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매일 거대도시로 향하는가 - 교통지옥에 갇힌 도시생활자의 기쁨과 슬픔
정희원.전현우 지음 / 김영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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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채널예스 연재 때부터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교통 철학자와 노년내과 의사의 조합으로 교통, 이동 이야기를 구상한 기획자의 통찰력이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기후동행카드, K-패스, GTX... 정책의 홍수 속에서 균형감 있게 교통의 현재와 이동의 미래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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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자 2024-05-16 16: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싶었는데! 잘 읽었습니다

rendevous 2024-06-12 09:1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열린책들 편집 매뉴얼 2024
열린책들 편집부 엮음 / 열린책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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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 은하계를 지키는 단단한 매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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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 명사들
리튼 스트래치 지음, 이태숙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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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 앙드레 모루아, 리턴 스트레이치가 전기 문학의 3대 거장으로 뽑힌다고 한다. 각각 대표작으로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바이런 평전‘과 ‘발자크 평전‘, <빅토리아 시대 명사들>이 꼽힌다.

서구의 ‘Memoir‘ 장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기원을 삼을 정도로 유구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몽테뉴의 <에세>(얼마 전까지 주로 ‘수상록‘으로 번역되었던),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 등 근대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자전적 글쓰기는 고백/회고를 통한 1인칭 내면의 창조, 중세적 세계관의 ‘신-인간‘ 관계를 벗어나 근대적 주체 형성 과정을 보여준다. 서구 기독교적 전통 때문인지 Memoir 장르는 서구 출판/독서 시장에서 여전히 가장 큰 파이를 차지하는 분야다. 이는 아마 ‘기록문화‘와도 밀접히 연관이 있어 보이는데 일정 수준/분량 이상의 기록 자료 없이는 전기를 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교차 3호: 전기, 삶에서 글로> 서문을 쓴 기획위원 김영욱은 한 사람의 생애를 글로 옮기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전기의 운명적인 한계 속에서 ‘한 인간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물은 바 있다. 유독 전기/평전 분야에 벽돌책이 많은 이유는 한 인간을 평면적으로 요약해버리지 않고, 최대한 입체적으로 풍부하게 복원하고자 하는 의지가 투영된 결과이리라.

사관 없이 역사를 서술할 수 없듯 전기/평전 작가는 특정한 관점에 입각해 인물을 바라보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관점이 단선적이고 도식적일수록 인물은 특정한 형상으로 상이 고착되고, 의미가 환원된다. 그렇다고 랑케의 실증주의 사관처럼 ‘객관적인‘ 사실을 건조하고 나열한다고 그 사람을 투명하고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는 건 아니다. 타인이라는 불가해한 존재와 자신 사이에 놓은 해석적 심연을 직시하면서 작가는 ‘둘의 끝나지 않는 대화‘에서 자신이 포착한 희미한 빛, 진실의 조각에 의지해 ‘하나의 이야기‘를 적을 따름이다.

한 사람이 남긴 기록/서술에 대한 재서술일 수밖에 없는 이중의 삶(한 사람이 살아낸 삶, 그 삶을 다시 살아내고자 분투한 전기 작가의 해석적 삶) 앞에서 삶의 다층적인 레이어들을 읽어내기 위한 노력하는 것, 이미지 조각들을 모아 마음속에서 영화처럼 상연해 보는 것, 깊은 호흡으로 세밀하게 한 사람을 상상/기억해 보는 것. 한 사람을 한 권의 책으로 번역하는 일은 이토록 지난하고 어려운 작업이다.


여담.
자기 서사 연구는 논픽션 장르의 전기, 자서전, 평전, 회고록, 일기, 편지뿐 아니라 자전 소설, ‘오토픽션‘ 같은 픽션 장르를 대상으로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대표적인 작가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파트릭 모디아노와 아니 에르노가 있고, 한국 작가 중엔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의 작가 이청준이 떠오른다. 샹탈 자케의 <계급횡단자들 또는 비-재생산>은 <랭스로 되돌아가다>의 디디에 에리봉, 아니 에르노, <교양의 효용>의 노동문화사가 리처드 호가트 등을 논의한다. 빨리 읽고 싶다...

