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착취의 지옥도 - 합법적인 착복의 세계와 떼인 돈이 흐르는 곳
남보라.박주희.전혼잎 지음 / 글항아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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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설명하는 레토릭으로 애용되는 문구 중 하나다(요즘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오징어게임>도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표방한다). 복지제도로 대변되는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와 심각한 수준으로 위계화된 노동시장. 더 이상 교실에 수면시간을 줄이고 공부하면 배우자의 얼굴이 바뀐다는 야만적인 문구가 공공연하게 게시되지 않지만 학력/학벌에 따른 불평등과 차별은 오히려 그 시절에 비해 심화되었다는 증거들이 존재한다. 학력/학벌이 고용시장에서 일종의 자본으로 작동한다. 고졸과 대졸, 중소기업과 대기업,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임금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돼 재산 차이로 확대재생산된다. 한 번 정규직은 직종이나 직장을 옮기더라도 계속 정규직으로 근무하게 될 확률이 높고, 한 번 비정규직은 근속연수가 쌓이고 성과를 많이 내더라도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한다. 대기업/공기업의 정규직 같은 '좋은 일자리'에 진입하느냐 못하느냐 여부에 따라 평생의 당락이 크게 결정되는 불평등 사회. 대기업 정규직-대기업 비정규직-대기업 제1하청 정규직-대기업 제1하청 비정규직-중소기업 정규직-중소기업 비정규직 식으로 촘촘히 피라미드식으로 위계화된 사회. 최근 불평등, 공정, 부동산 관련 이슈에 안테나를 기울인 채로 고병권 선생님의 자본 해설서를 읽고 있었더니 한 권의 책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중간착취의 지옥도>. 그동안 뉴스로 숱하게 접해왔으나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했던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었다. 한국일보에 연재된 기획기사가 열렬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결과 단행본 출간으로 이어졌고, 간접고용(하청) 노동자로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했던 故김용균의 죽음을 '사회적 참사'로 인식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변화에 힘을 실어온 김훈 소설가(기자 시절 한국일보에서 재직했다)가 추천사를 썼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토로했던 소설가가 어느덧 원로의 반열에 들어선 시점에서 도저히 지겨움으로 형언할 수 없는 참혹한 밥벌이의 현장을 보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김훈의 글을 많이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가 인간을 동물, 그러니까 피와 살, 뼈로 이뤄진 유기체로 보는 관점이 강하다고 알고 있다. 육체와 물질의 관점(때로 힘의 관점)에서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기에 육체노동(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자신의 육체를 이용한 노동으로 제 밥벌이를 해내고, 제 '새끼'들을 기르는 땀의 숭고함을 깊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성실하고 정직한 노동을 하는 이들이 외주화된 위험을 도맡아 일터에서 목숨을 잃게 만드는 사회를 더 이상 유지시켜선 안 된다고,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동료 시민이자 어른으로서 책임지기로 결심한 순간이 있었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책의 저자인 한국일보의 마이너리티 팀의 젊은 기자들(남보라, 박주희, 전혼잎)은 어떤 마음으로 간접고용 노동자에 대한 취재를 결심하게 된 것일까. 책에서 밝힌 취재의도는 다음과 같다. "이 책의 출발은 다음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당신은 힘들게 일하는 노동자입니다. 피·땀·눈물의 대가로 월급을 받지요. 그런데 누군가 그중 수십, 혹은 수백만 원을 늘 떼간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이 고질적인 문제를 포착한 기자들은 노동시장의 최하부에 위치한 간접고용 노동자들에게 ‘중간착취’에 대해 묻고, 그 지옥도地獄圖를 펼쳐보기로 했다." 평소에 잘 보지 않아서 잘 보이지 않고, 잘 보이지 않아서 잘 안 보게 되는 지점이 있다. 사각지대라고도 불리는 곳에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일 확률이 높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환경에 놓여 있을 확률이 높고, 이들의 정치적 권리를 대변해줄 수 있는 창구가 존재하지 않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오늘의 역사가'로 불리기도 하는 기자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동시대의 사건과 현상을 기록하는 일을 한다. 세상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문제를 발견해 알리기도 하고(의제화/공론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문제를 심층적으로 탐사해 새로운 논의의 장을 창출하기도 한다. 혹자는 일시적인 분노로, 혹자는 해묵은 체념으로 지나쳤을 질문을 정면으로 파고든 결과 한국일보 마이너리티 팀은 "사람 장사의 정갈한 구조" "거대한 착취 구조의 지도"(김경영)를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 시대의 마이러니티가 누구인지, 이 부정의한 마이너리티의 구조에서 누가 이익을 거두는지 정확하게 문제화를 하고, 100명의 목소리를 조합해 만들어낸 착취의 지도를 무기 삼아 현실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하는(낼 수 있는) 부분을 예리하게 짚어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기획-취재-보도-법제화를 위한 노력-출간의 과정이 어떤 식으로 진행됐을지 행간을 상상해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는 힘에 대해.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자체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해 그에게 정당하지 않은 몫을 지불한다고 배웠다. 자본주의적 노동 자체의 착취에 더해 오로지 '사람장사'를 통한 이익의 편취, 착취만 일삼는 합법적 시스템을 '지옥' 말고 뭐라 부를 수 있을지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1997년 IMF 금융위기 이후 노동을 유연화해 고용을 창출한다는 명목으로 비정규직이 도입되었다고 알고 있다(IMF 금융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불평등이 가파르게 심화되었다고 한다). 법을 새로 제정하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법을 폐기하거나 개정하는 게 훨씬 어렵다는 말이 있듯 비정규직 제도는 도입 당시 우려되었던 문제점들이 점차 심화돼 중대한 사회문제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 같은 국가에서는 비정규직에게 고용의 불안정성을 대신해 임금을 좀 더 지불한다고 한다. 이를 보면 고용형태와 상관없이 노동자가 노동자로서(혹은 자신의 노동에 근거해) 정당한 대우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잘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 고용형태와 상관없이 일의 가치를 동등하게 대하고, 더 나아가 고용형태에 따른 불이익과 어려움을 보완해준다는 점에서 노동존중 기조가 느껴진다. 반대로 한국사회에서는 고용의 불안정성이 족쇄가 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부당한 대우에 대항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법, 그리고 정치가 노동자의 편에 서 있지 않아서다. 비판과 비난의 화살은 자본의 이익과 효율성을 목적으로 불안정한 고용형태를 양산한 당사자인 국가와 기업에게로 향하기보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획득하는 경쟁에서 탈락한 개인에게로 향한다. 지옥은 타인을 착취해 자기이익을 도모하려는 장사꾼들의 열정과 대항할 수단을 지니지 못한 채 생존투쟁에 지친 당사자들의 무기력으로 생명력을 이어간다.

이렇게 자본친화적 정치지형 속에서 제도의 빈틈을 노린 '사람장사'의 기술이 간접고용이라 불리는 중간착취인 것이다. 간접고용은 종래의 사용자-노동자의 계약에 고용주(용역, 파견업체)가 끼어든 '삼각 고용' 구조다. 원청(사용자)이 용역업체(고용주)와 맺는 도급계약, 용억업체가 노동자와 맺는 '근로계약', 이 두 계약 사이의 빈틈으로 인해 노동자는 노동자로서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비정규직 중에서도 간접고용 노동자의 급여가 유난히 적은 이유는 단 한 가지 차이 때문이다. 노동력을 사용하는 사람과 노동자 사이에 누군가 개입해 있다는 것, 그게 이들을 비정규직 중에서도 제일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 누군가 개입하는 순간, 착취는 필연적이다."(54)

