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덩! - 완전한 휴식 속으로
우지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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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적이 두 번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한국의 수영장에서, 22살 때 싱가포르의 수영장에서. 갑자기 수심이 깊어지는 구간에서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엄습하는 두려움, 위로 폴짝폴짝 뛰면서 겨우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전력으로 레일을 가로질러 수영장 옆면으로 향하는 몸부림, 순간적으로 에너지를 급격하게 소모해서인지 산소가 부족해서인지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화이트 아웃‘의 시간. 그리고 또 하나의 기억. 초등학교 2학년 혹은 3학년 때 학교에서 단체로 캐리비안베이에 갔다. 메인 코스(?)인 파도풀을 재밌게 타고 나서 자율적으로 이용하고 싶은 기구나 코스에서 놀던 중에 뒤따라가던 친구를 놓치고 물살의 힘을 못 이겨 다른 쪽으로 떠내려갔다. 변기물에 심연으로 빨려들어가는 휴지처럼. 뒤돌아 역방향으로 열심히 물장구를 쳤지만 당시 내 근력으로는 물살을 거스를 수 없었다. 자아의 완전한 내려놓음, 나를 압도하는 힘에 대한 완전한 순종, 온전한 체념을 그때 처음으로 경험했었던 것 같다. 고요한 수면 아래로 인간이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끔 만드는 마성의 힘을 지닌 물의 이중성. ‘맥주병‘이란 표현이 시사하듯 사람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어 목숨을 잃게 만들 수 있는 물의 위력. 중력이 지배하는 평평하고 단단한 대지와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물의 세계.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한 탓인지 몰라도 물에 대한 호감은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2015년 여름방학, 친구와 함께 한 달 정도 수영장에 다닌 적이 있다. 많은 수영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 물 밖의 세계에서 물 속의 세계로 진입하는 순간 찾아오는 정적이 너무 좋았다. 외부의 소리가 차단됨과 동시에 내면의 소란까지도 일순간에 잠잠해져 고요와 평정이 찾아왔다. 굳이 어렵게 명상을 할 필요가 있나 살짝 현타가 오기도 했다. 수영을 제대로 할 줄 몰랐고, 물에 대한 공포가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상태였으나 상관 없었다. 물 속에 몸을 맡긴 순간부터 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거두고 단순해질 수 있었고, 현재에 집중할 수 있었다. 거기에 수영장(대전 용운국제수영장) 물이 좀 달랐는지 몰라도 대충 누워도, 몸에 힘을 완전히 빼지 않은 상태에서도 몸이 떠올랐다. 그래서 배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배영을 하다 보니 자신감이 살짝 붙어 친구에게 교습을 받아 자유형도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수심이 깊어져 발이 닿지 않는 구간 직전까지만 딱 찍고 돌아오는 식으로 안전하게 수영을 즐겼다.

그때 기억 때문이었을까. 한창 슬럼프에 빠져 있던 시기에 수영을 배워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딱 <가능한 불가능>의 ‘할 수 있어 프로젝트‘마냥 한동안 별다른 성취나 배움의 기쁨 없이 지내면서 자존감이 낮아지고, 우울증이 찾아와 의욕 상실, 무기력, 일상의 활력 저하와 생기 잃음을 겪던 차에 번득 ‘수영‘ 생각이 났던 것이다. 휴식과 놀이, 운동이라면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최고의 카드 ! 하지만 집 근처 마땅한 수영장이 없었으며 시간대가 안 맞는 이유 등으로 강습을 수강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완전한 휴식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로서의 물/수영장. 그런 수영을 소재로 한 그림과 더불어 휴식에 대한 에세이를 담은 책이란 설명을 듣고 <풍덩!>에 다짜고짜 ‘풍덩!‘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 주말 동안 <풍덩!> 덕분에 주말을 주말답게 보낼 수 있었다.

2

저자는 말한다. 모두가 지쳐있다고. 이는 한국이 OECD 국가 중 노동시간이 가장 긴 축에 속하는 ‘과로사회‘인 탓도 크지만 사람들이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고 성과를 내기 위해 쉬는 법을 잊어버리고 일에 중독된 영향도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휴식의 욕구 자체를 억압하고 부정하거나(휴식의 가치를 폄하하는 사고방식에서 기인하는 행동일 가능성이 크다) 쉬면서도 죄책감을 느껴 제대로 쉬지 못하거나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는 법을 몰라 스스로 쉰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쉬는 게 아닌 결과를 낳는다. 일반적으로 휴식 하면 ‘수면‘을 가장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잠이 다시 노동을 하기 위한 재생산의 기능에 그친다고 했을 때 잠이 휴식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지 의문이 든다. ‘하던 일을 멈추고 잠깐 쉼‘ - 휴식은 일-수면-일-수면으로 무한반복되는 루틴에서 벗어나 일상을 지배하는 시간의 리듬을 잠깐이나마 바꾸는 일, 깨어 있는 상태에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심신을 충전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일에 가까워 보인다. 일례로 지친 몸을 침대 위에 내동댕이치듯 던져 자고 일어나도 피곤함이 가시지 않아 무기력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굉장히 흔하다. 수면이 생존을 위한 생명 에너지를 보존하고 충전하는 최소한의 휴식에 가깝다면 저자 우지현이 말하는 휴식은 ‘삶을 회복시키는 방법‘이다. 뭔가를 하고 싶은 의욕을 되살아나게 하고, 창조적인 영감이나 생각을 들게 하며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춰주는 행위. 이처럼 삶에서 휴식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비해 휴식은 개인이 각자 알아서 하는 영역으로 주변화되어 있고, 성과지향/중독 사회에서 ‘나태함‘이란 도덕적 굴레를 덧씌워 휴식의 가치가 왜곡되고 폄하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저자는 쉬어야 한다고, 휴식을 잘 하면 삶을 잘 살 수 있다고 설파한다.

글은 조금 심심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휴식을 옹호하고 권하는 힐링 에세이에 있을 법한 평이한 내용들이 부분적으로 보였다. 이런 약점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큼 매력적인 이 책의 강점은 수영을 소재로 한 그림(무려 100여 점!)이 배치된 그림 에세이라는 점이다. 수영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19세기의 회화부터 동시대에 그려진 작품까지 수영을 소재로 한 다양한 그림들을 제시해 수영-휴식의 이중주를 유려하게 풀어낸다.

