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반지성주의
리처드 호프스태터 지음, 유강은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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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미국의 반지성주의>에 대한 리뷰는 아니고, 이 책을 바탕으로 진행된 '반지성주의' 강의에 대한 리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퍼가 아닌 리뷰로 글을 올려도 무리는 아니겠다 싶어 글을 올립니다.

 

문제의식 : 지식인과 반지성주의

 

나는 지성사와 문화사 연구에 관심이 많은데 515일 비교문학문화방법론 특강 반지성주의 세션에서 이택광 교수의 수업을 듣고 맑스주의와 반지성주의를 연결시켜보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강의를 간략하게 요약해본다면 반지성주의는 반공주의와 기독교 복음주의의 결합물로 인식되지만 여기에 항이 하나 더 추가돼야 하는데 바로 자유주의이다. 미국에서 진보는 리버럴이고, 이 리버럴들은 백인 노동자들의 반지성주의로 인해 트럼프가 당선되었다고 반지성주의를 비판하지만 사실 그들은 반지성주의와 은연중에 공모관계를 맺고 있다. 반지성주의는 자유주의의 이면이라 볼 수 있는데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반지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정초자 중 한 명인 홉스의 저작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데 홉스는 경험과 같은 계열의 심려prudentia를 이성과 같은 계열의 학식(사유)sapientia 위에 위치시킨다. 무기를 다루는 데 있어 탁월한 능력과 기교를 갖추고 있는것이 중요하지 무기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책으로 아무리 배워도 실전에서 쓸모가 없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 대중은 자신보다 뛰어난 역량의 소유자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막상 그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대중에게는 반엘리트주의의 정서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홉스는 기본적으로 강력한 주권자를 지지하는 국가주의적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반민주주의자로 분류되지만 강력한 주권의 필요성을 만인의 평등성에 찾는다는 점, 또 안보를 비롯한 국가의 역할을 뛰어넘는 월권적 권력 오남용에 적극적으로 반대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자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이 자유주의 정치철학은 그리스 시대 소피스트들부터 계보가 이어지는데 이들의 인식론적 회의주의가 정치적 냉소주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좌파의 상황과도 관련이 깊다. 체제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들고, 자본주의를 유일한 현실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변혁할 수 있는 래디컬한 사상과 정치운동이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앤서니 기든스가 천명한 3의 길부터 중도 실용주의 노선이 우세해졌고, 이 경향은 기존의 정치세력의 몰락을 극명하게 보여준 마크롱의 당선까지 이어지고 있다. 좌파가 몰락한 자리에 극우가 득세하고 있는 가운데 정치는 소멸되고, ‘사물들의 관리를 행하는 행정만이 남는다. 이런 정치적 맥락에서 지성주의는 결국 소피스트부터 영국경험론, 영미철학으로 이어지는 영미철학(바디우 식으로 표현하면 반철학)의 반대급부, 플라톤 전통의 대륙철학, 그중에서도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주장하는 좌파들의 입장이다.

 

 몇 가지 질문이 생기긴 했다. 진보적 자유주의 지식인 또한 반지성주의에 기여한다는 건 자유민주주의라는 체제수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럴진대 반지성주의의 개념규정이 좀 더 명확하게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반지성주의가 표면적으로 지식인에 대한 비판이나 지적 활동을 통한 지성의 습득에 대한 비판을 의미하고, 이면적으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는 점까지 이해가 되는데 자유주의 체제에 반하지 않는 입장은 모두 반지성주의인지 의문스러웠다. 특히 지성주의를 공산주의와 등치시켰을 때 칼 포퍼의 반증가능성을 배제하고자 하는 전체주의적, 도그마적인 태도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지성주의, 또는 플라톤 계열의 철학(반철학에 반대되는)이 엘리트주의적 측면을 띤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또 거대 담론에 대한 회의가 이어지고 일상성과 차이, 사소한 것에 집중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했지만 이제는 다시 일반이론과 총체성을 재사유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기존의 후기구조주의를 비롯해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을 수용하고 대화하는 방식으로 이론이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지성주의를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데 국한시키지 않고 사민주의나 공산주의를 갱신하고 쇄신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게 생산적이지 않을까 싶다.

 

