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믿음
헤르만 헤세 지음, 강민경 옮김 / 로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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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는 세상, 부유하는 존재들. 진지하게 인생에 대해 고민하고자 하지만 삶의 현실에 이리저리 휘둘립니다. 몸과 마음은 지쳤고, 영혼은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변한 것인지, 우리가 나약한 것인지조차 모르겠습니다. 그저 시간과 상황의 흐름이 우리를 맡깁니다.




우리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시적이고 자극적인 것들입니다. 어느새 그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이유도 없이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 우상들은 여러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돈이나 권력, 명예와 같은 여러 모양으로 말입니다.




시대의 정신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줄 것처럼 유혹합니다. 하지만 그런 우상은 추구할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만족은 일시적입니다. 더 크고 강한 것을 필요로 합니다. 감각적인 것들은 잠시의 즐거움을 줍니다. 하지만 우리 영혼은 점점 병들어갑니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는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하다 말합니다. 시대의 가치를 쫓아 살아가는 것은 우리를 참된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헤세는 '믿음'을 언급하지만 그것을 특정한 종교나 교리에 제한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전통과 사상을 통해서도 열린 자세로 많은 것을 받아들입니다.




『데미안』이나 『싯다르타』에서 작가의 종교성과 믿음이 어렴풋하게 드러납니다. 이 책 『나의 믿음』은 자신의 작품에서 보였던 사상과 전제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그만의 필치로 펼쳐나갑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 책은 믿음이나 영혼을 정의하는 책은 아닙니다. 작가는 그저 자신의 삶에서 경험했던 바를 소소하게 밝히면서 자신의 생각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때로는 한 개념과 다른 개념이 충돌하기도 합니다. 여러 종교의 가르침이 혼재하기도 합니다.




이는 헤세의 삶을 보면 충분하게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는 경건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외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는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했기 때문에 인도의 종교나 사상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자신에게 가장 밀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미심쩍었던 종교입니다.




아무래도 자라면서 경험한 여러 가지 실제적인 다툼과 분열들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인도의 철학과 중국의 철학에 관심을 가졌고, 이후로 중국의 전통적 덕에 대한 개념에 몰두했습니다. 이 책에서도 공자와 노자의 사상이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동양의 사상에 깊이 심취했습니다.




이후에 신실한 가톨릭 신앙을 가진 친구와의 교제로 인해 다시금 교회와 기독교에 관심을 가졌습니다만 현실의 교회 모습에 환멸을 느끼는 것은 여전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종교의 전반적인 영향은 기독교라고 말합니다. 교회보다는 영성을 중요시하고, 다양한 아시아의 사상이 어우러져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이 책은 '믿음'이라는 주제로 선별한 미공개 원고의 모음집입니다. 그리하여 책 전체적인 흐름이 일관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단편들이 쓰인 시간순으로 배열되었기에 형식적으로 큰 의미를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작가의 글은 충분히 우리에게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다양한 통찰과 깨달음을 우리에게 줍니다.




저마다 자신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분명한 정답을 말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시대가 따라 변하는 근거 없고 불확실한 사상으로 우리네 한 번뿐인 삶을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 같습니다. 보다 분명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의 반석 위에 우리 삶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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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내게 잘 지내냐고 물었다 - 인생이 힘겹고 외로울 때 꺼내 읽는 김경집의 인간학 수업
김경집 지음 / 그래도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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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 사람의 내면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은 세상이 지옥이라고 합니다. '믿을 인간 하나도 없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세상이 투박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 것을 느끼지 못하나 봅니다.



반면에 품이 너른 사람에게는 친절하고 겸손한 사람이 모입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여전히 세상을 살아갈만하다고 고백할 수 있겠죠. 그저 허황된 이상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현실 한가운데서도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끝까지 내 품을 다른 사람에게 허락합니다.



인문학자인 김경집은 많은 저술을 통해 차디찬 세상에서 사람 냄새나는 따뜻함을 소개했습니다. 직접 대면하지 못했지만 저자는 분명 후자의 사람일 것입니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이야기를 찾아 나섭니다. 여전히 우리들에게 사랑과 친절과 섬김과 덕이 있음을 굳건하게 믿는 것 같습니다.