이 책은 수영과 휴식을 넘나든다. 수영 그림으로 채워져 있지만 수영만을 논하지 않는다. 휴식에 관해 말하지만 휴식만을 전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화가들의 이야기가 담긴 미술책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수영과 휴식에 대한 산문집일 수 있으며, 또 누군가에게는 그림을 감상하는 화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의 성격을 결정짓는 것은 결국 독자들의 몫이다. 어떤 종류의 책으로 다가가든 책을 보며 잠시라도 쉴 수 있다면, 책을 덮고 각자의 휴식을 즐기게 된다면, 나로서는 더없이 기쁠 것 같다.(10p)

책에는 강렬한 햇빛 아래 여름바다를 만끽하는 작열하는 청춘의 이미지(마치 라이언 맥긴리의 사진 속 청년들처럼)가 있고, 해수욕장에서 누워 각자의 방식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사람 없이 텅 비어 있는 수영장이지만 왠지 모르게 평온한 분위기를 풍기는 풍경이 제시된다. 수영장은 수영장대로, 해수욕장은 해수욕장대로, 개인 풀장은 개인 풀장대로, 인적이 드문 바닷가는 바닷가대로 뉘앙스는 다르지만 보편적인 휴식의 정념과 분위기를 풍긴다. 물이 인간을 헐벗음에 가까운 몸둥어리로 존재하게 만들어서인지 물 속의 세계에서 인간들은 순수하게 동물에 가까워지는 듯하다. 물 속에서 움직이고, 지치면 밖으로 나와서 쉬고, 배가 고프면 뭘 먹고, 졸리면 자고... 자연적인 욕구를 강렬하게 감각하고 거기에 따라 움직이는 삶. 휴식이 자연스레 몸과 마음에 깃들게끔 사람을 순하게 길들이는 물살의 손길.

아무래도 내년에는 수영을 꼭 배워야겠다. 그리고 잘 쉬는 법을 꾸준히 배우고 연습할 생각이다. 미술관에 가지 못하더라도 그림 에세이, 화집, 사진집이 대상과 나의 시선, 내면의 풍경만이 존재하는 ‘사이‘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실감했기에 또 이런 류의 그림 에세이를 찾아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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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불가능
신은혜 지음 / 제철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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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일을 벌인 적이 언제였을까. 딱히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운 일상을 반복한 지 꽤 오래됐다. 2022년의 이탈리아어 공부하기 프로젝트는 중간에 좌초될 위기에 처해 있고, 그나마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할 만한 프로젝트는 2019년 10km 마라톤 도전이지 않을까 싶다. 예전에는 팟캐스트도 만들어보고(1인 독립제작으로 <마음짐승의 책 먹는 시간>이란 제목의 팟캐스트를 만들었으나 1화를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민음사와 문학동네의 네이버 카페를 활용해 독서모임을 주도적으로 만들어보기도 하고(원하나의 <독서모임 꾸리는 법>이 좀 더 일찍 나왔더라면 독서모임을 좀 더 지속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었을까? 그래도 민음 북클럽을 통해 함께 한 ‘희곡읽기 모임‘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대학에서 주관한 각종 공부 모임이나 공모전을 중심으로 ‘안 하던 짓‘을 저질러보거나 남들과 새로운 도전을 시도해보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동력 자체가 많이 떨어졌음을 체감한다. 일상의 권태로움에 적당히 무뎌지고 어느 정도 마비된 채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군대에 오고 나니 별다른 재미와 성취 없이 쪼그라들고 있는 나 자신을 덩그러니 마주하게 되는 순간에 찾아오는 우울은 거의 사라졌지만 시끌벅적하고 소란스러운 공간 속에서 내 기분이나 감정이 어떤지 모른 채로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이상하게 짜증나는 순간이 잦아졌다. 친구들이 먼저 전화를 걸어주지 않으면 먼저 전화하는 법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SNS와 블로그의 적당히 노출된 사적/공적 경계의 친밀성의 장소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소통을 하고 연결감을 느낀다. 친구와 지인의 성장과 성취, 전진을 보며 질투심이나 열등감을 느끼지는 않지만 모종의 경각심을 느끼긴 한다. 딜레탕트로서 책을 향유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나도 뭔가 멋진 일을 해내고 싶다고, 아니 멋진 일은 고사하고 어떤 일에 열중해서 내 역량을 제대로 발휘해보는 순간을 경험해보고 싶다고. 그런데 각 잡고 글을 쓸라치면 온몸에 퍼져 있던 피곤함이 급 응축돼서 머리를 조여오고, 특별한 구성 작업 없이 초고(토고/토 나오는 원고)를 쓰고 나면 어느새 시간이 다 지나가 있었다. 비공개를 걸어둔 토고가 두 개 정도 쌓여야 하고 싶은 얘기가 명확해지고 초점이 맞춰지는데 너무 비효율적인 방식이라 습관 교정이 시급해보인다. 하지만 그동안 쓰레기 같은 걸 쓰느니 차라리 책 한 자라도 더 읽자는 마인드로 쓰기를 미뤄왔던 나날이 얼마나 많았는지, 쓰기의 누락으로 인해 읽기/공부가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었는지 생각하면 뭐라도 쓰고 있는 지금이 나아 보인다.

대학원 과정을 수료한 시점이었을까. 학원을 다녀볼까 하는 생각에 잠시 사로잡혔던 적이 있다. 논문 주제를 픽스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간과 정력을 엉뚱한 데 쏟아붓는 건 말이 안 된다고, 결국 이도저도 아니게 애매해질 거라고 스스로 판결을 내려 기각시켰다.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었다고 보여지지만 그때는 진심이었다. 뭔가 새로운 걸 배우고 싶다고(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하루하루 어제와 다르게 성장한 나 자신을 확인하고 싶다고, 어쩌면 그런 색다른 자극이 신선한 영감을 줄 지도 모른다고. 제도권 내에서 학문적 글쓰기를 통해 전문적으로 지식을 생산하는 훈련을 하고, 결과물을 내는 일을 해내야 했고, 해내고 싶었으나 도통 실마리를 찾지 못해 헛발질을 오래 하다 보니 사람이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우울증에 걸려 자학에 빠지지 않으려면 스스로에게라도 나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해야 할 것 같았고, 뭣보다 성취감과 보람, 자기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과정에서 시도한 도전 중 오직 달리기만이 성공으로 마무리되었다. 달리기 말곤 제대로 도전한 게 없기도 했고, ‘기록의 단축‘ ‘완주‘ 신체 능력의 향상 및 건강 변화 같이 가시적으로 체감하고 느낄 수 있는 성격의 성취였다.