 반지성주의할 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일베처럼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거부하고, 부분적인 사실이나 경험에 기초해 가치나 이념, 지적 담론을 부정하는 태도였다. 확실히 한국에서 반지성주의 집단으로 표상되는 일베의 쾌락의 극단적 평등주의나 모두가 다 속물이고 병신이라는 점에서 평등하다는 사고방식, ‘정치적 사실주의를 내세워 팩트 너머의 이념이나 대의, 진실을 부정하는 점을 통찰하는 데 반지성주의는 유효한 관점을 제시한다. , 페미니즘에 가해지는 비판과 반대의 목소리를 분석하는 데도 있어서도 그렇다. ‘페미니즘은 피해망상증에 가까운 정신병이다같은 원색적인 비난뿐만 아니라 한국의 페미니즘은 ~~’라는 식으로 서구의 사상을 그대로 이식해서 한국적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식의 주장이나 페미니즘은 필요하지만 메갈리아는 여자일베다라는 식으로 온건하게 제도권 내에서 성 평등의 실현을 지지하되 급진적으로 갈등과 분란을 조장하는 운동에 있어 맹목적으로 적대적인 자세를 보이는 입장도 반지성주의의 관점으로 고찰해볼만한 대상이다.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자임하는 남성들 중에는 정말이지 페미니즘을 공부의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고, 공부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사람이 노동운동이나 노조, 마르크스 얘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어 물어뜯는 것처럼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부드러운 통치는 가부장제 질서라는 반지성을 비판하는 페미니즘의 지성의 목소리를 면역학적으로 부정하는 모양새다. 그들의 주장은 논리가 결여된 주관적인 주장, 자신의 육체성과 비체성을 순수한 정신logos으로 지우지 못한 오물과 같은 것이기에 자아를 오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원천적으로 목소리voice 자체를 차단하는 것이다. 이렇듯 반지성주의는 신자유주의 사회와 적극적으로 연결시켜 논의되어야 하며, 신자유주의라는 체제를 논하는 것이기에 맑스주의와 반지성주의(사실 이택광의 논의에 따르면 반지성주의 안에 이미 내재적 타자로서 맑스주의/공산주의가 자리하고 있지만)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아직까지 강력한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는 기독교 (복음주의), 반공주의, 자유주의는 각각 낙태금지법 투쟁에서 제기된 여성들의 자기결정권을 비롯해 소수자들의 권리를 억압하는 젠더 갈등, 신자유주의 체제하에 비정규직 양산을 비롯한 노동의 위기와 흙수저 담론에서 제기된 불평등 문제를 포함한 계급 갈등,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사회민주주의적 복지 담론을 색깔론을 통해 원천적으로 봉쇄했던 이데올로기 갈등을 조장하는 핵심적인 기제였다. 반지성주의를 단순히 신자유주의 이후 사회적인 것의 죽음, 사회 없는 사회의 도래에 따른 문화적 현상으로 볼 게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시기부터 구축된 모순의 중층구조의 결과라고 보는 편이 논의를 생산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김교신, 함석헌, 장준하 등 서북 계열의 월남 지식인들을 한국 보수의 뿌리이자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이라고 본 김건우의 작업이나 남한의 근대화와 서구화의 창구였던 기독교가 반공주의와 결합하여 보수층을 형성하고 있다고 비판적으로 분석한 김진호의 작업들을 유심히 지켜본 나로선 앞으로 이 주제를 좀 더 발전시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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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5-20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스리 님. 소식이 없길래 군대 가신 줄 알았는데..
잘 지내시고 계십니까 ?

2017-05-20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문학의 기쁨
금정연.정지돈 지음 / 루페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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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돈과 금정연(가나다 순으로 표기한다면 위치를 바꿔야겠지만 <작가세계>에서 진행한 '이 계절의 문학' 대담을 보면 대부분 이 순서로 이름이 배치되어 있어 이를 따르기로 했다. 나이도 많고, 가나다 순으로도 앞에 위치한 금정연이 '서평가'이기 때문에 뒤에 배치된 게 아니길 바랄 뿐이다)이 좋다. 다짜고짜 이렇게 고백하면 말하는 입장에서나 듣는 입장에서나(나는 의도적으로 쓰는 입장에서나 읽는 입장에서나 라고 쓰지 않았는데 나는 심층독서가 '듣기'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눈으로 훑으며 '보는' 것과 마음속으로 읽으며[묵독] 텍스트에 내면의 소리를 굴절시켜 '읽는' 것은 다르다. 물론 이 글은 읽지 않고 봐도 무방하지만 방금 전 읽은 그들의 대담에서 인용된 롤랑 바르트의 구절을 '킵'해놓고자 썼다. 말이 나온 김에 생각을 좀 더 풀어낸다면 정보와 지식의 용량capacity이 유한하다면 우리는 1 글뭉치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무엇을 읽을 것인가)와 2 글뭉치를 어떤 식으로 재구성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것인가(어떻게 읽을 것인가. 즉 해석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맑스주의와 페미니즘, 서양현대철학, 한국문학 사이에서 부유하면서 어떻게 내 이론을 세우고, 작업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깊어지는 나날이다) 당황스럽기 마련이고, 진정성이 의심되기 마련인데(블로그를 통해 진정성 있는 고백이 가능한지 자체가 의문이긴 하지만) 좋아하는 이들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글을 시작하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괄호로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문장을 다시금 여기 쓴다. 정지돈과 금정연이 좋다. 정지돈과 금정연이 좋다. 정지돈과 금정연이 좋다.(어떤 선언이나 서약의 의도는 없다.)

 사실 나는 후장사실주의를 사지/읽어보지 않았고, 정지돈의 <내가 싸우듯이>는 알라딘 중고책방에서 샀으며(그래도 졸업하기 전 학교도서관에 이 책을 내 힘으로 신청한 전력이 있다는 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금정연의 <난폭한 독서> 또한 도서관에 신청하긴 했지만 읽지 않은 상태다.  정지돈과 금정연이 글 쓰는 데만 집중할 수 있길 바라며 기본소득이나 박근혜 정부가 망친 우수문예지 지원사업의 부활과 문화예술인의 복지의 확충을 소망하고 있지만(하지만 금정연에게는 가족이 있기 때문에 그 정도로는 택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시대의 결혼은 어떤 의미에서 '숭고한' 실존적 도약/선택에 가깝지 않나 싶다) 모순적이게도 <문학의 기쁨>을 구매할 계획은 없다. 이미 디비피아에서 제공하는 <작가세계>에 연재된 글들은 프린트해서 읽었으며, 지인을 통해 확인된 추가된 새로운 글에 대해서도 도서관에서 읽고 공책이나 노트북에 정리하는 선에서 '처리'할 수 있을 거란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워크룸프레스에서 나온 베케트의 책들을 주문한 이후로 신간을 사지 않고 있는 상태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알라딘 중고책방에 '중독'되어 책들을 마구 사들였더니 신간을 거의 구매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통장 잔고와 책장의 자리 부족, 민음사와 와우북축제 같은 할인행사 애용, 두꺼움 어려움 이란 구매기준의 설정 등 다양한 요인들이 얽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에게 <문학의 기쁨>을 꼭 읽어보라고, 본인의 가치관에 따라 구매까지 '감행'하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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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정연 선생님에게, 2015년 10월 15일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제 뵙고 오늘 이렇게 메일을 씁니다. 집에는 잘 들어가셨는지요. 어젯밤에 오한기 씨와 함께 택시를 타러 가는 모습을 보며 생명에 지장은 없을지 걱정되었습니다만(정지돈은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고, 금정연은 매일 술에 취한다고 한다. 하지만 위장에 문제가 생긴 이후로 금주를 철저히 지키며 술자리에서 갤포스 같은 위장약을 먹을 정도로 의지의 소유자이기도 하다고 한다), 트위터를 통해 멀쩡한 모습을 뵙고 한시름 놓았습니다.

