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읽기
금정연 지음 / 스위밍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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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인구는 세계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다(<책맹인류> 참조). 유아기부터 스마트폰을 사용해 온 디지털 디바이스 유인원 세대 출현, 유튜브-틱톡, OTT 가히 제국적이라 할 만한 동영상 플랫폼 대두, 뉴미디어를 매개로 범람하는 자극적인 콘텐츠, 책을 읽을 만한 시간과 여유를 확보하기 힘든 팍팍한 세상… 세계독서인구감소위기대처위원회 금정연 한국 지부장이 제출한 ‘2024 한국 독서율 43퍼센트에 대한 분석’ 1분기 보고서에 제시된 한국 사회의 독서율 감소 원인들은 정도에 차이는 있겠으나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잠깐 독서율 43퍼센트 지표를 짚고 넘어가면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한 ‘2023년 국민 독서실태’에 따르면 “일 년에 한 권이라도 책을 읽는 성인이 채 절반이 되지 않는다”라고 한다. 책에 한정하면 읽는 사람이 읽지 않는 사람보다 적다. 십 년 전만 해도 독서율은 70퍼센트대를 유지했다고 한다. 역시 유튜브와 넷플릭스 탓인가…

​금정연 지부장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 이면 구조를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쇼츠와 릴스 같은 숏폼 콘텐츠에 압축된 ‘도파민’에 중독되고, ‘빨리 감기’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리듬에 익숙해져서 긴 글을 읽기 힘들어하는 현상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파악하려면 ‘자유롭고 자율적인 개인’이라는 자유주의적 환상에서 벗어나 인간과 사물-기계의 동맹, 기계-권력-사회의 아상블라주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2023년 통계청이 발표한 근로자 이동행태를 실험적으로 분석한 통계에 따르면 통근자의 하루 평균 출퇴근 소요시간은 72분, 수도권러는 83분이었다. 나의 출퇴근 소요시간은 통합 3시간 30분~4시간 정도이다. 노선 바이 노선이겠지만 일반적으로 출퇴근길 대중교통은 통근자에게 책을 읽을 만한 물리적, 정신적 환경을 허락하지 않는다. 북디자이너 신덕호는 서점 인덱스에서 열린 <펼친 면의 대화> 북토크에서 도시의 인구 밀도-혼잡도, 스트레스, 속도를 포괄한-와 독서 사이 유의미한 상관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 얘기한 바 있다. 18시 이후 신창행/서동탄행 1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홍대입구 방향으로 가는 2호선, ‘강남역’ 같은 곳에선 잠깐 사각형처럼 죽어 있는 것말곤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루 8시간, 주 40시간이 준수되는 사업장에 소속된 노동자라고 할지라도 ‘직주근접’-잇츠 저스트 어 부동산 씽-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책을 읽을 수 없거나 책을 읽기 굉장히 어렵다. 이는 단순히 독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삶의 주도권에 관한 이야기,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주체적인 시간에 관한 이야기, 재생산의 굴레에 속박된 통치되고 있는 삶에 관한 이야기, 여전히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대가로 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소외에 관한 이야기, 인간의 수면 시간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는 문화산업이 갈아 먹고 있는 건강에 관한 이야기, 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순도 높은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근본적으로 진정한 삶을 살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지는가 하는 문제다.

​늦은 밤, 하루의 일을 마치고 돌아와 잠깐 쉴 생각으로 스마트폰을 들었다가 피로한 눈으로 필요하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은 것들을 몇 시간이나 보았던 경험이 있을 테니까요. 그건 개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스마트폰의 문제도 아니에요. 우리에게 스마트폰이 아닌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체력을 남겨주지 않는 사회가 문제입니다.

<한밤의 읽기>, 금정연, 스위밍꿀, 9~10쪽

​우리에게 그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쟁취해야 한다..! 무엇을?

​먼저 주4일제 근무, 최저임금 인상, 주거 인상, 보편 복지와 사회적 안전망 확충, 조건 없는 기본 소득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데요. 아마 이런 것들이 이뤄진다면 독서율은 올라가겠죠. 당연히.

