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동료들이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중세 문헌을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문헌은 지금도 희귀서적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명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영문과 교수 윌리엄 스토너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의 동료들이 미주리 대학 도서관에 기증."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6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젊은 나이였지만(아버지는 스물다섯 살, 어머니는 겨우 스무 살),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부모는 항상 늙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서른 살 때 이미 쉰 살처럼 보였다. 노동으로 인해 몸이 구부정해진 아버지는 아무 희망 없는 눈으로 식구들을 근근이 먹여 살리는 척박한 땅을 지그시 바라보곤 했다. 어머니는 삶을 인내했다. 마치 생애 전체가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긴 한순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눈은 색이 연하고 흐릿했으며, 뒤로 똑바로 빗어 넘겨 틀어 올린 가느다란 반백의 머리카락 때문에 눈 주위의 잔주름이 한층 도드라져 보였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7

스토너는 9개월 동안 숙식을 해결하는 조건으로 가축들과 돼지에게 먹이와 물을 주고, 달걀을 가져오고, 소젖을 짜고, 장작을 팼다. 그밖에 밭도 갈고, 그루터기도 파냈으며(겨울에는 3인치 두께로 얼어붙은 땅을 파야 했다), 푸트 부인이 버터를 만들 때 우유를 젓는 일도 했다. 목제 교유기가 우유 속에서 첨벙첨벙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안 푸트 부인은 엄격한 표정으로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를 지켜보았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4

그에게 배정된 2층 방은 예전에 창고로 쓰던 곳이었다. 가구라고는 힘을 잃고 늘어진 틀 위에 얄팍한 깃털 매트리스가 놓인 검은색 철제 침대, 등유 램프를 놓아둔 망가진 탁자 하나, 수평이 잘 맞지 않는 딱딱한 의자 하나, 책상 역할을 하는 커다란 상자 하나가 고작이었다. 겨울에는 바닥을 통해 조금씩 올라오는 아래층의 온기가 전부라서 그는 해진 퀼트 이불과 담요로 몸을 감싸고 자칫 책장이 찢어지지 않게 곱은 손을 후후 불어가며 책장을 넘겼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5

2학년이 된 그는 캠퍼스에서 친숙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계절과 상관없이 그의 옷차림은 언제나 똑같은 검은색 브로드클로스 양복, 하얀 셔츠, 스트링타이였다. 재킷 소매가 짧아서 손목이 불쑥 튀어나와 있고, 바지 자락도 어색하게 겉돌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제복을 빌려다 입은 것 같은 몰골이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5

2학년 1학기 때 그는 기초교양 강의를 두 개 들었는데, 하나는 농과대학의 토양화학 강의였고 다른 하나는 모든 학생의 형식적인 필수과목인 영문학 개론 강의였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6

하지만 필수과목인 영문학 개론은 그에게 생전 처음 느끼는 고민과 고뇌를 안겨주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6

강의를 맡은 아처 슬론 교수는 50대 초반의 중년남자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얕보고 경멸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격이 너무 커서 그 간격을 좁히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싫어했으며, 그는 학생들과 거리를 두고 비꼬면서 즐거워하는 듯한 태도로 응수했다. 키는 평균이었고, 길쭉한 얼굴에는 주름이 깊이 패어 있었으며, 수염은 항상 깨끗이 깎았다. 그리고 갑갑하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반백의 곱슬머리를 빗어 넘기는 습관이 있었다. 목소리는 단조롭고 건조했는데, 그는 표정도 억양도 없이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말하곤 했다. 하지만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의 움직임에는 우아함과 확신이 배어 있어서, 그의 말에 목소리 대신 어떤 형태를 부여해 주는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17