저자가 만났던 사람들, 들었던 이야기, 자신의 삶 등이 얽혀서 아름다운 노래가 됩니다. 지쳐 포기하고 싶을 때, 아직은 아니라고, 여전히 '너'의 옆에 내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품 넓은 사회를 조금씩 만들어가자고 도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것이 부족하다 아우성입니다. 더 채우려고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남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목소리를 높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에 있습니다. 그것을 나누고 흘려보내는 것이 우리에게 훨씬 더 오랫동안 지속되는 기쁨을 준다 말합니다.



홀로 모든 것을 누리기보다 조금씩 덜어내어 모두가 조금씩을 누리는 것이 어떻겠냐고 되물어봅니다. 그때 표면적으로는 부족하고 모자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보이지 않았던 '너'를 보게 됩니다. '너'의 슬픔을 공감하며 그 슬픔을 덜어줍니다. 그리하여 함께 기쁨을 누립니다. 그것은 나만을 위해 채웠던 즐거움 이상의 행복입니다.



'관심'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마음에만 머문다면 나에게는 조금의 위안이 되겠지만 타인에게는 그 어떤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관심을 드러내어 '배려'로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미련해 보일 때가 있겠지만, 사랑의 흘러감만이 세상을 윤택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각박해 보입니다. 하지만 쥐고 있던 손을 펴보면, 차가웠던 세상이 조금은 따뜻해짐을 느낍니다. 생각보다 가까이 우리의 이웃이 있습니다. 작은 위로와 응원의 말로, 때로는 실제적인 도움의 손길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삶이 내게 잘 지내냐고 물을 때, 그래도 아직 살만한 세상이라고 대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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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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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가령 판사는 법을, 의사는 생명을, 목사는 복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기본적인 것이 지켜져야 마땅합니다. 공간과 시간에는 대부분 목적이 있습니다. 우선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한 원칙들이 무너진다면 존재의 이유 또한 사라집니다.



조금씩 원칙이 무너질 때, 매우 사소한 것이니 괜찮다고 말합니다. 이미 오랜 시간을 그러했다는 관행은 우리를 무뎌지게 만듭니다. 혹은 이미 형성된 사회 질서를 균열 시킬 때 발생하는 불이익을 감수하기 싫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양심은 현재의 힘겨운 상황 앞에 침묵을 강요받습니다.



하지만 작은 것에서 우리는 큰 의미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지나쳤던 작은 일상에 깊은 사랑이 묻어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행동으로 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작은 목소리가 모여서 우렁찬 외침이 됩니다. 손잡고 안아줘야 할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작은 몸부림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게 사건과 인물을 묘사하며 독자들의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는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 그녀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여백으로 인해 우리는 동일한 작품에서 수많은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나'의 이야기는 '너'의 이야기가 되고, '우리'의 이야기로 울려 퍼집니다.



『맡겨진 소녀』 이후 11년 만에 출간된 『이처럼 사소한 것들』. 오랜 기다림만큼이나 우리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작품을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이 소설에서도 작가는 긴 설명이나 구구절절 감정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숨겨놓은 등장인물들의 절제된 감정은 그들의 짧은 말이나 손짓을 통해 조금씩 우리에게 밀려들어옵니다.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있었던 은폐와 감금, 감제 노역의 실제 사건은 키건을 통해 보다 생생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가톨릭교회와 아일랜드 국가의 자금을 지원받으면서도 철저하게 자신들의 악행을 숨기며, 오히려 그 지역에서 폭넓은 권력을 행사했던 모자 보호소.