여기에 더해 용역과 파견 개념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용역은 원청과 용역업체가 ‘특정 업무를 완성하겠다’는 도급계약을 맺는 것으로, 원청은 용역업체에 일을 통째로 맡긴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에게 업무를 직접 시킬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원청은 노동자에 대해 법적 책임도 지지 않는다. 반면 파견은 원청이 파견업체를 통해 노동자를 공급받은 후 필요한 일을 노동자에게 직접 지시한다. (...) 원청이 파견직에게 사실상 자신의 직원인 것처럼 일을 시키기 때문에 원청은 파견직에 대한 법적 책임도 진다." (60-61) 대부분의 도급계약은 원청에서 직접 노동자에게 지시를 내리기 때문에 '불법 파견'이라고 한다. 파견이 아닌 용역계약을 맺으면 원청은 노동자에 대한 책임("노동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일도 없고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든다 해도 교섭에 응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용역업체 또한 노동자들로부터 관리비 명목으로 돈만 떼갈 뿐 노동자를 지원하거나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중간착취라는 문제의 근원은 간접고용에 있다. 그렇다면 왜 기업들은 노동자를 직접고용하지 않고 간접고용하는 것일까. 재계의 입장에서 이를 노동 유연화라 설명할 것이다. 이말인즉슨 '손쉬운 해고'를 의미한다. 손쉽게 해고를 당할 수 있는 처지에 놓인 노동자는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을 뿐더러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정치적 결사체를 결성하기 어렵다. 중간착취의 기술자들은 이런 처지(약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협박에 능하다. 당신이 아니더라도 일할 사람 많다고. 당신은 언제든지 대체가능한 부품이나 마찬가지니 쫓겨나기 싫으면 조용히 말 잘 들어야 한다고. 이렇게 편하게, 또 싼 값에 노동력을 이용하면서 노동자에게 정당한 몫을 지불하지 않은 만큼 자본의 주머니는 두둑해진다. 비용 절감과 노사 분쟁의 선제적 예방 같은 경영 차원의 '성과'는 누군가의 생존이 위태로워진 만큼, 누군가의 존엄성이 침해된 만큼 얻어진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은행경비원 임성훈 씨의 편지]

은행원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비슷한 대우도 바라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관리’ 명목으로 은행 경비원의 노동 대가를 중간착취 당하지 않고 온전히 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보다 조금만 더 마음 편하게 일하고 싶습니다. 양질의 일자리는 아니더라도 매년 반복되는 재계약과 언제 마주할지 모르는 지점 통폐합에 따른 계약 해지의 불안감에서 벗어나 일하고 싶습니다. 저는 안정된 고용 환경에서 소속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78-79)

담담한 어조로 얘기하고 있지만 절절한 진심이 느껴지는 편지에서 이 시대에 최소한으로 지켜져야 할 상식의 선이 어디일지 생각해보게 된다. 중간착취의 문제를 관찰하며 근본적으로 모든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우와 보상을 받는 사회가 가능할지 궁금해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이익에 따른 보상이란 셈법 이외에도 공동체적 가치, 돌봄적 가치, 생태적 가치와 같이 사람과 사회,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의 가치를 측정하고 보상하는 셈법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현생 인류, 현재 삶을 영위하고 있는 지구세계시민들은 미래 세대의 삶을 착취하지 않겠다는 합의 아래 자신이 누려왔던 편의와 효용을 포기할 수 있을까. 4차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산업구조와 노동의 변화 속에서 모두가 노동자가 될 수 없다고 했을 때, 일할 권리/기회가 소수의 특권이 된다고 했을 때 인간은 노동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까. 노동/일과 자아를 잘 구분해서 일을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대하고, 번 만큼 일한다는 정신이 쿨하고 현명한 태도로 여기지는 요즘이지만 일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기여한다는 성취감, 일터에서 맺는 사회적 관계와 같은 기능을 다른 무언가가 성공적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대학생 시절 조금은 먼 얘기 같이 느껴졌던 노동문제가 내 생존과 직결된 현실임을 점점 체감하게 된다. 아니 냉정하게 얘기하면 생존이란 단어의 급박함과 무게를 고려했을 때 생존 자체가 위협되는 상황에 놓일 확률은 적을 거라 예상된다. 집안 재정이 빠듯한 편이긴 하지만 수도권 지역에 거주하며 고등교육을 이수한 학력이 한국의 노동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자리를 보장해줄지 최대치는 알 수 없지만 최소치는 상상해볼 수 있어서다. 똑같이 임금을 월 2백만원 선에서 받더라도 중간에서 장사꾼들이 반절씩 착취해가는 사업장과 내 노동의 몫을 온전히 받을 수 있는 사업장에서 삶의 질은 확연한 차이가 날 것이다. 그러니 이 사회의 맨 밑바닥은 많은 이들이 관심을 기울여 변화를 이끌어냈으면 좋겠다. 고작 책을 읽고 한껏 게으름을 피우다 알맹이 없는 리뷰를 남기고 있는 형국이지만 앞으로도 한 권의 책을 읽고 잠시나마 사회적 이슈 - 타인의 고통,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 에 대해 고민하고 분노하고 슬퍼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일하는 사람의 어깨가 축 처지는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노동의 가치가 최대한 정당하게 인정받고 노동자-인간으로서 충분히 존중받아 주눅들거나 위축되지 않아 당당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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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
정지돈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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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 업 쇼트 - 불확실한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 이야기
제니퍼 M. 실바 지음, 문현아.박준규 옮김 / 리시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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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서른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무엇이 되었을까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김애란 - <서른> 중)

'서른'을 다룬 텍스트들이 꽤 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최승자의 <삼십세>,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번에 검색해서 알게 된> 블로콜리너마저의 <서른> 등등... 왜 서른인가 굳이 따져보면 '앞자리'가 십 년 만에 바뀌면서 나이에 대한 체감이 강하게 들고, 이제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성인''어른'의 티가 나야 할 것 같은데 여전히 미성숙하고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감각에서 불안이 몰려오는 게 아닌가 싶다. 예전에 '서른'은 결혼을 고민해야 하는 시기여서 그랬을 것 같고, 지금은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한 이에게 조급함을 들게 하고, 직장을 다니고 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이로 하여금 이직 같은 선택을 고민하는 시기여서 그럴 것 같다. 시대가 바뀌긴 했지만 서른에 갑자기 시간이 내 앞에 찾아와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 불심검문을 하는 특성은 바뀌지 않은 것이다. 서른의 상징성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유무형의 압력에 기인한다. 번듯한 사회인으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 '사람 구실' 해내야 한다는 것. 십대부터 이십대의 어느 시점까지 이어져온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장과 발달의 상승곡선이 멈춰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과도기와 정체기의 '인생 슬럼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이 들 때, 남들은 탄탄하게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거나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아 '부모'가 되었는데 자신은 아무 것도 이뤄놓은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서른이 온다. 그리고 서른 하나를 향해 거침없이 흘러간다.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김애란 - <서른>

김애란의 <서른>은 몇 년 전 폐간된 <문예중앙>이란 문예지의 2011년 겨울호에 수록된 소설이다. 설마 김애란 작가가 생물학적으로 서른살에 이 작품을 썼을까 싶어(왜냐하면 소설의 윤리적 깊이가 굉장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로필 검색을 해봤더니... 거의 맞았다. 1980년생이시니까 2011년에 썼다고 하면 한국나이로 32살에 쓴 것이긴 하지만 서른 즈음에 이 소설에 대한 착상을 하시지 않았을까 싶다. 거마 대학생 다단계 사건에 대한 자료조사에 시간을 쏟으셨을 테고, 아마 초고를 다 쓰기까지 그리고 퇴고를 마치기까지 다른 소설들의 평균적인 집필 시간보다 좀 더 걸렸을 것 같다. 불행히도 현재 <문예중앙> 2011년 겨울호도, <서른>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 <비행운>도 갖고 있지 않다 보니 소설에 대한 얘기를 길게 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그럼에도 <서른>이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그속으로 밀쳐버린 누군가를 향한 감당할 수 없는 미안함(죄책감보다 왠지 미안함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을 용서받으려 하지 않았다는 점을 적어두고 싶다. 용서받을 수 없는 미안함 앞에서 스스로를 죄인에 위치시키고 벌을 내리는 일은 어쩌면 쉬운 길일지도 모른다. 용서-구원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형이상학적 죄의 문제를 제쳐두고 현전하는 타인의 고통 앞에 최선을 다해 응답하고자 하는 일이 어렵고 고되지만 참된 길에 가까워보인다. 편지의 수신자인 '언니'가 답을 줄 수 없겠지만 언니의 존재로 하여금 '나'가 악무한적 고뇌에서 벗어나 타자에 대한 책임의 윤리를 어떻게든 지고자 하는 애씀이 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서른>의 발신인은 사회적 차원에서 '커밍 업 쇼트', 즉 '인간 구실'을 아직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수준 미달 상태로 인식될지 모르겠으나 그가 끝끝내 지켜내려 하는 책임감은 어른의 가장 본질적인 덕목이지 않은가. <서른>은 어른들은 이 지경이 되기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책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어물쩡 넘어가려 했던 공백에 물음을 던지고 또 던진다.

