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패배하고.]
그런 일이 열 번.
[패배했으며.]
백번
[또 패배했다.]
천 번도 넘게 반복되었다.
[그런데 너는 또다시 우리에게 그 전장에 서라고 하는구나.]
마치 유중혁의 회귀가 그러했던 것처럼.
[너희는 언제까지 과거의 망령을 불러낼 것이냐? 대체 언제까지 죽은 신화의 껍데기를 뒤집고, 능욕할 것이냐?]
이 거신들은 유중혁과는 다른 의미에서 ‘회귀자‘였고.
마침내 그 ‘회귀‘에 지쳐버린 존재였다.
[아이야, 우리는 해방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그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다.] - P106

완벽한 설화.
누군가는 ‘단 하나의 설화‘를 그런 이름으로 부른다. 이제껏존재하지 않던 설화를 쌓아 만든, 지금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이야기.
"저는 그냥 동료들과 함께 끝을 보고 싶을 뿐입니다. 누구도잃지 않고, 모두 함께 말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이야기일 것이다. 지금껏 그런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사실이다. 희생 없는 신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은 항상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으로움직이지. ‘운명‘이 너를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해보지 않고는 모릅니다. 그리고 [운명]이라면 이미 극복한 적도 있습니다." - P137

「하지만 김독자는 유 중 혁이 아니 지.」유중혁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녀석이 회귀자이기 때문이었다.
나와는 다른 회귀자 몇 번이나 삶을 반복할 수 있는 존재,
하지만 내 삶은 이번 한 번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이 삶은 실수를 허락하지 않는다. 내가 실수하면누군가가 죽는다. 그래서 나는 실수하지 않았다. 흐름을 비틀고, 뒤틀린 개연성을 감수하면서도 여기까지 왔다. 잘 왔다고생각했다.
브리아레오스는 말했다.
-진짜 ‘운명‘은 피할 수도 없고, 그것을 피해 간다면 개연성은 반드시 왜곡된다. 그리고 뒤틀린 개연성은 반드시 누군가가 대신 해소해야만 하지 - P348

"하지만 이번에도 그렇게 해야만 ‘이야기의 결말‘을 볼 수있다면, 저는 차라리 결말을 보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는 죽여야 하는 것.
"목숨을 두고 선택지 따위가 존재한다면 애초에 그건 잘못된 이야기인 겁니다."
내 대답을 두고 ‘양산형 제작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건 ‘길이 없는 길‘이라고.
[제4의 벽‘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택이 아니다.
처음부터 내게 길은 하나뿐이었으니까.
[마왕, ‘구원의 마왕‘이 ‘제4의 벽‘을 바라봅니다.]
7나는 유중혁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문제에 관한 한 그 녀석과 내 대답은 똑같다.
"저는 그 ‘이야기‘를 부술 겁니다. 그러니까 유상아 씨는 죽지 않습니다. 제 어머니도요."
새카만 어둠으로 덮인 막다른 벽이 눈앞에 있었다.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을 것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벽.
나는 천천히 그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 P353

"니르바나."
니르바나는 알고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특성‘이 있지만 ‘완벽한 불사의 특성‘은 단둘뿐이라는 것을.
하나는 회귀자 유중혁, 그리고 다른 하나는…….
"네 배후성, ‘만다라의 수호자‘는 지금 어디 있지?"
최초의 환생자.
이제 이 이야기의 세 번째 주인공을 만나러 갈 때가 왔다. -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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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회차의 유중혁은 내가 알던 원작의 유중혁이었다.
어머니가 교도소에 갇혔을 때도 내가 왕따를 당했을 때도수능을 보고, 군대에 가고, 다시 회사에 입사했을 때도, 내가줄곧 지켜보던 그 유중이었다. 냉혹하고 계산적이며 포기하지 않는 유중혁.
어린 나는 그런 유중혁을 보며 살아왔다. 살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놈을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저 유중혁이 이곳에서 죽으면 내가 알던 멸살법은 영원히 사라진다.
유중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죽고 싶다."
너무나 분명하고, 명확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마찬가지로분명한 목소리가 내게만 들려왔다.
「살고 싶다.」 - P192

「네가 보여준 ‘세계‘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해.]
「그렇군.」
「너는 내가 죽어야만 그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겠지?」
「그러면 늦는다.」
「이곳에 있으면, 너는 그 세계를 구할 수 없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특성 개화의 계기를 맞이합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새로운 특성을 획득했습니다!]

