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일부 요괴가 당신을 따릅니다.]
"무의미한 짓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저들은 어차피 이 설화방이 끝나면 다시 <황제>로 회수된내가 데려가겠습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저들에겐 이미 수천 번이나 일어난 일이다. 네 호의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것도 압니다."
"다시 똑같은 시나리오에서 똑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저들은 너를 잊을 것이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에게."
"슬픔이 없는 것입니까?" - P81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편하게날아서 또 누군가는 편한 길만을 골라서 가기도 하겠지.
하지만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은 달랐다.
(그들은 가장 어려운 방식으로 이곳까지 도착했다.)
그들은 날지도 못했고 편한 길을 골라 걷지도 못했다. 자기자신의 다리로 걷고 또 걸어야 했다.
불합리한 역경과 고난을 헤치며, 불행을 견뎌내고 비탄을삼켜내면서.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눈부신 ‘거대 설화‘의 가호를 받는 저들이야말로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이었다. - P130

「전부다 잊게될 거야」
「김 독자 더이상 김독자 아니게 된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99.1%]
「감독자는 무서웠다」
「지금껏 쌓아온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는게.」
‘괜찮아. 네가 모두 기억하고 있잖아.‘
‘네가 나를 모두 기록하고 있으니까, 난 절대로 잊지 않아‘
「그 도서관은 지금도 김독자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었다.」김독자의 숨소리부터, 김독자의 생김새, 김독자의 웃음과, 김독자의 말투.」「김독자가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 종종 흥얼거리던 노래.
김독자가 슬플 때와 기쁠 때 짓는 표정. 자신이 없을 때 괜히 중얼거리는 말버릇과 뒤따라오는 자조아이들을 생각할 때 고개를 기울이는 버릇.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을 감을 때 생기는 떨림. 유상아와 이야기할 때 짓는 미소 한수영을놀릴 때 휘어지는 눈썹과 입가의 짓궂은 주름. 이현성을 생각할 때의죄책감. 그리고「자신이 사랑하는 이야기를 떠올릴 때의 눈빛까지.」그렇기에 나는 말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읽으면 돼‘ - P162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그냥, 평범하게......."
실은 알고 있다.
이 세계에서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행복은 아무런 관심을끌지 못한다는 것을.
그렇기에 평범한 행복은 멸망한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사치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대가를 지불하고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그럼에도 누군가가 이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성좌, ‘고려제일검‘이………….]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서, 설마? 말도 안 되는…………!]
[심사위원, ‘필마온‘이 당신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서유기‘의 역사에서 한 번도 없던 일이 벌어졌다.)[심사위원, ‘미후왕‘이 당신의 이야기를 듣습니다.](은퇴한 손오공이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고쳐먹었다.)[심사위원, ‘투전승불‘이 당신의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어합니다.] - P204

「이 ‘유중혁‘이 1,863회차에서 사라졌던 그 ‘유중혁‘이라고?」「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지?」「하지만 그 유중혁은 [등장인물]에서 벗어났는데?」「1,863회차의 유중혁이 등장인물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3회차가 있었기 때문이야. 그런데 녀석이 처음부터 3회차의 유중혁이었다니 대체・・・・・・・」 - P288

고개를 들자 내가 맞서 싸워야 할 세계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아주 힘들고 험난한 싸움일 것이다.
어쩌면 이 우주의 누구도 우리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멀리서 포털의 끝이 보였다.
[당신의 선택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당신의 ■■ 「영원으로 기울어집니다.]
마침내 이 세계의 최종장을 준비해야 할 때가 왔다. - P400

