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읽은 책들
이윤영.이상길 지음 / 이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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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읽은 책들>은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의 이상길(문화연구)과 이윤영(영화 이론)이 공저한 서평집이다. <책장을 번지다, 예술을 읽다>의 후속격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출판문화>에 연재한 ‘생각, 시대를 바꾸다’를 모태로 하여 ‘한국 사회와 서구 사회에서 인식의 전환을 일으킨 책들을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읽자’는 기획의 산물이다. 비슷한 성격의 책으로 김호기의 <현대 한국 지성의 모험: 100년의 기억, 100년의 미래>, <세상을 뒤흔든 사상: 현대의 고전을 읽는다>, 정종현과 천정환이 공저한 <대한민국 독서사: 우리가 사랑핸 책들, 지의 현대사와 읽기의 풍경> 등이 떠오른다. 일련의 책들과 <우리를 읽은 책들>이 변별되는 지점은 서평의 대상이 된 책들이 1980~2000년대에 초판이 출간된 책에 집중되어 있고, 이상길이 담당한 2부 번역서 파트는 사회학 분야, 프랑스 이론의 비중이 높다는 점이다. ‘다시 읽기’가 꼭 축자적 의미가 아닌 은유적 의미였을지라도 아마 자신에게 친숙하고, 개인적으로 의미가 큰 책을 선정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주관적인 독서 체험과 프랑스에서 유학했고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에 재직 중이라는 저자들의 학문적 배경 및 위치가 맞물려 1980~90년대 인문사회 분야를 재구성하는 관점을 하나 더 얻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살짝 덧붙이면 두 저자 모두 문학과지성사에서 저서와 역서를 꾸준히 출간해 오고 있는 만큼 인연이 깊고, 이음 출판사 대표 주일우는 문학과지성사 대표를 역임한 바 있다(이런 ‘문지적’ 취향, 세계관이 묻어나는 대목은 박상륭과 이오덕 파트라고 느꼈다. 박상륭은 저자 선정의 차원에서, 이오덕은 <우리 말 바로 쓰기>를 언어에 천착해 서술한다는 차원에서).

책 제목이 우리‘가’ 읽은 책들이 아닌 우리‘를’ 읽은 책들이다. 이는 단순히 상투적인 표현을 피하기 위한 수사학적 전략이 아니라 일련의 ‘시차적 재독’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우리를 읽은 책들‘은 ’우리를 읽은 영화들‘을 말한 세르주 다네의 글에서 차용한 표현이다.

“장-루이 쉐페르가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에서 ‘우리의 유년 시절을 지켜보았던 영화들’에 대해 말했을 때, 내게는 이 표현보다 더 아름다운 표현이 없었다. 어떤 영화들이 우리를 점점 덜 지켜보는 영화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 영화들을 ‘직업적으로’ 보는 법을 배우는 것과, 우리가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고 우리 자신을 지켜보았던 영화들[…]과 사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7~8)

이윤영은 ‘우리를 읽은 책들’이 무엇인지 이렇게 서술한다.

우리 서평의 대상이 된 책들은 일단 우리가 읽은 책들이지만, 우리와 같이 살면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며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된 책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들은 우리를 ‘읽었다’, ‘읽다’라는 동사에는 독서라는 일차적인 의미 말고도 ‘마음을 읽다’에서처럼 ‘이해하다’, ‘뜻을 헤아려 알다’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이런 책들과 만난 순간을 되돌아보면, 결국 독서가 삶과 현실로 돌아가는 하나의 방법이며, 그것도 상당히 강력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우리의 자의식을 일깨워주며, 불가능한 세계가 아니라 가능한 다른 세계를 꿈꾸게 하고, 세계를 다르게 살 수 있는 힘은 대부분 어떤 책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9)