 올해 여름부터 선생님과 함께 해온 리뷰 원고가 벌써 세 번째 계절을 맞았습니다. 어쩌다 보니 함께 하게 됐고 어찌어찌 두 개의 원고를 썼지만 매 계절마다 수월하게 넘어가지 않는 듯합니다. 아마 그건 모든 원고가 가진 숙명이겠지요. 선생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어떡하지. 저 정말 글을 못 쓰겠어요. 선생님의 글쓰기 불능 상태는 육성과 트위터를 통해 매일 서너 번씩 듣고 있는지라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만 아무래도 이번 계절에는 정말 위기가 찾아온 것 같습니다.

...작게나마 선생님께 어떤 보답을 드려야 할까 고민하다 아래 내용을 첨부합니다. 선생님의 무기력한 일상에 한줄기 빛이 되길 바라며 이만 편지를 줄입니다.

ps.

제1회 서울힙합영화제 2015.10.29~11.01

http://seoulhiphopfilm.com/

정지돈 드림 


한국문학의 위기

-금정연과 정지돈의 서신교환 중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계절마다 세 권씩 한국문학 신간을 골라 종래의 '이 계절에 주목할 만한 신간'을 다루는 방식과 차별화되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소화해낸다. 결국 정지돈과 금정연이 좋은 이유는 역시 "애티튜드"(김태용의 독자는 누구인지 알기 위해 서울예대 출신 신인소설가 양세형과의 대화에서 양세형은 여대생들이 김태용(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로 애티튜드를 꼽았다. 뻔하지 않은 실험을 한다는 거다. 고등학생 때 나는 '반정부적'이란 형용사에 매혹된 바 있었다. 그러니까 국정화 교과서를 반대하면서 'PT 혁명'을 주창했던 어느 여고생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때문일 것이다. 이는 내가 김승일, 이랑에게 매혹된 이유이기도 하고 그런 애티튜드로 만들어낸 작업물들이 재밌었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절친이 애정하는 오한기는 아직 최애캐는 아니며, 오히려 최민우와 이상우 쪽으로 눈이 간다. 아 물론 박솔뫼는 사랑이다). 한국문학의 위기는 논하는 장에서 금정연은 자신이 어떻게 무교동 엔젤리너스커피 1층 창가 자리에 앉게 되었는지를 구구절절 설명한다(그, 러, 게, 앤, 젤, 리, 너, 스, 에, 는, 왜, 갔, 어, 쯧, 쯧, 쯧, !) 한국문학의 위기는 모르겠으나 금정연의 위기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게 된다. 김사과가 매우 절제된 문체로 세계의 '망함'을 담백하게 서술해서 매력적이라면, 금정연은 생활에 짙게 밴 생활세계lebenswelt'망함'이 글에서 뚝뚝 떨어져서 매력적이랄까. 서평가(겸 문학평론가)라는 '망캐'를 선택한 플레이어(시인이라는 '망캐'를 선택해서 '어려운' 즐거움, 어려운 걸 해내는 성취감을 느끼고 싶다던 김승일. 문예중앙은 디비피아에 안 떠서 확인이 어려운데 문예중앙에서 게임을 특집으로 다룬 적이 있다. 커뮤니케이션 총서 <인디 게임>의 저자 이정엽과 김승일, 이강진? 세 명의 글 모두 재밌었다. 김승일의 새 시집과 베드베드북스 새 책은 언제 나올 것인가. 아무튼 '게임 인문학'이 나름 인문학의 노다지가 될 것 같은데 관심이 있는 분들은 팟캐스트 살롱 안드로메다에서 최신 에피소드들을 들어보길 바란다. 제일 좋은 건 마음에 드는 [인디]게임을 직접 해보는 거겠지만)를 구경하는 기분이랄까. 세계와의 대결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음에도 세계와 대적/대결하는 주체의 비장미 같은 게 아니라 망해가고 있는 세계에서 망해가고 있다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나마 좋은 쪽으로 가려고 애쓰는 이의 소시민적 영웅성, 환상과 낭만을 발라낸 현실에서 실제적으로 고군분투하는 노동의 윤리, 아름다움 같은 거랄까.

 나도 요즘 들어 유머가 태도라는 명제에 동의하고(빨간책방 오프닝에서 들었다), 유머를 통해 삶을 좀 더 유연하게 살아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 둘은 확실히 유머가 있다(젊은작가상 수상집에서 정지돈 소설의 '유머'를 지적한 평이 있지 않은가).

 최근 고종석 선생님께서 에밀 시오랑 선생님께 편지를 쓰셨더군요. 서간체의 매력은 대체 무엇일까요. 고종석 선생님은 왜 자꾸 그런 칼럼을 쓰시는 걸까요. 엠마 왓슨이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를 망친 걸까요, 아니면 그 반대인가요. 존 케이지는 에릭 사티에게 편지를 쓰고 조영일 평론가는 신형철 평론가에게 편지를 씁니다(사실 신경숙 표절 사건 이후 문단권력에 대한 비판과 '문단-내-성폭행' 해시태그 말하기 운동 이후 제기된 문단권력에 대한 비판 및 한국문한 전반에 대한 비판과 성찰속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조영일의 편지글, 더 거슬러 올라가면 권성우까지 꾸준히 제기되었던 문제가 아니던가. 어찌 보면 문단도 정치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저는 금정연 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있어요.