[너는 김독자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다.】
"닥쳐라. 네놈 따윈 언제든 죽일 수―"
사람들의 기척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유중혁을 찾는 소리,
김독자와 한수영, 그리고 <김독자 컴퍼니 > 일행들의 목소리.
【인정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세계선은지금껏 내가 살아온 그 어떤 회차와도 다르다. 어쩌면이 세계선에서 너희는 정말 ‘벽‘ 너머를 볼 수 있을지도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네가 원하는 결말일 거라 기대하지는 마라. 그리고 그것이 네가 원하지 않는 결말이라 해도]
[이 세계가 실패한 회차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 P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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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가 사멸한 전장 위에, 남은 것은 유중혁뿐이었다.
모든 죽음을 거름 삼아 도달한 결.
그 오랜 싸움 끝에 유중혁이 원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이 빌어먹을 회귀의 끝을 보는 것‘
오직 그것을 위해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그 ‘너머‘로 가는 것을 막아선 벽이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이제 몇 개는 잊어버렸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것은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살아남을 거란 사실이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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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말 이 세계를 구하려고…………."
"세계 멸망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야. 우리는ㅡ"
"그의 희생은 숭고해요. 정말로 그 의미를 모르겠습니까?"
"아가리 안 닥쳐?"
"김독자가 왜 세계를 구해야 돼? 그 새끼가 왜 자기 목숨 희생해서 헛짓거릴 해야 되냐고! 이딴 세계에 그럴 가치가 있어?"
"구원의 마왕도 언젠가 당신과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 이 세계가 과연 지킬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두고 봐야알겠지.
"그는 지금 저기에 있습니다. 당신들과 함께 살아온 세계를지키기 위해서."
"이런 세계에서 당신들이 만났잖습니까."
"예언자인 제 말을 믿으세요. 힘을 비축해야 합니다. 두 재앙이 서로 싸워 공멸하는 순간을 노려야 해요. 그렇게 해야만우리 모두 생존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 미래를 아는 게 너뿐인 줄 알아?"
한수영의 주변에서 「예상표절」의 설화가 흐르고 있었다. 회귀자 유중혁 또한 [현자의 눈]을 통해 끊임없이 상황을 통찰하고 있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예언자만이 아니다. 이들 또한,
누구보다 미래에 대해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김독자를 구하는 길을 택했다.
검을 뽑은 정희원이 말했다.
"난 미래 같은 건 몰라. 하지만 하나는 알아. 당신은 세계를구하고 싶다고 했지? 나도 마찬가지야."
"그 사람이 내가 구하고 싶은 세계야." - P166

"넌 원래 동료고 뭐고 없는 놈이잖아. 그런데 이번 회차에들어와서 너무 많이 변했다 이거지."
"그래서 나는 너를 믿을 수 없어. 대의를 위해 동료들을 저버렸던 네가 왜 김독자는 구하려는 건데?"
"이 모든 시나리오가 끝났을 때, 김독자에게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그러니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때까지는 살려둘 거라 이거지?" - P221

-너는 미래에서 온 ‘김독자‘인가?
언젠가 유중혁은 누군가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 적 있었다.
1,863회차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아는 존재는 김독자뿐이라고 생각했고, 그랬기에 던질 수 있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멍청한 질문이었다.
1,863회차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아는 존재어떤 이야기에 관해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는 그걸 읽은 ‘독자‘가 아니라 직접 그 이야기를 살아간 ‘등장인물‘인 법이다.
[돌아가라. 너는 아무것도 구할 수 없다.】 - P226

어렸을 적, 나는 자주 유중혁이 되는 꿈을 꾸었다.
내게는 슈퍼맨이나 배트맨이 있어야 할 자리에 유중혁이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신나는 꿈을 꾸고 나면,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여전히 유중혁인 것처럼행동할 때가 있었다. 그것 때문에 맞은 적도 있고, 괴로운 일을 겪은 적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유중혁‘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 P323

"위대한 모략‘과 마주한 몇몇 공포의 기록자들은 그가 가장 오래된 꿈‘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중략)・・・・・・ 운이 좋은공포의 기록자들은 위대한 모략에게 가장 오래된 꿈‘의 정체를 물을수 있었다.」[그것은 이 우주의 시작이자, 거대한 수레바퀴의 주인. 나의 오래된 원수이자 나의 부모 모든 것의 마지막을 정하는자]」
몇몇 공포의 기록자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위대한 모략의 표정을 보았고,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그들은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내지 못했다.」 - P330

그 무수한 회차에서 실패한 이야기는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수만 년, 수십만 년, 어쩌면 수백만 년에 달하는 고통의 이야기.
세계선에서 버려져 ‘설화‘로 인정받지 못한 이야기.
세계의 무의식이 되어 먼 우주를 떠돌며 오래된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실패한 설화의 파편들.
끝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목소리. - P337

한쪽 하늘에서는 별들이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고, 다른 쪽 하늘에는 ‘그레이트 홀‘과 불길한 은하가 흐르고 있었다.
절반의 빛과 절반의 어둠.
곧 최후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그들 중 한쪽 편에 서서 세계의 결말을보아야만 할 것이다.
[당신의 두 번째 수식이 결정됐습니다.]
하늘의 건너편에서 작은 별빛이 반짝였다.
나는 그 별빛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천천히 지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계의 신격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마주 보며 내가 설 자리를 택했다.
[당신의 두 번째 수식언은 ‘빛과 어둠의 감시자‘입니다.] - P352