그대 내게서 계절을 보리.
추위에 떠는 나뭇가지에
노란 이파리들이 몇 잎 또는 하나도 없는 계절
얼마 전 예쁜 새들이 노래했으나 살풍경한 폐허가 된 성가대석을
내게서 그대 그날의 황혼을 보리.
석양이 서쪽에서 희미해졌을 때처럼
머지않아 암흑의 밤이 가져갈 황혼
모든 것을 안식에 봉인하는 죽음의 두 번째 자아
그 암흑의 밤이 닥쳐올 황혼을.
내게서 그대 그렇게 타는 불꽃의 빛을 보리.
양분이 되었던 것과 함께 소진되어
반드시 목숨을 다해야 할 죽음의 침상처럼
젊음이 타고 남은 재 위에 놓인 불꽃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0

때로는 안뜰 한복판에 서서 밤이 내려앉은 서늘한 잔디밭에서 불쑥 솟아오른 제시 홀 앞의 거대한 다섯 기둥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는 이 기둥들이 원래 대학의 주요 건물이었던 곳의 잔해임을 알고 있었다. 그 건물은 오래전 화재로 무너졌다. 달빛 속에서 알몸을 드러낸 채 회색을 띤 은빛으로 빛나는 그 순수한 기둥들은 신전이 신을 상징하듯, 스토너 자신이 받아들인 삶의 방식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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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지 않아도 초생달 같은 눈의 서금돌이 앞장서서 놀고 있을 것이다. 오십 고개를 바라보는 주름살을 잊고 이팔청춘으로 돌아간 듯이, 몸은 늙었지만 가락에 겨워 굽이굽이 넘어가는 그 구성진 목청만은 늙지 않았으니까. 웃기고 울리는 천성의 광대기는 여전히 구경꾼들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리. 아직도 구슬픈 가락에 반하여 추파 던지는 과부가 있는지도 모른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29

팔월 한가위는 투명하고 삽삽한 한산 세모시 같은 비애는 아닐는지. 태곳적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달에 연유된 축제가 과연 풍요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는지. 서늘한 달이 산마루에 걸리면 자잔한 나뭇가지들이 얼기설기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소복 단장한 청상의 과부는 밤길을 홀로 가는데― 팔월 한가위는 한산 세모시 같은 처량한 삶의 막바지, 체념을 묵시(默示)하는 축제나 아닐는지. 우주 만물 그 중에서도 가난한 영혼들에게는.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31

가을의 대지에는 열매를 맺어놓고 쓰러진 잔해가 굴러 있다. 여기저기 얼마든지 굴러 있다. 쓸쓸하고 안쓰럽고 엄숙한 잔해 위를 검시(檢屍)하듯 맴돌던 찬 바람은 어느 서슬엔가 사람들 마음에 부딪쳐와서 서러운 추억의 현(絃)을 건드려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하고많은 이별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흉년에 초근목피를 감당 못하고 죽어간 늙은 부모를, 돌림병에 약 한 첩을 써보지 못하고 죽인 자식을 거적에 말아서 묻은 동산을, 민란 때 관가에 끌려가서 원통하게 맞아 죽은 남편을, 지금은 흙 속에서 잠이 들어버린 그 숱한 이웃들을, 바람은 서러운 추억의 현을 가만가만 흔들어준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31

그 채마밭을 질러서 머슴 구천이가 지나가는 것이었다. 냉담한 귀녀의 눈이 구천이의 옆모습을 따라가다가 눈길을 거두며 실뱀이 꼬리를 치는 것 같은 미미한 웃음을 머금는다. 귀녀는 신발을 신고 치맛자락을 걷으며 안채를 향해 돌아나간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34

달은 산마루에서 떨어져나왔다. 아직은 붉지만 머지않아 창백해질 것이다. 희번덕이는 섬진강 저켠은 전라도 땅, 이켠은 경상도 땅, 너그럽게 그어진 능선은 확실한 윤곽을 드러낸다.

난간에 걸터앉아 달 뜨는 광경을 지켜보는 구천이의 눈이 번득하고 빛을 낸다. 달빛이었는지 눈물이었는지 아니면 참담한 소망이었는지 모른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36

"봉순아 흐흐흐…… 흐, 나 여기이 있다아!"

