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필요한 순간 - 삶의 의미를 되찾는 10가지 생각
스벤 브링크만 지음, 강경이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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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심리학자 스벤 브링크만의 책 <철학이 필요한 순간>이 다산초당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덴마크 공영방송 DR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진행했던 철학 강의 시리즈 의미 있는 삶을 정리한 것이다. 작가는 서문에서 영화감독 우디 앨런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우디 앨런은 삶을 의미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작가의 강의 제목과 이 책의 부제 삶의 의미를 되찾는 10가지 생각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미디어에서 삶의 의미를 다루는 내용을 쉽게 마주치게 되는데 작가는 삶의 의미를 이 책에서 이렇게 정리하고자 한다.


"저는 삶의 의미가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얻기 위한 도구적인 일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일과 그 자체를 위해 몰두하는 활동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삶에서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것,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제가 이 강의를 통해 다루려는 태도 또는 관점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 10명의 철학자를 데려온다.

 

 

 

 

10회에 걸친 강의를 통해 심리학이 너무 개인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과 도구화 현상에 한몫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10명의 철학자들의 이론을 토대로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선을 추구하는 것, 나아가 우리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할 덕에 대해 이야기한다.


10강 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깊었던 강의를 소개하고자 한다.


2강은 칸트가 말하는 존엄성이다.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수단이 될 수 없다고 칸트가 주장한 것은 보통 잘 알고 있다. 작가도 이렇게 축약한다.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특정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한 수단으로 취급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은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그 자체로 목적이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입니다. 칸트가 다소 난해하고 형식주의적인 방식으로 쓴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이성적 존재(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가 당신의 도덕법칙 안에서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p. 85


우리는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서 살고 싶지만 사회속에서 그렇지 못한 취급을 수시로 당하며 살기에 칸트의 말은 너무나 이론적인 말로 들릴 뿐이다. 예컨대 학생은 성적으로 등급이 매겨지며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최근에는 교육부라는 이름으로 환원되었지만 한 때 교육부는 교육인적자원부였다. 국민을 교육시켜 인적 자원으로 사용하겠다는, 한마디로 인간을 도구로 취급하겠다는 것이 국가의 사상이다. 물론 부처의 이름이 바뀌었다고 해서 국민을 자원으로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본은 이미 회사의 직원들을 소모품으로 취급한지 오래이고. 특히 우리나라는 IMF체제 이후 자본과 국가가 개인을 수단화하여 물건 사용하듯 한지도 20년이 넘었다. 그 폐해로, 자원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을 때 우리 스스로가 목숨을 버리는 사태를 심심찮게 보고 있다. 성적이 떨어진 청소년도,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게 된 중장년층도, 스스로의 존엄을 상실했다 느끼는 노년층등등, 우리나라 자살률이 세계 1위인 것이 이것을 방증하고 있다. 이런 시스템 안에서 칸트의 말은 너무나 이상적인 이론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칸트의 인본주의적 생각을 오늘날 되살릴 수 있도록 정치적 사회적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칸트가 말하는 존엄성이 말 그대로 지켜지는 사회가 언제쯤 올 수 있으려나 한숨지어졌다.


9강 카뮈의 자유에서는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


"자유는 특권이 아니라 책임으로 이루어진다."


카뮈는 자유를 구성하는 것이 책임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다. 자유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때가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모든 선택을 자유롭게 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고, 특히나 요즘엔 소확행이라는 말로 작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며 사는 것을 행복한 삶이라고 하니 그렇다고들 여긴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너무나 제한적 자유가 아닌가 말이다. 그 제한 속에서 아주 소소하더라도 뭔가를 이루거나 가지면 그것만으로도 행복아니냐는 말은 그 제한성 안에 더 가두는 미사여구일 뿐이 아닌가.