<서른>의 주인공(서른의 주인공이 '서른'인지 수신인인 언니가 '서른'인지 모르겠으나)은 지금 마흔이 돼서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독립적으로 싱글생활을 하고 있다면 무슨 고민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안 되지만 결혼을 하고 출산을 했다면 조금 추측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이 세상에 내보낸 아이에게 마스크를 쓰게 만든 어른들이 만든 사회의 질서를 비판하고 반성하고 있을 것 같다. 돌봄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정부에 분노를 느끼고, 돌봄과 육아가 과부하가 걸리게끔 편중된 상황에서 자신이 엄마로서 역할을 온전히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할 것 같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아동학대 사건들을 접하며 자기 자식 하나 책임지기 어렵긴 하지만 부모이자 어른으로서 그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함을 느끼고 아이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치적으로 각성했을 지도 모르겠다. 또, 기성 세대에 진입하고 있는 혹은 이미 기성 세대의 일부가 된 자신이 '꼰대'인지 아닌지 고민하고 청년 세대를 향해 염려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에서 규정한 성인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는 자신만의 기준을 통해 스스로를 성인으로 정체화하는 데 성공했을까? 곁에 친구들이 있을까? 누구에게도 꺼내기 힘든 고백을 담은 편지의 수신인이 되어줄 언니가 남아 있을까?

2 세대론의 궤적에 대한 하나의 거친 소묘

'MZ 세대'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여기저기서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작은 어폐를 가지고 있는데 새로운 세대 명칭은 신문이나 방송 같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소개 확산된다는 점에서 태생적으로 유행(트렌드)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OO 세대'라는 발명품 내지 신상품을 이해하려면 호명의 주체가 누구인지, 호명의 욕망 및 효과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세대 명칭은 정치적 목적, 마케팅적 목적에 따라 창안된다. 세대라는 사회학적 개념이 정립되자 인구 집단을 새로운 범주로 분석하기에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세대 개념이 생명력을 얻어 '사회적 실재'가 될 수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히트 친 세대 명칭은 '86 세대'일 텐데 정확한 연원과 시점을 따져봐야겠지만 2000년 총선과 2002년 대선에서 부상한 정치세력을 명명하고자 사용된 '(3)86'세대는 1987년 이후, 그러니까 87체제의 성립 이후부터 진보 정치의 헤게모니를 독점하다시피 군림했기에 '486''586'으로 변주하며 아직까지도 살아남았다. <386 세대 유감>, <불평등의 세대> 등 한국사회의 모순을 심화시키고 있는 기득권 세력으로 '586'세대를 지목하고 비판하는 담론들이 586 스타 정치인들의 몰락과 정권의 실정失政의 맥락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에 비해 'MZ 세대'론은 정치적 성격이 훨씬 옅다. MZ 세대는 '86'세대의 권위주의, 집단주의적 성향과 달리 반권위주의와 개인주의적 성향을 띠며, 페미니즘 기후위기 등 그동안 부차적인 문제로 간주되며 후순위로 밀렸던 의제들을 중시하는 정치적 입장을 띤다고 설명된다. 그렇긴 하지만 아직 현실정치에서 단일한 세대 집단으로서 뚜렷하고 일관된 정치적 경향성을 보여준 적이 없어 'MZ세대' 개념이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했다고 보기 섣부른 감이 있다. (투표권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청소년층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Z세대를 살짝 제쳐두고) 20-30대로 구성된 밀레니얼 세대를 보면 이준석이란 정치인을 제1야당의 당대표로 만드는 데 공헌한 '이대남' 집단의 정치적 영향력이 가시화된 바 있긴 하다. 하지만 능력주의와 안티페미니즘을 주된 이데올로기를 삼는 이 집단의 정치적 성격, 정치적 영향력의 규모와 밀도를 따지려면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MZ세대 자체는

인터넷 커뮤니티와 대중문화, 마케팅/시장의 영역에서 활발하고 다채롭게 호명되고 소비되고 있는 추세라 보인다. 그런데 'MZ 세대'론 이전에 흥행에 성공을 거둔 세대 명칭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88만원 세대'이다.

'88만원 세대'는 비록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던지라는 구호를 반복하고 있긴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노동자 정체성을 중심으로 청년 세대를 정치적 주체화하고자 하는 성격이 강했다고 생각한다. '알바'의 노동자로서 권리를 보호하고 쟁취하고자 하는 '알바노조'나 '청년 유니온', '민달팽이 유니온'(주거권) 등 사회단체는 '88만원 세대'의 세대 프레임과 세계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반대급부에서 청년들의 탈정치화 ㅡ 원자화/파편화된 개인들의 각자도생 및 생존주의, 먹고사니즘을 비판하고 정치적 조직화를 통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모순에 대항해야 한다는 메세지를 골자로 하는 담론을 2010년대 초반까지 자주 접할 수 있었다(20대 개새끼론을 포함해). 당시 한국의 사회학계에서 청년들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거듭나고 구성되는지 '자아의 테크놀로지' '마음의 사회학' 같은 방법론을 바탕으로 규명하는 작업들이 활발히 제출되었다. 그야말로 산업화된 자기계발 시장-강연, 도서 등으로 이뤄진-의 장치들이 어떻게 자기계발의 주체, 자기착취적 자아경영인을 구성해내는지, 청년들이 애용하는 콘텐츠인 웹툰이나 예능 같은 텍스트에 표상된 이데올로기 - 생존주의, 각자도생, 서바이벌 –를 해독해냈다. 이런 시도들은 '짱돌' 좀 던져봤던 (포스트) 586의 세대기억 및 세계관으로 오늘날 청년의 현실을 진단하고 (훈계하고) 비판하는 관점에 한 발짝 떨어져 있긴 했지만 ‘타자에 의한 재현’이 갖는 문제점을 여전히 피해가지 못했던 것 같다.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수동적으로 체현한 속물-괴물 형상과 기성 좌파 정치의 문법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깨어 있는’ 청년 형상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을 드러내는 데 한계가 명확했던 것이다.

'청년'이란 범주가 단일한 대상이 아니라 젠더, 지역, 계층/계급에 따라 첨예하게 분할된 복수의 존재라는 사실은 계급적 불평등을 꼬집었던 '수저계급론'을 지나 페미니즘 논쟁을 거치며 가시화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청년 세대의 신자유주의적 주체성과 ‘감정의 구조’를 읽어내려면 ‘젠더’(언론에서 젠더 ‘갈등’이라 투박하고 거칠게 명명되고 있는... 안티페미니즘, 신자유주의적 남성성, 여성혐오 등)와 ‘공정’ 담론을 받치고 있는 능력주의, '코인 열풍' 등의 현상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사회학자 전상진은 '세대 게임'이란 저서에서 '세대 프레임'이 현실을 호도하고, 잘못된 논쟁을 유도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구조의 피해자이자 약자인 청년과 노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문제화'가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대 간 전쟁의 제로섬 게임 형태(국민연금 논란을 비롯해 청년의 등꼴을 빼먹는 기성 세대의 이미지, 실질적으로 돌봄과 복지의 충분한 보호 아래 있지 못한 노인 세대의 곤경 및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노인 혐오)로 논쟁의 틀이 짜여짐에 따라 '세대 게임'의 판을 설계한 이들에게만 이익이 돌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대 게임'의 설계자들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세대 프레임'이란 렌즈가 어떻게 시각을 굴절시키고 착시를 낳는지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기성 세대, 특히 정치적, 도덕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고 있었던 (5)86세대의 위선과 기만적 행태가 폭로되고 ‘부동산’을 중심으로 세대적 분노와 좌절이 분출되고 있는 흐름에서 '세대' 문제는 앞으로도 한국사회의 모순과 문제점들이 응축된 전장으로 소환될 거라 예측된다. 특히 코로나는 사회 전반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세대뿐 아니라 계급/계층과 젠더의 불평등을 악화시켰다. 전반적으로 청년고용이 얼어붙은 상황에서 여성청년들의 고용은 더 나쁜 상황이란 통계가 있고(서비스업 같은 젠더화된 직종이 코로나에 좀 더 심대하고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 '코로나 경제'에서 가계부채는 위험한 수준으로 급상승하고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악화되었다고 한다. 반대편에서 상위 20% 계층의 자산은 증가했다는 소식이 있고, 언택트 플랫폼 기업들은 크게 성장했다. 부동산을 비롯해 주식과 코인 같은 금융자산의 가치는 높아졌으나 노동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은 '취업'부터 '결혼', '내 집 마련'에 이르는 성인기의 절차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헤쳐 나가고 있는가. '성인기의 절차'로 규정되었던 재사회화의 과정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더 이상 평범한 것이 아닌 게 돼버린 세상에서 일상과 자아를 어떻게 재구성하고 영위하고 있는가. ‘진보’와 ‘성장’의 감각을 어디서 찾고, 정치적으로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제니퍼 M.실바는 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문에서 이렇게 묻는다. 혼란스러운 생애 경로에 의를 부여하기 위해 청년들은 자신이 누구고 무엇을 원하게 될지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창출하게 될까? 이들은 새로운 형태의 감정 표현을 받아들이고 성공의 새로운 지표를 구축하게 될까? 그리고 마침내 자아다움에 대한 그들의 새로운 정의가 우리 모두의 미래를 형성하는 식으로 정치적 반향을 일으키게 될까?(13-14)

