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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축구 직접 만나러 갑니다 - 축구 대장 곽지혁의 사인 도전기
곽지혁 지음 / 영진미디어 / 2022년 10월
평점 :
-예스24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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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카타르 월드컵이 한창이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12년 만에 월드컵 16강 진출에 성공하며 팬들에게 큰 기쁨과 감동을 주었다. 나는 월드컵 경기를 라이브로 챙겨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2시면 취침에 들어가는 군의 특성상 특별히 'TV 연등'을 허용해줘야만 경기를 시청할 수 있었다. 어디선가 지금까지 월드컵 경기를 보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얘기가 들려왔고, 상급부대의 지침으로 월드컵 경기 시청 여건을 보장해준 덕분에 우루과이, 가나, 포르투갈, 브라질전 모두를 시청할 수 있었다.
내 축구인생(?)은 2002년부터 시작된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꼬꼬마 시절 한일 월드컵의 4강 신화를 함께 하면서 나는 축구라는 스포츠를 좋아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즈음부터 쉬는 시간, 점심 시간이면 운동장에 뛰쳐나가 공을 차기 시작했고, 박지성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고 2005년부터 EPL 경기를 챙겨보기 시작했다. 야자(야간자율학습)를 한 날에도 맨유의 챔피언스리그 경기가 있으면 새벽에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때 봤던 경기 중에 챔스 8강에서 승부의 쐐기를 박는 왼발 결승골을 작렬한 첼시전, 챔스 16강에서 피를로를 꽁꽁 묶어 맨유의 압도적인 압승을 이끌었던 AC 밀란전 등이 떠오른다.
30-40대에게 '해버지' 박지성이 가장 상징적인 아이콘이라면 10-20대에게 뭐니뭐니 해도 손흥민 선수가 우주최강슈퍼스타일 것이다. 2010년대 이후 챔스권의 문을 꾸준히 두드리는 강팀으로 성장한 토트넘 팀에서 붙박이 주전으로 뛰면서,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EPL 득점왕, 푸스카스 상 수상 등의 걸출한 업적을 남겼다. 이번 월드컵이 사실상 손흥민의 최전성기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에 기대하는 팬들이 많았을 것이다. 손흥민은 안와골절 부상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혼신의 투혼을 보여줬고, 결국 팀을 기적적으로 16강으로 이끌었다. 항상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으면서 피치 위에서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누구와 달리 주장으로서 품격과 리더십을 보여줬으며 아이 같이 순수한 웃음과 눈물을 보여주는 손흥민 선수의 인간적인 매력에 매료되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붓는 이의 열정, 꺾이지 않는 마음..! 스포츠의 결정적인 순간은 예술이나 종교가 영혼을 고양시키고,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때처럼 사람을 혼이 나가게 만들고, 미치게 만든다. 한 번 이 맛을 본 사람은 평생 이를 잊지 못하고 '신자'가 되곤 한다.
2
[유럽 축구 직접 만나러 갑니다]의 저자 곽지혁은 이렇게 축구에 영혼이 빼앗겨버린 '성덕'이다. '축구 대장 곽지혁의 사인 도전기'라는 부제는 책의 내용을 정확하게 요약해준다. 손흥민, 기성용, 이청용, 이강인, 이재성, 서영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모하메드 살라, 안토니오 발렌시아, 페르난도 요렌테, 트렌트-알렉산더 아놀드... 세계적인 선수들을 직접 만나 사인을 받기 위해 그는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 킬부터 주로 신혼부부들이 여행으로 찾는 스페인의 휴양도시 마요르카 등 전세계를 순례자처럼 주유한다. 경기장이나 훈련장, 혹은 선수들이 묵는 숙소에 미리 도착해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사인을 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부풀고, 기대가 좌절돼서 실망감에 빠지기도 하고, 선수들의 호의와 행운 덕분에 선수들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고, 실착 유니폼(경기 중에 실제로 입고 뛰었던 유니폼)을 받고...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어느 선수를 만나 사인을 받게 되기까지의 '썰'을 열거하는 식이라 책이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찾아보니 저자는 더 이상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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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에 가장 재밌게 본 예능 프로그램 중 '골때리는그녀들'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재밌었다. 기술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아 투박하고, 미숙하고, 엉성한 플레이를 하는데 경기에 임하는 자세만큼은 여느 프로선수 못지 않게 진심에 넘친다. 이 낭만 과잉의 아마추어리즘이 직관적으로 마음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었다. '검은리본' 아이린이 성장하는 과정이라든지, 패스-빌드업이 전혀 되지 않았던 팀원들의 손발이 조금씩 맞아떨어지는 모습이 자뭇 감동적이었다. 시즌2, 시즌3를 거듭하면서 골때녀들의 실력이 원숙해짐에 따라 더 이상 골때녀를 보지 않게 되었다...
새로운 걸 배우는 초보자-초심자가 되어보는 것, 갓 태어난 송아지나 망아지처럼 위태롭게 자세를 잡고 조심스레 한 발짝씩 내디뎌보는 것, 순수한 무지 상태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순수한 배움의 기쁨을 느끼는 것, 몸으로 하는 일을 새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품고 있다. 가령 수령 같은 운동...
군대 와서 십 년 만에 축구를 다시 해봤다. 가슴이 터져라 미친듯이 뛰고, 서로 눈빛교환을 한 다음에 패스 플레이를 하고(크로스 홋은 컷백으로 넘긴 공을 슛으로 연결하고), 땀으로 온몸이 젖은 다음에 함께 음료수를 마시고 샤워를 하는 시간. 역시 축구는 재밌었다. 하지만 허리 힘이 약해져서 그런지 온힘을 실어 강하게 공을 차면 무리가 왔고, 같은 팀을 비난하거나 '꼽'주는 행태 때문에 축구를 안 하게 되었다. 헬스 같이 개인운동이 아닌 단체 협동 스포츠가 줄 수 있는 끈끈한 기쁨이 있는데 아무래도 다른 곳에서 다른 종목으로 누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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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해외축구 직관 경험이 있다. 레알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홈구장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홈 경기를 본 것과 빌바오의 홈구장에서 유로파리그 조별리그 경기를 본 것. 스페인 여행 중에 조금은 충동적으로 직관을 결정했는데 결과적으로 꽤 괜찮은 경험이었다. 중계 화면으로 보는 것과 완전히 다른 속도감, 현장감, 패스의 리듬(템포), 분위기가 있었다. 만약 중립팬이 아니라 내가 응원하는 팀이 상위라운드로 진출하느냐 마느냐 여부를 판가름하는 '외나무다리' 결전이었다면 훨씬 가슴 쫄깃하게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마드리드만의 특성인지, 스페인 축구문화가 그런 것인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나이대가 조금 있는 팬들은 경기장에서 해바라기씨를 영화관에서 팝콘 먹듯 먹고 있었다. 경기가 끝나면 관중석은 그야말로 해바라기씨 껍질의 잔해로 지저분messy하다. 그렇게 해바라기씨를 옴뇸뇸 먹었던 스페인 아저씨가 아센시오(레알 마드리드의 윙포워드)의 쐐기골이 터지자 이방인인 날 향해 활짝 웃으며 기쁨을 나눴던 장면이 떠오른다. 같은 팀을 응원하면 잠시나마 친구가 될 수 있는 경기장 !
p.s 지하철역 개통이 완료되면 종종 수원종합월드컵경기장을 찾아야겠다. 이승우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