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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여행 / 어제 여행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자크 루보 지음, 김호영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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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9월 23일부터 26일까지 열린 서울국제작가축제에 다녀왔다. 2년마다 하는 행사라고 알고 있다. 한국의 소설가, 시인(극작가가 참여한 적이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과 세계 각국의 소설가, 시인이 서울에 모여 작품을 낭독하고 다채로운 공연을 하는 본격 문학축제였다. 점심 시간대부터 저녁 전까지의 시간은 웅진 W스테이지에서 평론가가 사회를 맡고, 한국-외국 작가들이 대담하는 형식으로 채워졌고, 저녁 시간에는 북촌 창우극장과 나무 현대미술 갤러리에서 각각 이틀 간 공연이 이어졌다. 기억에 남는 순간 베스트 5를 꼽으라면 이렇게 열거하고 싶다. 


최고은의 노래 - 김소연 시인의 낭독 

한유주의 <불가능한 동화> 낭독

다니엘 레빈 베커의 '우연히 마주친 음악incidental music' 연극공연 

다와다 요코의 낭독과 북 연주 

터키 작가 르자 크라치의 낭독 및 흡연 및 탈의 및 음주 및 탈의 퍼포먼스(조연호 시인과 강정 시인의 밴드 공연, 이영광 시인의 '유령' 연작 낭독과 판소리 공연을 놓친 게 두고두고 아쉽다 ㅜㅜ).


대체로 대담보다는 공연이 흥미로웠는데 한유주 - 다니엘 레빈 베커의 대담은 특별했다. 1960년에 결성된 프랑스의 실험문학 집단 '울리포'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알게 됐기 때문이다. 울리포는 작가뿐만 아니라 수학자, 화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형식적 제약'을 스스로 가해 새로운 문학을 추구하고자 했다. 옛날의 정형시나 시조 같이 정해진 규칙에 맞춰 창작하는게 아니라 작가가 임의로 만든 형식적 제약 안에서 창조성을 발휘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울리포의 수장 격이라 볼 수 있는 레몽 크노를 이웃블로거 '곰곰생각하는발' 님을 통해 알게 됐다. 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의 일부분을 번역해 올려주신 덕분에 울리포란 이름은 모르는 상태에서 '울리포적'인 것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었다. 


 한유주 작가의 경우 울리포의 회원은 아니지만 울리포프레스라는 독특한 출판사를 운영한 경험이 있고(500부 limited edition 자크 드뉘망의 '뿔바지'를 소장하고 계신 분이 관객 석에 있으셨다... 부러워요ㅜ), 미국의 소설사 다니엘 레빈 베커는 울리포의 회원이라고 했다. 다니엘은 울리포란 단체에 대해 설명하면서 조르주 페렉의 작품들을 예로 들었는데 알파벳 e가 없는 단어로만 쓴 작품 <실종>(1969)과 모음 e만 사용해 완성한 작품 <돌아온 사람들>의 존재는 거의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런 '미친' 짓의 시초가 페렉은 아니라고 한 사실이 더 놀라웠는데 아무튼 문학동네의 인문서가에 꽂힌 작가 선집에 포함된 조르주 페렉과 레몽 크노의 작품들이 하루빨리 출간되길 기다리면서 이미 출간된 사물들, w 또는 유년의 기억, 인생사용법, 잠자는 남자, 겨울여행/어제여행,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을 읽고자 했다. 그 중 예전에 주문해놓은(고로 한 장도 펼쳐보지 않은) <잠자는 남자>를 펼쳤으나 이상 빰치는 혹은 프루스트 빰치는 난해한 문체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페렉과 나는 2달 정도의 조정기간을 들어갔다. 


 두 달만에 페렉을 다시 펼치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던 건 한예종에서 하는 추계특강 세 번째 강의에 페렉을 번역하신 김호영 선생님의 조르주 페렉 강의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오는 기회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어 거의 꼬박 하루를 <잠자는 남자>에 '꼬라박아' 겨우 완독해낼 수 있었다. 절대적 고독의 아우라를 풍기는 이방인L'etranger.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이상의 <날개> 등이 떠오르면서 동시에 난해한 문체 때문에 어떤 작품과도 섞이지 않는 강한 개성을 느꼈다.  


 하지만 막상 <잠자는 남자>는 조재룡 평론가가 번역한 작품이어서 그런지 강의 시간에 많이 다뤄지진 않았다. 강의시간이 2시간으로 제한돼 있었기도 하고, 선생님이 감기에 걸리셨는지 몸이 안 좋으셔서 시간여유가 없었다. 대신 페렉의 대표작인 <인생사용법>에 대해선 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바로 어제 인생사용법을 다 읽었는데 인생사용법 작가노트도 꼭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100개의 장으로 구상되었으나 99개의 장과 에필로그로 이뤄진 점, 라틴제곱 삼각형을 통해 만든 표로 어느 장에 어떤 색깔이 들어가게 할지, 어떤 작가를 인용할지 결정한 점, 인생사용법 작가노트를 출간해 독자들에게 인생사용법이란 대단히 복잡한 구조를 지닌 작품의 수수께끼 같은 탄생비화를 알린 점이 나를 매혹시켰다. 자발적으로 엄숙주의에 빠져 문학을 굉장히 무겁고 진지하게'만' 바라보았던 내게 페렉의 유희정신은 어떤 해방감과 자유로움, 신선한 쾌락이었다. 페렉이 젊은 시절 좌파잡지를 출간하기도 하고, 정치에 꽤 열정적으로 참여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유대인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은 그였지만 자서전과 소설을 섞은 'w 또는 유년의 기억'을 집필하고 내면의 그늘을 거의 극복하고 한강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빛'이 있는 세계로 넘어왔다고 김호영 선생님은 설명하셨다. 