그런데 사실 첫 완주에도 기록의 단축에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별다른 목표를 설정해두지 않고 달리기를 즐기고자 하는 아마추어였기에 결과로부터 극적 감정이 도출되지 않았다. 두 가지였던 것 같다. 책에서였나 방송에서였나 제현주 작가가 얘기했던 것과 비슷하게 내 몸을 기능적으로 좀 더 잘 쓰고 싶다는 욕구의 충족 -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갈 때의 속도감이 주는 쾌감 등 - 과 최초로 참여한 마라톤대회였던 철원 DMZ 마라톤대회에서 느꼈던 달리면서 자연풍경을 호흡할 때의 황홀경. 달리면서 보는 건물, 자연이 좋았다(사람까지 볼 여유는 없고). 숨이 차올라 호흡이 불편하다가도 어느 순간에 갑자기 확 숨통이 트이면서 계속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일 때가 좋았다(러너스 하이까진 아닌 것 같지만 여튼 정상 궤도에 오른 것과 같은 기분이 정말 좋다). 결국 이렇게 정말 좋았던 순간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우연처럼 찾아왔다. 대신 이건 있는 것 같다. 빛나는 순간이 출현하려면 어느 정도 과정이 두텁고 풍부해야 한다고. 시적 순간은 산문적 성실성의 토대 위에서 출현한다고. 그래서 이 산문적 성실성의 무게감과 부피 자체가 도전 자체를 멋지게 만든다고. 도전 성공이나 기록 달성에서 오는 희열과 카타르시스는 어쩌면 지난한 과정들을 마지막 결과를 위해 존재한 것인양 기승전결의 서사적 배치를 통해 극적으로 연출한 효과인 지도 모른다. 과정으로만 이뤄진 삶을 편집권을 쥔 서사적 자아가 어떤 식으로 편집하느냐에 따라 결과의 의미를 비롯해 과정 자체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신은헤의 <가능한 불가능>은 일한 기억밖에 남지 않은 한 해를 마무리하며 헛헛함에 시달리던 저자가 문득 ‘1년에 하나씩‘ 자신에게 불가능했던 영역에 도전해보자는 프로젝트를 시작해 9년 동안 지속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서른 살에는 운전면허 따기(운전기술 익히기), 서른한 살에는 피아노 치기(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곡인 히사이시 조의 ‘summer‘ 완주하기), 서른두 살에는 영어 공부하기, 서른세 살에는 수영 배우기, 서른네 살에는 하와이에서 살아보기 ... ‘광고‘밖에 몰랐던 워커홀릭(책에서 그려지는 저자의 모습은 어느 정도 일밖에 모르는 바보, 일중독자에 가까워 보인다)은 우연한 계기에 절친과의 내기(50만원을 따기 위한!)에서 지지 않기 위해 운전면허 따기 프로젝트를 완수하게 된다. 그렇게 ‘1년에 하나씩‘ 불가능했던 걸 가능하게 바꾸는 ‘할 수 있어 프로젝트‘가 9년 동안 이어진다. 저자의 30대를 꽉 채운, 카피라이터로서 신은혜가 아닌 자연인 신은혜로서 써내려간 삶의 서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스토리.

무슨 도전이든 거의 실패 없이 척척해내는 유능한 저자의 성공담, 이었다면 지루했을 텐데 자신의 세계를 차근차근 확장해나가고 내실을 다져가는 성장기(?)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독서는 나도 뭔가 새로운 걸 도전해보고 싶다는, 나만의 ‘할 수 있어 프로젝트‘를 작당모의해보고 싶다는 욕망의 씨앗이 심어지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무슨 도전을 하더라도 이 도전을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동참할 수 있으며 도전의 시작과 끝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벗의 존재가 새삼 크게 다가왔다. 혼자였다면 분명 ‘어차피 난 안 돼‘하고 좌절했을 순간에 오기와 ‘억텐‘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친구(와 내기)의 존재 ! 2022년 ‘이탈리아어 배우기‘ 프로젝트는 거의 무산될 위기에 처했지만 2023년에는 꼭 새로운 프로젝트에 착수해서 성공적으로 완수해내리라. 이제 만 나이가 상용화되는 만큼 저자처럼 내년을 서른 살의 프로젝트 기점으로 삼아보련다. 프로젝트의 기술은 불가능했던 어제(작년)에서 가능한 오늘(올해)로 시간의 간격을 벌리는 데 비밀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에서 오늘로 점프해서 착지했을 때의 변화. 달라진 나 자신을 감각하는 편집의 기술. 하루하루 경험치를 쌓고 퀘스트를 깨나가는 게임의 주인공처럼 레벌업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가능한 불가능>을 재밌게 읽을 거라 생각한다. 추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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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 않은 질문, 듣지 못한 대답 - 시각예술가 박혜수 작가 노트
박혜수 지음 / 돌베개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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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10시간 동안 가야 할 비행기 안에서 내 옆자리에 앉을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조건이 있을까요?

박혜수 작가가 진행하는 ‘토론극장 : 우리_들‘의 4막 ˝I need somebody not anybody˝(토론설계자 : 김현경)이 던지는 질문은 이상과 같다. 박혜수 작가의 홈페이지에 게재된 강연소개는 다음과 같다.

왜 현대인들은 외롭다고 말하면서도 서로 다가가지 않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마음을 나눌 ‘누군가’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그 누군가의 자리에 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아무도 아닌 사람’에 대해 어떤 정보를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가? 혹은 등을 돌리며 거리를 두는가?
사회적 거리조절에 사용되는 다양한 체크리스트를 살펴보고, 그 뒤에 숨은 사회적 무의식을 분석한다.
(http://www.phsoo.com/uri/1603)