[책 속에서]

[서문]
나는 전기를 매개로 하여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비전 몇몇을 현대인의 눈앞에 펼쳐 보이려고 시도했다. (…) 나는 성직자, 교육 권위자, 행동하는 여성, 그리고 모험가, 이들의 삶에서 나를 사로잡았고 내가 얻을 수 있었던 진실의 몇 단편들을 조사하고 밝히려고 했다.

나는 이하의 페이지들이 역사적 견지에서 만큼이나 전기(傳記) 본연의 관점에서도 흥미로운 것이 되기를 희망한다. 인간은 과거의 단순한 징후들로 취급되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다. (2)


우리는 훌륭한 삶을 사는 것만큼이나 그것을 저술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이 책에서의 연구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그러한 저작들−표준 전기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저작들−에 빚지고 있다. 그러한 저작들은 내게 없어서는 안 될 많은 정보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훨씬 더 귀중한 것−하나의 표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얼마나 많은 교훈을 얻게 되는지! 그러나 상술할 필요는 없다. 적당한 간결함−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빠뜨리지 않고 중복되는 것은 모두 털어 내버리는−을 유지하기 위하여. 간결함은 확실히 전기 작가의 첫 번째 의무이다. 마찬가지로 확실하게 두 번째 의무는 그 자신의 정신적 자유를 고수하는 것이다. 찬양은 그의 업무가 아니다; 자기가 이해한 대로 사실들을 드러내는 것이 그의 업무이다. 그것이 내가 이 책에서 목표로 했던 것−냉정하게, 편견 없이, 숨겨진 의도 없이, 몇몇 경우들에서 내가 이해한 대로 사실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거장의 말을 인용하면−“나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제안하지 않는다: 나는 드러낸다.”(3)

[옮긴이의 글]

스트레이치의 이 책은, ‘새로운 시각에서 역사 다시 쓰기’의 한 전형으로서 새롭게 주목할 가치가 있다. 우선 위인들의 이야기는 실제 삶을 그려내 보임으로써, 그 시대에 관한 더 감성적이고 더 구체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의료개혁의 이정표를 세운 나이팅게일, 국교회 부주교에서 가톨릭 추기경으로 변신함으로써 빅토리아 시대의 종교 변동을 가장 극적으로 체현했던 매닝, 영국 지배계급의 가치관을 양성하는 사립 중고등학교를 개혁한 아널드, 세 대륙에서 활약한 영제국의 용사 고든. 우리는 이들의 전기에서 빅토리아 시대를 위대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면모를, 그리고 그 배경으로서 이들을 명사로 만들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여론’과 제도들−영국 기독교, 의료체계, 명문 사립학교, 제국주의−을 인식할 수 있다.

더구나 스트레이치의 위인전은 보통 위인전과는 전연 다르다는 점에서 그 매력이 배가된다. 스트레이치 자신이 이전의 위인전들을 “케케묵고…그리고 무엇보다도 찬양 일변도”라고 엄중히 비판한 위에서 전기를 썼던 것이다. (…) 신실한 성직자 매닝 대신 지배욕과 출세욕의 화신인 매닝: 등불을 든 가냘픈 천사 나이팅게일 대신 비인간적일 정도로 주변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나이팅게일: 럭비학교의 개혁자 아널드 대신 교육개혁자의 칭호가 무색한 아널드: 영웅적 전사 고든 대신 정서 불안 속에서 원주민 대학살과 영제국의 확장 계기를 마련한 고든. 스트레이치의 펜 아래서, ‘빅토리아 시대 명사들’은 한결같이 근면하고 뛰어나게 유능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 독선적이며 편집적인 도덕 의식과 종교를 지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더구나 4명의 위인이 표명한 기독교는 서로 매우 달랐고, 한 인물 속에서도 상반된 견해가 뒤섞여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 명사들은 제각기 붙잡은 기독교를 내걸면서, 독선적 도덕 의식과 태도를 견지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경탄할 근면성과 추진력은 자신들의 도덕과 종교의 기반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잊으려는 방편이었을까? 그리고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주의의 본성도 결국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330~331)