<한밤의 읽기>, 200쪽

​장기 과제 청사진은 손색이 없다. 핵심 어젠다를 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쯤 되면 한 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꼭 독서가 아니더라도 산책을 하고, 친구를 만나 근황을 공유하고, 영화나 공연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진정한 삶을 살 시간’이 우리에게 너무 부족하다는 모순이야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다. 이 진정한 삶의 시간을 개방하는 실천들 중 독서가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 왜 읽어야 하는가. 하필이면… 인간의 뇌는 책을 읽기 적합한 형태로 진화하지 않았다는 말까지 나오는 마당에… 금정연 지부장은 과거 세대가 범했던 엘리트주의적-계몽주의적 오만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독서의 효용 운운하는 실용주의의 절충적, 타협적 노선으로 빠지지도 않는다. 비장하지 않고 담백한 톤으로 진실, 본질을 말한다.

그런데 정말 책을 읽어야 할까요? 그런데 정말 책을 다시 읽어야 할까요? (...) 네, 책을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책이 좋은 거라서, 인류의 지적 유산의 보고라서, 우리의 공감 능력을 키워주는 예술이라서 뭐 그런 이유는 아니고요. 살기 위해서, 다만 살기 위해서 책을 읽을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한밤의 읽기>, 200~201쪽

​생존 독서. 잘 생각해 보면 이게 결코 과장된 수사가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다. 어젯밤 쇼츠 알고리듬 지옥에 빠져 지금 죽을 것 같은 기분에 시달리며 출근하고 있는 이라면 도파민 중독은 곧 현대인의 실존적 소외이자 존재론적 공허에서 비롯된 현상임을 체감하고 있을 것이다. 이건 생존의 문제다. 독서가 도파민 중독에서 탈출하는 디톡스 실천으로만 의미를 갖는다면 구태여 ‘생존’까지 무겁게 입에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가짜 뉴스가 범람하고 이런저런 말들의 홍수에 나도 모르게 휩쓸리기 쉬운 세상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갈 수 있으려면”(203) 읽어야 한다. “인권이 어떻게 발명되고 역사적으로 어떻게 확보되어왔는지, 민주주의는 어떻게 발전되어 여기까지 왔는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무엇이 잘못되었고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다른 나라의 경우는 어떤지 등을 생각하기 위해”(208~209) 읽어야 한다.

읽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뇌지컬’을 키우는 데,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독서보다 더 나은 실천을 인류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줄 안다.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힘이 담긴 사유, 즉 사상은 책이라는 형식과 결합하고 독자는 사상을 자기 언어로 번역함으로써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으로서 현재를 제대로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현재를 다르게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금정연 지부장이 제안하는 일상 단계의 실천은 ‘출퇴근 읽기’이다.

출퇴근 읽기 + 전자책 = 독서 혁명

‘한밤의 읽기’ 프로젝트에 바로 착수하기 부담감이 따르는 게 사실이다. 이미 ‘새벽 감성’이란 지배 담론을 고안해서 한밤의 불온성을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길들이는 전략이 꽤 성공을 거둔 바 있다.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엿보는 일은 ‘현타’ 부작용으로 현실 도피, 회피를 불러올 수 있다(역설적으로 밤의 위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다). 일단 범국민적으로 독서율을 증진시키려면 일상적으로 손쉽게 실천할 수 있는 생활 운동부터 시작해 볼 수 있다(인류세 대응도 ‘아나바다’ 운동부터?). 그러다 심화 과정으로 진입하면 출근길 독서, 점심시간 독서, 퇴근길 독서, 밤의 독서 목록을 각각 구성할 수도 있다. 마치 오전, 점심, 오후, 밤 시간대별로 소설, 산문, 편지 등 다른 장르 글쓰기를 했던 버지니아 울프처럼. 그러면 한 달에, 그리고 일 년에 꽤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다. 권수가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자투리 시간을 흡수해 버리는 숏폼 콘텐츠의 전횡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언제든지 읽기의 리듬을 되찾아오기 위한 전략을 구비해 둔다는 데 의의가 있다. ‘도둑맞은 집중력’ 탈환 작전. 출퇴근 읽기와 일기 쓰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전부하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매일 24시간이 주어졌고, 우리가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그 24시간을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스스로 그것을 살아내야 합니다. 얼마 있지 않은 달콤한 밤의 시간을 쪼개고 희생해서 자기가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야 하는 거죠. 저는 그중 하나가 한밤의 읽기라는 말씀을 드리는 거고요.

다른 한편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앞에 보이는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절망적이라고 느껴져도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다른 세상은 가능합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눈앞에 보이는 가능한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한밤의 읽기입니다.