 플로베르는 편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편지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는 그것을 쓰는 게 귀찮단다! 오늘은 네 통! 어제는 여섯 통! 그저께도 그만큼이었지! 한심한 갈겨쓰기가 내 시간을 잡아먹고 있어.

 

 루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점심 후에 더 이상 편지를 전혀 쓰지 않는 행복한 순간을 열렬히 동경하면서 마지못해 몇 통의 하찮은 편지들을 서둘러 썼다.


 저는 이 두 개의 구절을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라는 책에서 인용했습니다. 롤랑 바르트 역시 마합니다. 편지는 사실 성가신 관리 임무, 진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플로베르의 편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플로베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카프카의 편지가 없었다면 카프카는 어떤 인상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을까요. 편지는 카프카와 플로베르와 프루스트와 루소라는 퍼즐의 마지막 피스 같은 것입니다. 그들의 노역, 그들의 번거로움, 그들의 고통과 피로, 편지는 그것의 육화입니다. 대부분의 서간체 문학이 시시한 이유는 그것이 유치하고 뻔뻔하게 진심을 위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편지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을 쓰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 편지는 우리의 맨살을 드러냅니다. 예술적 맨살이 아니라 진짜 맨살, 생활의 맨살이요. 그리고 늘 그렇듯 생활의 맨살은 우리가 비참할 때만 매력적입니다. ... 카프카의 절망은 문학의 영원한 포카리스웨트 아닌가요.


 같은 곳.


 이후 바르트의 구분에 따라 한국문학에 대해 썰을 푸는 부분이 나온다.


 1. 내가 증오스럽다 - 고전주의적/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정용준)

 2. 내가 자랑스럽다 - 낭만주의적/여자 목숨으로 사는 남자(구광렬)

 3. 내가 시대에 뒤졌다 - 현대적/최후의 마지막 결말의 끝(곽재식)


 이는 바르트의 4번 분류 '현대적 고전'을 논하기 위한 떡밥에 가깝고, 이 현대적 고전은 '미확정적이고 속임수를 당한다' 데 정지돈은 아감벤의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를 인용한다.

 동시대인을 참으로 자신의 자신의 시대에 속하는 자란 자신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자, 하지만 그 간극과 시대착오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더 그의 시대를 지각하고 포착할 수 있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동시대인인가요. 동시에 우리는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요. 국정 역사교과서라니요. 이런 때에 거의 아무도 읽지 않는 한국문학에 대해 논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지 않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중의 시대착오에 빠진 건가요. 시대착오적인 시대의 시대착오. 실로 시대유감이 시대정신이 된 시대의 시대착오는 우리를 어떤 시대로 이끌게 될까요, 선생님.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 한국 문학은 가능한가. 이런 질문은 시대착오적이지만 오히려 시대착오적인 시대에 시대착오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동시대성이라고 하는 성취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니체가 반시대적 고찰 혹은 다른 곳에서 말한 unzeit, '지금이 아닌 때'의 시차적 관점을 통해 지금을 정확히 꿰뚫어보는 것, 2백 년 전 여성해방을 말한 페미니스트가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고, 흑인해방을 말한 사람이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당했던 것처럼. 김영하 또한 젊었을 적에 쓴 어느 단편에서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의 나이브함에 대해 냉소를 보내는 서술자를 등장시키지 않았던가(이는 냉소를 보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렇게 냉소를 당하는, '동네북'이 된 문학의 시대적 위상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겠지만) '문단-내-성폭행' 해시태크 말하기 운동 이후 한국문학이 새롭게 갱신되는 상상력의 원천이 여성주의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역설하는 목소리들이 커지고 있고, 실제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본 한국현대문학사 와 성전쟁 특강이 '대박'을 치면서(여행 여독을 다 풀지 못해 강의를 수강하지 못했으나 페이스북과 기사로 열심히 소식을 접했다. 자과캠에서 조교 일을 같이 할 뻔한 박사과정 선배님이 오혜진 평론가와 페미니즘 스터디를 같이 했다고 했을 때 너무너무 부러웠다...물론 여이연이나 다른 곳에서 페미니스트 선생님들과 같이 공부할 기회는 열려 있긴 하지만) 페미니즘 열풍이 문학계 내에서 어떤 변화의 흐름을 이끌지 기대되는 상황이다. 금정연은 <고종석> 파트를 웃음폭탄을 심어둔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최근 트위터에서는 서울시의 새 슬로건인 "I.SEOUL.U."를 패러디하는 놀이가 한창입니다. S+V+O의 기본적인 3형식 문장. 동사의 자리에 쓰인 SEOUL의 의미를 놓고 말놀이를 하는 것이지요. 내가 너를 서울하겠다 = 전세보증금을 올리겠다 = 코를 베어가겠다 등등.

 SEOUL 대신 다른 단어를 넣는 놀이도 있습니다. 일례로 한 트위터리언은 "I'll kohjongsok you"라는 문장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연쇄서신마'라는 애칭을 불리기도 하는 고종석 선생님의 최근 행보에 영감받은 그 문장의 뜻은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쓸 거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는 선생님에게 고종석하고 있는 셈입니다.

 문학을 사랑한다는 것은, 읽는 그 순간 그 현재, 그 현재성, 그 즉각성에 대한 모든 종류의 의혹을 일소하는 것이고, 그것은 화자가 살아 있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고 아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혹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죽음에 대해 놀라는 파스칼이고, 그것은 이 오래된 단어들(예컨대 '인간의 비참함', '욕정' 등)이 나 자신 안에 있는 현재적 사실들을 표현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것은 다른 어떤 언어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2)마르크스가 아놀드 루게에게 보낸 편지 제가 현시대를 과대평가한다고 생각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만약 현시대에 절망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바로 절망적 상황이 저를 희망에 가득 차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3) 금정연이 정지돈에게 보내는 편지

 ... 저는 다만 어떤 태도에 대해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절망적 상황이 저를 희망에 가득 차게 만들어주기 대문입니다" 같은, 마르크스의 인용이 아니라면 웃기지 않은 농담이거나 할리우드 B급 영화에서 45분이 지나기 전에 목숨을 잃는 조연이 내뱉을 법한 대사로 들릴 수밖에 없는 일종의 시대착오적인 태도를...