운 좋게도 이 토론극장 4막에 관객으로 직접 참여했었다. ‘10시간 동안 가야 할 비행기에서 내 옆자리에 앉을 사람‘ 10시간(시간), 비행기 옆자리(장소), 사람... 장소가 비행기 옆좌석으로 설정된 이유는 간단하다. 핸드폰 사용이 금지된 일종의 성소이기 때문이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속담이 앞으로 ‘스마트폰‘으로 대체될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스마트폰의 강력한 몰입에 따른 자아의 유폐는 오프라인 상에서 타인들과의 상호작용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 할 수 있다. 군대에서 동기들과 대화다운 대화를 가장 많이 나누는 시간대는 취침시간이다. 밤 시간대 자체가 텐션이 살짝 가라앉으면서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며 감정을 해소하게끔 만들지만 캄캄한 방 안에서 서로의 목소리만 존재하는 상황이 대화에 집중하고 몰입하게끔 만든다. 최근에 읽은 권여선의 <실버들 천만사>에서 단둘이 여행을 떠나기로 한 모녀는 핸드폰을 사용하지 말자는 규칙을 세운다. 또 다른 책에서 잠시 자리를 비우거나(화장실 등) 대화의 흐름이 끊겨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핸드폰을 보지 않는 사람을 만나라(?) 대략 이런 뉘앙스의 내용을 읽었다. 과거에 나는 그런 편이었지만 다들 핸드폰을 보는데 나만 안 보면 살짝 소외되는 것 같기도 하고, 중간에 SNS나 메신저를 확인하는 재미가 존재하긴 해서 핸드폰을 보는 사람이 되었다. 핸드폰을 본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집중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단정짓지 않고, 그저 과잉 연결-접속된 현대사회에서 오롯이 한 사람에게 시간과 관심, 의식을 쏟아붓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희소한 일이 되었는지 생각할 뿐이다.

10시간이면 꽤 긴 시간이다. 비행기에서 내린 이후에야 각자 갈 길을 가게 되겠지만 스쳐 지나가는 사이라 하더라도 꽤 긴 스침이라 할 수 있겠다. 10시간 동안 챙겨온 책을 읽고, 노트북이나 아이패드에 저장해놓은 드라마를 몰아볼 수 있고, 잠을 청하는 등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야 많지만 시간이 잘 가는 걸로 따졌을 때 대화만한 활동이 또 없다. 거기에 10시간의 비행은 앞으로 안 볼 사이, 다시 마주칠 확률이 희박하다는 전제가 주는 산뜻함과 가벼움에 더해 꽤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에 충분한 물리적 부피를 구성한다. 모종의 예의 바른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자신의 좌석에서 사회적 차원의 이동/연결을 전혀 하지 않을 것이냐, 아니면 그 무관심의 막을 걷어내고 상대방과 말문과 안면을 트고 어떤 ‘사이‘가 될 것이냐. 앞선 질문에 사람들의 답변은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인상, 취미(스포츠), 습관. 인상은 전체적인 외형에서부터 세부적으로 보면 체격(너무 체격이 큰 사람이 옆자리에 앉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피력되었다), 향기(후각은 가장 즉물적이고 직접적인 감각이자 시각이나 청각에 비해 자체적인 차단이 어려운 감각이라 굉장히 타당한 지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도 패션이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당신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알려준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패션은 정체성이자 아비투스이자... 취미가 빠지면 섭하다. 소개팅 단골 질문이기도 한 취미 영역에서 마이너한 취향이 통하는 이를 발견하면 사람들은 곧잘 운명의 상대를 발견한 양 흥분에 휩싸이게 된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의 무기와 키누처럼, 젊은 날의 우리들처럼. 내 영혼의 본모습, 내 진가를 알아줄 수 있을 거라고 믿음에 차게 된다. 아무튼 취미 영역에서 ‘스포츠‘가 가장 많이 거론된 건 스포츠가 이 시대의 ‘부족‘을 이루고 구분짓는 단위로 기능해서다. 켄 로치의 <미안해요 리키>를 보면 택배 배달을 하던 리키(맨유팬)가 라이벌팀을 응원하는 택배 수취인과 정답게 (?) 욕설을 주고받는 장면이 나온다. 스포츠는 집단적인 열광으로 종래의 전통적인 공동체에서 더 이상 제공하지 못하는 소속감과 끈끈한 유대감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적‘과 ‘우리‘의 선명한 구분을 통해 다소 본능적인 무리 짓기를 가능하게 한다. 같은 팀을 응원하는 이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의 증언이 이를 반증한다. 습관. 비행기 옆좌석은 물리적으로 상당히 근접해 있는 영역이다. 그만큼 다리를 떤다거나 하는 사소한 습관이 상대방에게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앞선 질문에 어떻게 답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군 생활을 하며 비슷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적이 있다. 군생활을 함께 할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조건을 설정할 것인지에 대해. 처음에는 ‘~~한 ‘ 사람이 새로 들어왔으면 좋겠다 는 식의 긍정적 가정법을 주로 했다면 지금은 ‘~~한‘ 사람이 안 왔으면 좋겠다, ‘~~한‘ 사람과는 같이 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 쪽으로 욕망의 형식이 변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과 부정의 조건문을 각각 설정해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 같다.

~~한 사람이면 좋겠다(딱히 군대 한정이라기보다 사회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까지 포괄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조롱, 편견을 일삼지 아니 하는 사람
-예의바른 사람,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몸에 익어 있는 사람
-지적인 사람, 책이나 영화, 사회 이슈 등에 대해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잘하는 사람(운동을 같이 할 수 있고, 그 사람에게 운동을 배울 수 있어서 좋다) - 내가 좋아하는 운동인 달리기를 같이 할 수 있는 러닝 메이트도 좋고, 내게 헬스 운동법을 알려주는 헬스 선생님도 좋다. 현재 곁에 둘 다 있어서 너무 만족스럽다
-해외축구, 특히 EPL에 관심 있는 사람
-상대방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자기 얘기를 ‘늘어놓는‘ 사람에게 붙잡혀 있다 보면 기가 너무 빨린다. 티키티카가 잘 되는, 말의 리듬과 온도가 비슷한 사람과의 대화는 편안하고 즐겁다. 잘 들어주기까지 한다면 더할 나위 없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사람, 말을 가려서 하는 사람, 말을 아끼는 사람. 가끔 텐션이 올라가면 희희낙락 소란스럽게 수다를 떠는 것도 파티처럼 흥겨운 재미를 선사할 때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조용한 생활‘을 영위하는 이에겐 침묵이 값지다(ECM의 슬로건처럼). 조용하게 큰 울림을 선사하는 말을 구사하는 사람.