<한밤의 읽기>, 168~169쪽

<한밤의 읽기>는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한밤의 읽기’로의 초대장이다. 밤이 선생(황현산)이라고 했던가. 밤 센세를 모시려면? 낮에 묶인 시간을 탈취해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밤에 읽고 쓰기. 생산성의 사슬에 결박된 시간의 고리를 느슨하게 풀고 쓰기와 읽기를 통해 삶을 뜨개질하기. 다음 날 피로 대처 방안은? 친구가 했던 명언을 소개하는 걸로 끝맺어 볼까 한다(그는 <한밤의 읽기>를 읽고 금정연이 자신과 피의 농도, 심박수가 비슷한 사람일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피곤한 상태를 받아들였다.

나는 이를 들뢰즈의 표현을 빌려 적극적 수동성이라 부르고 싶다. 낮에 절대적으로 헌신함으로써 밤에 존재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겠다는 결단, 또렷한 맨 정신으로 낮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과잉된 밤이 만들어낸 틈새에서 낮을 살겠다는 ‘은닉 대본’, 다른 삶을 사유하고 다른 세상을 꿈꾸는 시간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욕심.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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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의 요정 - 일기들 민음사 탐구 시리즈 9
유리관 지음 / 민음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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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박살 난 한국어를 구하기 위해 지옥에서 온 무명용사.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가 혼탁한 언어 생태계에서 한국어를 구하기 위한 문화운동이었다면 유리관의 ‘교정의 요정’은 망한 세상에서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노동자의 분투기이자 선언문이다. 말 되는 세계를 위한 말 싸움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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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 컴북스 이론총서
김환석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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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브뤼노 라투르>와 한 쌍을 이루는 탄탄한 라투르 입문서가 나와 반갑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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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
김경수 지음 / 필로소픽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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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이 세상에 나왔고, 이제 우리는 밈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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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자 2024-06-18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 너무 읽고 싶어요 ㅌㅋㅌㅋㅋㅋㅌㅌㅌ
 
자서전의 규약 현대의 문학 이론 30
필립 르죈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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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을 제목으로 한 책 두 권을 낸 불문학자 유호식의 자서전 아닌 <자서전>, 자서전-자전적 소설 연구서 <자서전: 자신의 삶으로 이야기를 만들다>을 읽고 있다. 민음사에서 나온 전작 <자서전: 서양 고전에서 배우는 자기표현의 기술>에서 앙드레 지드, 나탈리 사로트, 샤토브리앙, 미셸 레리스 같은 문학가와 루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몽테뉴, 성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철학자들을 골고루 다뤘다면 서울대출판문화원에서 나온 후속작 <자서전: 자신의 삶으로 이야기를 만들다>는 대부분 '자전적 소설'로 분류될 만한 작품들(바르트의 <애도 일기>, 루소의 <외로운 산책가의 몽상을 제외하고)을 대상으로 작품론/장르론을 펼치고 있다. 필립 르죈의 <자서전의 규약>이 문학 이론서에다 번역서여서 그런지 생각보다 잘 읽히지 않아서 유호식의 <자서전>으로 갈아탔다.

먼저 <자서전의 규약>을 짚고 넘어가 보려 한다. 자서전 장르를 문학의 한 갈래로서 본격적으로 다룬 거의 유일한 이론서, 비평서라 할 수 있는 필립 르죈의 <자서전의 규약>은 제목이 시사하듯이 장르로서 자서전을 성립시키는 '게임의 규칙'을 설명하는 1부 '규약', 루소-지드-사르트르 작품론이 수록된 2부 '자서전 읽기', 문학사의 관점에서 자서전을 논의하는 3부 '역사'로 구성되어 있다. <자서전의 규약>이 해당 분야에서 교과서의 위상을 누리고 있다는 명성에 걸맞게 깔끔한 솜씨로 장르를 정의하고 있었다.