‘우리와 같이 살면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며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된’ 책들을 잊어버린다면 ‘배운’망덕한 사람(실제 본문 표현이다)이 될 것이기에 배덕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쓴 글. 이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인상이라면 혁명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가능한 다른 세계를 꿈꾸게’ 하는 책들의 계보를 재구성하는 대안적 정전화, 대안적 역사 쓰기에 대한 열망이 살짝 엿보인다. 발터 벤야민을 시작점으로 브뤼노 라투르로 끝맺는 선을 보면 아마 마르크스주의 계열 지식인들 중엔 실망(?)을 금치 못하는 이가 있을 것 같다. 프레드릭 제임슨, 가라타니 고진, 루이 알튀세르 같은 인물이 ’컷오프‘(?)됐고, ’적대‘나 ’투쟁‘을 얘기하는 좌파 사상가가 아닌 ’외교‘를 말하는 브뤼노 라투르를 이 책의 대미로 장식하며 실상 ’현대의 고전‘ 같은 위치에 자리매김시킨 것에 대해.

그런 점에서 ‘우리를 읽은 책들’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주체의 성격을 좀 더 유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앞서 저자들의 학문적 배경을 간략히 짚긴 했지만 특히 새삼스럽지만 세대를 강조하고 싶다. 1980~90년대 대학을 나와 프랑스에서 유학했다는 공통점은 ‘우리를 읽은 책들’ 목록을 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생에게 <88만원 세대>, <은하영웅전설>, <몰락의 에티카>, 슬라보예 지젝, 가라타니 고진 같은 이름이 자신과 무관하기 어려운 것처럼 <전태일 평전>, <김수영 전집 2: 산문>,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우리 글 바로 쓰기> 같은 제목은 저자가 책을 언제 읽었는지가 중요하게 느껴진다. 만약 이윤영보다 후속 세대인 사람이 저자였다면 프랑스 고등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을 읽는다는 사실(한국과 프랑스의 교육적, 문화적 격차에 대한 인식)을 알아차린 데서 비롯한 설움을 김수영이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해소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았을까 가정해 본다. 혹은 프랑스 고등학생은 칸트나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는다는 교육적, 문화적 풍토의 차이를 인터넷의 발달, 프랑스 유학생 네트워크의 통시적 연결을 통해 이미 상식처럼 알게 되어 설움이 아닌 다른 감정을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해 본다.

번역서를 담당한 이상길 파트를 보면 ’우리를 읽은 책들‘ 다시 읽기의 방향성이 좀 더 뚜렷하게 도드라지는 느낌이 든다.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딱지를 달고 무분별하게 수용되었던 이론을 배태한 사회역사적 시간선과 현재 한국 사회의 시간선이 겹치기 시작했으니 이제 진지하고 성숙하게 이들을 다시 읽고, 주체적으로 연구하자는 요청이 반복적으로 제시된다(이는 이상길의 저서 <아틀라스의 발: 포스트식민 상황에서 부르디외 읽기>를 관통하는 문제 의식이기도 하다). 누구를? 부르디외, 보드리야르, 푸코, 엘리아스를. 푸코의 경우, 매우 거칠게 계보를 그려 보면 김현-오생근-박정자-이규현-이정우를 거쳐 허경, 심세광+전혜리, 이상길이 푸코를 한국어로 읽을 수 있게 만들었고, 김민철, 배세진, 이우창 같은 신진 연구자들이 세계적 수준의 ‘푸코학’을 동시적으로 호흡하며 지식을 생산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이제 ‘~~ 담론 분석’ 식으로 푸코를 써 먹는 게 아니라 한국 사회의 현실을 푸코적으로 연구한 학문 성과가 나올 조짐이 보인다는 거다(이를테면 <기계, 권력, 사회>의 박승일의 사례를 꼽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을 몇 가지 소개해 보려 한다.

어떤 책은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길 희망한다. 비참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책이 독자로 하여금 사회를 변화하게 만들어 더 이상 책이 읽히지 않는 세상이 도래하는 게 쓰이지 않은 결말이 완성되는 경우를 말한다. 조세희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더는 읽히지 않는 세상이 도래하길 꿈꿨다. 이윤영과 이상길은 각각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과 피에르 부르디외의 <자본주의의 아비투스>를 논하며 이렇게 글을 끝맺었다.