 기존의 소설이 서사 중심이었다면 페렉의 소설은 묘사 중심이다. 제인 오스틴처럼 내면의 감정묘사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페렉은 '사물'에 집중한다(그의 데뷔작 이름은 '사물들'이다!). 그는 묘사의 글쓰기를 통해 침묵하고 있는 사물들에게 말을 걸고, 겉보기에 별 것 없는 것 같고 너무 친숙해서 보이지 않는 사물들이 기억하고 있는 풍요로운 서사를 끌어낸다. 이에 '일상의 사회학'이란 멋진 표현이 붙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기억-과거를 통해 존재의 본질을 탐색했고, 제임스 조이스가 현재의 순간에 현현하는 진리, 소위 에피파니라고 그려내려고자 애썼다면, 조르주 페렉은 맑스적 의미에서 사물화된, 타성에 젖어 생명력을 잃은 일상의 사물들을 살려냄으로써 사물을 통해 일상을 구원하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구원은 너무 거창하다. 페렉이라면 훨씬 ''귀엽게' 표현했을 텐데... 연인끼리 사랑하는 사람의 쇄골, 어깨, 귓볼, 복숭아뼈를 하나하나 호명함으로써 사랑의 구체적인 물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페렉은 일상을 구성하는 사물 하나하의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일상회된 의식이 감각하지 못하는 일상의 풍요로운 속살을 불러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의 연인, 페렉.       


 <겨울여행>은 아주 짧은 분량의 소설이다. 주인공 뱅상 드그라엘이 동료 드니 보라드의 별장에서 무명시인 위고 베르니에가 쓴 <겨울여행> 시집을 발견한다. 출간연도가 1864년이란 걸 확인하고 깜짝 놀란다. 이게 사실이라면 보들레르, 폴 베를렌 같은 프랑스의 위대한 시인들이 위고 베르니레의 표절자인 셈이 밝혀지기 떄문이다. <어제여행>은 자크 루보가 페렉의 <겨울여행>을 이어썼다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후 울리포 회원들이 이 패러디를 연작으로 계속 써내려가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여 출간됐다고 한다. 


  창작과 표절에 대한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질문을 던지는 겨울여행/어제여행. 피에르 바야르의 <예상표절>이란 작품과 있지만 창조가 불가피하게 모방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에서 창작과 표절 사이의 질문은 끊임없이 제기될 수 있는 흥미로운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페렉은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기 힘들다며 미래의 글쓰기는 인용의 글쓰기가 될 거라 미국의 한 대학강연에서 말한 적 있다. 페렉보다 앞서 인용의 글쓰기를 시도한 사람으로 '인용으로'만' 이루어진 책'을 쓰고 싶다던 미완성 저작 아케이트 프로젝트(파사젠베르크)의 저자 발터 벤야민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인용은 기본적으로 기억이라 볼 수 있다. 인용구가 놓인 맥락을 벗겨 현재 글에 어디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인용의 글쓰기는 과거를 재배치해 현재를 재구성하는 기억의 건축술이다. 이미 쓴 텍스트를 바탕으로 축조되는 비평은 그런 의미에서 인용의 글쓰기를 가장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는 장르라고 볼 수 있다. 벤야민의 저서 중 <서사 기억 비평의 자리> 제목이 흥미롭다. 아아, 세계를 완전히 분해해서 다시 조립할 수 있다면,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인용한 오마르 카이얌의 구절은 아직까지(아마 앞으로도) 내게 최고의 아포리즘 중 하나이다. 


 페렉이 <W 또는 유년의 기억>에서 인용한 레몽 크노의 문장을 이 글을 닫고자 한다. 


그림자들이 요동치는 저 미친 안개

어떻게 환히 밝힐 수 있을까?


그림자들이 요동치는 저 미친 안개

저기에 나의 미래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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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인류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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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그의 대표작 <개미>에서 DNA 서사세 가지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진행되는 서사전략을 자주 차용하는 베르베르는 이 작품에서 다비드 웰즈 등의 인간들과 지구를 화자로 내세운다지구 화자는 흡사 가이아 신을 연상시킨다지구는 자신의 인 석유를 무분별하게 추출하고환경파괴를 일삼는 인류의 만행을 저지하기 위해 자연재해를 일으켜 자신의 뜻을 전달하려 하지만 지구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은 없다.


고생물학자 샤를 웰즈는 남극에서 17미터에 달하는 거인을 발견하지만 이를 세상에 공표하지 못하고 빙하에 묻혀버린다이 책의 제목 제3인류는 이 거인이 제1인류이며현 인류가 제2인류이고현 인류가 안고 있는 방사능과 환경오염의 문제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진화된’ 인류를 지칭한다초소형 인류 에마슈가 그 주인공이다.

 


 

 

 

 

리뷰 나는 누구인가우리는 어디서 왔는가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중학생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중학생 때는 자아탐색을 위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나는 질문을 받았다기보다 질문을 알게 되었다이 질문이 내게 답을 요구한다는 느낌보다 일반상식처럼 사춘기에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정보를 건네받은 느낌이 훨씬 강했기 때문이다이 질문이 나오기까지 사유의 과정을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 질문을 왜 해야 하는지가 차라리 더 궁금했다이런 걸 궁금해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면 질문의 실마리가 조금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책에서도 선생님에게서도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예시답변조차 얻을 수 없었다너 자신을 알라하던 소크라테스가 엄청 싸가지 없어 보였다위대한 철학자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질문이 아닌 속이 배배 꼬인 할아버지의 빈정댐으로 느껴졌다아마 중즈음이었을 것이다(이때 당시 교과서에 <개미>가 수록됐던 걸로 기억한다).