볏섬을 져 나르는 구천의 다리 뒤에 숨어서 살금살금 걸어오던 자그마한 계집아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앙증스럽고 건강해 보이는 아이의 나이는 다섯 살. 장차는 어찌 될지, 현재로서는 최치수의 하나뿐인 혈육이었다. 서희는 어머니인 별당아씨를 닮았다고들 했으며 할머니 모습도 있다 했다. 안존하지 못한 것은 나이 탓이라 하고 기상이 강한 것은 할머니 편의 기질이라 했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38

봉순이 울상을 지었으나 날갯짓을 배우기 시작한 새 새끼처럼 서희는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며 좀체 봉순이에게 잡히려 하지 않는다. 유록빛에 꽃 자주의 선을 두른 조그마한 꽃신은 퍽으나 날렵하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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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죽음의 공포, 암이라는 병에 대한 불안은 가을, 회복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언덕길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서 아이들이 뛰어가고 시장바구니를 든 주부가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세상은, 모든 생명, 나뭇잎을 흔들어주는 바람까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들, 진실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았고 그것들을 위해 좀 더 일을 했으면 싶었다. 고뇌스러운 희망이었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11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의 원고를 썼던 것이다. 백 매를 쓰고 나서 악착스런 내 자신에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어찌하여 빙벽(氷壁)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 가중되는 망상(妄想)의 무게 때문에 내 등은 이토록 휘어들어야 하는가. 나는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인가. 내게서 삶과 문학은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징그러운 쌍두아(雙頭兒)였더란 말인가. 달리 할 일도 있었으련만,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으련만…… 전신에 엄습해오는 통증과 급격한 시력의 감퇴와 밤낮으로 물고 늘어지는 치통과, 내 작업은 붕괴되어가는 체력과의 맹렬한 투쟁이었다. 정녕 이 육신적 고통에서 도망칠 수는 없을까? 대매출의 상품처럼 이름 석 자를 걸어놓은 창작 행위, 이로 인하여 무자비하게 나를 묶어버린 그 숱한 정신적 속박의 사슬을 물어 끊을 수는 없을까? 자의(自意)로는, 그렇다, 도망칠 수는 없다. 사슬을 물어 끊을 수도 없다. 용기가 없는 때문인지 모른다. 운명에의 저항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시각까지 내 스스로는 포기하지 않으리. 그것이 죽음보다 더한 가시덤불의 길일지라도.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12

승리 없는 작업이었다. 끊임없이 희망을 도려내어 버리고 버리곤 하던 아픔의 연속이 내 삶이었는지 모른다. 배수(背水)의 진을 치듯이 절망을 짊어짐으로써만이 나는 차근히 발을 내밀 수가 있었다. 아무리 좁은 면이라도 희망의 여백(餘白)은 두렵다. 타협이라는 속삭임이, 꿈을 먹는 것 같은 무중력이, 내가 나를 기만하는 교활한 술수가, 기적을 바라는 가엾은 소망이…… 희망은 이같이 흉하게 약화되어 가는 나를, 비천하게 겁을 먹는 나를 문득문득 깨닫게 한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13

나는 표면상으로 소설을 썼다. 이 책은 소설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한 인간이 하고많은 분노에 몸을 태우다가 스러지는 순간순간의 잔해(殘骸)다. 잿더미다. 독자는 이 소설에서 울부짖음도 통곡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일 따름, 허구일 뿐이라는 얘기다. 진실은 참으로 멀고 먼 곳에 있었으며 언어는 덧없는 허상이었을 뿐이라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진실은 내 심장 속 깊은 곳에 유폐되어 영원히 침묵한다는 얘기도 되겠다. 칠팔 년 전에 나는 어느 책에다 언어가 지닌 숙명적인 마성(魔性)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진실이 머문 강물 저켠을 향해 한 치도 헤어나갈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 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날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 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전율(戰慄) 없이 그 말을 되풀이할 수가 없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14

이상이 『토지』 제1부를 쓰던 삼 년 동안의 내 심경이며 그것을 적어본 것이다. 앞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이다. 이 밤에 나는 예감을 응시하며 빗소리를 듣는다.