『전태일 평전』을 읽을 필요가 없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다. 전태일도, 조영래도 기억할 필요가 없는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겉보기에 시대와 상황이 아무리 바뀌어도, 또 단어 하나하나가 아무리 무거워도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이름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전태일, 그리고 조영래. (47)

『자본주의의 아비투스』는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빈민, 실업자, 혹은 청년들이 새로운 약탈적 자본주의 경제체제 아래서 어떻게 적응(또는 부적응)하고 있는지, 그들의 꿈과 좌절과 분노는 어떤 대상을 향하고 있는지, 그 정치적 효과는 과연 무엇인지 묻게 만든다. 이 책이 아직 말할 것이 남은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184)

1960년대의 알제리, 1970년대의 한국 사회의 모순은 2024년 한국에도 여전히 잔존해 있다. 구의역 김군, 김용군 같은 청년 노동자의 비극적인 죽음은 전태일이 막고자 했던 바로 그 참혹과 양상이 다르지 않다. 여전히 전태일이 노동자의 대표적인 표상으로 자리하는 현상은 전태일에 대한 평가를 막론하고 그 자체로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윤영이 다룬 책 중 의외였던 책이 두 권 있다.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와 이오덕의 <우리 글 바로 쓰기>. 전자는 주로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나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같은 책에 밀려 비슷한 기획물에서 다뤄진 걸 보지 못했고, 후자는 프랑스에서 유학한 영화학자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우리말을 지향한다고 알려진 이오덕의 글을 선정했다는 점에서 놀랐다. 책을 읽고 나니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할 것 같다는 선입견과 달리 ‘한국적 미’를 경험적으로 포착하고자 ‘오래 지켜보는 시선’을 지녔던 이의 독보적인 미학적 에세이였고, <우리 글 바로 쓰기>는 우리 글을 우리 말의 어법에 맞게 바르고 정확하게 쓰는 걸 본질로 삼는 ‘한국어 글쓰기’의 고전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특히 이오덕이 우리 말 살리기 ‘운동’을 전개했고, 이 운동 전략의 맥락을 살펴야 한다는 주장은 항간에 ‘이오덕주의’라는 이름으로 매도되는 이오덕 발화를 다르게 이해하게 만들었다. 이윤영에 따르면, 이오덕은 순 우리말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우리 말이 한글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넉넉하게 인정한다.(104) 그렇다면 이오덕에게 깨끗한 우리 말의 기준은 무엇인가? ‘살아 있는 말’이 깨끗한 말이다. 탈식민-신식민 상황이 혼재하면서 외국어식 표현이 오남용되었던 때에 이오덕의 언어 ‘정화’ 운동은 자아-민족의 순수한 형이상학에 대한 노래가 아니라 언어의 주권을 실제 사용자인 언중에게 돌려 주려는 기획이었다. ’아래로부터‘ 깨끗한 우리 말을 바로 세우고, 그럼으로써 생각을 바로 세우고자 했던 주체성 회복의 실천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예전에 내가 어디선가 읽고 마음에 새긴 쇼펜하우어의 문장은 ‘글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생각이 명확하지 않다는 뜻이다’였다. (…) “표현이 모호하고 불명료한 문장은 언제 어디서나 정신적으로 매우 빈곤하다는 반증이다. 이처럼 표현이 모호하고 불명료한 것은 십중팔구 사상이 불명료한 때문”이며 “명료하게 생각한 것은 쉽게 적절한 표현을 발견한다. […] 난해하고 애매하고 엉클어지고 불명료한 말을 조합하는 자들은 […] 실제로는 아무것도 말할 게 없다는 사실을 가끔은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숨기려고 한다.” (…) 이는 정확히 이오덕의 생각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의 어떤 말도 그 생각과 하나로 붙어 있는 것이고, 생각이 말로 나타난 것입니다. […] 말은 잘못되었는데 생각만을 바르게 가질 수 있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104~105)