​3 '신자유주의 키드', 밀레니얼 노동계급 청년들의 성장 보고서 : <커밍 업 쇼트>

2010년대 중반에 출간된 <커밍 업 쇼트>는 어떤 식으로 미국 노동계급 청년의 현실을 탐구했는지 살펴보자. 먼저, 청년들이 성인으로 잘 성장할 수 있게끔 도와줘야 하는 제도의 실패를 겨냥하며 '특정 기준이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는' 수준 미달의 대상은 성인이 되지 못한 청년들이 아닌 제도(16)임을 밝히며 책의 방향성을 명확히 밝힌다. 역자들은 각주에서 이렇게 덧붙인다. 이 책 전체에 걸쳐 지은이는 성인이 되는 과정이란 결코 개인 또는 가족이 개별적으로만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사회와 제도의 뒷받침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그 이유는 결국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공정하게 분배할 지를 결정하는 역할을 정치의 몫이고,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교육과 취업, 결혼은 사회와 제도의 적절한 뒷받침이 제공되어야 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커밍 업 쇼트>는 계급과 계층, 하비투스 같은 기존 사회학의 개념과 범주로 불평등의 구조를 설명하지 않는다. 성인이 되고자 고군분투했으나 가족과 제도, 국가로부터 '배신'을 겪은 청년들이 개별적으로 '치료 서사'를 구축해 자신의 진보와 성장의 감각을 측정하는 '치료의 에토스'에 집중한다. "감정적 견고함과 심리적 변형에 따른 치료적 기준에 따라 자신의 진보를 측정(10)"하는 '치료적 자아'의 형상에 주목하는 것이다. 기성 세대의 관점에서 나약해보이기도 하고 한심해보이기도 하는 청년들의 모습, 정치적 차원에서 청년의 미덕으로 지목되는 진보적 스탠스를 취하지 않고 퇴행적이고 보수적인 행태를 꾸짖고 훈계하지 않는다. 대신 100명의 미국 청년 노동자들을 만나 목소리를 듣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로부터 이들 청년 남녀에게 성인기는 노동, 가족, 관계, 친밀함, 젠더, 신뢰, 존엄이라는 선을 따라 새롭게 상상되고(10) 있음을 확인한다. 재편된 가치의 지형에서 청년들이 제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며 걸어가는 길을 염려와 응원의 마음으로 지켜보며 동행하는 것 같은 제니퍼 M.실바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치료적 자아다움은 어떻게 시민적 정치적 행동과 연결될 수 있을까?(11) 질문하며, 그리고 우리는 자기 단절이나 방어적인 고립에 맞설 제도들을 건설할 수 있을까?(13) 고민하며.

[커밍 업 쇼트]가 미국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민속기록지ethnography이기에 한국 사회의 특성을 부기할 필요가 있다. 압축고도성장을 경험했을 뿐더러 상향의식이 강한, 자식에 대한 투자(희생)와 기대가 큰 부모 세대의 의식구조, 그리고 나이에 따른 규범의 압박이 심한 사회라는 점을 말이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미국과 한국의 청년들의 상황과 사정을 비교하며 읽는 재미/어려움이 있었다. 한국의 사정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커밍 업 쇼트>의 내용을 따라가보도록 하자. <커밍 업 쇼트>의 소개된 사례들에서 공통적으로 청년들을 괴롭히는 적은 빚(대학등록금과 카드 사용, 그리고 의료비 지출에 따른), 정서적 고통(불안정한 관계에서 비롯된 상처의 산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제도의 배신'에 따른)이었다.

제도들 – 교육과 가족 또는 군대-은 청년들이 안정된 미래를 꾸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많은 청년은 이 제도들이 오히려 가장 고통스런 배신의 원천임을 배우며 성인기에 접어들었다. 이들은 모범이 될 만한 생애 경로, 세상에 대한 신뢰감, 또는 자신이 비틀거릴 때 도와줄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을 전혀 갖지 못한 채로 존엄과 자아 존중을 확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커밍 업 쇼트>, 8p

저자가 관찰한 ‘무드 경제’에서 새롭게 형성된 노동계급 성인의 치료 자아의 핵심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노동에 대한 낮은 기대치, 헌신하는 연애 관계에 대한 경계심, 사회 제도에 대한 폭넓은 불신, 타인들과의 깊은 단절, 감정과 정신 건강에 최우선으로 집중하는 태도(35). 무드 경제는 존엄, 건강, 진보의 특수한 감각을 창출하는데, 사람들의 성장 과정을 형성하는 경쟁과 자립, 자기 비난의 문화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감각이다. 감정을 ‘붙들지’ 못하는 사람은 무시와 혐오의 대상이 된다.(39) 이 경제에서 사람들은 노동이나 결혼, 계급 연대 같은 전통적인 통화가 아니라 감정들을 자아 변형 서사로 조직하는 능력을 통해 정당성과 자기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50). 불확실한 사회에서 ‘리스크의 사유화’(privatization)는 감정과 심리 발달에 집착하는 내향적인 자아를 정립한다. 이 자아는 유연한 경제와 포스트전통 사회 세계가 초래한 유동성과 불확실성으로 둘러싸인 삶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는 핵심적인 문화 자원이 되었다(51).

이렇게 치료 자아가 신자유주의 사회의 문화적 변동-무드 경제가 낳은 지배적인 유형이지만 이 자아 서사를 구성하고, 자아다움을 추구하는 접근성이 계급적으로 불평등하게 분배돼 있음을 지적한다. 치료적 자아 서사를 성공적으로 창출하려면 계급에 기반한 ‘연장 세트’tool kit가 필요한데 노동 계급은 언어 능력과 감정 표현, 물질 자원 등으로 구성된 이 연장들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에바 일루즈는 이렇게 설명한다. “노동 계급의 삶에는 치료적인 감정·언어 기술과 하비투스가 없다.”(52) 결과적으로 치료 자원들이 배제된 노동계급의 에토스로 인해 노동자들이 웰빙에 이르는 역량을 갖추지 어렵다고 한다면, 이 감정들도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53).

(<커밍 업 쇼트>의 이론적/방법론이 무엇인지, 어떤 면에서 유효한 분석과 통찰을 제공하는 데 성공 혹은 실패했는지 따져보기)

4 '나이 든 청년'으로 성장을 상상하기. 한국에서 '청년 이행기'를 보내고 있는 이들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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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 필링스 - 이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 앳(at) 시리즈 1
캐시 박 홍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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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한마디 쏘아주는 것, 그것이 주저되는 것은 아니다. 그거야 못 할 것도 없다. 문제는, 그런 내면적 갈등과 심지어는 언어적, 신체적 충돌에 노출될 가능성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게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주류 다수 백인 남성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스트레스다. 바로 이 인구 집단에 속하는 남편은 지금이야 나만큼이나 이 문제에 예민하지만 결혼 초기에는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바를 구체적으로 일일이 설명해주어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했다. 그렇게 설명하면서 느끼던 내 심정, 그것이 바로 '소수적 감정'이었다. (274)

한국계 미국인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를 번역한 노시내는 '번역가의 글'에서 자신이 직접 체감한 '소수적 감정'을 고백한다. 가장 가까운 사이의 상대방에게도 일일이 설명해주어야 비로소 인식할 수 있는 감정, 혹은 열과 성을 다해 설명해줘도 인식하는 데 실패할 수 있는 감정, 그래서 자신과 관계맺고 있는 사람들과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중 대다수에게 차라리 설명하기를 포기했을 법한 감정, '가서 한마디 쏘아주는 것'을 택한다고 해서 카타르시스가 찾아오지 않는 감정,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거나 부정하는 가능성에 항시적으로 노출돼 있으면서 발산도 수렴도 없는 폐쇄회로에서 영혼을 부식시키는 감정, 그런 '소수적 감정'이 놓인 자리가 제각각 다르니 한국계/아시아계 미국인 작가와 자신의 체험이 동일하지 않다고 확실하게 선을 그으면서도 자신이 찾아낸 하나의 공감 방식을 보여줬다. <마이너 필링스>를 읽게 될 독자들이 자신만의 공감 혹은 번역 방식을 찾아내 '소수적 감정'들(마이너 필링'스')이 좀 더 너른 보편성의 자장을 가질 수 있길 희망하지 않으셨을까 싶었다. 그러려면 개별적이고 특수한 캐시 박 홍의 내밀한 기록을 꼼꼼이 읽어내는 게 우선이겠다.