카뮈의 주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우리가 늘 마음 내키는 일만 한다면 오히려 동물처럼 욕망의 노예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자유란 욕망대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추구할 가치가 없는 욕망이라면 스스로 억압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의무에 대한 성찰만 하는 것도 곤란하다. 둘 다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된다고 역설한다. 두 왜곡된 자유를 넘어서자고 말한다. 작가는 이사야 벌린이라는 철학자의 <자유의 두 개념>을 빌어와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를 설명한다. 벌린에 의하면 소극적 자유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방해 받지 않고 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정작 우리가 원하는 것을 누가 결정하는지를 고려하지 않으므로 우리의 욕망이 조장되거나 주입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적극적 자유란 무언가를 향한 자유와 관련이 있는데 누가 우리를 통제하는지, 우리는 무엇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 깊이 성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자기 통제라 부르는데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이 될 때 비로소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유는 우리가 어떤 공동체의 일부로서 존재할 때 가능하다. 이것은 결국 책임과 연결되는데 인간이라면 누구나 적극적 자유를 추구할 수 있게끔 길러줄 건강한 공동체를 가꾸고 돌볼 책임이 있는 것이다. 즉 자유와 책임은 서로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에게 자유가 없다면 의무를 실행할 책임도 없다.


내가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건강한 공동체에 기여할 책임감도 있다는 것이고 개개인의 존엄성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에 개인의 역할이 지대한 것이다. 즉 개인을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존엄한 존재로 여기는 개개인이 공동체의 구성원이므로 자신의 존엄과 자유를 위해 책임 있는 행동을 할 때 나아가 공동체 구성원의 존엄과 자유도 지켜질 것이라는 결론에 당도했다.


그렇다면 작가가 이야기하는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좋은 삶이란 행복이 아니라 의미에 달려있다고 했다.

저는 많은 사람이 경험된 삶보다는 진짜 삶을, 그러니까 온갖 불확실성과 고난을 겪을 수 있지만 동시에 의미있는 활동도 할 수 있는 삶을 선택하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행복을 최대한 많이 얻는 삶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사람들과의 복잡다단한 진짜 관계 속에서 말이지요. 삶의 의미는 경험만으로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의미 있는 삶은 오직 우리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진 활동에 참여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p. 255~257


"행복이란 것이 단순한 쾌락만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삶에서 나온다고 한 작가의 주장을 정리해 보았다. 어쩌면 더 안갯 속이란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고,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삶은 무엇일지 고민해 보는 시간이 될 수도 있겠다. 나는 경험만으로 의미를 얻을 수 없을 거란 말에 공감했다. 직접 경험에는 제약이 많아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최대한 많은 간접경험을 함으로써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 내 생활에 작가는 물음표를 던졌다. 물음표가 느낌표가 되면 의미를 찾은 것이 될까? 나는 지금 수많은 물음표 속을 헤매고 있다. 지금이 바로 철학이 필요한 순간이다.

 

 

** 다산북스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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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하고 게으르게
문소영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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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소영 작가는 미술작품을 가지고 예술 분야는 물론 사회, 문화 전반에 거쳐 광대한 지식을 뽐내고 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부럽다를 넘어 질투가 난다. 서울대 경제학과 석사까지 했는데, 다시 홍익대 예술대학에 들어가 지금 박사과정 중이란다. 그렇다! 그의 학벌을 보고 내 학력 콤플렉스 발동이다. 그런데 읽으면서 점점, 어라? 아니다! 우와!! 했다. 공부 잘 하고 글도 잘 쓰다니...

 

 

 내가 꿈만 꿨지 잘 안 되는 바로 그 지점! 한 분야를 다른 분야로 연관지어 글쓰기!! 그러려면 아는 게 많아야지 싶어 책을 많이 읽는데 잘 안 된다. 이것은! 독서만으로는 안 되는 것인가? 유명인의 말이든, 멋진 문구든, 메모를 해두었다가 글 쓸때 인용을 해야 하는데 읽을 당시에는 생각하면서도 따로 적어두지는 않아서 그런 걸까? 어떤 문장을 이어가려할 때 맨 비슷비슷한 단어로, 했던 말 하고 또 하는 기분으로 글을 쓴다. 내 상태와 비교를 하자니 질투심이 풍풍 솟아오르는 거다.