흩어지고 사라진 기록들만큼이나 그 안에서 고통당했을 3만 명의 여성들은 제대로 된 사과 한번 받지 못한 채 기억 저편에 머물 뿐입니다. 모자 보호소를 관리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고,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려고만 했습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목도하는 불의가 우리의 삶을 위협하지 않을 때, 우리는 아주 소소한 우리의 일상을 택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주 사소한 것을 위해 겪지 않아도 되는 고통과 불안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힘겨움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인공인 '빌 펄롱'을 통해 희망 또한 발견합니다. 끊임없는 자책과 자신의 양심의 소리와의 싸움 이후에 그는 평범한 일상을 뒤로합니다. 모두가 눈치 주고 자신의 일상이 위협받을 수 있음에도 그는 사랑을 택합니다. 그가 받은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작은 일상은 누군가의 희생과 섬김으로 가능합니다. 거창한 무엇은 아니었지만, 끊임없는 사랑이 우리를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손길과 몸짓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하여 우리 또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소소하지만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을 인간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오로지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 말합니다. 사랑과 정의가 무슨 힘이 있냐고 조롱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결국 우리를 이끌었던 힘은 사랑이었음을요.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힘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만이 우리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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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 일상의 단어들에 숨은 의미 그리고 위안과 격려
데이비드 화이트 지음, 이상원 옮김 / 로만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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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오리무중입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 뒤에 슬프고 힘든 일이 따라옵니다. 울다가도 미소 짓고, 한숨 쉬다가도 껄껄 웃게 되는 삶의 반복입니다. 실상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부정적인지 긍정적인지조차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모든 사건에는 양면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비교적 어릴 때는 삶이 단순했습니다. 어떤 사건에서 한 가지 면에 치중했습니다. 시험이 있으면 긴장했고, 좋은 결과가 나오면 기뻐했습니다. 원하는 것을 받게 되면 즐거웠습니다. 친구들과 오해가 생기면 슬펐습니다. 화해하면 다시 행복했습니다.



어느 정도 삶을 살아가다 보니 인생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여러 사건의 심층으로 들어가 그것을 해석해야 했습니다. 의도를 고민해야 했고, 의미를 묵상해야 했습니다. 삶의 과정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건들은 생각보다 입체적이었습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그것을 제대로 해석할 만한 영성이 없고, 그것을 명확하게 풀어낼 언어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신비로운 여정 가운데 인생의 모순을 적절하게 표현할 우리만의 언어가 필요합니다. 사건 이면을 날카롭게 파고 들어가서 이를 통해 우리를 보다 더 깊고 넓게 만들어갈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굳건한 믿음과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우리네 삶의 역설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데이비드 화이트(David Whyte). 이 책 『위로: 일상의 단어들에 숨은 의미 그리고 위안과 격려』는 일상에서 스쳐 지나가는 단어에 풍성한 생명력을 더합니다. 한 단어 안에 숨겨진 다양한 층위를 아름답게 풀어냅니다.



흔히 우리가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저자를 통해 재탄생합니다. 분노, 속박, 위기, 거부, 절망과 같은 단어는 오히려 우리가 추구하고 붙들어야 할 언어로 변모합니다. 새롭게 해석된 단어로 인해 우리 삶은 다른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게 됩니다.



가령 대부분은 '분노'가 순수한 형태의 공감을 향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가 분노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지키고 싶어 하는지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감정입니다. "내면의 무력함에 대한 외면의 폭력적 반응(21)"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망'이 인간 삶에 대한 숨은 자비로움이라고 우리가 어떻게 떠올려봤겠습니까? 저자는 실망을 통해 우리 내면을 재평가할 수 있게 되고, 외부의 가짜 평가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자신을 볼 수 있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실망은 변화를 낳게 되고, 보다 더 우리를 관대하게 해줍니다.



이렇듯 단어에 대한 숨은 의미를 찾아내고 보다 더 깊은 이면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삶을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 삶을 적실하게 풀어내는 언어가 많아져야 합니다. 우리의 좁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 말고 주위를 향해 우리를 활짝 펼쳐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이 되면,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에 짓눌립니다. 우리를 설명할 단어가 부족합니다. 우리 삶을 풍부하게 해석하기는 더욱 요원합니다. 우리의 존재와 삶을 풍성하게 풀어나갈 신선한 언어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어쩌면 위로와 격려는 주어진 상황을 새로운 언어로 색다르게 해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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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없는 진보 -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함 사유의 뜰 1
김상봉 지음 / 온뜰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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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이겨야만 끝나는 전쟁과 같습니다. '역사적 사실'이나 '사건의 진실 여부'보다 자신의 정치 성향에 따라 시비가 결정됩니다. 사용하는 언어는 같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매우 다릅니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는 시대입니다.