이 질문이 내게 다가온 건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읽으면서부터였다. <>로 시작해 타나토노트아버지들의 아버지나무파피용개미 순으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사후세계는 실제로 존재할까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일까(‘타나토노트’), 진화론이 맞는 것 같긴 한데 인류의 조상은 무엇일까또 최초의 생명의 조상은 무엇일까생명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아버지들의 아버지’), 인류는 새로운 지구를 찾을 수 있을까만약에 찾는다면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까또 그곳에 새로운 문명을 건설한다면 지구에서보다 나은 문명을 건설할 수 있을까외계인은 존재할까그들의 문명은 우리보다 진보했을까?(‘파피용’) 같은 질문을 막연히 던졌다(너무 깊이 알면 다쳐). 그때부터 소설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도덕윤리교과서에 나오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문장이 아니라 흥미진진하며 가끔 에로틱하기도 한 이야기를 통해 질문을 던지고지적 모험을 떠날 수 있다는 점이 나를 매료시켰다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한 반에 두세 명씩은 꼭 베르베르를 읽었던 것 같다탈출구가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제3인류는 미싱 링크’, 원숭이와 인간 사이 진화상의 빠진 고리를 찾아 인류학적 근원을 찾고자 했던 <아버지들의 아버지>와 우주범선을 타고 새로운 지구를 찾아 신인류문명을 건설하고자 했던 <파피용>의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우리가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그는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로 인간존재의 근원을 탐사하는 작가의 유형은 아니라는 점이다그는 이야기꾼이다매너리즘에 빠졌다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없다고 실망하고 등을 돌린 독자들도 꽤 되지만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은 여전하기 때문에 아직도 수많은 독자들을 거느리고 있다(그는 올 8월에 예스24에서 진행한 한국인이 사랑하는 해외작가 투표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급행열차’ 급의 이야기를 타고 달려온 독자들 중에는 하차 이후에 헛헛함을 경험했을 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 공백을 어떻게 채우는지 알고 있다마르지 않는 샘지적 호기심은 우리를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채운다질문하는 자여그대에게 즐거움이 있을지어다.

 

함께 읽으면 좋을 책 (5) :

 

아버지들의 아버지(베르나르 베르베르), 파피용(베르나르 베르베르),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른스트 슈마허), 센스 앤 넌센스(케빈 랠런드길리언 브라운), 침묵의 봄(레이첼 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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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캠핑 여행 - 아이와 함께 떠나는 새로운 제주 여행법
이지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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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적 경쟁심. 황지우 시인의 <뼈아픈 후회>에 나오는 표현이다.

시위 한 번 나가보지 않은 내가 민주화 운동으로 국가 유공자증까지 받은(동생 황광우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황지우 시인의 발 끝에도 못 미칠 테지만 내 복잡한 감정을 설명하는 데 이만한 표현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아니 좋은 사람이어야 했다. 좋은 사람이 도덕 교과서에서 말하는 선한 사람인지, 타인에게 이로운 사람인지 불분명했으나 좋은 사람이어야 했다. 실제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보다 타인에게 그런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중요했다.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군요.' '~는 참 사람이 좋아.'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 이런 말을 듣고도 표정을 컨트롤할 수 있을 적정 수준의 수줍음을 느끼고 여유롭게 웃을 수 있는 사람, 어쩌면 좋은 사람보다 '좋음' 그 자체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 좋음의 화신. 

  

 돌아보니 나는 생각보다 윤리 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의식이 강한 만큼 잘 지키진 못한다. 이 윤리 의식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아버지'에 가까운데 내 경우 아버지가 정말 산처럼 커다랬던 것이다. 그렇다고 칸트 같은 도덕주의자는 아닌데 무엇이 윤리적인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회의적 윤리의 신봉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행동은 존재sein가 아닌 당위sollen의 목소리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의 충동에 충실하고, 자유롭게 사고/행동하는 예술가형 인간에 대해서도 예술가의 그 '좋음'- 칸트가 천재라고 말한 인간 유형으로서의 장점에 매료되어 예술가를 닮고자 했다. 하고 싶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면에서 '하고 싶다'의 목소리를 듣기 힘들었다. 해야 한다에 파묻힌 삶. <삶이라는 직업>. '아버지'를 죽이라는 데 정말 죽여도 되는 걸까? 그게 옳은 걸까? 망설이다가 은근슬쩍, 어물쩍 넘어가버린 모양새. 좋음과 옳음의 세계. 이 감옥으로부터 나를 구출해내는 것이 내 과제였다. 