 

 

 그러나 그런 마음, 고이 접어, 넣어두었다!

내 학력이 별로라서 그렇기도 하고, 분명 작가보다 치열한 공부를 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건 아주 쓸데없는 감정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우며, 기실 말도 안 되는 질투인 것을...

 

 

 작가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문제에서 한 지점을 예리하게 포착해내어 예술작품과 연결한 후 자신의 생각을 펼쳐놓는다. 또, 도슨트처럼 예술작품 설명으로 시작해 자신의 감상이나 단상을 다른 작품이나 사회문제로도 연결시킨다.

 

 

 예를 들면, 1부의 두 번째 글, “지독한 게으름”을 보자. 일본 그림책 작가 ‘사노 요코’의 에세이에서 게으름이라는 키워드를 이끌어내어(아주 사소한 문장에서 자신과의 공통점을 찾아냄/물론 사노 요코는 게으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음)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하는데 우아하게도 회화 작품과 짝 지운다. 아래 ‘존 화이트 알렉산더’의 “휴식”으로.

 

 

그래놓고 마지막 문장에는 또 이렇게 쓴다.

 

 

 

"게다가 이왕 일을 하면 그 일로 뭔가 세상에 없는 걸 만들고 싶다는, 내 게으른 성격에 어울리지도 않는 드높은 야심이 순간순간 일어나곤 한다. 그래, 난 맥도 할머니보단... 요코 할머니처럼 죽고 싶어, 그러려면 지금보다 조금은 부지런해져야 하는 걸까?"

 

 

 

 

 처음에 자신은 지독한 게으름쟁이라 해놓고 부지런해야 한다고 마무리 하는 것으로 보아 사실은 게으르지 않은 거다. 그렇잖은가? 그렇게 많이 공부하며 다방면으로 활동하는데 어찌 게으를수 있을까.

 

 

 그러니 저런 이에게 질투심을 가지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에세이는 전체 6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 부의 제목은 게으르게, 불편하게, 엉뚱하게, 자유롭게, 광대하게, 행복하게 로 잡았다.

 

 

 5부의 일곱 번째 글의 제목은 “경제학 농담으로 푸는 저출산 해법”이다. 자신의 전공분야를 살려 경제학 보고서를 인용하는데 시작은 경제학 자학 농담이다. 어렵게 느껴질 법한 내용을 농담으로 시작한다. 그러고나서 경제학 보고서와 경제학자의 말을 인용한다. 마지막 부분에 또다른 경제학 농담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데, 이 부분이 딱 나도 생각해 본 내용이었다.

 

 

 작가는 어린이집 보육교사의 낮은 급여를 지적한다. "여성의 돌봄 노동을 ‘사랑의 노동’으로 미화하면서 그 실제적 중요성과 가치는 저평가 되고 있다"고. 우리는 대부분 어머니의 희생으로 이만큼 자기 자리에서 활동하고 있다. 오늘날 여성들이 출산을 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여성들은 더이상 출산과 육아에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회적 보육을 담당하는 어린이집 교사들이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믿음이 있다면 출산율이 조금은 올라갈지 모르겠으나, 그것을 기대하기에 그들의 급여는 턱없이 낮다.

 

 

 이런 사회문제를 다루면서 경제학 농담을 끌어오는 것은 역시 작가의 밑천이 두둑하기 때문이다. 김정운 작가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풍부한 콘텐츠를 자산으로 축적해 두고 있어야 새로운 창조물이 나오며, 그것의 한 축에 예술이 꼭 들어간다고! 이 말에 부합하는 사례가 바로 문소영 작가라 생각된다.

 

 

 나도 언젠가 작가처럼 글을 쓰고야 말겠다고 두 주먹 불끈 쥐어본다!