저자는 한국 독자들에게 남기는 말에서 '미국의 인종차별사'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차이나는클라스>에서 정희옥 교수가 미국의 아시아 혐오의 역사를 설명한 내용과 거의 포개졌다. 1800년대 서부개척 시대에 철도를 놓는 데 인력이 필요했던 미국은 중국인 노동자의 이민을 수용했다. 당시 중국인 이민자들은 아편전쟁의 패배에 따른 청나라 정부의 폭정(과도한 세금)에 못이겨 태평양 건너 미국으로 떠난 것이었다. '쿨리'로 불렸던 중국인 노동자들은 위험한 노동에 투입돼 목숨을 많이 잃었으나 이들에 대한 미국사회의 처우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을 건국했던 이들은 미국을 앵글로 색슨계 백인들로 이뤄진 '순수한' 백인의 국가로 건설하고픈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백인우월주의, 어쩌면 백인근본주의라 불릴 수도 있을 인종주의의 토양에서 팽창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전세계에서 노동력들을 미국 땅으로 불러모았고, <차이나는클라스> 강연에 소개된 일화처럼 일본계 미국인을 '흑인'으로 분류/판단하기도 했던 역사적 사례가 보여주듯 백인성/흑인성은 골상학과 같은 당대의 과학의 힘을 빌어 자의적이고 모순적으로 규정되었다. 이민금지법이 시행되었던 시대를 지나 이민국적법이 제정되었고,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이 발흥하며 소수인종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이런 역사적 투쟁을 통해 법적 권리를 쟁취해나갔으나 문화인류학자 김현경이 말한 '사회적 성원권'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쉬이 허락되지 않았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흑인과 대비 속에서 '모범 소수자'로 간주되었다. 흑인들처럼 범죄를 저지르거나 빈곤하지 않은, 근면하고 '우등한' 소수자(13). 영리하고 성공적인 집단으로 간주된 것은 맞지만, 그와 동시에 로봇 같고, 무감정하고, 쉽게 교체될 수 있는 존재(14).

저자는 이렇게 미국에서 보이지 않는 인종인 아시아인의 몸 안에 살면서 느끼는 자신의 상반된 감정을 가능하면 투명하게 풀어넣고자 한다고 했다고, 그러면서 "남들에게 좀 더 이해받고 눈에 덜 안 보이는 존재가 되고자" 이 책을 썼다고 집필목적을 밝힌다. 이 책에서 독자들이 자신의 일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로 끝맺음하는 '한국 독자들에게' 보낸 저자의 편지를 읽고 나서 자문하게 되었다. 나는 이 책에서 나의 일부를 발견했는지, 그리고 마티 편집부 레터에 영업당한 것이긴 하지만 이 책과의 만남을 성사시킨 나의 기대와 욕망이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평소 아시아 혐오 및 혐오범죄 소식을 접하며 미국에 유학을 가서 취업에 성공한 친구가 염려된 적은 있지만 사실 먼 곳의 이야기,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라는 감각이 있었다. 한마디로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한국사회 내부의 인종주의와 혐오의 양태들을 거의 매일매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인터넷을 매개로 전시된 정보의 형태로 수용했기에 (일일이 반응할 가치가 없다는 판단 아래) 의식의 초점을 의식적으로 비틀어 노이즈와 같은 상태로 전환시키거나 혐오의 흐름과 경향을 보여주는 신호이자 증상으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다. 그래왔지만 대중 사이에서 집단적으로 발현된 감정을 거시사회학적으로 관찰하고, 개개인의 내밀한 감정이 신체를 어떻게 변용시키고 자기기록, 수행적 글쓰기가 감정의 역량을 어떤 식으로 발현시킬 수 있는지 관심을 두고 있던 나였기에 예약주문한 <마이너 필링스>가 도착하자마자 매일매일 읽어냈다.

캐시 박 홍은 아시아계 미국인 시인으로서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을 타 인종, 젠더, 역사를 가로지르며 미국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신체'로 위치지어진 자신의 몸의 레이어를 종적으로, 횡적으로 탐구한다. 분노, 우울, 짜증, 불쾌함이라 적었을 때 개개인의 감정의 지층과 결, 맥락을 전혀 담아내지 못하는 명사의 둔탁함과 우둔함에 맞서 양가적이고 복합적인 감정에 대한 두터운 서술thick description(클리퍼드 기어츠)을 통해 '이 감정은 사소하지 않다'는 증명과 선언을 완수해낸다. 그동안 내 무지와 몰이해로 인해 타인의 감정을 대상화된 인식틀에 대입해 납작하고 평평하게 단순화시켜 버렸던 기억들이 떠오르곤 했다. 소수적 감정을 번역하기 위한 윤리적 태도와 인식론적 방법이 결여돼 있었던 순간에 내 몸을 은근슬쩍 보편의 지위에 올려놓았던 안일하고 게을러서 폭력적이었던 마음 같은 것들. 노시내 번역가의 일화처럼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을 일일이 설명해주길 부탁하기도 조금 두렵고 부담스러워서 넘겨짚고 오해를 일삼았던 마음 같은 것들. 그렇게 신중한 침묵 속에 틀어앉아 양가적이고 복잡한 소수적 감정의 속내를 살피기를 회피했던 날들이 머릿속에서 지나고 나니 저자가 말했던 '자신의 일부'의 질문이 돌아왔다. 저자와 직접적으로 동일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지만 자신이 놓여 있던 소수적 위치를 확인하고, 소수적 감정들 간의 보편적 공감의 선을 새롭게 긋고자 했던 노시내 번역가의 번역과정을 살피며 일말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내면적 갈등과 심지어는 언어적, 신체적 충돌에 노출될 가능성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게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그런 스트레스 속에서 남들에게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나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소수적 감정이 여전히 제 거처를 얻지 못한 채 몸속을 돌아다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잡대' 출신. 헤테로 시스젠더 비장애인 수도권 거주 남성으로서 기득권(내지 특권)을 누려왔던 내게 혐오 대상이 되고, 혐오 대상으로 사는 삶이 어떤 건지 조금이나마 알게 해준 대상은 학벌주의였다. 학벌주의를 소재로 썼던 지난 글에서 지적했듯 학벌주의는 다른 이데올로기와 혐오 담론에 비해 영향력과 심각성이 약화된 것처럼 보인다. 기업에서 '블라인드 채용' 시스템을 도입해 학벌에 따른 차별을 줄이고자 하는 명시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능력주의'의 이상대로 학벌과 같은 출신 배경(학벌 또한 능력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하지만)보다 업무 능력을 중시하는 기조가 예전에 비해 많아졌다고 들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봤을 때 학벌에 따른 차별보다 학력에 따른 차별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기에 불안정하고 취약한 비정규직 노동자/플랫폼 노동자/긱 이코노미, 정말 목숨이 걸린 위험한 노동환경에 놓인 블루칼라 노동자 이슈가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나 역시 이런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고, 사태의 심각성이나 중요성에 비해 조명을 충분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얼마 전 네이버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몬 '직장 내 괴롭힘'의 요인 중 하나로 학벌주의의 사내문화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학벌주의는 아시아계 미국인 캐시 박 홍에게 은근하고 교묘하게 자행된 인종차별처럼 고도로 섬세하게 발전했음을, 발전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분야와 직종에 따라 풍토가 제각각 다를 것이다. 개발자 사회의 경우, 코딩만 잘하면 실력으로 인정하고 대우해준다는 말이 있지만 ... 최상위권 대학 그룹 내부에서 교묘한 구별짓기와 알력 다툼도 존재하겠으나 지방대 혐오 및 차별은 어떤 식으로 진화했을지 궁금하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요즘엔 특히 사적 영역에서 낯선 이에게 출신 대학을 묻는 행위가 무례하다는 인식이 어느 정도 확립된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질문, 혹은 호구조사를 적지 않게 받아봤다. 한 번은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기사에서 처음 만난 상대에게 출신 대학을 묻는 문화/관습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있어 친구에게 공유한 적이 있다. 상대방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얻는 데 가장 효과적인 질문일 수 있기 때문에 꼭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게 친구의 답변이었다. 나는 학벌주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지방대를 비롯해 대학 서열에 따른 혐오가 놀이처럼 행해지고 있는 현실에서 기사의 취지와 메세지를 보충설명하는 대신 대화주제를 바꾸는 편을 택했다. 명문대에 다니고 있는 친구에게 그런 설명을 하는 내가 구차해질 것 같아서, '적당한' 거리두기를 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서술과 발화는 주관적이고 특수한 감정과 이익을 대변하지 않기 어려워 내가 '비합리적'으로 굴게 될까 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마 그 친구가 내 의견에 공감해주지 않으면 상처받게 될 거란 염려와 걱정도 있었을 것 같다. 몸이 없는 것처럼 굴 수 있는 글 - 담론의 영역에서 논리로 무장해서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었지만 (공격이나 반박, 비판을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지만) 몸에서 도저히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현장에서 나는 침묵을 택했고, 후에 침묵보다 편한 기만을 택했다. 처음에 출신 대학을 밝히지 않고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밝히고 다녔는데(출신 대학을 밝히고 싶지 않음을 눈치채는 이도 있었지만 대학에 다니지 않고 독학하는 거냐고 확인하려는 이가 있어) 나중에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어차피 한 번 만나고 지나칠 사이에서 진실한 필요가 없다고 자기정당화를 했으며, 관계가 지속되는 경우 '신뢰할 만한' 타인에게 선택적으로 사후고백을 했다.