"한 실제 인물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소재로 하여 개인적인 삶, 특히 자신의 인성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이야기한, 산문으로 쓰인 과거 회상형의 이야기"

실제 인물이 자기 삶을 회고적으로 쓴 이야기 정도로 간추릴 수 있겠다. 르죈이 밝힌 이 책의 탐구 목적은 "자서전 텍스트가 기능하도록 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그것을 읽는 독서 행위를 통하여 자서전 텍스트의 기능 작용을 살펴보는 것"이다. 쓱 훑어본 인상으로는 야우스의 수용 미학과 언어학/기호학(뱅베니스트가 자주 언급된다)을 접목해 '자서전 텍스트의 기능 작용'을 살펴본 것처럼 보였다. 르죈의 말을 빌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 번째 연구 「자서전의 규약Pacte autobiographique」에서 내가 보여주려고 한 것은, 자서전 장르가 그에 포함된 형식적 요소들보다는 그 텍스트에 대한 ‘읽기의 계약contrat de lecture’에 의해 정의되며, 따라서 역사적 시학은 읽기의 계약의 체계, 그리고 그 계약들의 통합적 기능이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 필립 르죈은 '규약' 파트에서 저자와 화자 그리고 주인공 간의 동일성 문제, 주인공의 인칭 문제 등을 논하며 형식적으로 자서전과 전기를 구분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표준적인 형식을 정의하고 장르의 규칙을 규정할 수 있을 때, '자서전 연구'가 학술적으로 가능해지고 축적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개척자로서 르죈의 성취는 칭찬받아 마땅해 보인다.

언어적 형태

a) 이야기 recit

b) 산문으로 되어 있을 것

2. 다루어진 주제: 한 개인의 삶, 인성의 역사

3. 작가의 상황: 저자(그 이름이 실제 인물을 지칭함)와 화자의 동일성

4. 화자의 상황

a)화자와 주인공의 동일성

b)이야기가 과거 회상형으로 씌었을 것

(17)

-회고록memoires(조건 2 부족)

-전기biographie(4a)

-한 개인의 삶을 그린 사소설roman personnel(3)

-자전적 시poeme autobiographique(1b)

-내면 일기journal intime(4b)

-자기 묘사 이야기 autoportrait 혹은 수필essai(1a와 4b)

자서전은 사실상 저자의 고유명이 제목에 해당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국역본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제목이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인 것처럼... 자서전은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이고, '저자-화자-주인공' 동일성이 지켜지고 있다는 '읽기의 계약' 하에 독자들은 네루다의 인생사를 읽는 것이다. 르죈은 "저자란 결국 출간된 일련의 여러 가지 텍스트에 책임을 지닌 동일한 인명"임을 강조한다. 르죈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시작하는 전기biography의 유구한 역사적 줄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기원으로 삼는 'Memoir' 장르의 역사와 '자서전Autobiography'를 구분 지으며 '근대의 장르'로서 자서전을 탐구하고 있다. 근대적 개인과 더불어 탄생한 이 특수한 사적인 글쓰기는 (일반적으로) 일대기적 서술을 통해 인생의 의미/목적을 종합적으로 서술하는 걸 겨냥한다. 파편화된 일상을 열거하는 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서사적인 구조 속에서 인생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를 꿰어 보고자 하는 불가능한 야심, 끝(모든 걸 한눈에 볼 수 있다고 가정되는 위치)에 서서 처음부터 모든 과정을 (회고의 한계를 무릅쓰고) '다시' 보고 기록하겠다는 욕망...

자서전의 규약은 하나의 총체이다. 자신의 인생을 자기 이름으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인생의 의미를 정해야만 한다. 또한 자신의 인생을 모두 감싸안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종합이 필요하며, 과거의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의 자신을 설명해야만 한다. 스스로 작품 속에 개입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지드는 자서전이 갖는 이 모든 양상이 탐탁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알기’라는 개념이 그 안에 제한과 인위성을 포함하는 함정이라고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내가 나 스스로를 인위적으로 모방하면서 나의 인생에 있어서 모조의 단일성을 일구어내겠는가?”, “이틀 후면 51세가 되는데도 아직도 나 자신을 모르다니! 무엇인가가 다 뒤섞여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나 자신이다. 사실 나는 스스로를 분석하려고 애쓰지도 않지만 말이다”, “나는 나의 느낌들을 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262)

저자는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자서전을 쓴다면 독자는 타인의 자서전을 왜 읽는가. 역자 윤진은 "허구의 삶 속에 가능한 자기의 삶을 투사하는 간접 체험인가? 타인의 내면을 궁금해하는 은밀한 엿보기인가?" 운을 띄우며 결국 자서전을 읽는 독서 행위는 "자아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몸짓"이 아닐까 하는 화두를 던진다. 서사화된 인생 텍스트에 독서 행위를 통해 개입함으로써 '자아 정체성 회복'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이뤄질 수 있는지 규명하려면 지면이 꽤 많이 요구될 텐데... 차차 고민해 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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