이제부터 작가님은 내 워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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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을에 볼일이 있습니다 - 무심한 소설가의 여행법
가쿠타 미츠요 지음, 박선형 옮김 / 샘터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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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을에 볼일이 있습니다> 는 일본작가 '가쿠타 미쓰요'의 신작 여행에세이다. 영화 <종이달>의 작가로 우리나라에 알려져 있는데, 일본에서는 문학상도 많이 받았고 그녀의 작품이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된 것도 많다. <종이달>을 영화로 보며 꽤 파격적이고 신선한 감흥을 받았는데 작가의 에세이에서는 잔잔하고 고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상을 쓴 에세이와 소설 사이의 감성 차이가 있는데 어찌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에세이는 작년에 <이제 고양이와 살기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를 읽었고 이번이 두번째다. 그 책에 등장한 아메숏이 이번 책에도 나와서 나혼자 반가워했다. 67쪽,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꼭지에는 지금 고양이와 살게된 인연을 말하고 있다.

대학시절 선배의 곤란한 부탁을 거절하려는 심산으로 보상은 고양이로 받겠다며 즉흥적으로 말했다. 그 고양이 종 이름이 바로 아메리칸 쇼트 헤어(줄여서 아메숏) 였다고~~ 그때 선배에게 했던 부탁을 20년 후에야 하느님이 들어준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작가! 친구들과 한국으로 여행가자고 무심코 내뱉은 말이 그대로 실현되었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나오는 이 고양이 키우게 된 이야기는 내가 집사이기에, 지난번 작가의 고양이 에세이를 읽었기에 자연스럽게 시선과 마음이 머물게 된 꼭지다. 작가의 낙천적 심성을 다시 확인했다.

 

이처럼 이책은 작가의 느긋하고 낙천적 심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보통 여행에세이하면 여행지의 멋진 풍광과 함께 힐링장소 위주가 많은데 이 책은 조용하다. 20~30년간 여행했던 곳에서 받은 느낌과 당시 자신의 생각을 들려준다. 화려하지도 요란스럽지도 않은 작가의 여행경험을 읽다보니 여행의 설렘보다는 내집에서의 편안항이 느껴졌다. 선풍기가 유유히 돌아가고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는 내 옆엔 고양이가 낮잠을 즐기고 있는 장면이 연상된다.

작가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여행갈 때 들고다니는 가이드북과 여행노트다. 요즘은 워낙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구글맵으로 이동한다지만 작가는 아직 가이드북을 좋아한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인기있었던 책, <지구를 걷는 법>을 아직 애용하지만 이젠 그 책을 들고 다니는 일본인을 만날 수 없어서 이렇게 아쉬워한다.

"가이드북을 지참하는 여행은 아날로그여서 이제는 비주류가 되어버렸구나 싶다. 홀로 남겨진 듯해서 어쩐지 쓸쓸하다."

그리고 작가는 한 번의 여행마다 한 권의 노트를 남긴다고 한다. 이동 루트, 숙박 장소, 여행 경비, 먹고 마신 것, 산 것등을 기록하며 어디서 무엇을 보고 어떤 사람들과 대화했는지 뭐가 인상에 남았는지를 상세히 남겨둔다고 한다. 아마 그래서 이 책에 오래전 여행했던 것을 쓸 수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작가처럼 여행을 자주 가지 못하기도 하지만 저렇게 상세한 기록을 남겨본 적이 없다. 로망인 홀로 긴 여행을 가게 된다면 나도 저런 기록을 남겨야겠다.

작가가 가장 자주 여행한 곳은 태국이다. 너무 자주 가다보니 수많은 출입국 스탬프 때문에 방문 목적을 의심받을 정도라고. 여러가지 목적으로 방문했지만 특별한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라고 한다.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사원에 가거나 태국식 스키야키를 먹는 것은 개인적인 소망일 뿐 '볼일'은 아니다."

