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신앙 전체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본질 그 자체를 변화시켜 놓았다는 사실 위에 놓여 있다. 비극 중의 비극을 숭고한 승리로 전환시킴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하느님 나라로의 하나의 통과passage, 하나의 빠스까Pascha로 만드셨다. "죽음으로 죽음을 짓밟으심으로", 그분은 우리를 그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게 하셨다. - P18

온갖 선전과 자기 긍정과 끝없는 자랑으로 양육된 현대인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지만, 진정으로 완전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은 동시에 자연스럽게도 겸손한 것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완전은 바로 그 완전성 때문에 선전이나 외적 영광이나 어떤 종류의 자기 과시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겸손하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겸손은 바로 그분의 영광이요 모든 진정한 아름다움과 완전과 선의 원천이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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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에게 이상주의란 스스로 실체를 드러내는 덕인 동시에 호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주의는 우리 이웃 속에 보이는 고통을 우리 자신의 고통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로만 한다면 전혀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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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위한 교회‘는 무분별한 연대성과 막연한 동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소원대로 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것과 세계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소원은 그리스도의 파송과 사도직 속에 드러난다. 온 인류에 대한 교회의 개입(介入)은 선교 속에서 실현된다. 이러한 파송은 사회가 교회에게 허락하는 사회적 역할의 기대 지평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오고 있는 공의와 오고 있는 평화, 오고 있는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의 종말론적인 기대 지평 안에서 일어난다. 교회가 인류를 섬기는 목적은 이 세계가 지금의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거나 보존되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계가 변하여 자신에게 약속된 바로 그것이 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위한 교회‘란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교회‘와 세계의 갱신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 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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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언제나 우리가 불안을 극복하고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요구한다. 바로 불안과 염려가 넘치는 그때 말이다. 그 고난이 개인적인 것인지 아니면 그 사회 전체에 주어진 것인지는 상관없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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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아보니, 기회란 흐름 속에 앉아 있다 보면 언젠가 오는 것이었다. 내 인생에는 그런 기회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아니, 기회라기보다는 마치 순리처럼 내게 찾아온 일들이었다. 그러니 매일의 순간순간을 허투로 보내서는 안 되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내일이 있다는 것을 핑곗거리로 삼지 않았다. 내일이 있으니 오늘은 어떻게 되든 괜찮다는 마음가짐으로 사는 게 아니라,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내일이 와 있는 삶을 살고자 했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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