~~한 사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자기 기분과 감정만 생각하는 사람. 미성숙하고 이기적이며 폭력적인 사람. 상대방의 기분과 감정을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언행하는 걸 개의치 않는 사람.
-자신의 지위니 권력만 가지고 대우받으려고 하는 사람. 자존감은 낮은데 자존심은 쌔서 남을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사람.
-겉과 속이 심하게 다른 사람. 소문을 퍼뜨리고, 편가르기를 하고, 갈등과 분란을 조장하는 사람.
-가면(사회적 자아)과 실제 자아의 괴리가 커서 왔다갔다 하는 변동 폭이 심한 사람. 자신은 원래 괜찮은 사람인데 남이 원인을 제공해서 나이스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거라고 자기정당화를 하는 사람.
-소수자 차별, 여성혐오, 물신 숭배, 능력주의, 그러니까 너무 보통의 K...

한편 군생활을 하며 좀 더 강화된 생각이 있다면 넓고 얕은 인간관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다. 마음을 나누는 사이의 친구와 진심을 담은 대화를 나누고 소통했을 때 뭔가 마음이 채워지고 충만해지는 영혼의 부풀어오름을 경험한다. 이는 거의 숭고하기까지 한 고귀한 체험이지만 속되고 비루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기도 한다. 재밌는 짤을 공유해주는 사람, 꿀알바-유용한 정보나 소식을 전달/공유해주는 사람, 새로 알게 된 맛집에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식성이 비슷하고 먹는 양이 비슷한. 특히 술의 영역에 적용되는 부분), 여행 메이트(여행 취향-스타일은 또 특수 영역이기에...) ... SF의 상상대로 이런 관계가 세부적으로 상품화돼 소비 가능한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면(부분적으로 이미 현실화된 현재이기도 하고) 그때 우리는 우정을 어떻게 재발명할 수 있을까, 지킬 수 있을까. 사실 난 인간관계에 있어 회의주의적이고 비관주의적인 쪽에 가까울 것 같다. 의식적 차원에서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을 통해 진실된 관계를 구축하길 원하고, 상대방과 전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깊은 신뢰를 공유하고 친밀성을 나눌 수 있길 욕망하지만 무의식적 차원에서 모종의 공포와 불안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언제라도 별다른 이유 없이 상대방이 날 떠날 수 있다는 생각,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에는 별다른 인과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끊임없이 변화하듯 관계 또한 생명체처럼 변화를 겪다가 수명이 다해 소멸할 수 있다는 것,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특별한 사건사고 없이 남남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가끔 친구에게 묻고 싶어진다. 너에게 난 어떤 존재인지, 넌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우리가 앞으로도 잘 지내는데 혹시나 필요한 게 있지 않은지, 평소에 내게 서운했거나 말하지 못한 게 있지 않은지... 미술작가 박혜수는 많은 이들이 이런 질문을 묻지 않고, 누군가로부터 듣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예술가가 대신 묻고 들은 다음에 이를 바탕으로 전시를 하는 작업을 한다. 이를 테면 이런 식으로.

“너는 네가 좋으니?”(서문 7-8)
당신은 어떤 꿈을 포기했나요?(1 꿈의 먼지)
헤어진 연인이 남긴 물건과 사연을 남겨주세요.(2 실연 수집)
첫사랑을 기억하시나요?(3 사랑과 실연의 얼굴)
10대의 나, 80대의 나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요?(4 미래가 두려운 사람들)
내가 갑자기 죽는다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5 애도 일기)

작가가 직접 서술한 작업의 방법론은 다음과 같다.

나는 보편적인 주제를 가지고 심리적 접근 방식의 설문 조사와 분석을 거친 뒤 다양한 예술작품들로 발표하고 있다. 이미 이슈화된 사회문제의 결과보단 그 원인인 개인의 심리를 분석함으로써 사람들이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도록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사용한다. 한편으로 이런 작품들은 매우 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왜 개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공공장소, 게다가 현실의 고단함은 다 내려놓고 편하게 쉬고 싶은 미술관에서 이야기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39)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의 진심은 감추고 “사람들이”로 시작하는 이야기에 매달려왔다. 마치 자신은 그 문제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 게다가 외로움과 우을증, 집단 이기주의와 같은 심리적 문제는 혼자서 해결이 어렵다. 누구나 다 조금씩 가지고 있는 이 병을 밖으로 꺼내서 함께 고민하여 ‘누구나 겪는 일’로 인식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가지게 할 수 있다. 사회적 문제의 원인을 내적 영역에서 발견하고 개인의 문제로 변환하여 생각하도록 하고 싶었다. 문제의 발견은 개인의 영역이지만 해결은 대화를 통해 공론화시켜 함께 논의하자는 것이 ‘대화’ 프로젝트의 목적이다.(41)

자신(자아)에 대한 앎, 자신의 감정과 마음을 살피고 해석하며 돌보는 자기 돌봄의 능력, 그리고 마음에 어떤 상처가 새겨졌는지 알아채고 고통을 마주하며 온전하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회복의 능력. 나는 이런 앎과 능력, 힘에 관심이 지대한 사람이다. 박혜수의 작업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랄까. 이 책의 목차에서 가장 끌렸던 부분은 2부 실연 수집(‘헤어진 연인이 남긴 물건과 사연을 적어주세요‘)이었다. 이별을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한 채 도망쳐왔기 때문에 매듭 지어지지 않은 감정의 실타래가 자꾸 풀려나와 지금의 내 기분과 마음에 엉키곤 한다. 지금의 외로운 감정이 옛 연인과의 추억과 얽혀 과거를 미화하기도 하고, 지금의 슬픈 감정이 사귀는 동안 잘해주지 못했거나 상처주었던 기억들과 얽혀 우울하게 가라앉히기도 한다. 고통스러운 기억, 부끄러운 기억, 행복했던 기억, 비참했던 기억, 서글펐던 기억, 모든 기억을 회피하거나 부정하지 않되 집착적으로 붙잡으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자연스레 기억과 망각의 흐름에 맡기기. 내 현재를 이루는 중요한 과거인 만큼 내 일부인 기억을 안고(기억 안아주기, 화해하기) 함께 살아가기. 사랑을 좀 더 잘 사랑하기 위한 삶의 여정에서 만난 상대방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후회와 그리움을 살아내고 앞으로 나아가기. 제대 이후에 그 친구를 만나게 될지,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상상의 극장에서라도 이별을 완성시키고 싶다.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다, 거기서 그래도 꽤 예쁘게 사랑했었던 나도 그녀도 편히 쉴 수 있도록.