 제주 캠핑 여행에 대해 리뷰를 쓰는 데 왠 뜬금없는 자기고백이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제주. 바로 이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뽑힌 남쪽 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제주에 딱 한 번 가본 적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으로. 솔직히 말하면 거기서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풍경을 보았는지 기억도 안 난다. 뚜렷하게 기억나는 건 숙소에서 잠들기 전 진실게임 비슷한 사춘기 소년들의 고백 시간에 흥을 돋구기 위해 평소 나답지 않은 소설을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써냈다는 것, 희미하게 기억나는 건 20대 후반의 아름다운 외모의 음악을 가르치셨던 담임 선생님이 두 남학생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내게서 멀어지는 모습- 담임선생님을 짝사랑했던 레파토리의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이래저래 애증이 있던 관계여서 그랬는지 그 뒷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추론해볼 수 있는 것은 그때 당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여학생을 멀리서 바라보는 내 모습. 황병승 시인이 선언의 천재라면 난 관조의 수재 정도는 됐을 것이다. 아니 이건 거짓말이다. 사춘기 소년의 감정구조라는 게 어떤 성절의 것인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을 것이다. 사춘기 소년에게 관조란 불가능한 능력에 가깝다. 어려서 (미리) 늙어버렸다는 시인들을 보면 또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닐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추상과 형이상학의 세계와 친했던 나도 '소녀' 앞에선 감정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감정 대신 감각을 발명하는 법을 일찍 깨쳤더라면 그때부터 시나 소설을 끄적였겠지...). 어쨌든 나는 멀리서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오랜 습관이다. 


 그 이후로 제주도를 찾을 일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찾게 된 건 작년 봄 즈음이었던 것 같다(제주도에 간 것은 아니다). 강정 해군기지 찬반 논란. 친구의 블로그에 인혁당 사건 같은 어휘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즐겨 듣는 팟캐스트에서 보도연맹 사건 같은 어휘들을 접하게 됐다. 나는 알게 되었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선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시류에 대해 나름의 논평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정치적 지식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나의 과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진중공업과 쌍용자동차에 대해선 잘 모른다. 활발하게 논의가 되던 시기에서 한 발짝 뒤로 눌러나 있던 것도 컸지만 한꺼번에 모든 문제들을 감당하기에 버거웠다는 게 솔직한 생각이다. 대신 용산참사 같은 경우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등을 이용해 공부했고-그나마 이 표현이 적절한 것 같다-, 밀양 송전탑의 경우 1달 정도 함께 했던 '나눔 문화'라는 단체를 통해 많이 배웠고, 강정의 경우 3권의 책, 1편의 논문, 이런저런 기사, 칼럼, 강정 docu jam, 서울환경영화제에서 만난 미라클 여행기 등을 통해 가장 넓고 깊게 공부했다. 강정 해군기지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한 공부였는데 마음과 감정이 앞서서 글 수준이 아주 개판이 되었다. 현장에 직접 가보지 않고 자료만 가지고 쓰는 글의 한계도 있었을 테고, 강정을 여전히 사회의 문제로 다뤘을 뿐 내 문제로 다루지 못한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전히 존재sein가 아닌 당위sollen... 


 오멸 감독 덕분에 알게 된 4.3 사건과 강정으로 제주도는 내게 관광지보다 피의 역사를 간직한 섬에 가까워졌다. 물론 아름다운 이미지가 완전히 증발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고등학생 즈음 SBS 다큐멘터리에서 제주도를 자전거로 혼자 여행하는 여대생을 본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아마 나는 그때 무의식적으로 포카리 스웨트 광고를 연상하지 않았을까 싶다. 산토리니 섬과 제주도는 그렇게 내 무의식 속에서 동급이 되었다. 아니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여대생의 존재가 제주도의 손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왠지 제주도로 여행가게 되면 그녀 혹은 그녀 같은 매력쟁이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맞다. 바람이 많은 섬이라 그런지 이야기만 들어도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간 것이다. 그 판타지의 감각을 최대한 활성화시켜 <제주 캠핑 여행>을 '예습'했다. 


 역시나였다. 제주도는 아름다운 섬이었다. 떠나버리고 싶은 충동을 즐기면서 한 장 한 장 읽을 수 있었다. 캠핑은 경제적으로 부담되고, 같이 갈 사람도 없기 때문에 실질적 도움은 지금 당장 되기 힘들었지만 게스트하우스에 대한 정보도 제공돼서 제주도 상상여행에 핍진성을 더할 수 있었다.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자연환경, 멋진 볼거리... 같이 갈 사람만 있다면 공사판을 뛰어서라도 자금을 마련하리! 


 제주여행에서 좋았던 점은 미술을 공부한 저자가 감각적인 스케치로 사진을 대신했다는 점(이 장점은 제주도 캠핑 여행 놀이 부분에서 극대화된다), 볼거리-먹거리 등 여행서가 갖춰야 할 기본사항을 충실히 갖췄다는 점, 여행다닐 때 들고 가기 좋은 크기/무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표지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아, 제주. 그런데 최근 제주를 다녀온 친구의 말을 들어보니 강정 해군기지 건설을 놓고 투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오멸 감독의 <지슬>의 부제가 끝나지 않는 세월2였는데 제주도의 피의 역사, 고난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나도 뭔가를 하고 싶은데 실상 광화문 세월호 시위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있으니 할 말이 없다. 도덕적 경쟁심. 이걸 극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난 성자/순교자가 될 그릇은 아니다. 대신 내 나름대로 고민하고, 사유하고, 대화하면서 길을 찾을 것이다. 그 누구/무엇을 위한 경쟁심이 아닌 나를 위한 도덕적 경쟁심으로 방향을 바꾼다면 충분히 좋은 재료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투사/순교자도 중요하지만 지속가능한 진보를 위해선 의식 있는 시민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걸 배웠기 때문에. 한 명의 투사/순교자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여러 명이 나눠서 진다면 한 명이 십자가에 못 박힐 필요도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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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바나나 2014-09-03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뜨끔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도 조금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지라.
책에 관해선 사진이 아닌 감각적인 스케치라고 하니 관심이 가네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각적'이라는 거^^
칼비노 전집의 관한 정보는 감사합니다.
근데 그때까지 사고 싶은 욕구, 읽고 싶은 욕구를 자제할 수 있을지^^

rendevous 2014-09-03 23:33   좋아요 0 | URL
사실 전집 류는 한 권, 한 권 모아가는 재미에 방점이 찍혀 있는데 말이죠 ^^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을 한 권 한 권 모으다간... 가계 경제가 흔들릴 지도 모르지마 이탈로 칼비노 전집 정도라면 용돈 아껴서 한 권씩 모아도, 혹은 지름신 강림으로 한꺼번에 장만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
 
하룻밤에 읽는 불교 - 개정판, 2천5백년 불교사와 불교사상을 한눈에 그림으로 읽는다 하룻밤 시리즈
소운 스님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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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하룻밤에 읽는 불교. 