왜 그랬을까. 혹시라도 출신대학을 들었을 때 상대방의 표정에서 미묘한 감정의 기미를 포착하게 될 까봐 걱정했던 것일까. 적어도 인터넷 커뮤니티를 채우고 있는 혐오의 논리와 언어를 구사할 이들이 아니라고 예상되었으나 온전히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평소 감수성이 예민하고 정치적 윤리적으로 섬세한 스탠스를 취하던 친구가 '지잡대' 욕하는 걸 보고 (평소 잠을 깊게 못 자는 친구였는데 지방의 고향에서 지내는 동안 지방대학 축제가 끝나고 새벽에 소란스럽게 했던 모양이었다. 욕할 만한 상황인 건 자명했으나 평소 말을 아끼고 언어에 예민하며 표현을 조심스럽게 하는 친구였던 만큼 ...) 학벌주의는 입시라는 트라우마를 저마다 겪어낸 한국인들의 몸에 각인돼 무의식을 이루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만의 수준에 도달하자 자기분열과 자기혐오가 심해졌다. 차라리 맘 편하게 당당하게 사실을 밝히고, 대놓고 무례하게 혐오의 언어를 구사하는 이를 맞딱드린다면 '가서 한마디 쏘아주는 것'을 했더라면 훨씬 나았을 거란 후회가 몰려왔다. 여기에 이르고 나니 결국 내가 스스로를 긍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입시를 외면하고 회피하는 선택을 했던 실수와 과오를 인정하지 못하는 데서 형성된 자기혐오가 학벌주의를 음화된 방식으로 내면화하게 만들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 노시내 번역가가 설명한 '스트레스'로부터 상당 부분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물론 취업 과정을 비롯해 언제 어디서 출신 대학의 속살을 내보여야 하는 순간이 찾아올지 모르는 상황은 변함 없지만 대학원의 간판이 갑각류의 외피처럼 단단하고 든든하게 느껴졌다. 제도나 이데올로기에 억압받고 차별받은 소수자적 이들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과잉 자기동일화하게 되는 메커니즘, 나는 비판적으로 자기성찰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감정은 저 자신의 논리에 따라 이상한 길로 빠져들고 있었다. <마이너 필링스>를 읽으며 깨달은 바가 있다면 '소수적 감정'을 기록하는 작업이 주관적 내면적 표현에 그치면 나르시시즘을 강화하는 식으로 귀결될 위험이 크다는 것이었다. infernal circulation 지긋지긋한, 지옥과 같은 악무한에서 벗어나려면 사회적으로 '인종화된 몸'(프란츠 파농)으로부터 탈정체화하는 힘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구조적 폭력, 상징폭력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역사를 공부하고, 이를 변혁하고자 운동했던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타자들의 개별적 고통들을 듣는 데 귀 기울이고, 소수적 감정들의 보편성을 디딤돌 삼아 기존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나 자신과 내 정체성 사이의 내전을 종식시키는 게 출발될 것 같았다. 그 출발로 내 '소수적 감정'을 기록해둔다. 캐시 박 홍이 <블레이드 러너 2049>, 웨스 앤더슨의 영화(특히 <문라이즈 킹덤>), J.D.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원래 별로 안 좋아했던 책이라 통쾌함을 느끼며 읽었다) 등 백인 남성성 및 판타지의 서사를 (굳이 명명하자면 '탈식민주의적 독법'으로) 비판적으로 독해해냈듯 예술 텍스트와 사회에 비판적으로 개입해 목소리를 내고 싶다. 더 많은 소수적 감정들이 옹호되어도 괜찮다는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는, 완고해보이는 기존 질서에 불편한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소수적 말하기를 실천할 수 있길.

캐시 박 홍은 <마이너 필링스>에서 '소수적 감정'을 소수자 및 소수집단의 자기정체성을 강화하고 확립하는 데 기여하게끔 서술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으로서 겪은 감정을 내밀하게 서술하되 가족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들의 이민사를 살피고, 흑인과도 다른 갈색인(황인을 대체하는 용어인 듯하다)의 소수자성을 재현하는데 몰두하고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백인우월주의가 자행해온 인종차별의 역사에서 소수적 인종들이 어떤 식으로 연대하고 반목했는지 복잡다단한 역사를 성찰한다. 그 과정에서 언론에서 대량으로 생산한 이미지-로드니 킹의 구타 장면과 LA 시가지에 작은 화염이 점처럼 박힌 모습을 방송국 헬리콥터가 멀찍이서 촬영한 장면-가 1992년 LA 폭동 사태의 지배적 기억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실 김-깁슨 감독의 <4.29> 다큐멘터리와 당시 흑인들의 소수적 감정을 다룬 시인 완다 콜먼과 소설가 폴 비티의 책들을 소환해 "착한" 한국 상인 대 "못된" 흑인 동네라는 간명한 공식(94)에 들어맞지 않는 역사의 실상을 좀 더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자고 권한다. 맬컴 액스와 함께 흑인민권운동에 동참했던 아시아계 미국인 운동가의 초상을 복원해내기도 하고, 중국계 트랜스젠더 작가 우 창이 다큐멘터리 <와일드니스>로 성공을 거뒀지만 자신과 우정을 나눴던 라틴계 트랜스젠더들에게 느끼는 죄책감을 비판적으로 포착해내기도 한다.

'아시아계' 혹은 제3세계 작가에게 부과되었던 소수인종의 인종적 자기재현의 요청과 불화하며 모더니즘에 기울었던 자신의 미학 체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아시아 여성'의 정체성을 이미지와 문자언어를 통해 실험적으로 탐구했던 차학경의 죽음, 그동안 이상하리만치 말해지지 않았던 그녀 인생의 진실을 침묵과 망각으로부터 건져낸다. 전기적 사실을 바탕으로 작품을 읽어내는 독법은 전문가 사회에서 사장된 것에 가까울 정도로 낡고 세련되지 못하다고 치부되지만 차학경이 그 누구보다 자신이 누구(who)인지 천착하는 과정에서 어떻게(how) 쓸 지를 고민했던 작가였기에 나는 작가의 선택을 지지할 수 있었다. 에밀리 정민 윤의 작품 제목대로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을 2차세계대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가해졌던 야만적 폭력에서부터 한국군이 베트남의 하미 마을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 트럼프 정권 당시 아시아 인종을 향한 혐오 범죄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으로 펼쳐서 보여준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피해자성'이나 '당사자성'의 굴레에 갇히지 않고 소수자들이 맞서 싸워야 하는 대상은 누가 누구의 적인지 규정하는 권력(257), 나 자신을 나의 적으로 삼는 권력에 맞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사수해야 한다는 메시지일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사실