박혜수의 책을 읽으며 나 혼자만의 심리 드라마로 그칠 수 있었던 기억을 남들의 것과 나란히 놓고 보며 사회적 시선의 자리에서 그려지는 좌표의 성좌, 지도의 지형을 통해 우리의 안부를 묻는 기술을 배우고, 혼자 자문자답할 때 보이지 않던 부분이 타자라는 차원을 통해 인식되고 감지되는 앎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새로운 인식을 생산하고, 앎을 생성하는 일이 예술이 지닌 고유한 역량일 것이다. 앞으로 ‘묻지 않은 질문‘과 ‘듣지 못한 대답‘을 주고받고자 할 때, 고심하여 진심 어린 메시지를 작성하는 것 못지 않게 이를 전달하고 주고받을 무대-극장의 배치와 연출에 힘쓸 필요가 있겠다. ‘누구에게 무엇을 물을까‘에 더해 ‘어디에서 어떻게 물을까‘까지. 스스로에게 자문해보고 싶은 질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묻지 못한 질문들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릴 수 있어서, ‘우리‘를 ‘우리‘로 현전시키게끔 할 대화의 물꼬를 틀 말들이 찾아와서 뜻 깊은 독서였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토론극장에 방문할 수 있길. 사람들이 저마다의 토론극장에서 각자가 생각하는 ‘우리‘를 상호보완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길. 그렇게 미워하는 마음 없이 자신을 좋아하고, 신이 선물해주신 인연에 감사하며 더 많이 사랑하고 살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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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 사전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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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야간근무 설 동안 책을 읽지 않았다. 읽은 날과 읽지 않은 날의 피로도가 확연히 차이 난다는 걸 체감한 결과였다. 비몽사몽 상태로 졸다가 멍때리다가 다시 졸다가 하는 식으로 2시간을 ‘허비‘하는 게 졸린 눈을 비벼 정신 차리고 꾸역꾸역 책을 읽는 것보다 나쁘지 않다는 걸 인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계산을 뛰어넘어 다음 장을 빨리 넘기고 싶은 책이 등장하면 속수무책이었다. 읽는 수밖에. 언제 어디서든. ​



김소연 시인의 <한 글자 사전>을 읽었다. <마음 사전>과 10년 터울의 자매와 같은 책이라고 시인 스스로 설명했는데 내게는 한참 어린 동생 격인 <한 글자 사전>이 구면이어서 더 친숙했다. 2014년 한 해 동안 종각역의 반디앤루니스(종로서적이 들어서기 전에 있었던)에서 처음으로 문예지를 읽었다. 문학동네, 창비, 자음과모음, 문예중앙, 오늘의 문예비평, 21세기문학 등등... 당시 재학 중이었던 학교도서관에 구독 중인 문예지보다 더 다양한 종수를 구비하고 있었고, 2-3시간 정도 서점에 머무는 동안 읽기에는 단행본보다 문예지 쪽이 적합했다(현대문학 핀 시리즈나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라는 선택지가 있었다면 또 달랐을 지도... 여튼). 계간이라는 시간 텀, 시 소설 산문 비평 이론 등 다양한 형식의 글이 총망라되어 있는 장르의 잡스러움(잡지다움), 듣도 보도 못한 신인작가의 등단작부터 오래 전부터 좋아했던 작가들의 최근 발표작을 가장 먼저 읽을 수 있다는 신속성 등 문예지 읽기는 꽤 흥미로운 활동이었다. 문예지를 읽기 시작하면서 사뭇 진정한(?) 한국문학 독자가 된 것 같은, 사실 그보다는 진정한 문창과 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이는 ‘문단 내 성폭력‘ 공론화가 이뤄지면서 기존의 문예지들이 폐간되고(혹은 편집위원들이 교체되고) 신생 문예지가 폭발적으로 쏟아지기 전, 황혼의 시간대에 기존 문예지 체제의 마지막 독자가 된 것이기도 했다. 그때 챙겨 읽었던 연재 코너가 몇 가지 있다. 故 황현산 선생님의 로트레아몽 번역, [21세기문학]의 청탁받은 작가가 자율적으로 꾸렸던 코너(한유주의 글이 흥미로웠던 기억), [오늘의 문예비평]에 연재되었던 김경식 선생님의 루카치에 대한 글(아마도 이 초고를 바탕으로 <루카치의 길> 단행본이 탄생한 거라 짐작된다), 그리고 문예중앙에 연재되었던 김소연 시인의 ‘한 글자 사전‘. 두툼한 두께와 부피를 자랑했던 문예중앙에서 ‘한 글자 사전‘이 거의 말미에 배치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뷔페에 와서 시 소설 평론 종류를 가리지 않고 탐식한 뒤에 식사를 마무리하는 디저트와 같았던 한 글자 사전.



2014년 그 해에, 아니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게 가장 감명 깊고 충격적이었던 낭독의 경험은 2014년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접한 한유주의 <불가능한 동화>와 김소연의 <수학자의 아침> 낭독이었다. 작가가 낮은 목소리로 일정한 리듬과 속도를 유지하며 읽은 <불가능한 동화>는 내가 평소와 같이 천천히 묵독했더라면 아마 감각하지 못했을 것들을 머릿속에 현현시켰다. 문체의 리듬, 사유의 리듬에 접속했을 때에만 감각할 수 있는 미묘한 텍스트의 질감이 있다는 사실을, 모든 텍스트를 시 읽듯 가장 느리게 읽어내는 게 능사가 아니라 각 텍스트에 맞는 사유의 속도와 리듬에 도달해야만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 완전히 몰입해서 팽팽하게 당겨진, 기분 좋은 탄력을 유지하고 있는 정신으로 텍스트를 소화할 때의 자릿함, 지적 흥분과 열기 같은 것이 그 순간에 있었다. 자기만의 독특한 문체를 구축한 작가를 읽어낼 때, 말하는 입을 활용해 문장이 음악이 되게끔 소리내어 읽고 호흡하고 멈추며 내 몸으로 문장과 부딪쳐보면서 문체에 내재된 작가의 육체성을 경험하는 방법이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배웠다. 그리고 김소연 시인의 <수학자의 아침> 낭독.



일상에 안개처럼 퍼져 있던 외로움이 응결돼 단단한 얼음과 같은 고독이 되는 순간

나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정작 자기 마음과 욕망을 알지 못했던 어긋남의 상태에서 오롯이 마음과 대면할 수 있었던 시간

익숙한 언어로 가장 낯선 감각을 일깨우고, 감정 이전의 감각의 화학 작용을 일으켜 마음을 운동시키는 서정의 힘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던 날.



