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게 비유하자면 미국은 할리우드 액션처럼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면서 비교적 명쾌하고 극적인 이야기가 많은 반면에 영국은 매일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씨에 끊임없이 홀짝이게 되는 홍차처럼 좀 더 섬뜩하고 현실적인 묘사로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간의 내면을 파고든다. -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81451 - P20
하지만 그 모든 단어와 문장을 다 옮긴다고 해도 번역가 김남주의 표현처럼 "단어와 단어 사이의 그 매력적인 모호함"7은 도저히 옮길 수 없을 것 같았다. -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81451 - P23
그러니 번역을 꿈꾸는 이들이 이 말을 고려해준다면 좋겠다. 이 일은 끊임없이 텍스트와 대화를 나누며 읽고 또 읽는 생활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 또한 옮길 수 없는 텍스트를 옮기는 일에 비애와 슬픔을 느끼겠지만 그마저도 즐길 경지에 오르면 굉장히 강력한 무기가 생기는 셈이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다. 이 모든 괴로움과 슬픔을 음미할 준비가 됐다면, 번역의 세계로 들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81451 - P25
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흰개미가 통풍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도 가우디의 성가족 교회와 비슷한 형태로 흰개미탑을 짓는 것을 일컬어 ‘이해 없는 능력competence without comprehension’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에 빗대어 ‘이해 없는 번역’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81451 - P26
하지만 진짜 골칫거리는 정신적으로 힘든 책이다. 첫 번째는 ‘너무’ 잘 쓴 책. 영어 문법의 잠재력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책은 한국어로 번역하기 힘들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고지식하게 번역하면, 꼬인다. 노엄 촘스키의 『촘스키, 희망을 묻다 전망에 답하다』가 그런 책이었다. -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81451 - P28
두 번째는 사유가 깊은 책이다. 대니얼 데닛의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가 대표적인 사례다. -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81451 - P28
대니얼 데닛은 스스로 이렇게 말할 정도로 번역하기 힘든 저자다. "우리가 해야 하는 생각 중에는 형식에 구애받음 없이 은유를 구사하고 상상력을 자극하고 (모든 수법을 동원하여) 닫힌 마음의 벽을 공략해야만 가능한 것이 있다. 행여나 쉽게 번역되지 않는 문장이 있다면, 번역의 대가가 등장하거나 전 세계 과학자들의 영어 실력이 나아지기를 바랄 수밖에 없으리라."9 -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81451 - P29
유능한 저자는 독자가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장치를 문장에-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심어두는데, 이런 장치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저자의 글은 읽거나 번역하기 힘들다. 중역重譯 이 힘든 데는 이런 까닭도 있다. 이반 일리치의 『그림자 노동』은 이런 점에서 번역하기 까다로웠다. 중역은 아니지만(원전은 영어판이다) 일리치의 모국어는 영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문장에서 영어 원어민의 무의식적 장치를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81451 - P30
하지만 초짜 사공이 영어 땅으로 향하면, 독자를 엉뚱한 나루터에 내려주기 십상이다. 물길도 모르고 저자가 어디서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그냥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배를 젓는다. 이를 일컬어 ‘영혼 없는 직역’이라 한다. 저자가 어떤 의도로 문장을 썼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영어 단어와 한국어 단어를 짝짓는 것이다. 이에 반해 게으른 사공이 한국어 땅으로 향하면, 배를 나루터 아닌 곳에 대충 접안하기 쉽다. 이를 일컬어 ‘얼렁뚱땅 의역’이라 한다. 문장 구조를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서 대충 감으로 끼워 맞추는 것이다. 언뜻 보면 그럴듯하지만 원문과 대조하면 터무니없는 오역도 곧잘 발견된다. 강호에서 벌어지는 번역 논쟁은 영혼 없는 직역과 얼렁뚱땅 의역의 사이비 논쟁인 경우가 많다. 부디 경험 많고 부지런한 사공을 만나시길. -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81451 - P38
2017년 발표된 번역기의 성능은 100점 만점에서 평균 55점 정도라고 한다. 구글과 네이버는 앞으로 3년 안에 70~75점까지 올리는 것이 목표라고 발표했다. 인공지능의 발전 추세를 보면 일정 단계를 지난 뒤 비약적으로 성능이 좋아지는 일이 많으니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다. 그렇게 되면 외국 문서 중에서 쉽고 자주 쓰이는 실용적인 내용의 번역은 아무래도 기계에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지극히 난해하고 철학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한 텍스트, 그야말로 인간만이 이해해 옮길 수 있는 텍스트만이 남을 것이다 -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81451 - P48
기계가 따라올 수 없는 번역이란 아마도(?) 기계는 가질 수 없는 풍요로운 정서와 상상력을 갖춘 번역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더욱더 인간다워지기로 했다. 그러자면 기계적으로 옮기던 습관에서 벗어나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81451 - P49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라는 속담은 번역에 꼭 들어맞는다. 번역가는 문장 하나하나마다, 단어 하나하나마다 판단을 내려야 한다. 판단은 언제나 틀릴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판단을 회피하거나 텍스트를 해석하지 않고 원문 뒤에 숨으면 상당수의 오역을 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문장이 오역이 아닐 수 있는 이유는 번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문장은 실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문장일 가능성이 크다. -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81451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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