제목에서는 좋아하는 마을에 볼일이 있다고 했는데 볼일이 없다니? 아마도 '볼일'이라는 단어 속에 내포된 특별함이 작가에겐 별 일이 아니란 뜻인 것 같다. 여행에 거창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처럼 누리고픈 소망이리라.

혹여 이 책을 읽고 '뭐 이런 심심한 여행에세이라니?'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MSG 쫙 뺀 담백한 맛이라 여기면 좋을 듯 싶다. 밍밍한 맛을 찬찬히 곱씹다 차오르는 고소함을 느낄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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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 2 - 아모르 마네트
김진명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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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의 소설 <직지>의 표지에는 '아모르 마네트'라는 문구가 부제처럼 쓰여 있다. 이것의 전체 문장은 라틴어로 '템푸스 푸지트 아모르 마네트'이며 한글로는 '세월은 흘러도 사랑은 남는다.'이다. <직지>2권의 리뷰를 쓰며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책의 줄거리를 요약하지 않고 싶어서이다. 1권 리뷰에서도 스포일러를 줄이려고 살인사건에 더 비중을 두고 썼다. 이런 추리적 요소가 들어있는 책의 리뷰를 쓰면서 범인을 밝히거나 스포일러가 되는 줄거리를 쓰는 것은 책을 직접 읽어보고픈 흥미를 떨어뜨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 너의 글 실력이 부족해서겠지!"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본격적으로 리뷰를 쓰고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한 게 직년 1월부터인데, 그러고보니 추리소설 리뷰는 딱 한 번 써봤다. 실력부족이라고 해도 할말이 없는 형편이다.

다시 '세월은 흘러도 사랑은 남는다'로 돌아가보자면, 이 문장이 내겐 중의적으로 읽혔다. 카레나와 쿠자누스의 사랑, 그리고 인류애!! 그 인류애란 카레나(은수)에게는 세종의 애민사상이라 할 수 있고, 쿠자누스로서는 일종의 카피레프트 정신이라 하겠다. 그 둘의 노력으로 인쇄술이 구텐베르크에게까지 이어졌으므로. 물론 이 소설 제목이 '직지'이고 주인공도 직지일 수 있겠으나, 나는 카레나와 쿠자누스가 주인공이라 생각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도 '세월은 흘러도 사랑은 남는다'로 끝나니까. 그들의 노력을 작가 역시 인정했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이루어지지 못한 그들의 사랑이 인쇄술이라는 혁명적 사건으로 이어졌고 오늘날까지 유효하다고 여기기에 그 문장을 강조했다고 본다.

1권에서 사회부기자 기연이 퍼즐같은 정보를 토대로 추리끝에 찾아낸 이름이 카레나와 쿠자누스였다. 2권에서 본격적으로 살해를 주도한 단체를 찾아나서는 내용일 줄 알았는데 배경이 조선시대로 바뀐다. 세종과 주자사(활자 만드는 사람) 양승락의 딸 은수가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갑인자보다 더 아름다운 활자를 만들 줄 아는 은수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반역이라고 다그치러 온 명나라 환관때문에 고초를 겪는다. 은수라는 조선의 여인이 어떻게 바티칸까지 가게 되었고 인쇄술을 전파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것이 2권의 주 내용이다.

소설의 마지막에는 직지와 구텐베르크 인쇄술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그 둘에 대해 뉴스로 확인할 수 있는 최신 정보들이 서술된다. 급마무리 라거나 뉴스브리핑 한다며 허무해하는 독자들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렇게 역사와 사실이 명확한 소재로 팩트를 가미하여 소설화시킬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다. 그 점은 높이 평가해주어야 한다. 카레나와 쿠자누스의 이야기가 픽션이라해도 소설적 재미를 만끽할만한 설정이었다고 본다. 마지막에 기연의 입을 빌어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제대로 잘 전달될 것이다.