이 날 이후로 최애 시인 리스트에 김소연을 꼽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수학자의 아침> 이후에 나온 <i에게>도 너무 좋았던 탓에 이 결심은 아직 유효하다. 그리고 뮤지션 최고은에 대한 애정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두 사람의 우정 또한 현재 진행형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오늘의 난 미지근하게 축제]의 책 소개는 다음과 같다(알라딘 제공)



˝싱어송라이터 최고은과, 시인 김소연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만들어 낸 아트북이자 새로운 음악책의 형태 뮤키디오.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가꾸어나가는 ‘우정스러움‘을 주제로 한 이 작업은 우정을 지켜내기 위한 각자의 내면을 다듬는 일상적인 모습들이 조화롭게 묘사되어 하모니를 이룬다.˝



정가 33,000원이지만 사지 않을 수 없는 이유...



개인적으로 김소연 시인의 이미지를 한 장 간직하고 있다. 2016년 가을 경이었을까. 학과에서 외부 시인을 초청하는 행사를 마련했고, 내 추천/의견이 반영됐는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김소연 시인이 먼 걸음을 해주셨다. 행사가 끝나고, 교수님을 포함해 시 동아리 멤버들이 주축이 된 무리가 시인과 함께 식사를 하러 자리를 옮겼다. 김소연 시인의 열차시간 때문인지, 아니면 채식을 하셔서 그랬는지 고깃집(이라고 기억하고 있다)에서 샐러드 혹은 밑반찬을 조금 들다가 금방 일어서셨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아 적은 양의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시는 모습을 보고, 이 시인이 <경배>를 쓴 시인이 맞구나 싶었다. 시인과 시가 일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소연, 진은영, 심보선. 좋아하는 시인의 목록에 (여전히) 가장 첫 손에 꼽을 수 있는 시인들. 곧 있으면 진은영의 신작 시집(무려 10년 만에!!)이 부대에 도착할 예정이다. <한 글자 사전>을 읽고 나니 김소연 시인의 글을 더 읽고 싶어져서 다른 산문집을 읽을지, 시집을 오랜만에 다시 읽을지 행복한 고민을 할 예정. 심보선 시인의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와 <오늘은 잘 모르겠어>도 다시 읽고 싶어진다.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시집도 따라읽고 싶지만...(투명도 혼합 공간 등등) 좋아하는 것들을 충분히 좋아하고 난 다음이어도 늦게 않을 테다.







1 이미 아름다웠던 것은 더 이상 아름다움이 될 수 없고, 아름다움이 될 수 없는 것이 기어이 아름다움이 되게 하는 일.

2 성긴 말로 건져지지 않는 진실과 말로 하면 바스라져버릴 비밀들을 문장으로 건사하는 일.

3 언어를 배반하는 언어가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

(<한 글자 사전>, p242)







동지와는 사소한 이견을 좁혀나가기 위하여 논쟁을 한 이우 옹호로 귀결되어야 옳고, 벗과는 사소한 이견으로 대화를 농밀하게 만든 이후 다름에 매혹되어야 옳다(172)







시스템 바깥에서 끼리끼리의 유대로 정말 하고 싶던 일을 하고, 정말 하고 싶던 방식으로 그 일을 하고, 정말 되고 싶던 그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 이런 일만이 이 시대엔 유일한 궐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159)







우리가 가장 믿고 사는 이것. 우리가 가장 숭배하고 사는 이것. 우리에게 가장 큰 실망을 주는 이것. 우리에게 가장 다양한 실망을 주는 이것. 그리하여 가장 연연하는 이것. 하여, 몸은 우리에게 말한다. 몸의 언어로. 몸의 방식으로. 몸으로써. 몸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감각‘이며, 감각에 기대어 몸의 언어를 듣는 일이 ‘아픔‘이며, 몸의 언어에 화답을 하는 일이 ‘통증‘이며, 몸이 자신의 언어에 귀를 기울여준 고마움을 표하는 일이 ‘회복‘이다. (148)







가장 순정한 말은 오로지 한 음절로 이루어진 감탄사다. 가장 나약한 말은 남을 그럴듯하게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짓말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조차 기만하는 저짓말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입증하고야 만다. 가장 허망한 말은 사랑을 맹세하는 말이지만, 그 허망함은 너무도 허망한 나머지 이상하고 야릇한 굳건함이 있다. 가장 영리한 말은 무수한 대화 끝에 매달리고야 마는, 자신의 허위를 자조하는 말에서나 가능해진다. 가장 아둔한 말은 누군가를 꾸짖는 말이다. 무섭게 가르치려 하면 할수록 점점 마음이 닫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가장 무서운 말은 정확한 말이다. 가장 정확한 말은 군더더기 없이 간명하게 집약적으로 초점을 맞추며 감정을 싣지 않기 때문에 냉혹하다. 가장 가난한 말은 말을 많이 하는 자의 입속에서 나온다. 가장 현명한 말은 그 말을 듣는 자가 듣고 싶어하던 말일 뿐이며, 가장 진실된 말은 말로 하는 순간 추레해질 뿐이며, 가장 영롱한 말은 했던 말들을 모두 부정하는 말일 뿐이다. 가장 설득력 있는 말은 차라리 신음이거나 비명이며, 신음과 비명 너머에서 가다듬어 하는 말은 기도와 겨우 가까워질 수 있다. 말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기운을 비집고 생성되는 뜬금없는 농담의 말과 뜻 없이 손을 흔들며 건네는 인사말은 아무것도 아닌 채로 언제나 반갑다.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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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과의 0 영 zero 零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약육강식의 세계관을 체득하고 견지하는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적 화자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 개인적으로 아직 사람에 크게 데여본 적이 없는데 주변이나 미디어에서 전파되는 얘기를 들어보면 정말 이기적이고, 타인의 심리를 조정하는 가스라이팅에 능한 사람(주로 애인, 친구, 가족 같이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타인)에 의해 영혼에 깊은 상처가 새겨졌다는 일화를 흔히 접하게 된다. 자기애와 자존감이 강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타인을 수단으로 삼는,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폭력에 별다른 도덕감정과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소설 화자와 좀 거리가 있긴 하지만 상대방보다 자신이 우위에 서는 관계에서 위로와 연민, 동정을 보내며 우월감을 향유하다가 힘의 관계가 역전되고 나니 열등감을 못 이기고 관계를 ‘손절‘해버린 사람으로 인해 고통을 받으신 블로그 이웃 분이 겪은 사건이 떠올랐다. 어렵고 힘들 때 곁을 지켜주는 친구가 진짜배기라는 말이 있지만 이걸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방의 성장과 성취, 성공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축하해줄 수 있는 사이-관계, 상대방의 기쁨을 내 기쁨처럼 공유할 수 있는 ‘팬심‘이랄까 - 수평적이고 평등한 관계에서 이런 순수한 팬심-애정을 유지하고 키워나간다는 게 쉽지 않은 것 같다. 배신당하거나 파괴되지 않기 위해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도 자아의 안전 지대를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에 납득이 되었다. 나도 어느 정도 그런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완전히 발거벗은 취약한 상태에서 타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돌봄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이 앞선다. 그런 ‘자기통제력‘에 대한 불안-강박을 넘어서서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지워버리고 넘어설 수 있는 초월로서의 사랑을 추구하고 싶은 욕구가 있음에도 ... 정신이 무너져 고생했던 경험이 떠올라 주저하게 된다. 그러니 사랑과 의존, 돌봄과 우정, 마음에 대해 공부할 것이다 계속.