끝으로 독서와 서평의 의미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논한 이상길의 후기를 옮기며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프루스트에 의하면, 우리는 고독 속에서 책과(또는 책을 매개로 저자와) “진실한 우정”의 관계를 맺는다. 내 앞에 현존하지 않는 사람과의 이 우정은 가볍고 변덕스럽지 않으며, 이해타산을 넘어선다. (…)이 순수한 우정의 공기atmosphere는 침묵이다. 그것은 말보다 순수하다. 말이 타인을 위한 것이라면, 침묵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또한 말과 달리 침묵 속에는 우리의 결점이나 가식이 들어있지 않다. 그것은 순수하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공기이다. […] 책에는 일관성이 있다. 사실 이러한 일관성은 우리 삶에서는 불가능하다. 우리 삶에는 인간관계들rapports이 있고, 또 그 때문에 우리 사고에도 여러 이질적 요소가 끼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에는 일관성이 가능하고 이를 통해 우리는 저자 생각의 중심선을 곧게 따라갈 수 있으며, 저자의 여러 특성을 고요한 거울에 비친 것처럼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242~243)

그러니 모든 서평은 서평가가 독서를 통해 저자(정확히는 책)와 맺은 “진실한 우정”의 산물이고, 이를 또 다른 독자와 나누고자 하는 초대장이다. <우리를 읽은 책들>은 내게 ‘우리’라는 침묵과 우정의 공간을 만들라는 요청으로 다가왔다. 이 ‘우리’는 독서를 통해 독자인 나와 책-저자가 맺은 관계일 수도 있고, 이상길과 이윤영처럼 서로 상대방이 쓴 글을 읽고 장문의 이메일 대화를 주고받는 관계일 수도 있다. 1990년대생 친구와 ‘우리를 읽은 책들’은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읽을 책들’은 무엇일지 오래, 아주 오래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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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매일 거대도시로 향하는가 - 교통지옥에 갇힌 도시생활자의 기쁨과 슬픔
정희원.전현우 지음 / 김영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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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채널예스 연재 때부터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교통 철학자와 노년내과 의사의 조합으로 교통, 이동 이야기를 구상한 기획자의 통찰력이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기후동행카드, K-패스, GTX... 정책의 홍수 속에서 균형감 있게 교통의 현재와 이동의 미래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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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자 2024-05-16 16: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싶었는데! 잘 읽었습니다

rendevous 2024-06-12 09:1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열린책들 편집 매뉴얼 2024
열린책들 편집부 엮음 / 열린책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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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 은하계를 지키는 단단한 매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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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 명사들
리튼 스트래치 지음, 이태숙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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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 앙드레 모루아, 리턴 스트레이치가 전기 문학의 3대 거장으로 뽑힌다고 한다. 각각 대표작으로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바이런 평전‘과 ‘발자크 평전‘, <빅토리아 시대 명사들>이 꼽힌다.

서구의 ‘Memoir‘ 장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기원을 삼을 정도로 유구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몽테뉴의 <에세>(얼마 전까지 주로 ‘수상록‘으로 번역되었던),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 등 근대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자전적 글쓰기는 고백/회고를 통한 1인칭 내면의 창조, 중세적 세계관의 ‘신-인간‘ 관계를 벗어나 근대적 주체 형성 과정을 보여준다. 서구 기독교적 전통 때문인지 Memoir 장르는 서구 출판/독서 시장에서 여전히 가장 큰 파이를 차지하는 분야다. 이는 아마 ‘기록문화‘와도 밀접히 연관이 있어 보이는데 일정 수준/분량 이상의 기록 자료 없이는 전기를 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교차 3호: 전기, 삶에서 글로> 서문을 쓴 기획위원 김영욱은 한 사람의 생애를 글로 옮기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전기의 운명적인 한계 속에서 ‘한 인간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물은 바 있다. 유독 전기/평전 분야에 벽돌책이 많은 이유는 한 인간을 평면적으로 요약해버리지 않고, 최대한 입체적으로 풍부하게 복원하고자 하는 의지가 투영된 결과이리라.