김교수에 따르면, 그가 6.25 사변 막바지에 교사 재직 중 군대에 소집되어 신병 훈련을 받을 때, 함석헌 선생님이 『빅토리아 시대 명사들』의 마지막 장 「고든 장군의 최후」를 번역하여 손수 옮겨 적은 열 장이 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이제 80세를 바라보는 김교수는 그 편지를 “평생 가슴에 간직하였다”고 쓰고 있다. 우리의 선각자 함석헌 선생님과 김용준 교수는 스트레이치의 책에서 평생 가슴에 간직할 그 무엇을 발견했음에 틀림없다.

유난히 길고 한 때 영광의 신화에 싸여있던 빅토리아 시대는 이제 다시 새롭게 쓰여지기 위하여 거기에 있다. 그 시대를 출중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언제나 새롭게 읽혀지고 쓰여질 수 있다. 그런데 위인들의 생애를 새롭게 읽고 새롭게 쓰는 작업은 우리의 삶을 사는 방식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반세기 전에 함석헌 선생님이 이 책을 읽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편지로 적어 보냈다는 사실 앞에서 새삼 곱씹게 되는 질문이다.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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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Turn 마이 턴 - 요한 크루이프 자서전
요한 크루이프 지음, 이성모 옮김 / 마티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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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축구의 패러다임 전환을 일으킨 혁명가 요한 크루이프 자서전 <<마이 턴>>. 요한 크루이프는 축구 선수감독행정가로서 정점을 찍었던 전설적인 인물이다제목을 절묘하게 잘 지었다크루이프가 발명한 기술 ‘크루이프 턴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현대 축구의 전술적 판도를 뒤바꾼 그의 혁명적인 성과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축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현대 축구에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개념과 철학을 선구적으로 고안한 크루이프의 생각을 흥미롭게 받아들일 것 같고축구에 관심 없는 독자라도 자기 분야에서 혁신을 가져온 사람의 태도에서 충분히 인생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크루이프에게 축구는 삶 그 자체였다삶이 축구에 영향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때를 생각할수록 가정을 이루고 꾸려나가는 과정에서 내가 경험한 것이 토털사커의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토털사커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축구가 아니다. 팀 전체와 다른 선수들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축구다. 열 명의 선수 모두가 공을 가진 선수의 행동을 주의 깊게 지켜보며 그가 이제 어떤 플레이를 할지 예측하며 뛰어야 하기 때문이다.(52)


은퇴 이후에도 자기 삶을 살 수 있도록 인성 교육을 중시하고, 냉정한 프로 스포츠의 세계지만 승패 못지않게 팬을 즐겁게 하는 데 집중했던 크루이프는 시대를 앞서가는 인물이었다. 이 책의 한 줄 카피를 뽑는다면 그의 명언인 모든 불리함에는 유리함이 있다가 적절해 보인다. 크루이프는 비쩍 마른 체구로 유리하지 않은 신체적인 조건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로 하는 축구’, 기술로 하는 축구 시스템을 도입해 새 시대를 열었다. 기존 패러다임을 그대로 수용해 더 많이 더 열심히 뛰는 데만 몰두했다면 그는 결코 세계적인 선수로 발돋움하지 못했을 것이다.