「나는 그 세계의 ■ ■ 이 궁금해졌다.」

「만약, 한 사람의 존재가 정확히 절반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면 어떨까.」수만 명의 한수영이 말하고 있었다.
「하나의 존재가 두 개의 분신으로 나누어진다면, 둘 중 어느 쪽을
‘진짜‘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눈부신 광휘 속에서 둘로 분열한 유중혁이 서로 마주 보고있었다.

「하나의 존재가 둘이 되었다.」하지만, 그 존재의 배후성은 하나뿐이다.」

「나는 죽는다.」
「나는 회귀한다.」
「이 이야기는 이곳에서 끝난다.」「그럼에도 다시 한번, 그 모든 것은 처음부터 시작된다.」

[화신 ‘유중혁‘이 사망했습니다.]
[화신 ‘유중혁‘의 배후성이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성흔, ‘회귀 Lv.???‘가 발동합니다.][화신 ‘유중혁‘이 배후성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내 유년을 지켜준 인물이,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사라지고 있었다.
「다음 회차에서는.」
유중혁의 모습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해당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눈부신 빛이 재처럼 허공에 날리고, 창백한 현실의 광경이드러났다. 그 속에서 유중혁만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향해 걸어갔다. - P197

「내가 너였다면 좋았을 것을.」
「이 세계에는 김독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에게도.」시나리오를 끝까지 클리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니야.」

[제4의 벽]이 말했다.
「너도 이 걸원했잖아.」
「주인공이 되고 싶었잖아.」
「너는 유중혁이다.」

나는 유중혁이 아니야.

김독자는 유중혁이다.」

내가 되고 싶은 건 주인공이 아니라고.

「그럼 너는 무얼 위해 시나리오를 수행하는거지?」

무엇을 위해 시나리오를 수행하는가.
별을 향해 손을 뻗는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24그런 걸 말로 설명할 수 있다면, 뭐 하러 목숨 걸고 시나리오를 깨왔겠어. - P379

[역시 그대였군요. ‘최후의 벽의 파편‘이 선택한 존재가]

[선악을 가르는 벽이 깜짝 놀라 당신을 바라봅니다.] - P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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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른 소리 말어라. 그게 세상인 게야. 강원도에서 옥중출마자가 당선된 걸 봐라. 세상은 그리 쉽게 변하는 게 아니다" - P59

가난이란 굶주림과 헐벗음의 끝없는 수렁이었다. 굶주림은 속으로 사무치는슬픔이었고, 헐벗음은 겉으로 드러나는 창피스러움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버린 다음 식구들은 전부 점심을 굶어야 했다.

"서러움 중에 큰 서러움이 배는 서러움인데……" - P185

홍성기가 그러는 것은 아직 고등학생이라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사리 분별을 못하는 탓인지, 대학을 다니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평생 그러기가 쉬웠다. 친일파들이 계속 득세하고 있는 세상에서 그는 그런 태도로 얼마든지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덕으로 남들보다 먼저출세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홍성기나 장경식이 친일파 편을 드는 것은 그나마 자기네 아버지들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대다수 아이들의 태도였다. 언쟁이 벌어졌을 때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거 다 지나간 옛날얘기 아니냐. ‘이제 와서 따져서 뭐 하자는 거나 ‘우리도 그때 살았으면 벌수 있었겠냐. ‘어쩔 수 없어서 그랬을것 아니냐‘ 이런 반응들을 보였다. 그런데 그건 그들의 생각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말들을 아이들은 마치 제 생각인 것처럼 그대로 되뇌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친일과 세상에서 친일파들이 좋도록 꾸며낸 말에 완전히 물들어 있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어떤 아이는 ‘그런 걸 따지는 건 촌놈 짓이라고도 했다. 그 ‘촌놈 짓‘이란 ‘촌스러운 짓일 수도 있었고, ‘촌놈들이나 하는 짓일 수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친일파들을 공박하고 나선유일표나 이상재의 고향이 지방이었다. 어쨌거나 촌놈이란 좋지 않은 욕이었다. - P190