인간 사냥꾼이랄까, 아니면 흡혈귀 같이 타인을 착취하는 인물의 내면을 심리스릴러적 문법으로 풀어내 일단 재미 있었다. 황예인 평론가와의 대담을 읽고 나니 본문을 천천히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어졌는데 기회가 닿을지 모르겠다. 예전에 읽은 <천국에서>와 비교했을 때 경향이나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실제로 이 텀 동안 작가가 미국에 체류하며 번역을 하며 생활했다는 전기적 사실도 존재한다) <N.E.W>도 읽어봐야겠다.



-존 후퍼의 이탈리아 사람들이라서(지나치게 매력적이고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김혜리의 <조용한 생활> 코너 중 ‘책 읽는 의자‘에 소개된 적이 있는 책. 이탈리아 여행을 대비할 겸 이탈리아의 역사와 문화, 지리, 음식 등을 다룬 책을 찾다가 권은중(마찬가지로 <조용한 생활>에서 김혜리 기자님과 음식과 요리, 먹는 일을 다루는 코너를 맡아주셨던) 님의 <볼로냐, 붉은 길에서 인문학을 만나다>의 다음 타자로 존 후퍼의 책을 골랐다. 권은중 기자님의 책은 연재한 글을 단행본으로 묶은 영향에서인지 반복되는 부분이 많은 점은 아쉬웠지만 기본적으로 ‘볼로냐‘라는 매력적인 도시를 중심으로 음식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주셔서 입문자가 읽기에 딱 안성맞춤인 책이었다. 그에 비해 <이탈리아 사람들이라서>는 좀 더 서술의 무게감과 깊이감이 있는 편이다. ‘가족‘을 중시하고, ‘음식‘에 정말 진심이고(이 둘은 강한 상호관련성을 띤다. 저녁이면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하루 있었던 일들을 나누는 일상의 의례를 중요시한다고), 가톨릭의 영향이 전반적으로 깔려 있고, 정치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혼란스러우며, 행정과 법이 복잡하여 효율성이 떨어지고, 겉모습-패션과 치장에 열심이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고 제스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남북 문제‘라는 고유의 모순을 안고 있는 나라. 부제대로 지나치게 매력적이고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이탈리아를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 동안 접했던 이탈리아 문학, 영화에 대해 뒤늦게 이해되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현실과 환상(판타지아)의 경계가 확실치 않고, 진실verite이 단일하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각자 상대적인 버전으로 복수의 진실들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 이런 일반화에는 항상 오류의 위험이 따르고, 또 저자의 포지션이 영국 출신으로 기자 경험을 바탕으로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탈리아 란 걸 감안하고 수용해야겠지만 - 예전에 한 번 들은 적이 있는데 다시 읽으며 새삼 신기했던 부분은 이탈리아식 ‘기사‘의 문체와 형식. 일반적으로 ‘기사‘하면 정확한 사실 위주로 건조하게 서술한 글을 연상하겠지만 이탈리아의 기사는 기본적으로 ‘이야기‘성이 강하다고 한다. 핵심 정보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고 초중반부에 썰을 많이 푼다고...



관심 있는 나라를 이런 식으로 다룬 책을 좀 더 읽고 싶어졌다. 일단은 스페인,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 정도.



-녹색 계급의 출현



<지구에 착륙하는 방법><나는 어디에 있는가?>에 이은 라투르의 생태정치학 저작들. 이음 출판사에서 내는 과학잡지 <에피>에 ‘인류세‘ 코너도 있고, 박범순 카이스트 인류세 연구센터장의 글도 자주 실리는데 라투르의 근작들도 이음에서 발빠르게 번역돼서 참 고무적인 부분이다. <녹색 계급의 출현>은 라투르와 슐츠(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동 작업을 했듯)가 쓴 녹색 ‘공산당 선언‘ 같은 책이었다.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 위계를 철폐하고 ‘지구생활자‘라는 새로운 주체를 제시했던 라투르는 이 책에서 ‘신기후체제‘의 파국적 위기에 맞서 대항할 주체화의 계기로 ‘계급‘을 (재)소환한다. 근데 여기에 ‘녹색‘을 곁들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생산력주의에 갇혀 있었고, ‘진보‘ ‘발전‘ ‘풍요‘ ‘확장‘의 구호가 아닌(이를 통한 해방은 공멸적 파괴와 다른 생명체에 대한 파괴와 착취에 기반하는 것이 되어 진정한 해방일 수 없기 때문에) 지구의 거주가능성-생존가능성을 보존할 수 있는 ‘감싸기‘의 생태정치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메모 형식이라 시론적, 선언적 성격이 강한데 오히려 그래서 사고를 촉발시키고 연결시키는 면모가 크기도 하다. 네 편의 해설 모두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견지하여 이 선언문을 어떻게 활용/사용할 지에 대한 방향을 잘 제시한다. 선언문이라 그런지 읽다 보면 가슴이 웅장해지는 모먼트가 존재한다. 박동수의 <철학책 독서 모임>에 제시된 <숲은 생각한다> <반려종 선언> <부분적인 연결들> 포스트휴먼, 신유물론, 과학기술학 저서 리스트로 공부를 이어가면 참 좋을 텐데... 혼자 읽기엔 좀 빡셀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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