팀 스포츠 경기에서 사회가 개인들의 총합 그 이상이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이 자주 출현한다. 최고의 선수들로만 팀을 꾸린다고 해서 최고의 팀이 되는 건 아니다(레알 마드리드 '갈락티코 1'의 성취를 까 보면 그다지 휘황찬란하지 않다).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선수 개개인의 개인기에 의존하기보다(클린스만의 '해 줘' 축구 같이) 시스템에 의한 조직력이 경기력의 성패를 좌우하는 비중이 커진다. 스타 플레이어들이 즐비하지만 암울한 경기력으로 일관하고 있는 EPL의 맨유, 첼시 같은 팀(+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을 보면)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명언을 되새기게 된다. 축구의 감동은 사회학자 김홍중이 <은둔기계>에서 묘사하듯 천재적인 개인의 예술적인 플레이, 피지컬과 뇌지컬을 극한으로 끌어낸 경이로운 플레이에서 오기도 하지만 11명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조직력, 한 수 위 실력의 선수를 상대하기 위한 헌신적인 협력 플레이, 자신이 눈에 띠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팀을 위해 궂은 일을 도맡는 희생 플레이(투혼. 현역 시절 박지성은 'unsung hero'라는 별명으로 불렸다)에서도 온다.


축구에서 새 팀의 판을 짜는 작업을 '리빌딩'이라고 부른다. 감독의 철학, 전술을 녹여 새로운 팀을 만드는 데 2~3년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오합지졸 같았턴 팀이 눈빛만 봐도 마음이 통하는 '원팀'이 돼 자신들의 '빌드-'을 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훈련을 거쳐야 하는지 확인하고 싶으면 초창기 '골때리는 그녀들'을 보면 된다. 유럽 축구를 보며 열광하고, 국가대표팀 축구를 보며 분노와 환멸에 사로잡혔던 내게 축구의 순수한 즐거움, 열정의 아름다움을 깨우쳐 준 건 '골때녀'였다. 기술적으로 투박하고, 조직적으로 엉성한 신체들이 먼 길을 돌아 끝끝내 '빌드-' 축구를 해 내는 모습에서 몰려드는 감동이 있었다.


애플 티비의 오리지널 콘텐츠 <테드 래소>는 경기장에서 퍼포먼스를 보여 주는 엔터테이너로서 축구선수이기 이전에 '사람'인 선수들의 일상을 담아낸 코미디 장르의 스포츠 드라마다. 만약 안드로이드, AI 로봇 선수들로 축구장을 채운다면 축구 경기가 더 박진감 넘치고 흥미로워질까? 로봇 축구는 로봇 축구만의 미학이 있을 테지만 이 드라마는 축구와 일상을 양발 드리블 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스포츠만이 주는 매력을 솜씨 좋게 그려냈다. 모든 걸 승패, 성적으로 판가름하는 냉정한 프로 스포츠의 세계, 자본주의적 냉정함과 팬들의 광신적 열광이 맞부딪치는 경기장에서 스포츠가 선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한 사람이 스포츠를 통해 더 나은 사람으로 어떻게 성장하는지), 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우리가 왜 스포츠를 사랑하는지 본질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드라마.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테드 래소>처럼 스포츠의 서사가 좀 더 다양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책 속에서]


축구에 관한 한 나는 한 가지 결점을 가지고 있다. 오로지 최고의 축구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선수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수준 낮은 축구는 할 수가 없다. 나는 한 방향밖에 보지 못한다. 위로, 더 높이, 정상을 향하여. 최고가 되는 것. 내가 결국 피치를 떠난 것도 그래서였다. 내 몸은 더 이상 최고 수준의 축구를 할 수 없었고, 그렇다면 피치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나에겐 강한 정신이 있었기에 감독이 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내 인생은 늘 더 잘하고 더 발전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삶의 모든 일에 그런 마음으로 임했다.(11~12)


내 관심은 축구의 철학, 이상적인 축구에 있었다. 나는 늘 앞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을지에 집중했고, 종종 과거를 돌아볼 때는 오로지 실수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교훈은 삶의 여기저기에 있고, 이것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나중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에는 내가 무엇을 지나왔는지 볼 수 없었다. 돌아보건대 내가 축구선수로서 배운 가장 중요한 네 가지는 좋은 잔디, 깨끗한 드레싱룸, 축구화를 스스로 깨끗이 닦는 습관, 촘촘한 골네트다.