 

하룻밤에 못 읽었다 ^^ 

 

끝.

 

^ ^ 

 

 

 

 

 

 

 

 

 

 

 

 

 

 

 

 

 

 

 

 

 

 

 

 

 

 

 

음...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까? 청년출가학교 얘기를 하면 좋지 않을까? 맞아. 청년출가학교. 거기서 시작된 인연이었어. 

내게 불교란 뭐였지? 고려 시대 국교? 동국대 백일장인가 만해 백일장 때 틀어주던 오세암의 세계(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궁예????!!!! 대머리? 염주? 사리? 악기가 된 뼈(정약용 선생이 복숭아뼈였나? 거기 구멍이 세 번 날 정도로 열심히 정진했다는 에피소드를 읽고 스님을 연상했다) 불 속 결가부좌? 시 속 철학적 뿌리? ... 

생각해보니 불교와 나의 개인적인 접촉이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 때 불국사를 간 걸 제외하곤 거의 전무할 정도로 절은 '옛날의 유산' 이미지가 강했던 것 같다. 부모님이 불자도 아니었고, 주변 얘들도 불자가 아니었다. 내겐 너무 먼 불교. 

그런데 청년출가학교에 별 고민 없이 지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실존적인 고민도 고민이고, 참여해주신 선생님들의 명성도 명성이지만, 불교의 '수행'하는 이미지가 강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내게 기독교는 노래 부르고 기도하는 이미지라면, 불교는 절하고 염불 외우는 이미지. 

 

극빈. 무아에 이르기 위해 고행하는 구도자. 무성욕 혹은 절대적 절제. 자연을 벗 삼아 사는 자연인. 

   

이런 끌림들이 있었다. 지속가능한 마조히즘? 하루하루 - 삶을 수행으로 가져간다면 공부/휴식의 분리를 좀 더 부드럽게 완화시킬 수 있을 거란 기대. 예상은 적중했다.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잠 들고, 깨끗한 공기 마시며 말끔한 정신 상태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질문하고, 대화하기, 밥 먹는 것 - 걷는 것 - 작은 것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게 생활하기, 온전히 나에 집중하는 시간, 정말 좋았다. 

스케줄을 짜고 거기에 맞춰 움직이는 것을 잘 못하는 나에게 어느 정도 꽉 짜인 스케줄은 오히려 다른 것에 신경쓰지 않고 내 앞에 놓인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정말 다 좋았는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내가 불교에 너무 무지했다는 점, 그로 인해 불교에 대한 궁금증을 스님들께 여쭙지 못했다는 점과 스님들이 해주시는 불교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이었다. 

 

하룻밤에 읽는 불교. 

 

불교라는 거대한 세계에 들어가는 데 글을 읽지 않도록 이정표를 세울 수 있는 책으로, 지도를 그려보고, 영토를 더듬어볼 수 있는 책으로 괜찮을 것 같아 서평단에 신청했고, 운 좋게 인연이 닿았다. 

 

요약-정리된 부분을 보면서 고등학교 때 풀던 문제집이 생각났다. 그만큼 일목요연하게 요약이 잘 돼 있었다.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불교입문자들에게 길을 안내해주는 길잡이 입문서를 표방하고 나온 콘셉트에 충실한 책이었고, 처음 불교용어를 접하는 나에겐 또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책이기도 했다. 

 

p26

 

<우파니샤드>의 어원적 의미는 '가까이 앉다'로, 스승에서 제자로 구전되어온 가르침을 집대성하여 <베다> 문헌의 가장 끝부분에 실려 있기에 베단타라고도 일컫는다. <우파니샤드>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16세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편찬되었다. 

 <우파니샤드>에 나타나는 철학적 특색은 범아일여, 즉 우주의 근원인 브라만과 개인에 내재한 아트만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브라만교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다양한 현상들을 있게 하는 근원적 실재가 존재한다고 생각해 이를 추구했다. 그리고 현상계와 신들의 의지처가 되는 근본 원인인 브라만 개념을 고안해냈다. 

 브라만은 현상계의 모든 존재 안에 내재되어 있으며, 현상들의 차별적인 모습은 브라만 안에서 하나의 원리로 귀결된다. 그리고 아트만은 개인의 영적 존재로 다른 물질들과 구분되는 본질적인 어떤 것이며, 인식의 주체이자 윤리적 주체로서 육체가 죽어서 사라진다고 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파니샤드>의 신봉자들은 브라만을 개인의 영적 존재인 아트만과 다르지 않다고 믿었다. 개인의 내면적 탐색이 극치에 이르면 아트만을 발견하게 되고, 바로 그것이 유일의 실재인 브라만과 동일하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범아일여적 사고는 우주의 본질을 내적 자아성찰을 통해 추구하게 만들었다. 개인은 대우주를 반영한 ㅅ우주이므로 우주의 본질을 자신 안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청년출가학교에서 들은 기억이 있는 단어들. 