[‘이계의 신격‘들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안다. 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한다. 나는 너희가 아니니까.
그렇기에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아직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
[이계의 신격‘들이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아직 이야기할 것들이 남았잖아."
나는 이계의 신격들을 올려다보았다.
두족류와 촉수괴물로만 묘사되는 이들. 이 세계선에 필요하지 않기에, 이 세계선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형태를 부여받은 존재들.
나는 그들을 향해 이야기했다.
"내가 너희를 이야기하겠어." - P359

"그놈은 네가 아니다."
"그놈도 유중혁입니다."
"그놈과 너는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걷지않을 것이다."
"초월형 몇 단계에 올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설화를 쌓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너는 겨우 세 번 회귀한 애송이일뿐이지만, 그놈이 모르는 설화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그 말을 들으며 유중혁은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은밀한 모략가‘에게는 닿지 못했던 주먹이었다. 천천히 펼친 주먹에서 설화가 흘러나왔다.
그가 쌓아온 설화 ‘은밀한 모략가‘는 모르는 설화.
"초월의 길은 모두 다르다. 그놈을 따라잡으려 하지 말고너만이 갈 수 있는 길을 찾아라." - P371

"혼자서 갈 것이냐?"
"저는 항상 혼자였습니다."
"그 길은 이미 다른 네가 걸어간 길이다."
"야, 유중혁 어디 있어! 이제 출발해야 돼!"
눈부신 빛과 함께 <김독자 컴퍼니 > 일행들이 수련장 문을열고 들이닥쳤다.
신유승, 이길영, 이지혜, 한수영.......
대체 언제부터 준비하고 있었는지 <김독자 컴퍼니>의 모두가 모여 있었다.
"저들이 바로 너의 설화다. 중혁아."
‘은밀한 모략가‘에게는 없는 것.
"이번 회차의 너는 혼자 싸울 필요가 없다." - P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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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언제쯤 환생할수 있는 거죠?
[저곳은 아해의 전장이 아닙니다. 아해는 더 커다란 의미를수행할 존재로 환생할 것입니다.]
-저들이 내 의미예요.
영혼이 되어서도 유상아의 목소리는 결연했다.
-여기서 저들을 살리지 못하면 제 환생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해요.
[의미라......]
[그대는 내가 아끼던 아해의 몸에 깃들 것입니다.]
-다른 사람 몸에 들어간다고요? 환생하는 게 아니었나요?
[그 몸을 화신체 삼아 환생하는 것입니다.]
[그는 우주의 섭리로 되돌아간 것뿐입니다. 모든 것이 수레바퀴의 공허한 회전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아끼던 사람이잖아요.
[아해도 곧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환생자가 된다는 건 그런 것이니.]
-전 아직 환생자가 아니에요.
[그런 굴레에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대에게 소중하던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남을 저주하는 게 취미이신가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해여.]
[성들은 평생을 불면에 시달립니다. 시나리오 없이는 잠들지 못하고, 꿈에서조차 다른 이의 설화를 탐식합니다. 탐식을 통해 자신이 처한 시나리오를 지우고 싶어합니다. 그리고늘 불안해하지요. 자신들이 왜 불안한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그들에게 시나리오는 영원한 백일몽입니다. 죽음을 외면하기에 죽음을 모르고, 죽음을 모르기에 시나리오의 미망에서깨어나지 못하지요. 자신을 구원할 단 하나의 이야기가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환생자는 다릅니다.]
[환생자는 성좌처럼 영원을 살아가지만, 죽고 다시 태어납니다. 죽음을 알기에 깨어남을 알고, 깨어남을 알기에 자신이시나리오 속 일개 부속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환생이란 시나리오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들 체념한 얼굴이에요.
[누가 이기든 바뀌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시나리오는 바꿀 수 있어요. 우린 늘 그래왔어요.
[하지만 그것이 ‘시나리오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포기하는 건가요? 뭘 해도 시나리오는 시나리오니까? 그건 도망치는 거예요. 싸워보지도 않고서 패배를 인정하는 거라고요.
[아해여, 그건 환생자의 삶을 모욕하는 말입니다. 환생자들]은 무수한 삶을 시나리오와 투쟁하며
-단 한 번의 삶도 포기 않고,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싸워보셨나요?
-1,800번이 넘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싸운 사람도 있어요.
유상아가 화면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코트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 모든 삶을 함께 지켜본 사람도 있고요.
그 옆에 선 흰 코트의 사내가 일행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옮겨간 사내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쓰러진 이현성을 향했다.
[숫자를 헤아리기에 이 몸은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헤아릴 수 있는 숫자도 있군요.]
석존이 이현성을 보며 말했다.
[이 섬에 늘어날 환생자가 하나] - P10