"너, 수학이나 과학 과목들은 어쩔 수 없다 치고, 음악이나 미술 과목 교과서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니? 온통 서양 음악에 서양 미술인 거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 음악이 없고 우리 미술이 없는 거냐? 우리 것은 무조건 무시해 버리고 서양 것이면 무엇이든 사족을 못 쓰고 가르쳐대는 이런 식의 교육이 앞으로 몇십년 계속돼 봐라, 우리 꼴이 뭐가 되겠는지, 모두 서양 것이면 무조건 높고 귀하게 보고, 우리 것이면 무조건 천하고 나쁘게 보는 얼간이들이 돼 있을 테니까. 조선시대에만 사대주의가 있었던 게 아니야. 해방 이후의 이런 작태는 신사대주의다."
그래서 그런지 오빠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퍽 고급한 문화생활로치부되고 있는 르네상스니 세시봉이니 하는 음악감상실에 드나드는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오빠의 말은 되새겨볼수록 맞고, 그럴수록 박영자는 안타깝기만 했다. 일개 대학생이 깨닫고 있는 그런 일을 어째서 교과서를 만드는 유식한 사람들이 모를까 하는 점이었다. 그리고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친구들에게 그런 말을 했을때였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 유치하고 촌스러운 것을 배워 무엇하느냐고 비웃었다. 우리의 것은 이미 친구들의 의식 속에 유치하고 촌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고, 그런 말을 하는 자신까지 유치하고 촌스럽게 취급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들을 설복시킬 도리가 없었다.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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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흔, ‘회귀 Lv.3‘가 발동합니다!]
잔혹하다. 정말 이렇게 끝나는 건가?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유중혁이 여기서 죽는다고?
한 줄의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화신 ‘유중혁‘이 자신의 배후성을 바라봅니다.]
"......유중혁?"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넝마가 된 유중혁이, 피칠갑을 한눈으로 자신의 배후성을 보고 있었다.
사라지던 녀석의 육체가 스파크 속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화신 ‘유중혁‘이 자신의 배후성에게 저항합니다.]
[화신 ‘유중혁의 모든 설화가 죽음에 저항합니다.]
그리고 내가 본 어떤 회차에서도 없던 일이 벌어졌다.
[화신 ‘유중혁‘이 회귀를 거부합니다.] - P216

[………… 말했을 텐데. 훔쳐 배운 스킬로는 이길 수 없다고.]어쩌면 수르야의 말대로일 것이다. 나는 언제나 타인의 기술로 싸워왔으니까.
"이건 훔쳐 배운 게 아닙니다. 읽은 거죠."
[읽어?]페르세포네의 말처럼 존재는 곧 이야기다.
오랜 세월 하루도 빠짐없이 읽은 문장의 기억내가 읽고 보아온 모든 것이 지금의 내가 되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됩니다][제4의 벽] 위로 ‘거대 설화‘의 문장들이 떠올랐다.
이것은 독자의 설화.」
나는 수르야를 향해 달렸다. 달려가는 궤적 속에 홀로 이야기를 읽던 무수한 시간이 함께 흘러갔다.
평범한 삶이었다.
어두컴컴한 밤에 틀어박혀 홀로 멸살법을 읽던 시간아르바이트가 끝난 후 버스 안에서, 군대 사지방‘에서 공강 시간 강의실에서 퇴근길 지하철에서......
동시에 독자의 선화」
나는 혼자 그 세계에서 살았다. - P281

여기서 실패하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이 대화에서 ‘은밀한 모략가‘를 설득해야만 한다.
[저들이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반쯤 벌렸던 입을 천천히 다물었다.
「빌어먹을, 김독자! 그만둬! 제발! 돌아오라고!」「난 이런 거 원하지 않아. 이런 식으로 살아남고 싶지 않다고.」「뭐든 할게요. 죽으라면 죽을게요. 가만있으라면 가만있을게요. 하지만 제발 그런 짓은 하지 마세요! 제발!」[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들려온 일행들 목소리.
그들은 전하지 못했으나 나는 들은 말들.
[저들이 원했던 결말이 저곳에서 너와 함께 죽는 것이었다면? 그래도 기어코 저들을 구하겠다는 말인가?]
나는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 그렇습니다."
[그것은 구원이 아니다. 저주다.】 - P404