사성제 :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해탈의 방법을 고, 집, 멸, 도 네 단계로 설명하는 가르침. 첫째, 존재하는 그 자체가 모두 고통의 연속이다. 둘째, 고통의 근원은 집착이다. 셋째, 고통의 소멸을 열반이다. 넷째,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행이 필요하다. 

 이어 열반에 이르는 수행을 다시 여덟 가지로 말했으니, 이것이 팔정도, 즉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말,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노력, 올바른 주의, 올바른 선정이다. 

 

진은영 시인이 쓴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에서 본 적 있는 나가르주나 용수의 <공> 사상. 

p58

 

나가르주나의 가장 큰 업적은 <반야경>에서 말한 공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공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는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고, 항상 변한다는 불교의 근본교리이다. 나가르주나는 <중론>에서 공성(사물의 본성 또는 실체)이 바로 석존이 발견한 연기임을 밝히고 있다. 연기란 현상계의 사물들은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과 상호의존적으로 공존하면서 생성하고 소멸한다는 것으로, 모든 현상계의 물질의 실제 모습을 밝힌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간략하게나마 불교의 주요 개념들을 익힐 수 있어서 좋았고, 무엇보다 나라마다 불교가 어떤 변천사를 겪었는지 대략적인 역사적 흐름을 잡을 수 있어서 앞으로 불교를 공부하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될 거란 걸 예감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면 청년출가학교에 강의해주신 분으로 광고인 박웅현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때 본인은 <하룻밤에 읽는 ~~> 이런 제목이 달린 책을 싫어한다고 ^^ 하룻밤에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내용을 하룻밤에 읽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게 하는 마케팅에 대한 비판적인 광고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독자 입장에서 그 책이 하룻밤에 읽는~ 이든, 두 글자로 읽는 ~~든 책 내용만 알차다면 상관없다. 대신 한 가지 드는 아쉬움이 있다면 본격적인 전문서적과 초보자들을 위한 입문책 중간에 위치할 만한 책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 같다. 그런 책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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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삶 1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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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만국의 중고등학생들이여, 세계문학으로 단결하라!

이렇게 외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많은 작가들이 세계문학을 일독하길 권하는 건 많이 봤다. 세계문학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아무래도 세계라는 어감의 영향으로 국가별로 떠올려보면- 영국의 셰익스피어, 독일의 괴테, 이탈리아의 단테, 스페인의 세르반테스,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정도다(프랑스는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 출연한 황현산 선생님의 말씀대로 국가를 대표할 만한 대문호는 없지만 보들레르, 랭보, 발자크, 앙드레 지드, 프루스트 같은 작가들이 포진되어 있어 탄탄한 미드필더(?) 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삼국지나 서유기, 초한지, 수호지 같은 작품들은 '중국고전'이란 독립된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느낌이라 세계문학의 첫 인상과는 약간의 거리감이 있고, 천일야화는 문학보다 순수한 이야기에 가까운 느낌이라 역시 거리감이 있다. 우리가 세계문학이란 단어의 처음으로 이질감을 느끼는 순간은 아마도 '세계'가 유럽에 갇혀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세계문학이라기보단 유럽문학.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이나 근대소설이 유럽에서 처음 생겨났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유수의 출판사들이 펴내고 있는 세계문학전집이  5대양 6대주를 종횡무진 누비며 다양한 문화권의 다양한 언어로 쓴 작품들을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해주고 있어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좋은 작품들도 한글로 읽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그중에는 민음사의 모던 클래식 시리즈 같은 '젊은' 고전을 표방한 세계문학들이 나와 독자들과의 소통에 좀 더 다가서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일례로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은 2001년에 발생한 9.11 테러를 다루고 있어 중고등학생 같은 젊은 독자들도 소설과 경험을 공유해 동시대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고백할 게 있다. 나는 자유로운 삶을 1권밖에 읽지 못했다. 그래서 이 리뷰는 반토막짜리 리뷰가 아니라 리뷰 아닌 리뷰가 될 것이다. 책이 선정되기 전까지 '하진'이란 작가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김연수 작가가 번역한 적까지 있는 세계적인 소설가였다. 재밌는 점은 한국에 잘 알려진 위화나 모옌, 쑤퉁, 옌롄커 같이 중국어가 아닌 영어를 작가언어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소개에 따르면 1989년 톈안먼 사태를 접한 뒤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프랑스' 작가 르 끌레지오 같은 경우 영어와 프랑스어의 모두 능통했는데 자신의 작가언어로 프랑스어를 선택했다는 이력을 들은 적이 있고, 언어의 마술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같은 경우도 러시아어와 영어 두 개의 작가언어를 구사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는데 하진의 경우 영문학 박사학위까지 따긴 했지만 톈안먼 사건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직접적 영향으로 외국어(영어)를 작가언어로 채택'당했다'는 점이 특이했다. 중국에 남은 작가도 있고, 해외로 망명한 작가도 있고, 그들 각자의 사정을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힘들지만 대략적인 흐름만 보면 개인의 힘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불가항력에 의해 의도된 선택이라는 점에서 하진은 영어에게 선택당했다, 이렇게 써보기로 한다. 