"구텐베르크를 인정하고 나면 우리 직지의 진짜 가치가 보일 것입니다. 직지는 인간 지능의 승리입니다. 맹수에게 이빨과 발톱이 무기이듯 인간에게는 지식과 정보가 무기입니다. 그 지식과 정보를 가장 정확하고 깔끔하게 기록하고 전달하는 장치가 바로 금속활자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이런 수단을 만들어낸 우리 민족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또한 이 직지의 정신과 맞닿은 것이 바로 훈민정음입니다. 훈민정음은 이제껏 인류가 만들어낸 어떤 글자보다도 우수하다고 전 세계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직자와 한글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기 이전에 인간 지능의 금자탑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직지와 한글은 그 존재 자체가 소수의 독점으로부터 지식을 해방시켜온 인류가 손잡고 동행하자는 지식혁명입니다. 이기심에서 벗어나 이타심의 세계로 나아가자는 위대한 메시지가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독자중에 심각한 비약이라 여길만한 아래와 같은 대사가 나오기는 한다.

“직지와 한글과 반도체는 인류 지식혁명을 이끄는 대한민국의 3대 걸작입니다.”

 

그러나 전 미국 부통령 엘 고어도 이런 말을 남겼다니 그리 뜨악하게 반응할 것까지는 없을 듯 하다.

“한국은 금속활자 발명과 디지털 기술로 인류에게 큰 선물을 줬다.”

 

우리나라나 유럽에서나 민중이 글을 알고 책을 읽게 되어 기득권들이 누리는 고급정보를 공유하게 되는 것을 지극히 꺼렸다. 그러한 체제를 무너뜨리고 지식의 보편화를 만들수 있게 된 인쇄술의 위대함을 우리는 간과하며 살고 있다. 이제는 너무나 손쉽게 내 손안에서 어마어마한 정보들을 접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에 살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기기 하나로 몇가지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스티브잡스의 위대성은 강조하고 감사하면서 그것을 아주 편하게 누릴 수 있는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에 대해서는 그보다 덜한 감정을 가지고 사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 기기에 중요한 부품인 반도체 기술도 우리가 세계 1위인데 말이다.

요즘 우리의 반도체 산업에 위해를 가하려는 일본의 경제제재를 보니 우리나라의 이러한 우수성에 흠집을 내고픈 그들의 욕망도 일정부분 작동한 것이 아닐까 혼자만의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물론 아베의 어깃장은 다른 의도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 책을 읽고 보니 문득 그쪽으로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소설은 독자의 배경지식에 따라 다양한 감상이 있지만, 어떤 시기에 읽느냐에 따라서 다른 결의 감상이 나올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의 위대성을 폄하하며 살고 있는게 아닐까? 이젠 우리를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이 책을 읽고 우리안에 숨겨둔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길...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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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 1 - 아모르 마네트
김진명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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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직지’에 대해 기본적인 정보 정도는 알고 있는 한국인이라고 장담했다. 그런데 따져보니 그 안다는 것이 이름에 불과했다. ‘직지심경’이라 잘못 불리어져 ‘직지’를 불경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불경이 아니며, ‘직지’의 정식 명칭은 “백운화상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이고 “직지심체요절” 더 줄여 ‘직지’라 부른다는 것 정도. 아, 쿠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80여년 앞선 것이라는 것까지만.

김진명 작가의 신작소설, <직지>에서는 우리나라 ‘직지’에 영향을 받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앗, 이런 상상력이라니? 추리소설 작가답게 그 둘의 연관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갔을지 몹시 기대하며 <직지>1권을 펼쳤다.