<감사의 말>에 언급된 학자들 중 사라 아메드와 로렌 벌랜트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후마니타스 출판사의 '딕테' 시리즈에 포함된 일원이기도 하다. 사라 아메드는 <행복의 약속>The Promise of happiness과 <고집스런 주체>Willful subjects, 로렌 벌랜트는 <작인한 낙관>Cruel Optimism. 딕테 시리즈에 대한 설명문에서 일부를 여기 옮긴다. "한국계 미국인 여성으로서 인종적 억압과 젠더 억압이 교차하는 상황에서 '말하고 쓰기'의 가능성을 탐색한 차학경의 <딕테>에 대한 이어 말하기이기도 하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침묵하며 지배 언어를 그대로 받아 적었던 수동적 받아쓰기dictee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우리 안의 다른 목소리, 거대 서사에서 자리를 찾지 못한 자들에 빙의해 듣고 말하고 쓰는, 능동적 받아쓰기를 통해 침묵을 비우고자 한다." 캐시 박 홍은 시인답게 언어, 구체적으로 영어에 대해 예민한 감각과 첨예한 의식을 보여준다. 그녀는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며 달변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여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녀가 '원어민'의 언어를 능숙하게 매끄럽게 모방하길 욕망하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녀는 소수자로서 영어를 '소수 언어'(들뢰즈-과타리)적으로 전유하고자 한다. 영어 내부의 이질성, 차이를 현시하고 여기서 문학적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발굴해내고자 한다. 딕테 시리즈의 서술처럼 수동적 받아쓰기가 아닌 능동적 받아쓰기, 대상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관조'theoria의 공간을 확보하고 보편적인 언어를 구사하거나 침묵을 통해 말해지지 않는 걸 전달하는 모더니즘의 문법을 넘어 그녀는 침묵을 비워낸다. 테레사 학경 차의 문장으로, 에밀리 정민 윤의 문장으로, 그녀 자신의 문장으로. 아껴 읽고 싶었으나 더 빨리 읽어버린 이 책을 곁에 두고두고 오래오래 곱씹고 싶다.

+ 여성 예술가들의 우정을 그려내보고 싶다는 야심으로 자신의 대학시절의 기억을 담은 장chapter은 '어떤 배움'의 제목을 달고 있다. 에린과 헬렌 그리고 자신 사이 '애증'이란 간단한 말 안에 포섭되지 않는 우정을, 그녀들의 재능과 불안정함, 열정과 좌절을 성장소설 읽듯, 시트콤 보듯 재밌게 또 슬프게 공감하며 읽었다. 타인의 서사, 특히 고통을 착취하듯 빌려다 쓰는 글쓰기의 몰윤리성과 관련한 쟁점들이 제기되는 모습들을 지켜본 입장에서 서로의 삶이 얽혀 있는 '친구 사이' 여성 예술가들끼리 우정의 사수와 파탄의 경계선에서 서사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대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 캐시 박 홍의 시, 그리고 그녀가 영화 <미나리>에 남긴 코멘트나 글이 있다면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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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를 만들다 열린책들을 만들다 열린책들 아카이브 1
홍지웅.열린책들 편집부 엮음 / 미메시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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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리뷰는 아닙니다] 


책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한다. 출판계에 몸 담고 있는 지인을 곁에 두고 있는 건 아니어서 출판물에 활자화된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의 <읽는 직업>, 기획회의 편집위원회에서 엮은 <한국의 출판기획자>, 장은수 편집자의 <출판의 미래>, 은유 작가님의 <출판하는 마음>을 재밌게 읽었다. 유유 출판사에서 내고 있는 '~~책 만드는 법'도 서재의 출판/독서 섹션에 구비해뒀다(어느 작가님께서 이런 명언을 남기신 적이 있다. 서재에 꽂아두고 책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많이 된다고. '시작이 반'이라 했을 때 책을 사서 책장에 꽂아두는 것으로 독서의 절반을 달성한 거라고 우겨본다).

한 권의 책이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작가, 편집자(교정/교열, 편집/ 재교-삼교-오케이교 ...), 교정교열 전문편집자(일드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의 코노 에츠코가 맡은 역할이 바로 교열편집자이다. 극중에서 교열만 하지 않지만 ㅎㅎ ), 북디자이너, 인쇄소 직원 등 '생산 라인'의 직종만 해도 다양하다. 마케터, 오프라인 대형서점, 동네서점(독립서점), 인터넷서점, 신문사의 출판담당기자, 도서관, 출판잡지, 도서출판 팟캐스트, 유튜브(북튜버) 등 책을 다루고 책과 관련된 분야로 시야를 넓히면 출판산업과 출판문화를 지탱하고 구성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산업의 파이를 놓고 봤을 때 출판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은 편이고, 학습지와 수험서를 내는 대기업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출판사들은 중소 기업 규모의 영세적이라 알려져 있다. 그래서 어디선가(<한국의 출판기획자>로 기억한다) 장은수 편집인이 대기업 출판사가 나오면 자금력과 인프라를 바탕으로 과감하고 선도적인 기획출판을 이끌 수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이런 출판 풍토에서 출판이 불황이다, 이 판은 망해가고 있는 판이다 같이 자조적이고 체념적인 인식과 정서가 출판계 내부에서 꽤 만연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출판업계의 노동조건은 열악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영세한 출판사의 물적 토대에 더해 출판업 본디의 노동집약적 성격이 합쳐진 결과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장은수 편집인의 페이스북에서 '3년차 편집자'가 출판계에서 희소하고 귀한 존재라고 말씀하신 걸 본 적이 있다. 출판업계의 열악한 처우로 인해 인재들이 떠나고 다른 업계에 뺏기고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회사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 자세히 모르지만 연차별로 발달심리학에서 말하는 발달/성장 단계 같은 게 존재한다고 들었다(파주에디터스쿨에서 <천년의상상>의 선완규 편집장의 강의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 3년차에는 ~~ 역량을 키우는 시기(~~을 경험하고 발달시켜야 하는 시기), 5년차에는 ~~, 7년차에는 ~~. 아무래도 출판업계 자체가 이직이 잦고, 다른 직종에 비해 오래 몸 담을 수 없는 구조여서 (은퇴?가 이른) 출판인으로 오래 버티고 산다는 것 자체가 난이도가 높은 도전인가 보다. 그래서 그런지 편집자의 전문성을 제대로 인정해주고, 대우가 달라져야 출판업계의 내실을 안으로부터 다질 수 있을 거라는 지적이 있는 것 같다. 소명의식에 호소하고, 장인정신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산업'인 출판을 지탱하고 발전시키기 역부족일 것이기에 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여전히 계속 새로운 책들이 나오고 있고, 그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알라딘에서 관심 가는 작가와 출판사, 시리즈물에 '신간 알림' 서비스를 설정해두었는데 오늘만 해도 8권의 신간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이 떴다. 8권 뿐이랴. 아마 오늘 하루만 해도 100권 이상 신간이 출간되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고 싶은 열린책들 출판사는 오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으로 유명한 요나스 요나손의 <달콤한 복수 주식회사>라는 번역소설을 출간했다. 번역을 맡으신 임호경 번역가의 이름을 2009년 1, 2월 즈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 시리즈에서 처음 봤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겨울방학에 책을 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고, <타나토노트>, <뇌> 등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을 바탕으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을 고른 것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1시간 이상 집중해서 정독하는 시간이 쌓여서 그런지 책을 읽어낼 수 있는 힘이 길러졌고, 고등학교 진학 이후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며 '야자'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세계문학전집으로 민음사 책들을 많이 읽었지만 열린책들 책들도 많이 읽었다. 아니 사실 많이 읽진 못했고 많이 샀다 ! 최초로 출판사와 '라포'를 형성한 대상이 <열린책들>이었기 때문이었다.