하지만 단 하나.
내가 그 끝을 알지 못하는 회차가 하나 있었다.
모든 동료를 잃고, 마침내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눈앞에 둔사내.
"둘."
셀 수 없는 배신과 무수한 회귀 속에, 모든 감정이 닳아버린괴물이 나를 보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아픔과 함께
‘은밀한 모략가‘가 남긴 말이 귓전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 너의 방식으로 모든 것의 마지막에 도달해 세계를 구한다고 치자. 그러면 ‘다른 세계‘는 어쩔 셈이지?]
【네가 구원하지 못한 그 세계들은 모두 어떻게 되는것이냐?]
폐허가 된 광화문의 하늘에서, 죽어가는 별들이 빛났다.
이곳은 내가 바꾼 ‘3회차‘의 스타 스트림이 아니었다.
내가 바꾼 미래로 인해 원작의 세계선에서 버려진 세계.
유중혁의 칼날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대답하지 않을 모양이군. 죽어라."
멸살법 1,863회차
이 세계는 내가 아는 유중혁의 마지막 회차였다. - P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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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눈빛이군요. 자신의 동료를 믿지 않는 건가요?]
믿지 않느냐고?
물으나 마나 한 이야기다. 툭하면 죽는 저 개복치 녀석을,
믿을 수 있을 리가...……….
[믿습니다.]
그럼에도 왜일까. 잘도 그런 대답이 나왔다.
자연스러운 대답에 페르세포네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애초에 저 녀석을 믿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나는 화면 속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패배하고, 부러지고, 몇 번이고 절망해도그래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녀석.
저놈을 안 믿는다면, 애초에 누굴 믿을까.
설령 이번 회차가 실패한다고 해도………….
녀석은 언젠가 반드시 이 세계의 결말을 볼 것이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판돈을 올리죠 100만 코인 걸겠습니다.] - P302

[자넨 늘 그걸 보고 있군. 빈 메모장에 뭐라도 쓸 참인가?]
그 물음에 답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이내 힘없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냥 이걸 보면 마음이 안정되거든요."
멀리서 암흑 차원의 긴 어둠이 밀려나는 모습이 보였다. 텅비어 있던 창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마침내 돌아갈 시간이었다. - P330

"한때는 작은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제 작은 나무는 모조리 뿌리 뽑히고, 그 땅을 차지한 큰 나무 몇 그루만이 가지를 뻗어 하늘을 덮었구나."
"잎과 가지는 무성하지만 이젠 고작 몇 그루의 나무뿐인 것을 그대들 생각은 어떤가. 그것을 여전히 ‘숲‘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무림武林은 오래전에 죽었다.
- P357

나는 한명오를 잘 알았다. 내가 아는 최악의 인간 열 명을꼽으면 반드시 들어갈 인물이다. 그럼에도 왠지, 그 순간만큼은 한명오가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한없이 예쁜 아이였어. 인간은 아니지만, 내가 낳았다고는믿을 수 없을 만큼 정말 예뻤지."
저도 봤습니다."
아스모데우스가 화신체로 삼을 정도로, 예쁜 여자아이였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애틋한지, 한명의 입가에 몇 번이고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야기는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한명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한명오가 말했다.
"그러니 독자 씨도 해보게."
출산을요?"
"아니, 독자 씨가 고민하는 거 말일세."
꺼진 스마트폰 화면에 내 당황한 얼굴이 비쳤다.
"난 독자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는 모르겠네. 솔직히말해서 원래 독자 씨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잘 알고 있던 바입니다."
"그런데 최근 독자 씨가 좀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있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일이 잘 안 풀린다는 것, 알고 있네. 모든 게 원하는 대로는흘러가지 않겠지. 그래도 너무 연연하지 말고 마음이 이끄는대로 하게."
"뭐가 어떻게 되든 그걸 살아내는 사람은 독자 씨야 제대로하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걸세."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남자에게 공감하는 날이 올 줄이야.
불이 들어온 스마트폰 화면에 멸살법 파일이 보였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2차수정본).txt한명오와 같은 경험은 없다. 아이를 가져본 적도, 가질 예정도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한명오의 기분을 조금은 알것 같았다.
‘2차 수정본‘을 읽느냐 읽지 않느냐.
지난 몇 시간 동안 머릿속을 차지한 생각은 그뿐이었다.
소설을 읽음으로 인해 내가 영향받을까 무서웠고, 내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확인하기가 괴로웠으며, 내 모든 ‘미래‘가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건 우스운 일이었다.
한명오 식으로 말하자면..
아직 이 이야기는 제대로 태어나지도 않았다. -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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