처음부터 살인사건 현장이다. 사회부기자인 주인공 기연이 도착한 곳은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난 곳인데, 그 살해 기법이 아주 잔인하고 기이했다. 귓불 아래 목부분에 네 개의 구멍이 나있는데 사람의 입술자국이 있는 것이다. 그 구멍이 사람의 송곳니 자국으로 유추되는데 그곳으로 피를 흡착해 빨아낸 것으로 보였다. 뱀파이어라 하기엔 다른 이빨 자국 없이 네 개의 구멍 뿐이라는 것이 이상한데다 사망 후에 피를 빨았다는 것이다. 직접적 사망요인은 가슴쪽에 찔린 상처인데 사용된 흉기가 창으로 보인다는 것. 그럼 피살자는 누구인가? 서울대학교의 전직 교수 ‘전형우’였다. 이 끔찍한 살인사건을 탐정처럼 파헤치는 이가 기자 기연이다.

기연은 유사한 살해 방식에 대해 조사를 하다가 <살인의 역사>라는 책을 쓴 저자 ‘이안 펨블턴’이라는 작가에게 자문을 구한다. 그에게서 ‘이 살해 방식은 매우 클래식하며 개인이 저질렀다기보다는 전통과 의식이 오랜 과거로부터 지속되어온 비밀 단체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메일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전교수를 살해한 집단이 누구인지를 찾아야 하는데 그러기엔 이 사건을 경찰이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본인이 적극 파헤치기에 이른다. 물론 특종 욕심도 있었다.

여기서 잠깐! ‘직지’에 대한 기본 상식 공부! 책에서 김진명 작가가 아주 친절하게 알려준 내용을 바탕으로~~

‘직지심체요절’이 ‘직지심경’으로 불리게 된 연유는 1967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박병선박사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3년 간의 연구를 통해 현존하는 최고의 금속활자본임이 확인되었다. 이름이 너무 길어 어떻게 알릴까 고심하다가 프랑스인들이 잘못붙인 이름 그대로 ‘직지심경’으로 알려졌다. 백운화상 사후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에 상‧하 두권으로 인쇄되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프랑스에 남아있는 하권뿐이다.

여기서 문제는, 직지가 세계 최초라는 것 외에 어떤 의미도 없다. 세계사를 바꾼 위대한 지식혁명의 주인공으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위 내용은 책 속의 인물, 서원대학교 김정진 교수가 기연에게 하는 말이다. 서원대 김정진 교수는 실제 인물이며 김진명 작가가 김교수의 삼고초려 끝에 이 소설 <직지>를 완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원대학교 문화기술사업단은 전 세계인들이 직지를 쉽게 배우고 즐기도록 “직지톡톡”이라는 앱을 개발해 전국 초중고에 수업교재로 제공하고 시민들에게 무료 배포했다.

‘직지’가 서양의 금속활자 발명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려는 서원대학교의 노력이 소설가와 콜라보되어 탄생한 책이 <직지>인 것이다. 사실 앞부분에 기자가 김교수를 만나 설명을 듣는 장면과 책의 뒷표지 설명을 읽으며 궁금해서 읽다말고 검색을 좀 해보았다. 소설은 소설로 읽으면 될 일이지만, 이러한 팩션의 경우 역사적 사실을 확인해보아야 직성이 풀려서 먼저 찾아본 후 다시 책을 펼치니 더 심취할 수 있었다.

1권의 내용은 살해된 전교수의 범인을 찾기 위해 기자가 정보를 수집하고 추리해 나가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기연이 참관한 세미나에서 우리나라(직지측)과 독일(구텐베르크측)의 공방이 이 소설을 작가가 왜 쓰려고 했는지에 대한 답변으로 보인다.

“독일은 직지의 씨앗을 인정하고 한국은 독일의 열매를 인정해야 한다.”

전교수가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편지와 그 속의 흔적들을 따라 기연과 김교수는 독일로 떠난다. 2권으로 넘어가면 숨은 비밀들이 하나 둘 드러날 것 같다.

처음 뒷표지의 “직지에서 한글, 반도체로 이어지는 지식혁명의 뿌리를 찾아 한국인의 정체성을 밝히는 경이로운 소설“ 이라는 홍보문구가 과장됐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서원대의 주장과 소설가의 상상력이 우리가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될만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줄 것 같아 2권도 기대가 된다.

 

 

**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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