사관 없이 역사를 서술할 수 없듯 전기/평전 작가는 특정한 관점에 입각해 인물을 바라보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관점이 단선적이고 도식적일수록 인물은 특정한 형상으로 상이 고착되고, 의미가 환원된다. 그렇다고 랑케의 실증주의 사관처럼 ‘객관적인‘ 사실을 건조하고 나열한다고 그 사람을 투명하고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는 건 아니다. 타인이라는 불가해한 존재와 자신 사이에 놓은 해석적 심연을 직시하면서 작가는 ‘둘의 끝나지 않는 대화‘에서 자신이 포착한 희미한 빛, 진실의 조각에 의지해 ‘하나의 이야기‘를 적을 따름이다.

한 사람이 남긴 기록/서술에 대한 재서술일 수밖에 없는 이중의 삶(한 사람이 살아낸 삶, 그 삶을 다시 살아내고자 분투한 전기 작가의 해석적 삶) 앞에서 삶의 다층적인 레이어들을 읽어내기 위한 노력하는 것, 이미지 조각들을 모아 마음속에서 영화처럼 상연해 보는 것, 깊은 호흡으로 세밀하게 한 사람을 상상/기억해 보는 것. 한 사람을 한 권의 책으로 번역하는 일은 이토록 지난하고 어려운 작업이다.


여담.
자기 서사 연구는 논픽션 장르의 전기, 자서전, 평전, 회고록, 일기, 편지뿐 아니라 자전 소설, ‘오토픽션‘ 같은 픽션 장르를 대상으로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대표적인 작가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파트릭 모디아노와 아니 에르노가 있고, 한국 작가 중엔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의 작가 이청준이 떠오른다. 샹탈 자케의 <계급횡단자들 또는 비-재생산>은 <랭스로 되돌아가다>의 디디에 에리봉, 아니 에르노, <교양의 효용>의 노동문화사가 리처드 호가트 등을 논의한다. 빨리 읽고 싶다...

[책 속에서]

[서문]
나는 전기를 매개로 하여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비전 몇몇을 현대인의 눈앞에 펼쳐 보이려고 시도했다. (…) 나는 성직자, 교육 권위자, 행동하는 여성, 그리고 모험가, 이들의 삶에서 나를 사로잡았고 내가 얻을 수 있었던 진실의 몇 단편들을 조사하고 밝히려고 했다.

나는 이하의 페이지들이 역사적 견지에서 만큼이나 전기(傳記) 본연의 관점에서도 흥미로운 것이 되기를 희망한다. 인간은 과거의 단순한 징후들로 취급되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다. (2)


우리는 훌륭한 삶을 사는 것만큼이나 그것을 저술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이 책에서의 연구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그러한 저작들−표준 전기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저작들−에 빚지고 있다. 그러한 저작들은 내게 없어서는 안 될 많은 정보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훨씬 더 귀중한 것−하나의 표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얼마나 많은 교훈을 얻게 되는지! 그러나 상술할 필요는 없다. 적당한 간결함−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빠뜨리지 않고 중복되는 것은 모두 털어 내버리는−을 유지하기 위하여. 간결함은 확실히 전기 작가의 첫 번째 의무이다. 마찬가지로 확실하게 두 번째 의무는 그 자신의 정신적 자유를 고수하는 것이다. 찬양은 그의 업무가 아니다; 자기가 이해한 대로 사실들을 드러내는 것이 그의 업무이다. 그것이 내가 이 책에서 목표로 했던 것−냉정하게, 편견 없이, 숨겨진 의도 없이, 몇몇 경우들에서 내가 이해한 대로 사실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거장의 말을 인용하면−“나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제안하지 않는다: 나는 드러낸다.”(3)

[옮긴이의 글]

스트레이치의 이 책은, ‘새로운 시각에서 역사 다시 쓰기’의 한 전형으로서 새롭게 주목할 가치가 있다. 우선 위인들의 이야기는 실제 삶을 그려내 보임으로써, 그 시대에 관한 더 감성적이고 더 구체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의료개혁의 이정표를 세운 나이팅게일, 국교회 부주교에서 가톨릭 추기경으로 변신함으로써 빅토리아 시대의 종교 변동을 가장 극적으로 체현했던 매닝, 영국 지배계급의 가치관을 양성하는 사립 중고등학교를 개혁한 아널드, 세 대륙에서 활약한 영제국의 용사 고든. 우리는 이들의 전기에서 빅토리아 시대를 위대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면모를, 그리고 그 배경으로서 이들을 명사로 만들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여론’과 제도들−영국 기독교, 의료체계, 명문 사립학교, 제국주의−을 인식할 수 있다.