 전미도서상, 펜 포크너상, 퓰리처상 최종 후보 같은 화려한 수상내역도 그의 소설을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평소 아시아권 작가들과 유독 친하지 않았던 내게 영어로 글을 쓰지만 중국의 뿌리를 두고 있는(단순히 혈통이 아니라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서) 작가의 작품을 읽는 이번 기회는 특별했다. 이런저런 지면에서 문화대혁명, 톈안먼 사건을 접하면서 이 사건이 중국현대사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근 허핑턴포스트에서 천안문 사건을 기록한 사진들을 본 터라(http://www.huffingtonpost.kr/2014/06/05/story_n_5450192.html)

소설은 이 사건을, 정확히는 이 사건을 통과해낸 이들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렇게 궁금했으면 열심히 다 읽고 꽉 찬 리뷰를 쓸 것이지... 할 말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장편소설을 잘 안 읽게 되는 경향이 있다. 시집 아니면 철학서, 감각의 찬란 아니면 사유의 혁신. 기체적, 무정형의 상상력 아니면 지구보다는 금성에 어울릴 밀도의 숨 막히는 지적 투쟁... 극과 극의 호흡으로 갈리다 보니 그 중간쯤에 해당하는 장편소설이 잘 읽히지 않았다. 


 <자유로운 삶>은 가독성이 뛰어나서 그래도 읽는 맛이 있었다. 주워들은 말로 중국소설은 서사가 강하다는 말은 들은 적 있는데 그런 중국소설의 전통의 영향으로 하진 역시 풀어쓰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의심을 했지만 저자소개를 보니 그런 서술적 문체가 하진 소설의 특징이자 미덕이라 하더라(역시 책에 있어서만큼은 의심보다 믿음이 좋은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듯하다).


 <자유로운 삶>의 첫 문장은 이렇다. '마침내 타오타오가 여권과 비자를 받았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읽었는데 작품을 읽어 나갈수록 이 한 문장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자유로운 삶1권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이 소설은 자유를 위해 불안으로 다가서는 소설이다. 주인공 난은 작가 하진처럼 톈안먼 사건으로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아내 핑핑과 함께 이주한다. 타오타오가 뒤늦게 부부와 합류하지만 '타오타오는 미국에서 부모를 만났다' 결과를 설명하는 한 문장이 담지 못할 인물 내면의 불안한 심리변화를 작가는 차분하게 추적해나간다. L'Etranger - 불안의 원인은 이방인이라는 그들의 정체성에서 기인한다. 그들은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다 - 이는 언제라도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근원적 약점이라 할 수 있다. 타오타오가 핑핑이 쓰던 잘못된 표현을 교실에서 썼다고 웃음거리가 된 에피소드는 약과이고 사소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그들의 타자적 위치를 반영하고 있다. 그들은 유색인종이기 때문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kkk단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최근에 토니 모리슨 관련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교수님에 따르면 아직까지도 미국 내 대학내에서 kkk단 표식을 한 대학생들이 '자유'롭게 활보하고 다닌다는 말이 내겐 꽤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세상에 달라지긴... 역시 힘든 것이다) 이 같은 모든 예외상황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그들의 일상은 실상 항시 비상상황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노동자라는 그들의 계급도 이 불안의 한몫을 하지만 핑핑이 토로한 적 있듯 돌아갈 곳이 없는, 조국/고향을 등지고 떠나 이방에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하고 있는 미아와 같은 그들의 처지가 불안의 핵이다. 


 불안에 영혼을 잠식당한 이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을 잃어가고, 어떤 이는 중국에서의 남성이 누리던 권위의 박탈과 밑바닥 생활로의 급작스러운 추락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아내를 자신보다 15살이나 많은, 하지만 자신보다 자신감 넘치는 남성에게 빼앗기고 만다. 작품을 쭉 읽어나가면서 생각나는 영화가 있었는데 조금 뜬금없을 지도 모르지만 마이클 무어의 <식코>가 어른거렸다. 소설의 배경은 1992년이고, 영화의 배경은 2000년대 중반이기 때문에 시차는 존재하지만 충분한 재산을 소유하지 못할 때 건강(의료보험), 사랑에 끊임없이 균열이 발생하는 자본과 개인과의 불화 양상이 꽤 비슷해보였다. 저 '충분한'이란 단어의 모호함, 도대체 어느 정도를 가지고 있어야 인간다운 삶-그러니까 건강할 권리(건강의 위협이 발생했을 때 치료받을 권리), 사랑할 권리를 보장받고,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인가. 단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삶/행복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재방을 쌓아야 하는가. 혹은 얼마나 많은 불안을 마음 속에 집어넣어야 부족한 자본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가. 이방인의 미국에서 홀로서기는 그야말로 고통과 눈물의 대서사시이다. 이 지난하고 핍진한 투쟁에서 내면이 완전히 소진되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고 생명력, '다시 한번'의 의지의 원천이 되는 건 가족 간의 사랑이고, 난의 경우 '시 쓰기'인 것처럼 보인다. 

 

 이쯤 되면 우리는 한 번 질문해봐야 한다. 인간이란 동물은 왜 시 같은 걸 쓰는가. 반대로 시 같은 걸 써야만 생을 버텨낼 수 있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글쓰기의 구원이 있다면 그 구원은 어떻게 오는가. 최근 글쓰기의 구원에 관한 가장 인상적인 글을 접한 기억을 공유하고자 한다. 6월 11일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에서 장장 8명의 시인과 4명의 평론가-출연진의 리스트를 공개하면 김민정, 김행숙, 박상수, 송승환, 이영광, 이원, 한강, 함성호/ 김수이, 양경언, 함돈균, (한 분의 이름이... ㅜ죄송합니다)가 참여한 '시민과 함께 하는 시 낭독회'가 열렸다. 막간을 이용해 에피소드를 전하면 거기서 필자는 낭송자로 선정되어 이영광 시인의 '아프면 안 된다던 말'을 낭송하고, 부상으로 '나무는 간다' 시집을 받아 시인께 친필사인을 받았다 ㅜㅜ 신형철 평론가가 진행하는 팟캐스트의 영향도 있었지만 자발적으로 감상문을 쓰고 싶은 욕구를 강렬하게 자극했던 시집이었던만큼 나름 각별한 시집을 시인의 사인과 애정 어린 코멘트와 함께 받게 되어 나에겐 정말 '선물' 그 자체였다.(시가 궁금하신 분들은 여기로 놀러와주세요 ^^ http://blog.naver.com/yadohy6407/20197297971)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거기서 함돈균 평론가는 황병승 시인의 <육체쇼와 전집>에 대한 평론을 낭송해주셨는데... 내 머릿속에 남은 건 정말 뼈의 뼈만 남긴, 그래서 상대방의 의도를 반영하지 못한 폭력적 언술이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한 문장이다. 