기량과 스피드, 기술과 득점 등 나머지 모든 것은 그다음 문제다. 이것이 나의 축구와 인생을 정의하는 철학이다. 나는 토털사커부터 가정생활과 크루이프 파운데이션에 이르는 모든 일에서 이 철학을 실천했다. 나의 인생은 더 발전하고 성장하기 위한 끝없는 도전이었다. (15)


또 어떻게 보면 숫자를 좋아하고 머리로 셈하는 데 익숙했던 것이 훗날 축구에서 숫자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내 특징으로 연결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상대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공간을 얼마나 더 잘 활용할 수 있을지를 나는 숫자로 생각했다. 디스테파노도 그랬었다. (22)


나에게 축구를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축구를 즐기는 것이었다.(22)


나는 야구에서 집중적으로 배운 세부적인 부분들을 나중에 축구에서도 매우 유용하게 활용했다. 투수의 투구를 결정하는 사람은 포수다. 투수는 필드 전체를 볼 수 없지만 포수는 볼 수 있다. 또 포수는 투수의 공을 받아 어디로 던질지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모든 공간과 모든 선수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어떤 축구감독도 나에게 공을 받기 전에 그 공을 어디로 패스할지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나중에 프로 축구선수로 뛰면서 어린 시절 야구에서 배운 것, 즉 언제나 경기장 전체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떠올렸고 그것이 나의 강점이 되었다. 야구는 훈련으로 재능을 키울 수 있는 대표적인 스포츠로, 축구와 비슷한 점이 참 많다. 순간 스피드, 슬라이딩, 공간 인지력이 요구되는 것도 그렇고, 한 수 앞서 생각하고 여러 다른 수를 생각해야 하는 것도 비슷하다. 이는 론돈 훈련(선수들이 가깝게 모여서 패스를 주고받는 훈련 방식옮긴이 주)을 토대로 하는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 축구와도 일맥상통한다. (29)


축구를 잘하는 선수란 공을 단 한 번에 터치하고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를 아는 선수다. 이것이 네덜란드 축구의 핵심이다. 나는 늘 축구는 아름다우면서 공격적이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아약스 시절 우리가 늘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기술과 전술이다. 많은 감독이 움직임을 강조하고 많이 뛰라고 하지만, 나는 너무 많이 뛰지 말라고 말한다. 축구는 머리로 하는 게임이다. 축구선수는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너무 빨라도 안 되고 너무 늦어도 안 된다.(40~41)


그 시절 아약스에서 우리는 꽤 좋은 결과를 누렸고 꽤 좋은 축구를 펼쳤지만, 나는 내가 단지 축구선수로 기억되기보다는 언제나 나아지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43)


그때를 생각할수록 가정을 이루고 꾸려나가는 과정에서 내가 경험한 것이 토털사커의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토털사커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축구가 아니다. 팀 전체와 다른 선수들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축구다. 열 명의 선수 모두가 공을 가진 선수의 행동을 주의 깊게 지켜보며 그가 이제 어떤 플레이를 할지 예측하며 뛰어야 하기 때문이다.(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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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느 베이유 불꽃의 여자 - 교양선집 6
시몬느 뻬트르망 지음 / 까치 / 197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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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느 베이유 불꽃의 여자>는 시몬 베유의 친구였던 시몬 뻬트르망이 쓴 베유의 전기이다. 시몬 베유 전기 중 가장 표준적이고 충실한 전기로 평가받고 있다. 역자 고 강경화 선생님은 옮긴이 후기에서 레이먼드 로젠탈이 번역한 영역본 <<Simone Veil, A Life>>를 번역 대본으로 삼았음을 밝히고 있다. 원서는 자료 중심에다 분량이 워낙 방대해서 베유의 생애의 자취를 중심으로 줄였다고 설명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시몬 베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고등사범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면서 시몬느는 나와 같이 솔본느 대학의 자격시험도 치렀다. 그녀의 뛰어난 지성과 악명 높은 옷차림에 대한 소문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무척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시몬느는 솔본느에 다니는 알렝의 제자들과 함께 교정을 산책했는데 한 손에는 늘 책을 들고 있었다. 대규모의 기아가 중국을 휩쓸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시몬느는 진심 때문에 더 그녀를 존경했다. 전 세계의 정의를 위해 고동칠 수 있는 심정을 지녔다는 것에 감탄했다. 나는 그녀의 철학적인 재능보다도 이 눈물 정을 지녔다는 것에 감탄했다.”(40)

 

 시몬 베유는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 교육기관 중 하나인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우등으로 입학했을 만큼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보부아르가 증언했듯 베유는 무엇보다 약자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을 지닌 탁월한 영혼이었다. 선천적으로 병약한 신체를 타고났으나 육체노동에 뛰어든 학출이었다.

