다. 아기 사자가 늠름하게 자라 아빠의 뒤를 잇는다는 애니메이션 줄거리는 충분히 감동적이다. 리얼 생존기나 아기 사자의 귀욤미, 거기에 귀에 익은 뮤지컬 넘버까지, 과연 넘어설 수 있을까? 작가와 아무 관계가 아님에도 걱정이 슬몃 고개를 들었다.


먼저 읽어본 사람으로서 이 책을 추천하겠다. 어떤 다큐보다 생생하고 박진감 있다. 책장을 펼치면 단숨에 탄자니아 평원 어딘가로 데려갈 것이다. 세렝게티 초원의 내음이 코끝을 스칠 것이고, 킬리만자로 산을 헉헉거리며 오르고 있을 것이다. 1인칭 서술자인 어린 사자에게 스르르 감정이입하게 된다. 용맹한 아버지의 사냥법을 배우는 한편 그들의 죽음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아야만 한다. 물소와 하이에나의 숨통을 끊어야 내가 살 수 있고 가족을 지킬 수 있다.


p.164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머리를 흔들고 나서 나는 먹는 일에 집중했다. 녀석의 부드러운 뱃가죽을 물어 당기자 힘없이 뱃구레가 터지며 주르륵, 창자가 흘러나왔다. 나는 주둥이를 깊숙이 들이밀어 부드러운 간을 뜯어냈다. 입안 가득 진득한 핏물이 차오르며 그동안의 갈증을 순식간에 풀어주었다. 이 맛, 내가 살아있음을 각성시키는 이 환장할 맛이야말로 현실인 것이다. 먹잇감을 살피고, 그것들이 우는 소리와 바스락거리는 움직임을 듣고, 바람에 실려오는 생명의 냄새를 맡고, 발톱과 이빨로 목숨을 취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존재하는 모든 증거이다. 이것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먹는 행위의 적나라함, 부모와 자연 안에서 살아있다는 벅차오름, 죽음을 기껍게 받아들이는 눈망울은 생과 사를 온전히 몸으로 행하는 것이다. 세렝게티의 사자나 물소와 우리 인간이 그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가. 삶과 죽음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 스마트폰 속에서만 소통하며 멀티버스와 증강현실의 시대에 내 몸과 내 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이 소설을 그저 활자로 만나는 동물 다큐라는 범주 안에 가두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들이 온몸으로 묻는다. 당신들은 몸과 마음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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