1 베르나르 베르베르 2 세련된 디자인 3 세계문학과 장르문학을 아우르는 지향성이 세련되게 느껴짐 4 홍지웅 사장님. <열린책들>의 입덕 포인트를 꼽아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한 작가와 지속적인 파트너십을 가져가 '대표작가'로 출판사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점이 유효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대표작 <개미>에 홍지웅 사장님이 인물로 등장하는 부분도 라포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디자인의 경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도 굉장히 세련된 느낌을 주었지만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이 한 손으로 편하게 쥘 수 있다는 점, 크기가 작아서 책장에 세워두면 블록이나 성냥갑 같은 귀여운(?) 느낌을 준다는 점이 마음에 끌렸다. 사철 방식으로 제작해 책을 오래 동안 튼튼하게 보관할 수 있다는 문구가 신뢰감을 줬다. 추리소설, 범죄소설, 스릴러 소설, SF소설 같은 '장르문학'을 세계문학전집에 포함시킨 점이나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의 전신 격인 Mr.know 세계문학전집에서 '젊은 고전'들을 소개한 점(민음사의 모던 클래식 시리즈처럼)도 굉장히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2010년대 초반에 도서전 같은 행사에서 젊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최애 출판사를 꼽는 설문에서 문학동네와 열린책들이 가장 높은 득표를 기록했던 걸로 기억이 난다. 그렇게 <열린책들>에 대한 호감은 어느 이벤트에 당첨돼서 무려 움베르토 에코 컬렉션 전집+ 움베르토 에코 소설들 + 미의 역사/추의 역사 를 받게 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파주출판단지를 처음 갔을 때 가장 인상적인 출판사 사옥/건물 역시 <열린책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열린책들의 형제 출판사 <미메시스>의 뮤지엄. <미메시스> 출판사는 내가 가장 최초로 접한 그래픽노블인 <아스테리오스 폴립>를 포함해 훌륭한 그래픽노블들을 지금까지 꾸준히 출간하고 있고, 건축과 예술 관련한 책들을 많이 내고 있다. 그런데 사실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을 읽은지 꽤 되었다. 표면적으로 그때그때 당장 읽어야 하거나 읽고 싶은 책이 <열린책들>에서 낸 책이 아니었던 순간들이 누적된 결과이기도 하고, 한국문학/서양철학/사회학/문화이론 분야에 독서가 집중돼다 보니 접점이 잘 안 생긴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린책들> 출판사의 홍지웅 대표를 '책 만드는 사람들' 시리즈(라고 부르기엔 거창하지만... 소박하게 덕질하는 마음으로 시작하려 한다)의 첫 손으로 꼽은 이유는 월북출판사의 홍영환 대표님이 쓰신 <출판인 홍지웅의 생애사 연구-번역문학을 중심으로>를 재밌게 읽어서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1743.html#csidx1409f73bcf3f8c09b47e2fc2818ddb2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출신으로 학내 신문 편집장을 역임했던 홍지웅은 '도스토예프스키를 사랑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는 <열린책들> 출판사를 설립하고 초기에 주력한 대상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들이었다. 1988년 '해금' 조치란 사회문화적 변화 속에서 아나똘리 리바꼬프의 <아르바트의 아이들> 시리즈와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니꼴라이 오스뜨로프스끼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같은 책들을 출간한 것이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 판매고를 올리지 못해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한다. 가장으로서 가정을 책임져야 했고, 사장으로서 회사와 직원들을 책임져야 했기에 대출을 받아 출간한 책들이 어느 수준 이상으로 터져줘야 생활을 영위하고, 그 다음 책을 기약할 수 있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동구권의 해체에 따른 냉전의 종식, 1991년 5월투쟁의 패배라는 대내외적 사회변화 속에서 그는 다른 유럽문학을 출간하며 돌파구를 모색했다. 해외에 출판사와 에이전시에 접촉하고, 계약을 성사시키는 국제 네트워크와 입지전적 면모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유럽문학의 성적이 괜찮아서 위기를 넘기고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어 파스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같은 밀리언셀러들이 터져주면서 상승곡선을 그리게 된다(어느 인터뷰에서 홍지웅 대표는 <열린책들> 사옥을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지어줬다면서 고마움을 표한 적이 있다). 좀머 씨 이야기의 경우, 당해에 '올해의 상품'에 꼽히기도 할 정도로 센세이션한 반응을 이끌었다고 한다. 이념/이념적 진정성과 같은 '무거움'으로부터의 도피, 민족 국가 사회 같은 거대한 집단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개인의 심리, '혁명/변혁의 시대'에서 소비자본주의로 급격한 사회변동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했다는 '좀머 씨 신드롬'에 대한 분석이 있으나 추후에 1990년대에 대한 비판적인 문화론적 독해의 대상으로 새롭게 논의될 필요가 있겠다.

그렇게 상업적으로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한 뒤에 도스토예프스끼 전집, 프로이트 전집, 움베르토 에코 전집,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같은 전집들을 출간한다. 전작주의와 개정판 출간이라는 <열린책들>의 특징이 전집 출판에서 잘 나타난다. 프로이트 전집의 경우 판본이 세 가지 존재한다. 1997년 초판본, 2004년 개정판, 2020년 개정판. 최근에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를 출간했으며, 5년 전 열린책들 창립 30주년 기념 대표 작가 12인 세트를 출간해 북디자인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학부 시절에 정외과 교수님 연구실을 찾아가곤 했었는데 그때 이 세트를 소장하고 계신 걸 확인하고 말씀드렸더니 디자인이 너무 좋아서 사셨다고 설명해주셨다. 그런데 구매자/독자 리뷰를 확인해보니 반양장본으로 10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제작하다 보니 상태가 고르지 못해 비판의 목소리가 꽤 존재하는 눈치다. 이 세트 디자인을 맡으신 석윤이 북디자이너의 채널예스 연재글을 너무 재밌게 읽었다. 그런데 후임(?)이 유지원 선생님이셔서 나 미쳐...).

링크를 가져온 기사의 인터뷰에서 홍영완 대표가 지적하듯 <열린책들>의 대표저자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이건 사실 다른 출판사들도 갖고 있는 문제이긴 하다), 한국문학 출간의 부재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고, 일부 개선된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여전히 번역출간을 주력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미메시스의 <테이크아웃> 시리즈는 괜찮은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한국 출판시장에서 건재함을 자랑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더해 요나스 요나손 같은 작가가 벌어다주는 돈으로 인문 사회 과학 분야의 양서들을 꾸준히 내려고 노력하는 편인 것 같다. 특히 출판 편집자들이 교과서처럼 애용한다는 <열린책들 편집 매뉴얼>을 꾸준히 출간하고, 출판계 후학(?) 양성에도 힘 쓰시는 걸 보면 출판인-편집자 라는 직업에 진심이신 것 같다(보통 대표 자리에 오르면 현업에서 물러나 경영을 맡는 경우가 많은데 현장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여전히 현역 편집자로서 필드에서 활동하신다고 한다). '아카이브'를 중시하고 성실히 기록을 남겨 후대에 전수하는 부분도 출판인으로서 멋진 부분이라 생각한다.

여태껏 좋은 얘기들을 많이 써놨는데 사실 노동현장, 직장으로서 '열린책들'이 얼마나 괜찮은 환경일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것까지 꼭 포괄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열린책들> 정도 되는 출판사가 어느 정도 환경일지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홍지웅 사장님이 일선에서 물러나 은퇴하고 나면 <열린책들> 출판사가 어떻게 될지도 ...

좀 더 알찬 내용의 본격적인 출판인 탐구 성격의 글이 되려면 홍지웅 사장님이 직접 쓰신 책들을 읽었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시간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책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꾸준히 기록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이를 너무 묵혀두기보다 부족하지만 일단 저질러보자는 생각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작년보다 올해 더 많은 종수의 책을 출간했다는 데서 보람을 찾는 어느 출판사 대표의 말에서 출판인이란 무엇으로 사는 존재인지, 누군가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 기쁨에서부터 문화를 창달하는 이로서 지닌 소명 의식(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한 치열한 고뇌, 사회에 파문을 일으키고자 하는 야심)까지 다양한 레이어의 꿈과 욕망들이 궁금해졌다. 평생 책을 만들며 '할아버지 편집자'로 살고/죽고 싶다는 소망,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것을 세상에 내놓고자 하는 소망, 독자와 책의 연결(성좌 그리기constellation)을 꿈꾸며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 개인적으로 <열린책들>에서 낸 책 중 딱 한 권만 꼽으라면 <그리스인 조르바>를 꼽고 싶다(가장 재밌게 읽은 책은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 !!). 세 번 읽은 책. 아마 한 번 더 읽게 된다면 문학과지성사 판으로 읽게 될 것 같지만.

+ 고2 때였나. 수준별 분반을 운영했었나, 모종의 이유로 반을 이동해서 수업을 들어야 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다른 반에서 열린책들 판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양장본 말고 엄청나게 뚱뚱한 페이버백 버전)을 읽고 있었는데 (사실 가계도 - 이름 정리를 제대로 안 하고 읽어서 내용을 따라가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지만) 다른 반 아이가 다가와서 책 두께를 확인하고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약간 나를 신기해하고, (좀 과장하면) 경이로워 했던 순간. 그런 허세/자부심의 순간들이 독서의 고단함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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