 

1980년대 한국에서 시몬 베유 전기가 널리 읽혔던 데는 순수성의 화신이자 행동하는 양심이었던 베유의 도덕성이 한국 청년들에게 실존적인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70~80년대 독서 문화를 저항으로서의 독서’, ‘운동으로서의 출판으로 해석했던 국문학자 천정환과 정종현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변증법적 유물론, 종속 이론 등 사회과학의 시대를 풍미했던 사회과학서적과 더불어 체제의 억압과 폭력에 맞서 진실과 정의를 지키려 했던 양심적 지식인을 형상화한 소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지적한다. 대표적으로 다이허우잉의 <<시인의 죽음>>, <<사람아 아, 사람아!>>, 잉게 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같은 책은 당대 대학생 사이에서 베스트셀러였다.

 

 1980년대 학출이었거나 학출-되기를 고민했던 청년들에게 시몬 베유와 전태일이 동일 선상에서 읽혔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일신의 영달을 포기하고, 시몬 베유의 경우 지식인 계층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약자를 위해 '존재 이전'을 감행했던 순수성의 화신. 마르크스나 레닌이 아닌 신과 대면하며 '세계의 비참'에 맞서 실천을 고민했던 영성의 전사. 역자 강경화 선생님이 '불꽃의 여자'라고 불의 이미지로 시몬 베유를 은유한 데는 자신을 산화시켜 세상에 빛을 가져 온 구도자적 생애와 더불어 당대 지식인들의 양심에 불꽃을 당긴 전태일의 최후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다. 어떤 인간은 존재를 파괴하는 고통 속에서 신과 대적하며 영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지상에 두 발을 붙이고 을 자신의 문제계로 삼아 도약하는 영혼. 중력은총은 인간과 신의 간격을 은유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시몬 베유 전기를 읽으며 시몬 베유가 유리 같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날카로운 지성으로 세계의 부조리를 도려내 분석하고, 예민한 감수성으로 타인의 고통에 쉽게 전염돼 곧잘 긁히고 깨지고, 자신을 투명하게 비우기 위해 단식에 가까우리만치 먹지 않고 편안함과 안락함을 강박적으로 기피했던 사람. 선천적으로 약한 체질을 타고났으나 신체에 영혼이 구속되길 거부하려는 듯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현장에 뛰어들길 두려워하지 않았던 활동가. 자본주의적 노동 현장에서 벌어지는 소외와 착취, 전쟁터에서 말살되는 존엄성에 통감하면서도 '신을 기다리며' '신의 사랑에 관한 무질서한 생각들'을 멈출 수 없었던 예언자적 사상가(그래서 발터 벤야민과 살짝 겹쳐 보이기도 했다). 그의 생애를 알고 나니 사상이 궁금해졌다. 최근 좋은 번역으로 시몬 베유의 책들이 여럿 출간됐다. 이제 읽기만 하면 된다.

 

 

<중력과 은총>(윤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이종영 옮김, 리시올)

<신의 사랑에 관한 무질서한 생각들>(이종영 옮김, 새물결)

<쿠튀리에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이종영 옮김, 리시올)


[책 속에서]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은 시몬느에게는 어떤 철학적인 신념에 앞선 일종의 본능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분명히 나타나 있듯이 시몬느는 불의를 미워하고 진실한 유대감으로 맺어진 참다운 인간 관계를 열망했다.(24)

 