더구나 스트레이치의 위인전은 보통 위인전과는 전연 다르다는 점에서 그 매력이 배가된다. 스트레이치 자신이 이전의 위인전들을 “케케묵고…그리고 무엇보다도 찬양 일변도”라고 엄중히 비판한 위에서 전기를 썼던 것이다. (…) 신실한 성직자 매닝 대신 지배욕과 출세욕의 화신인 매닝: 등불을 든 가냘픈 천사 나이팅게일 대신 비인간적일 정도로 주변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나이팅게일: 럭비학교의 개혁자 아널드 대신 교육개혁자의 칭호가 무색한 아널드: 영웅적 전사 고든 대신 정서 불안 속에서 원주민 대학살과 영제국의 확장 계기를 마련한 고든. 스트레이치의 펜 아래서, ‘빅토리아 시대 명사들’은 한결같이 근면하고 뛰어나게 유능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 독선적이며 편집적인 도덕 의식과 종교를 지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더구나 4명의 위인이 표명한 기독교는 서로 매우 달랐고, 한 인물 속에서도 상반된 견해가 뒤섞여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 명사들은 제각기 붙잡은 기독교를 내걸면서, 독선적 도덕 의식과 태도를 견지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경탄할 근면성과 추진력은 자신들의 도덕과 종교의 기반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잊으려는 방편이었을까? 그리고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주의의 본성도 결국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330~331)

김교수에 따르면, 그가 6.25 사변 막바지에 교사 재직 중 군대에 소집되어 신병 훈련을 받을 때, 함석헌 선생님이 『빅토리아 시대 명사들』의 마지막 장 「고든 장군의 최후」를 번역하여 손수 옮겨 적은 열 장이 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이제 80세를 바라보는 김교수는 그 편지를 “평생 가슴에 간직하였다”고 쓰고 있다. 우리의 선각자 함석헌 선생님과 김용준 교수는 스트레이치의 책에서 평생 가슴에 간직할 그 무엇을 발견했음에 틀림없다.

유난히 길고 한 때 영광의 신화에 싸여있던 빅토리아 시대는 이제 다시 새롭게 쓰여지기 위하여 거기에 있다. 그 시대를 출중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언제나 새롭게 읽혀지고 쓰여질 수 있다. 그런데 위인들의 생애를 새롭게 읽고 새롭게 쓰는 작업은 우리의 삶을 사는 방식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반세기 전에 함석헌 선생님이 이 책을 읽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편지로 적어 보냈다는 사실 앞에서 새삼 곱씹게 되는 질문이다.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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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Turn 마이 턴 - 요한 크루이프 자서전
요한 크루이프 지음, 이성모 옮김 / 마티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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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축구의 패러다임 전환을 일으킨 혁명가 요한 크루이프 자서전 <<마이 턴>>. 요한 크루이프는 축구 선수감독행정가로서 정점을 찍었던 전설적인 인물이다제목을 절묘하게 잘 지었다크루이프가 발명한 기술 ‘크루이프 턴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현대 축구의 전술적 판도를 뒤바꾼 그의 혁명적인 성과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축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현대 축구에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개념과 철학을 선구적으로 고안한 크루이프의 생각을 흥미롭게 받아들일 것 같고축구에 관심 없는 독자라도 자기 분야에서 혁신을 가져온 사람의 태도에서 충분히 인생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크루이프에게 축구는 삶 그 자체였다삶이 축구에 영향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때를 생각할수록 가정을 이루고 꾸려나가는 과정에서 내가 경험한 것이 토털사커의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토털사커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축구가 아니다. 팀 전체와 다른 선수들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축구다. 열 명의 선수 모두가 공을 가진 선수의 행동을 주의 깊게 지켜보며 그가 이제 어떤 플레이를 할지 예측하며 뛰어야 하기 때문이다.(52)