 예술가/지식인이 지난 시대와 같은 권위와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했을 때, 예술과 상품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공공성이 탈색/표백된 상태에서 '취존'이 정언명령화되는 시대에 예술이 제 존재의 의미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의 애티튜드. 그러니까 너도 나도 '예술가'라는 기표의 아우라를 뒤집어 쓰고 싶어서 안달하는 '장사꾼'들의 세계에서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지키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자존심, 이 배타적이고 완고한 비타협적 태도가 예술가를 예술가로 만들어준다. 미셸 우엘벡이 <지도와 영토>에서 그린 현대적 예술가의 초상으로 내세운 제드에게 예술가적 윤리가 있다면 자신의 작업을 제1순위에 놓고, 충실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문단-내-성폭행'이나 여타 문화예술계 성폭행 사건이 보여주듯 유명세와 권력을 얻어 오용하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작가와 작품을 따로 봐야 하냐, 함께 봐야 하나 논쟁은 차치하고). 씨네21 대담 중 영화평론가들(김경욱, 김소희, 송효정, 정지은)이 나온 대담에서 한 영화평론가는 영화평론'계'라는 게 존재하느냐고 반문하며, 영화평론가들이 점 조직처럼 움직이고 각개전투를 진행하며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다 보니까 각자의 고민이 공유되어 사회화, 정치화되지 못하고, 인정욕구가 영화계 외부로 굴절돼서 표출된 게 아니냐, 그렇다면 한 개인의 일탈적 범행으로 볼 게 아니라 영화판, 영화평론계라는 사회적 관점에서 재발방지를 접근할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송효정 "어쩌면 본인의 인정욕구를 공식적인 장에서 풀기 어려우니 적극적으로 SNS를 활용한 것일 수도 있다. 영화평론의 장이 점점 좁아지고 있는 만큼 이후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란 장담을 못하겠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6083

). 범죄자들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 이뤄져야 겠으나(문학3 문학몹에서 권명아가 '성폭행은 성폭행이다'라는 명제를 강조했듯)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아무래도 남성중심주의적 문학(성) 자체에 대한 발본적 비판과 성찰이 이어져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성폭행의 문제에 문단과 문학의 문제를 끌어들임으로써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만든다는 권명아의 비판은 타당하다고 여겨지나 성폭행 문제를 정확하게 처리하되 '문단-내-성폭행'이란 복합적인 구조안에서 성폭행을 사유하고, 문학-문단 장을 성찰해야만 근본적인 체질개선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문학3 녹취록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http://munhak3.com/bbs_detail.php?minihome_id=&bbs_num=12&b_category=&tb=plus3

) <내가 싸우듯이> 후기/작가의 말은 지금까지 읽었던 가장 아름다운 후기 중 하나였다(황정은처럼 깔끔하게 해설을 빼버리는 것도 좋지만 <내가 싸우듯이>는 후기를 통해 한 권의 소설집으로서, 젊은 작가의 출사표/도전장과 같은 첫 번째 작품집으로서 완벽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금정연은 오한기와 정지돈을 얘기하고, 정지돈은 오한기와 금정연을 얘기하고, 오한기는 홍학을 얘기한다. 그러니 <홍학이 된 사나이>를 읽으시라(입문자에겐 <의인법>이 더 친절하고 재미있을 수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금정연이 앤젤리너스 카페 같은 잡담만 떠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그는 젊은작가 수상집 윤이형의 <쿤의 여행> 해설에서 그럴 듯한 평론가들이 라캉의 상징계 운운할 것이라고 하며 에반게리온 신지의 소중함을 주석을 통해 역설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바르트와 바디우 같은 '기본템'도 곧잘 활용하는 사람이다.

 1. 지도주의 - 맑스주의 - 역사적, 국가적으로 예술을 인민에 봉사하도록 함 - 포화상태

 2. 낭만주의 - 독일 해석학 - 하이데거의 이론적 장치 속에서 언제나 신들의 귀환이라는 가정과 연결되어 있는, 순전히 약속에 불과한 어떤 것들이 작동함 - 포화상태

 3. 고전주의 - 정신분석 - 어떤 욕망 이론을 완전히 전개할 때 주어지는 자기의식의 과잉 - 포화상태


 금정연은 바르트가 말년에 준비했던 소설과 바디우의 4번째 도식 '현대적 고전'을 연결시키며 그것이 경이감의 회복과 연관된 개념이자 '삶을 새롭게 발명하기'라고 말한다. 이미 랭보가 말했고, 68의 그 유명한 구호의 반복이기도 하지만 68이 제 이상을 끝까지 실현하지 못한 실패한 혁명이기에(우리는 베케트의 '더 낫게 실패하라'는 말을 떠올려야 한다), 견자의 시선으로 선취한 미래를 지금, 여기에 도래시키는 시적 혁명을 현실화, 현행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다 보면 벌기 위해 살아야 하는 그지같은 전도, 역전이 일어나는데 한 번 사는 인생 그렇게 개 같이 벌다 뒤지긴 아까우니까 '다른 삶'을 모색하고 발생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도주선'(보통 탈주라 번역하지만 김재인의 번역을 따르기로 한다).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 몸을 바꾸는 일, 그러니까 마음을 감싸고 있는 굳은 껍질을 벗기고 기쁨을, 슬픔을, 고통을, 행복을 새롭게 느끼기, 꿈에서 깨는 벤야민식의 사유, 정지 상태의 변증법...