[후회하게 될 것이다.]
연기처럼 흩어지는 대도깨비의 신형.
모든 일행이 확실하게 살아남을 방법 하나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대의 판단은 매번 나를 놀라게 하는군.]
이번만큼은 수르야도 감탄했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김독자."
"왜. 또, 뭐."
"오래 생각하고 한 판단 맞지? 같잖은 동정심이라든가, 순간적인 충동은 아니지?."
"그럼 됐어."
"화내도 돼. 난 방금 엄청난 기회를 걷어찬 거니까.".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뭐, 그래. 이유가 있겠지. 솔직히 나도 네가 거절할 거라고생각했어."
"뭐? 왜?"
한숨을 푹푹 쉬며 대답하는 한수영의 말을 받은 것은 유중혁이었다.
"그게 네놈이 살아가는 방식이니까."
평소와 같은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는 유중혁을 보며, 두 사람이 내게 무엇을 양보했는지 깨달았다.
맞다.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 P71

「가장 뜨거운 지옥의 중심에서,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인 용이깨어날 것이다.」「그는 용 중의 용. 혼돈의 중심에서 태어난 모든 용의 수장이자 세계에서 가장 늙은 증오.」
「그 용은 하늘을 한 번, 땅을 한 번 보고 꼬리를 내리칠 것이다. 한번의 꼬리짓에 별들이 추락하고 세계의 한 방위가 사라지리라.」 - P74

"묵시룡‘은 본래 ‘특정한 용‘을 지칭하는 게 아냐. ‘가장 오래된 선‘이나 ‘가장 오래된 악‘이 특정 성좌를 칭하는 게 아닌것처럼. ‘묵시록의 최후룡‘은 거대 설화 그 자체를 말한다고."
"잠깐, 그러면......"
"아직 이 시점에서 ‘누가 묵시룡이 되느냐‘는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지."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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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고아원에서 국민학교에 다녔는데, 4학년 때 모래로 팔이고 장딴지고 피가 나도록 문질러댔어. 그래도 피부는 아이들과 같아지지 않고검은색 그대로였어. 내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죽기보다 싫은 게 뭔지알아? 튀기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놀리고 하는 거야. 난 미국에가서 감자껍질이나 벗기는 신세로 천대받아도 좋고, 버림받아도 괜찮아. 어쨌든 미국에만 가면 돼. 그럼 많은 흑인들 틈에 섞여버리니까 여기서처럼 구경거리 되는 일은 없어지거든.」 - P33

방탄조끼에 철모를 쓰고, 총까지 휴대하고 운전을 해야 하는 자신들을 그들은 ‘군번 없는 군인‘이라고 불렀다. - P42

「왜 안 그렇겠어. 그렇지만 결국 그 일을 해냈잖아?
정남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쳤다.
「그럼 됐어. 큰 고비를 넘긴 거야. 왜 우리나라 속담에 이런 게 있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너는 이제 해방됐으니 얼마나 좋아. 난 앞으로 당해야 하는데. 네가 부럽다. 가, 밥 먹으러.」「아니야, 아니야, 나 밥 못 먹어. 지금도 구역질 나」정남희는 입을 막고 돌아서며 웩웩 구역질을 해댔다.
「이것도 이겨내야 해. 밥을 굶고 어떻게 힘든 일을 하겠어. 여기까지와서 그까짓 것 못 이겨내면 안 되잖아..」
김광자는 정남희의 등을 다근다근 두들기며 좀 싸늘하다 싶게 말했다.
「너는 밥 먹을 자신 있어?
정남희는 눈물 어린 눈으로 김광자를 쳐다보았다.
「우리한테 자신이 있고 없고가 어딨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낭떠러지에 서 있는데.」
「그래・・・・・・ 그렇지, 낭떠러지지. 누구나 그렇지. 알았어, 가」 - P111