은퇴 이후에도 자기 삶을 살 수 있도록 인성 교육을 중시하고, 냉정한 프로 스포츠의 세계지만 승패 못지않게 팬을 즐겁게 하는 데 집중했던 크루이프는 시대를 앞서가는 인물이었다. 이 책의 한 줄 카피를 뽑는다면 그의 명언인 모든 불리함에는 유리함이 있다가 적절해 보인다. 크루이프는 비쩍 마른 체구로 유리하지 않은 신체적인 조건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로 하는 축구’, 기술로 하는 축구 시스템을 도입해 새 시대를 열었다. 기존 패러다임을 그대로 수용해 더 많이 더 열심히 뛰는 데만 몰두했다면 그는 결코 세계적인 선수로 발돋움하지 못했을 것이다.


팀 스포츠 경기에서 사회가 개인들의 총합 그 이상이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이 자주 출현한다. 최고의 선수들로만 팀을 꾸린다고 해서 최고의 팀이 되는 건 아니다(레알 마드리드 '갈락티코 1'의 성취를 까 보면 그다지 휘황찬란하지 않다).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선수 개개인의 개인기에 의존하기보다(클린스만의 '해 줘' 축구 같이) 시스템에 의한 조직력이 경기력의 성패를 좌우하는 비중이 커진다. 스타 플레이어들이 즐비하지만 암울한 경기력으로 일관하고 있는 EPL의 맨유, 첼시 같은 팀(+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을 보면)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명언을 되새기게 된다. 축구의 감동은 사회학자 김홍중이 <은둔기계>에서 묘사하듯 천재적인 개인의 예술적인 플레이, 피지컬과 뇌지컬을 극한으로 끌어낸 경이로운 플레이에서 오기도 하지만 11명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조직력, 한 수 위 실력의 선수를 상대하기 위한 헌신적인 협력 플레이, 자신이 눈에 띠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팀을 위해 궂은 일을 도맡는 희생 플레이(투혼. 현역 시절 박지성은 'unsung hero'라는 별명으로 불렸다)에서도 온다.


축구에서 새 팀의 판을 짜는 작업을 '리빌딩'이라고 부른다. 감독의 철학, 전술을 녹여 새로운 팀을 만드는 데 2~3년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오합지졸 같았턴 팀이 눈빛만 봐도 마음이 통하는 '원팀'이 돼 자신들의 '빌드-'을 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훈련을 거쳐야 하는지 확인하고 싶으면 초창기 '골때리는 그녀들'을 보면 된다. 유럽 축구를 보며 열광하고, 국가대표팀 축구를 보며 분노와 환멸에 사로잡혔던 내게 축구의 순수한 즐거움, 열정의 아름다움을 깨우쳐 준 건 '골때녀'였다. 기술적으로 투박하고, 조직적으로 엉성한 신체들이 먼 길을 돌아 끝끝내 '빌드-' 축구를 해 내는 모습에서 몰려드는 감동이 있었다.


애플 티비의 오리지널 콘텐츠 <테드 래소>는 경기장에서 퍼포먼스를 보여 주는 엔터테이너로서 축구선수이기 이전에 '사람'인 선수들의 일상을 담아낸 코미디 장르의 스포츠 드라마다. 만약 안드로이드, AI 로봇 선수들로 축구장을 채운다면 축구 경기가 더 박진감 넘치고 흥미로워질까? 로봇 축구는 로봇 축구만의 미학이 있을 테지만 이 드라마는 축구와 일상을 양발 드리블 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스포츠만이 주는 매력을 솜씨 좋게 그려냈다. 모든 걸 승패, 성적으로 판가름하는 냉정한 프로 스포츠의 세계, 자본주의적 냉정함과 팬들의 광신적 열광이 맞부딪치는 경기장에서 스포츠가 선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한 사람이 스포츠를 통해 더 나은 사람으로 어떻게 성장하는지), 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우리가 왜 스포츠를 사랑하는지 본질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드라마.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테드 래소>처럼 스포츠의 서사가 좀 더 다양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책 속에서]