 내 미국 삼촌Mon Oncle d'Amerique


 저는 지금 줄무늬에 개가 그려진 오버사이즈의 스위트셔츠를 입고 있습니다. 언젠가 계절에 맞지 않게 옷을 입고 떨고 있는 저에게 선생님이 선물하신 옷입니다. 지금은 홈웨어가 되었지만 한동안은 외출할 때 입기도 했습니다. 친구가 저에게 한 소리하기 전까지는요. 그건 이런 말이었습니다. 우리 정연이, 미국에 계신 삼촌이 옷 보내주셨구나?


 ... I jungjidon you = 나는 네게 옷을 준다 = 내가 너의 미국 삼촌이다


 2014년 와우북축제 '책읽기는 혁명이다' 사사키 아타루를 초청한 자리에서 금정연이 사회를 봤는데 매끈하고 위트 있는 진행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그 자리에 김소연 시인과 함돈균 평론가도 함께 자리했다. 보고 싶은 함쌤과 김소연 쌤...)


 정리해보면

 I SEOUL YOU 내가 너를 서울하겠다 = 전세보증금을 올리겠다 = 코를 베어가겠다 등등.

 "I'll kohjongsok you" =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쓸 거야"

 

 

 I jungjidon you = 나는 네게 옷을 준다 = 내가 너의 미국 삼촌이다

 I yangdonghyeok you = ?? 나는 어떤 동사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네게 음악CD를 선물한다(권나무, 레이첼 야마가타, 최고은) = 나는 네가 조금 슬플 줄 알길 바라는 사람이다. 나는 네게 책을 선물한다(불안의 책, 오규원 시 전집2, 기형도, 황지우, 황인찬, 박준, 허연, 김승일 등등의 시집) = 나는 너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다 ...

 다시 한 번 바디우. 새로운 관계를 찾지 못한 창작 에너지는 세 개의 도식에 한 세기 동안 고였고, 결과는 포화 상태의 기능부전입니다. 물론 그것은 자굼의 잘못이 아닙니다. 바디우는 예술을 내재적이고 독특한 진리로서 사유할 때(이것이 그가 더듬는 새로운 도식의 핵심입니다) 유효한 단위는 작품이나 작가가 아니라 사건에 의한 어떤 단절로부터 시작되는 예술적 짜임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문제는 관계 맺음이고, 그것의 상대항인 철학(사상 혹은 비평적 대계)의 부재입니다. (그것은 예술을 사유하는 것이 철학의 역할이라는, 혹은 철학이 없다면 예술을 사유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피할 수 없는 문제는 진리가 여기 있다는 것이고, 이 "진리가 여기 있음"은 바로 진리를 만들어내는 예술과, 진리가 있다는 조건하에서 그것을 보여주는 일을 의무이자 어려운 과업으로 삼는 철학의 공동 책임을 가리킨다는 말입니다, 라고 바디우는 <비미학> 서문에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문학의 현재이기도 하다, 라는 생각입니다. 라고 금정연은 썼다. 이론의 탈서구중심주의는 내게 있어 관심 있는 주제 중 하나이지만 어설픈 이론의 민족주의의 사대주의와 짝패임을 잘 알고 있다. 어떻게 '지금 여기'의 현실을 사유할 것인가-방법의 문제이고, 이론의 수명이 짧고 최신 유행이론이 소비되는 학문적 풍토가 잘못된 것일 뿐 사상의 번역('번역은 창조다' 조재룡의 <번역하는 문장들>을 보라)이, 사상의 대화가 새로운 사상의 원천이 된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젊은 비평가들의 서구이론 의존도가 높다는 김인환의 비판은 새겨들어야 겠으나 랑시에르와 바디우를 읽지 않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의 이론을 퍼날라 표피적으로 소비하는 게 문제이지 (그런 데 표피적으로 소비하지 않으려면 번역이 잘 되어야 할텐데 <존재와 사건> 번역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복도훈 신형철 허윤진에게 가해진 서구 이론 의존성 비판이 생각나는데, 사실 이는 비단 비평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학문장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복합적으로 생각할 주제일 것 같다) 사상의 보편성의 차원에서 랑시에르와 바디우의 미학을 바탕으로 한국의 '시와 정치'에 대한 담론을 첨예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어느 대학원생 블로그에 말한 것처럼 자기 관점이 있는 글들을 더 많이 만나보고 싶은 게 사실이다. 아감벤, 바우만, 들뢰즈, 데리다, 낭시, 지젝, 바디우 등등이 돌아가면서 등판하는 꼴은 끔찍하지 않은가. 그런 첨단 이론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자기만의 작업을 하는 이들을 찾아낼 수 있는 눈 밝은 독자, 감식안을 가진 동료 연구자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어찌 됐든 다음 학기 때 서용순 선생님과 랑시에르, 바디우를 읽게 될 것 같으니 어떻게 프랑스산 이론무기들을 내 것으로 소화시켜 내 작업의 재료들로 활용할 수 있을지 - 불어를 배우긴 힘들 것 같고 - 고민해봐야겠다. 정지돈의 답신을 끝으로 <한국문학의 위기> 편은 이만 마무리하기로 한다. 다음엔 <한국 문학은 가능한가>를 다루도록 하겠다.

 '진리가 여기 있음'을 철학과 예술이 증명 - 경이감의 회복 - 삶을 새롭게 발명 

 선생님의 각오를 보니 장 뤽 고다르가 1968년 USC(미국 남가주대학)에서 있었던 토론에서 한 말이 떠오릅니다. 고다르의 말을 인용하며 편지를 맺음하겠습니다.


 고다르 : 나는 사람들이 다른 영화를 보러 갈 때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내 영화를 보러 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관객 : 관객을 바꾸려고 하고 있다는 말인가?