「응, 닥터 한스가 하는 말이, 일을 쉽고 즐겁게 하려면 신앙을 가져보라는 거야. 간호원을 왜 ‘백의의 천사‘라고 하느냐 하면, 간호원은 환자들을 대하는 데 마음속에다 천사와 같은 사랑을 간직해야 한다는 거야.
그냥 의무와 책임으로만 일을 하면 일이 힘들고 괴롭지만, 천사 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하면 쉽고 즐거워진다는 거지. 예수를 믿으며 그 사랑을배우라는 것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야. 그래서 그런지 닥터 한스는 환자들을 대하면서 얼굴을 찡그리는 일이 한 번도 없이언제나 웃고 다정해. 꼭 친부모 대하는 것같이 - P113

근로감독관은 궁기 흐르는 전태일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며 반말을 던졌다. 거만하고 불친절한 공무원의 전형적인 말투를 쓰는 그의 얼굴에는 귀찮다는 기색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 P149

전태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근로감독관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생지옥이나 마찬가지인 공장 얘기를 듣고도 놀라거나 동정하는 빛은 전혀 없이 무작정 간단하게 말하라고 몰아댔다. 일거리가 너무 많아 그런 것일까? 몸에 밴 공무원 행투 때문일까? 근로기준법은 분명히 나라가 만들었고, 근로감독관은 그 법이 잘 지켜지도록 감독하는 사람 아닌가? 그러면 틀림없이 우리 공원들 편이어야 하는데.... - P152

「야, 느네 학교는 데모 안 해?」유일민의 옆에 앉은 대학생이 낮은 소리로 친구에게 물었다.
「더 하면 뭘 해. 공화당에서 3선개헌을 하기로 결의해 버렸는데.」
「하긴 그래. 야당이야 자릿수 모자라 있으나마나니까. 근데 박 그사람 어쩔려고 그러지? 이승만이 당하는 걸 뻔히 봤으면서도」「권력의 맛이 좋은 걸 어쩌겠어. 자긴 안 당할 자신이 있다 그런 배짱인거지. 그런 착각과 오만이 인간의 한계고 어리석음 아니겠어.」
「글쎄 말야, 우리들도 다 아는 걸 어째서 그 사람들은 모르지? 권력을잡으면 다 그렇게 바보가 되나?」
「그게 권력의 속성이고 마성이래잖아. 왜 조지 워싱턴을 위대하다고하겠어. 국민 여론이 나라를 위해 당신은 대통령을 세 번 해도 된다고했을 때 워싱턴은 단호하게 말했어. 나는 대통령을 세 번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차후에 나보다 못한 자가 나를 빙자하여 세 번 하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자 한다. 그래서 미국의 민주주의는 이룩된 거야.」
「참 부러워. 우리도 그런 인물들이 있어야 하는데. 어쨌거나 박은 제무덤 파고 있어. 」
「당연하지. 경제 건설 팔아대며,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고 있지만,
그거 얼마나 웃기는 일이야. 이승만도 건국대통령 내세우며 자기 아니면안 된다고 했거든. 하여튼 정치가들이란 염치없이 뻔뻔스럽고, 양심 없이 거짓말해 대는 못된 인간들의 표본이야. 어쨌든 정치란 아더메치야」
‘아더메치‘란 귀를 덮는 장발과 함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말로,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다‘는 줄임말이었다. - P167

고정된 레일을 가진 전차가 팽창하는 도시의 교통에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모르지만 시민들 의견은 아예 들어보지도않고 하루아침에 없애버린 것이 서울의 전차였다. 그건 군 출신 시장이보여준 대표적인 군대식 행정이었다. 그런데 그런 저돌성이 ‘과감한 추진력‘으로 미화되면서 군대식의 효과가 사회 전반을 물들이고 휘어잡아가고 있었다.
유일표는 그런 현상을 보면서 언뜻언뜻 몸서리치고는 했다. ‘군대는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이 억지는 그래도 유식한 말로 포장이나 되어있었다. ‘으로 밤송이 까라면 깠지………… 3년 동안 넌덜머리 나게 들었던 이상스럽기 짝이 없는 말이 바로 한국 군대의 동력이었다. 그런 어거지와 우격다짐의 군대식이 언제부턴가 사회를 지배하는 힘이 되어 있는 것을 느끼며 두렵고도 암담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 P200

작은 고추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세상사람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부르는별명이 아니라 애칭이었다.
「누구 덕에 이만큼 잘살게 됐는데.」「그럼. 그저 조선사람은 작은 고추야. 그만한 인물 없어.」사람들의 이런 맞장구를 흔히 들을 수 있었다. 엄연히 피땀 흘리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모든 공이 박 대통령 차지가 되고 있는 게 그는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그건 3선개헌을 해놓고 불안 상태에 있는 공화당이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말을 사람들이 어리숙하게 되뇌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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