축구에 관한 한 나는 한 가지 결점을 가지고 있다. 오로지 최고의 축구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선수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수준 낮은 축구는 할 수가 없다. 나는 한 방향밖에 보지 못한다. 위로, 더 높이, 정상을 향하여. 최고가 되는 것. 내가 결국 피치를 떠난 것도 그래서였다. 내 몸은 더 이상 최고 수준의 축구를 할 수 없었고, 그렇다면 피치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나에겐 강한 정신이 있었기에 감독이 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내 인생은 늘 더 잘하고 더 발전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삶의 모든 일에 그런 마음으로 임했다.(11~12)


내 관심은 축구의 철학, 이상적인 축구에 있었다. 나는 늘 앞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을지에 집중했고, 종종 과거를 돌아볼 때는 오로지 실수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교훈은 삶의 여기저기에 있고, 이것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나중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에는 내가 무엇을 지나왔는지 볼 수 없었다. 돌아보건대 내가 축구선수로서 배운 가장 중요한 네 가지는 좋은 잔디, 깨끗한 드레싱룸, 축구화를 스스로 깨끗이 닦는 습관, 촘촘한 골네트다.

기량과 스피드, 기술과 득점 등 나머지 모든 것은 그다음 문제다. 이것이 나의 축구와 인생을 정의하는 철학이다. 나는 토털사커부터 가정생활과 크루이프 파운데이션에 이르는 모든 일에서 이 철학을 실천했다. 나의 인생은 더 발전하고 성장하기 위한 끝없는 도전이었다. (15)


또 어떻게 보면 숫자를 좋아하고 머리로 셈하는 데 익숙했던 것이 훗날 축구에서 숫자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내 특징으로 연결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상대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공간을 얼마나 더 잘 활용할 수 있을지를 나는 숫자로 생각했다. 디스테파노도 그랬었다. (22)


나에게 축구를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축구를 즐기는 것이었다.(22)


나는 야구에서 집중적으로 배운 세부적인 부분들을 나중에 축구에서도 매우 유용하게 활용했다. 투수의 투구를 결정하는 사람은 포수다. 투수는 필드 전체를 볼 수 없지만 포수는 볼 수 있다. 또 포수는 투수의 공을 받아 어디로 던질지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모든 공간과 모든 선수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어떤 축구감독도 나에게 공을 받기 전에 그 공을 어디로 패스할지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나중에 프로 축구선수로 뛰면서 어린 시절 야구에서 배운 것, 즉 언제나 경기장 전체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떠올렸고 그것이 나의 강점이 되었다. 야구는 훈련으로 재능을 키울 수 있는 대표적인 스포츠로, 축구와 비슷한 점이 참 많다. 순간 스피드, 슬라이딩, 공간 인지력이 요구되는 것도 그렇고, 한 수 앞서 생각하고 여러 다른 수를 생각해야 하는 것도 비슷하다. 이는 론돈 훈련(선수들이 가깝게 모여서 패스를 주고받는 훈련 방식옮긴이 주)을 토대로 하는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 축구와도 일맥상통한다. (29)


축구를 잘하는 선수란 공을 단 한 번에 터치하고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를 아는 선수다. 이것이 네덜란드 축구의 핵심이다. 나는 늘 축구는 아름다우면서 공격적이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아약스 시절 우리가 늘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기술과 전술이다. 많은 감독이 움직임을 강조하고 많이 뛰라고 하지만, 나는 너무 많이 뛰지 말라고 말한다. 축구는 머리로 하는 게임이다. 축구선수는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너무 빨라도 안 되고 너무 늦어도 안 된다.(40~41)


그 시절 아약스에서 우리는 꽤 좋은 결과를 누렸고 꽤 좋은 축구를 펼쳤지만, 나는 내가 단지 축구선수로 기억되기보다는 언제나 나아지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43)


그때를 생각할수록 가정을 이루고 꾸려나가는 과정에서 내가 경험한 것이 토털사커의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토털사커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축구가 아니다. 팀 전체와 다른 선수들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축구다. 열 명의 선수 모두가 공을 가진 선수의 행동을 주의 깊게 지켜보며 그가 이제 어떤 플레이를 할지 예측하며 뛰어야 하기 때문이다.(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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