 고다르 : 세계를 바꾸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


 (정지돈의 추신이 아니라 나의 것이다)p.s 영화의 역사 를 영화관에서 보고 싶은데... 아마 힘들겠지? 영화를 사랑하는 친구/애인을 사귀어서 같이 영상자료원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리. 요즘 읽고 있는 디디 위베르만뿐만 아니라 바디우, 랑시에르 등 불란서 학자들이 쓴 영화 관련된 책에는 웬만 하면 언급되는 영화인 듯하여 빠른 시일 내에 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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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 수록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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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도는 있고, 디디는 없다.

 

 단순하다. ‘있는디디는 단순해지자고 자신을 다그친다. 단순해지지 않는다. 단순히 단순해지자는 것인데 생각한다고 생각한 대로 되지 않는다. 단순하게 살기로 한다. 단순하게 먹기로 한다. 생곡을 먹는다. 눈썹이 빠지고 있지만 이 또한 단순화의 과정이리라. 단순한 눈썹과 단순한 위장과 단순한 손톱과 단순한 정수리로 갖게 되면 단순해질 것이다. 단순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도도는 있고, 디디는 없다.

 

 단순하지 않다. 있었던 도도는 있고, 앞으로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있었던 디디는 없고, 없을 것이다. 있는 지도 몰랐던 벽은 있는지 몰랐을 때도, 있는지 알았을 때도 계속 있는데 디디는 없다. 옥탑방에서 도도를 기다리는 게 좋다고 말해주던 디디, 소설을 읽고 도도에게 이야기를 해주던 디디, 버섯을 머리를 한 디디도 없다. 없지 않았는데 없다. 없는 중이다. 단순한 방에서 디디의 부재는 최대화된다. 이렇게 단순해져야 자기 안에 다른 것이 있는데 그 동안 그러지 않았다. ‘도도도도였다. ‘도도였던 도도도도인 중이다. 자연스럽게, 당연하게도, 당연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 없이. ‘도도도도이고자 열심을 다해 노력한 것은 아니다. 그냥 있었다. 그랬는데 또 도도였다. 어김없이, 여지없이, 거리낌 없이.

 

 왜,인가.

 

 ‘가방을 움켜쥐는 인간은 가방을 움켜쥔다. 그것 같은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사람이 생각하고, 무사유는 죄다. 이런 말로 이 소설은 단순해졌는가. 무사유가 죄면 죄인들은 어떤 벌을 받는가. 재판관은 누구인가. 법조항은 무엇인가. 재판장은 어디 있는가. 생각하는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생각하는 사람은 생각하고 있는데, 생각하면서 동시에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는가. 생각하는 사람은 생각하고 있는가. 무엇을 생각했는가. 무엇은 무엇인가. 무엇은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사람은 생각하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사람은...


 도도는 있이 없고, 디디는 없이 있고,가 왜 아닌가. 

 

 나도 모르게 직조해내는 패턴의 연속, 이것이 인간이 그리는 무늬人文는 아닐 것인가. ‘판단이고 뭐고 없이하려면 판단도 뭣도 하지 않을 때 판단이고 뭐고 없이 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 몸-마음의 패턴을 만들고 유지하는 게 힘들면 적어도 결정적인 순간만큼은 판단이고 뭐고 없이할 수 있는 것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몸-마음은 미처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흉해진다. 단순하다. 하지 않으면 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가 나온다. 하지 않으면 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가 나온다는 걸 미처 상상하지 못한 도도는 괴로워한다. 우리는 재난교육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재난교육을 받지 않았다. 우리는 재난교육을 하고 있다. 단순해졌는가? 단순해지지 않는다. 단순해져야 한다. 단순해지지 않는다. ‘오랫동안 나는 그것을 생각해오지 않았다. 해야 할 것이다. 해야 한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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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레플리카
윤이형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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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니

 

 한 달 전, 한국에서 전 세계가 주목하는 경기가 열렸다. 한국 국적의 이세돌과 영국 국적의 알파고의 대결이었지만 이 대결은 인간 대 기계(인공지능)의 대결로 인식되었다. 경기 전 바둑전문가들 사이에서 이세돌의 압승이 예상되었지만 결과는 1:4 참패로 끝났다. 1국에서 해설위원들은 알파고의 수를 정말 사람이 두는 것 같네요라고 평가했지만 이세돌의 완패 이후부터는 인간이라면 도저히 둘 수 없는 수예요라고 평가했다. 낙관론과 비관론이 쏟아졌고, ‘인간다움에 대해 성찰하자는 제3의 의견이 사설과 칼럼을 채웠다. 나는 알파고의 출현 앞에 인간이란 동일성-정체성으로 뭉치는 대중들의 휴머니즘이 불편했고, 빅데이터와 딥러닝을 통해 감정까지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출현하면 인간의 유적 본질이 해체될 거란 생각에 머리가 멍했다. 아무리 상상을 해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실감이 나지 않는 초현실적 상황이 근미래에 당도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도착한 것이다. 스파이크 존즈의 <Her>가 심심찮게 회자되었고, 나는 지금까지 SF 영화와 다른 방식으로(<A.I.> ) 감정을 가진 로봇을 묘사했다고 평가받은 <엑스 마키나>를 서둘러 봤다


 대국이 끝나고 일주일 정도 모든 것들을 기계의 관점에서 생각하게 되었다. 호르몬 환원주의나 기계론적 환원주의에도 결코 정복되지 않을 것 같았던 정신이나 감정까지 빅데이터와 딥러닝에 의해 정복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유전자 속 저장된 진화적 정보들이 일종의 빅데이터라고 친다면 나도 단백질 컴퓨터였다. 저장능력도 정보처리능력도 알파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후진고물... 양심이 프로그래밍되어 있고, 알고리즘이 yes로 가면 죄책감을 느끼고, no로 가면... 컴퓨터 공학적 지식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망상에 빠져 허우적대던 때 대니를 만났다.