나중에 시몬느가 굶어 죽은 것 역시 자신의 성실과 순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일종의 현실과 타협하기를 거부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살아서 더 많은 것을 이룩함으로써 다른 이상을 추구할 수도 있을지 모르나, 시몬느는 자신의 영혼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어떤 것에도 양보하지 않았다.(30)

 

어느 날 나(시몬 드 보부아르)는 그녀와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단 하나이며, 혁명이 일어나게 되면 이 세상의 굶주린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그런 식으로는 사람이 그저 생존하게 될 뿐이지 행복하게 될 수는 없다고 말하자, 시몬느는 나를 아래 위로 훑어 보면서 당신은 아직 배를 곯아 본 적이 없군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뒤로 우리의 관계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나는 시몬느가 나를 잘난 체하는 소시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 때문에 좀 괴로웠다. 나는 계급적인 문제에서는 완전히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40)


작업 속도도 너무 빨랐다. 반면에 시몬느는 손으로 하는 일은 너무 서툴렀다. 제자에게 쓴 편지에서, 시몬느는 이렇게 하소연했다. “한번 생각해 보렴. 일은 느려지기만 하는데 무자비하게 책정된 책임량은 자꾸만 쌓이는데다가 이걸 해낼 수가 없으면 해고당한다 말이다! 나는 아직도 제대로 속력을 낼 수가 없단다. 아직은 일이 서툰데다가 원래 타고나기를 동작이 느리고, 두통에 시달리고, 또 자꾸만 생각하는 버릇이 있으니까 말이야. 아무리 해도 이 버릇만은 떨쳐버릴 수가 없구나.”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하는 작업이 있다는 것은 확실히 잔인한 일이다. (140)


배고프다는 것은 그치지 않고 지속되는 느낌이다. 굶주림이 혹사당하며 먹는 것보다 더 괴로울까? 잘 모르겠지만……더 괴롭다.”(150)


공장 생활은 시몬느에게 순교의 생활이었다. (153)


더욱이 그녀가 공장에 들어간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억압받는 자들의 운명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153)


시몬느에게 인간 심리의 본질을 깨닫도록 해 준 것은 이 힘의 개념이다. 이 개념에 의해 시몬느는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사랑받는 작품 일리아드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시몬느의 일리아드, 혹은 힘의 시라는 글은 정치 문제나 사회 문제를 떠나서 쓴 것으로서 당시의 상황과는 무관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 글은 일반적인 전쟁이나, 일반적인 불행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시몬느가 일리아드에서 특히 감동을 받은 것은 인간 영혼이 얼마나 나약한 것인가, 인간 영혼은 힘과 폭력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 하는 점이었다. 힘을 행사하는 자이든지, 그 힘의 지배를 받는 자이든지 간에 인간은 힘에 의해 변형된다. 때로는 용기와 사랑으로 이 폭력에 의한 근본적인 변형을 피할 수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상처를 면하지는 못한다. 시몬느는 일리아드에 대해, “일리아드의 고통은 인간 영혼이 힘에 종속됨으로써 생겨난 것이므로 정당화될 수 있는 유일한 고통이다. 개인의 본성에 따라 약간씩은 다르지만 힘에 대한 종속은 인간의 공통된 운명이다. 일리아드에 나오는 인물들은 아무도 이것을 피하지 못하며, 우리들 역시 아무도 이것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힘에 종속되는 그 누구도 멸시받을 수 없다. 자기 자신의 영혼 내에서, 혹은 인간 관계 속에서 힘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비극적이다. 파멸의 위험이 항상 그의 머리 위를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213~214)

 

시몬느는 6월 초에 내게 안부 편지를 보내왔다.

무엇을 하고 지내니? 공부하고 있니? 전에 생각했던 주제를 살려 논문을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속히 완성해서 출판도 했으면 좋겠어. 이곳에 G. 베르제르라는 훌륭한 철학자가 있는데 그의 논문이 요즘 파리에서 출판되었어. 네가 여행할 수 있다면 올 여름에 만났으면 좋겠구나. 여기는 모두 잘 지내고 있어. 무슨 책을 보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소식을 전해 주기 바란다.”(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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