지금의 우리나라를 보면 숨이 막혀 옵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 어렵습니다. 기본적인 소통이 되지 않다 보니 대화의 가능성조차 없습니다. 서로는 상대방을 향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비상식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은 해괴망측한 사람을 지지하지?'



민주주의의 위기는 소통의 실패로 인하여 발생합니다. '나'와 '너'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품격 있는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도 하고, '너'의 통찰과 안목을 칭찬하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함께 문제를 해결해 가야 합니다.



이러한 '나'와 '너'의 주체적인 만남에 대한 오랜 관심을 갖고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기를 원했던 김상봉 교수. 그는 이 책 『영성 없는 진보』를 통해, 현재의 위기를 돌파할 우선적인 과제가 무엇인지를 물어봅니다. 근원적 문제에 대한 명확한 진단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저자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있지만, 시민의 정치적 관심은 전체적인 큰 그림을 보기보다는 당파적 이익에 대한 관심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근본적 원인을 서두에 밝힙니다. 그것은 바로 '영성의 부재'입니다.



어떻게 보면 생뚱맞습니다. '정치'와 '영성'이라니요. 하지만 저자의 주장을 조금만 들어보면 쉽게 납득이 됩니다. 여기서 '영성'은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입니다. '전체'는 '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무한히 큰 무엇'이라 정의한다면 종교와 상관없는 특정한 마음의 소질이나 자세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영성이 정치와 관계가 있을까요? 특히 진보 정치와 영성은 무슨 상관일까요? 저자는 한 마디로 이 나라의 진보적 정치활동이 '전체를 위한 자기희생'이었다고 요약합니다. 동학 농민 혁명과 3.1운동 등이 모두 그러한 가치 위에 전개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독재 권력의 엄혹한 시절을 겪으면서도 우리나라가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독재에 맞서 싸운 덕분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과감하게 던질 수 있었던 이유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 고통에 응답하여 자신을 희생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계 가운데 '나'라는 존재가 그저 '나'만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너'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하는 것은 세계가 나와 하나라는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우리의 작은 몸짓이 역사의 진보를 위한 유의미한 과정이 된다는 믿음 위에 우리는 '나'를 버리고 '우리'를 위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되는 행위를 '정치'라고 말합니다. 그동안 저자가 줄곧 주창했던 '서로 주체성'이라 명명합니다. 민주주의는 서로 주체성의 형성 원리이며, 타자의 주체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됩니다. '나'와 '너'가 '우리'가 되지 못하고, 서로 적대적으로 으르렁거리고만 있으니 심각한 위기라는 것입니다.



한국 정치의 위기는 이러한 전체를 위해 나를 버리는 영성의 전통이 끊어짐으로 인해 야기됩니다. 저자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나와 세계가 하나라는 믿음이나 자기를 희생하는 정신을 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단지 지금의 정치 행태는 자신의 권력을 쟁취하고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탐욕만이 가득한 모습입니다.



낡은 것을 새것으로 바꾼다는 구호는 큰 동력을 얻습니다. 절대적 악에 대한 비판은 흩어져 있는 힘을 재빨리 모아줍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낡은 것을 파괴한 뒤에 새로운 것을 형성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저자는 현재의 한국 민주주의는 보편적 가치의 상실로 인해 집단적 자기 형성이 불가능하다고 비판합니다.



저자는 다시금 우리의 민주주의가 회복되기 위해 전태일과 서준식의 예를 들어 그들이 간직했던 영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들은 거창한 무엇보다 한 사람을 위한 사랑과 애타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너'의 아픔과 고통을 고스란히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불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가장 큰 동력입니다.



분열된 시대, 적대적 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웃의 아픔을 간과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소외되고 연약한 사람들, 신음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영성입니다. 그 가운데 상처와 고통은 필연적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기꺼이 전체에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지금 너무도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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