 시인은 실패의 기록을 고백함으로써, 아니 고백의 언어로 실패를 기록함으로써 진실의 윤리에 닿고,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13회 미당문학상 수상작으로 뽑힌 '내일은 프로'라는 시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보여주고자 하였지요. 다양한 각도에서의 실패를. 독자들은 보았을까, 내가 보여주고자 한 실패. 보지 못했지.. 나는 결국 실패를 보여주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실패에 실패한 시인에게 남은 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패배자의 이미지, 절망이나 좌절의 포즈가 아니라 '내일은 프로/내일은 프로'라는 희망의 자세였다. 이 역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이는 다시 함돈균 평론가의 평론으로 돌아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듯하다. 


 중요한 것은 시가 불모의 세계에 대해 유용한 결과물을 내놓는 식으로 세상과 거짓 화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불모의 세계가 지닌 불모성을 '무용한' 예술적 형식으로 드러내는 정직한 시적 자의식을 강인하게 견지하는 일이다. <얼굴 없는 노래> 중 


 효율성을 신봉하며 인간을 무자비한 무한경쟁의 전쟁터로 내모는 세상에서 성공과 승리는 무엇에 대한 성공과 승리이며, 무엇을 위한 성공과 승린가.죽음과 고통을 은폐한 야만적 체제에 대한 반성적 물음 없이 주어진 답을 푸는 기계적 운동을 삶이라 불러야 할 이유가 있는가. 작동이나 실행, 주어진 명령을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기 위한 '업그레이드'의 신화에 인간의 이야기는 없다. 승리와 성공의 제2의 자연이 지배하고 있는 신화에서 깨어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형식은 실패이다.실패는 패배와 다르다. 히틀러가 제국의 건설에 실패했다면 돈 키호테는 세계와의 대결에서 패배했다. 신형철 평론가는 어떤 패배는 성공보다 더 멀리 우리를 데려다놓는다고 한 적이 있다. 그것은 가능의 세계에서 정답을 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불가능과의 대결을 통해 질문을 구하고자 했기 때문에 가능한 진술일 것이다.1대 99. 1명의 성공자와 99명의 패배자를 낳는 구조는 혼자서 살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결함에 기인해 공멸의 의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완벽한 실패의 성공이라면 성공일 것이다.성공의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줄 수 있는 건 성공의 실패가 아닌 실패의 성공일 것이다. 그리고 시인이 그 어떤 대상에 대한 투쟁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투쟁, 자신 자신의 실패와 투쟁함으로써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세계의 성공의 신화, 성공성의 제 2 자연을 찢고 패배성의 자연을 불러내는 시인은 '실패의 성자'이다. 제대로 된 실패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온 생애로 말을 하는 그는 실패에 실패함으로써, 성공이 보여주지 못한 무엇을 보여줬다. 한 진실한 영혼은 이 실패를 읽고, 구원의 가능성이라 썼다. 


 시 쓰기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다. 소설을 완독하지 못해 빈약한 부분을 채우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실패한 리뷰다. 하지만 이 실패가 성공보다 더나은 실패가 될 수 있길 바라며 한 줄을 '덤'으로 남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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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4-06-27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었습니다. 리뷰라기 보다는 전문가가 쓴 한 편의 컬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네요. 특히 마지막 문단. 멋있어요~. 천안문 사진도 낭독하신 시도 잘 봤습니다.

하진의 이 소설은, 마치 누군가의 일기장처럼 느껴졌어요. 기록의 뭉치 같았어요. 아주 자잘한 것들이 모여서 모이고 또 모이고 모여서 소설이라는 큰 덩어리를 형성하는 과정 속에서 깊이있는 진솔함이 느껴졌어요. 큰 사건이 없어도, 반전이 없어도, 화려한 문장이나 대단한 사유가 없어도 단지 생각과 일상의 기록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생각거리를 주었다고나 할까요

rendevous 2014-07-10 23:50   좋아요 0 | URL
하진의 이 소설은, 마치 누군가의 일기장처럼 느껴졌어요. 기록의 뭉치 같았어요. 아주 자잘한 것들이 모여서 모이고 또 모이고 모여서 소설이라는 큰 덩어리를 형성하는 과정 속에서 깊이있는 진솔함이 느껴졌어요. 큰 사건이 없어도, 반전이 없어도, 화려한 문장이나 대단한 사유가 없어도 단지 생각과 일상의 기록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생각거리를 주었다고나 할까요

이 문장 읽고 <자유로운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더니 제가 읽어내지 못한 부분이 많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판단하려 들지 말았어야 했는데... 제 오만을 반성하게 됩니다. '한 번은 아무 것도 아니다' - 밀란 쿤데라의 문장을 상기하면서 김연수 작가가 번역한 <기다림>과의 만남을 기다려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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