 

 아름다워

 

 라고 말할 줄 아는 동갑내기 청년을. 나라면 그런 생각 혹은 마음이 들어도 사회적 관습을 의식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거나 오해를 살까봐 끝내 발설하지 않았을 말을 진심으로 할 줄 알고, 할 줄 아는 것을 하는 대니’. 그에게 아름답다는 진술 혹은 고백을 들은 소주를 천천히 목으로 넘겨야 사람이라는 더 높은 존재로 회복되는 기분을 느끼는 기계적 일상을 살고 있는 할머니이다. 직업세계에서 은퇴한 후 자식의 자식을 맡아 육아노동을 하는 게 할머니로서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사회에서 그녀에게 허용된 감정은 모성애와 우정 정도이다. 기술적으로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무성(無性)적 감정만 허용된 그녀에게 대니는 연인들의 언어를 속삭인다. 자신의 몸에 새겨진 얼룩이 지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대니의 몸에는 (물리화학적으로 거짓이겠지만) 할머니의 몸이 들어와 있다. 대니가 기억하려는 기억은 할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이고, 이는 결국 할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을 새긴 의 자신의 몸, 어쩌면 자신의 몸에 섞여 있는 '우리'의 몸이다. 자신의 몸에 새겨진 흉터를 보며 그와 함께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가 연상되고, 그 이미지(기억)가 육화된 물질이라 한다면 우리 안에 우리의 몸이 없다고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하지만이란 말이 이 세상에 왜 존재하는지! 하지만 하지만이란 말이 존재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다) 대니가 영원히 함께 있고 싶어 했던 자리에 할머니는 남았고, 대니는 영영 떠났다. 할머니는 그를 사랑했고, 죽였다.’ ‘이것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곧 진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진실도 거짓도 아닌 세계 한구석에서 할머니는 대니를, 대니와의 기억을, 대니를 사랑했던 자신을, 대니와 자신 사이에 존재했던 사랑을, 홀로그램 같은 사랑의 흔적을 견디며 살아갈 것이다. 설령 그것이 대니와 함께 할 수 있는 수많은 길 중 오답이라 하더라도, 오답이란 걸 뒤늦게 깨닫는다 해도, 그래서 죽고 싶을 만큼 미안하고 가슴이 미어져도 그것까지 견뎌내며 살아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혹은 불행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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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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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가끔 신중함에 대해 얘기하곤 한다. 선택의 기로에 선 이에게 신중하게 생각해같은 말을 한다. 상대방이 생각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위험부담이 커 보일 때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봐라고 말하기도 한다. 신중함은 사실 매우 조심스러움을 뜻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중함이란 기표를 나눌 때 실제로 전달되는 기의는 미래의 위험에 대한 불안이다. 조심하란 소리다. 보이지 않은 위험에 눈을 고정하라는 말이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위험한 위험에 집중하라는 주문이다. 그래서 신중한 생각은 사태의 본질에 천천히 침윤해 본질에 닿는 사색이나 성찰과는 거리가 있다. 사태와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둬 생각의 공간을 확보함에 있어 동일하나 그 공간에서 이뤄지는 생각의 운동양상이 판이하게 다르다. 우리가 삶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는 수학문제처럼 간결하게 정돈되어 있지 않다.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작업, 문제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문제해결의 첫 걸음이다. 문제가 파악되지 않으면 문제와 문제가 아닌 것 사이에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해 혼란을 겪다 이내 소진되기 십상이다


 칸트나 비트겐슈타인이 한 작업도 바로 이런 정리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칸트는 이성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고, 이성의 규제적 사용을 종용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지금까지의 철학이 언어의 문제였다고 규정지은 후,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나눠 말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명제로 철학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에도 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철학자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는 이유는 세상이 여전히 혼란스럽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아니 점점 더 복잡해지고 알쏭달쏭해지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자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에게 신중해지자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위험하고 불안하고, 어쩌면 불행한, 그래서 불쌍한 이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몹시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자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가 이승우는 그런 신중함의 처세술은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소설집 전반에 걸쳐 보여주고 있다. 사색과 성찰의 깊이에 닿지 못하고, 먹은 것을 싸고 싼 것을 다시 먹는 것 같은 악무한의 사유는 사유의 무능함을 드러낸다. 단순히 생각 좀 해라라는 식의 계몽적 패러다임으로는 오늘날의 혼란에 대처할 수 없음을, 우리에게는 어떤 종류의 철학-생각하는 방법과 생각에 대한 생각-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 사유의 무능함이 단순히 지적 무능력이 아니라 타인과의 연대가능성이 제거된 타자-없는세계를 살아가는 불행한 의식의 윤리적 무능력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타인에게 말 걸지 못하고, 손 뻗지 못하고 생각만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코기토가 느닷없는, 그러나 일상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타자의 출현에 당황하고 실패하는 풍경은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설지 않을 거라 예상된다. 신중함의 에토스에는 비관적 정조가 깔려 있으나 명확한 현실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신중한 사람은 현실의 파국적 상황을 예감하고 있으되 그 파국을 직시할 윤리적 역량도, 그 파국을 뚫고 나갈 대안을 고안해낼 만한 지적 역량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 리얼리즘 없는 비관주의에 대해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만 <하지 않는 일>에 대한 이야기로 이야기를 끝맺기로 한다

 

 나는 처음에 <하지 않은 일>이 가수 타블로와 타진요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작가가 겪은 표절시비에 대한 이야기란 걸 알게 되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 중 가장 감정적 몰입이 강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를 여기서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하지 않은 일에 하지 않았다고 답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나랴는 식으로 하지 않았다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는 변명(잡아떼기)’으로 받아들인다. 에덴에서 추방당해 고통과 불신이 가득한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은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말할 수 있는 것과 함께 드러난 말할 수 없는 것앞에 가만히 서 있어 보는 것, 잠시 그것에 마음을 내줘보는 것, 그럴 때만 오롯이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아닐까. ‘신중한 사람의 극복은 신중함을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사람이 되는 데에 달려있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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