1973년 6월 3일 밤

作者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15

사정에 의해 1989년 가을부터 나는 인지를 발부하지 않았고 『토지』의 출판은 중단상태로 들어갔다. 문학을 포기할 생각도 해보았고 서점에 『토지』가 꽂혀 있는 것을 보면 심한 혐오감에 빠지기도 했다.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절망감은 꽤 오랫동안 나를 침잠하게 했으며 내 문학이 얼마나 가벼운 존재인가를 깨닫게도 했다. 그리고 독자들도 책을 읽을 권리가 있다 하며 출판중단을 비난하는 내 주변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고 시간을 응시하며 겨울나무가 바람에 몸을 흔들며 고엽을 떨어뜨리듯 나 역시 새봄을 맞기 위하여 분노의 쓰레기를 떨꾸려고 호미를 들고 텃밭에 나가곤 했다.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잔하다. 바람에 드러눕는 풀잎이며 눈 실린 나뭇가지에 홀로 앉아 우짖는 작은 새, 억조창생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애잔함이 충만된 이 엄청난 공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일사불란한 법칙 앞에서 나는 비로소 털고 일어섰다. 찰나 같은 내 시간의 소중함을 느꼈던 것이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16

서문 쓰는 것이 두렵다. 할 말을 줄이고 또 줄여야 하는 인내심에는 억압적 속성이 있으며, 부정적 성향에다 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늘 현실도피를 꿈꾸고 있기 때문인데 내게는 어떤 것도 합리화할 용기가 없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18

그해, 그러니까 『토지』를 끝낸 1994년 8월 15일, 그때도 나는 해방감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멍청히 앉아 있었다. 방향조차 잡을 수 없었고 막막했던 길 위에서, 폭풍이 몰고 간 세월이 끔찍하여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토지』의 운명도 기구했다. 25년 동안 여러 지면(紙面)을 전전했고 4부까지 출간되었으나 3년 동안 출판정지, 절필한 일이 있었다. 완간이 된 뒤에도 출판계약이 끝나면서 3년간 책을 내지 않고 절판상태를 애써 외면했다. 작품이 나간 이상 독자에게는 읽을 권리가 있고 이미 작가 손에서 떠난 거라며, 꾸지람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구세대에 속하고 편협한 나로서는 문학작품이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생산되고 소비되는 오늘의 추세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상인(商人)과 작가의 차이는 무엇이며 기술자와 작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차이가 없다면 결국 문학은 죽어갈 수밖에 없다. 의미를 상실한 문학, 맹목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삶,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책이 다시 나가게 되니 마음은 석연찮다. 자기연민이랄까, 자조적(自嘲的)이며 투항한 패잔병 같은 비애를 느낀다. 나는 왜 작가가 되었을까.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19

지리산이 한과 눈물과 핏빛 수난의 역사적 현장이라면 악양은 풍요를 약속한 이상향(理想鄕)이다. 두 곳이 맞물린 형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가. 고난의 역정을 밟고 가는 수없는 무리. 이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라면 이상향을 꿈꾸고 지향하며 가는 것 또한 우리네 삶의 갈망이다. 그리고 진실이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21

어디 지리산뿐일까마는 산짐승들이 숨어서 쉬어볼 만한 곳도 마땅치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식물, 떠나버린 생명들, 바위를 타고 흐르던 생명수는 썩어가고 있다 한다. 도시 인간들이 이룩한 것이 무엇일까? 백팔번뇌, 끝이 없구나. 세사(世事) 한 귀퉁이에 비루한 마음 걸어놓고 훨훨 껍데기 벗어던지며 떠나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소멸의 시기는 눈앞으로 다가오는데 삶의 의미는 멀고도 멀어 너무나 아득하다.

2001년 12월 3일

박경리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22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 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라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남정네 노인들보다 아낙들의 채비는 아무래도 더디어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식구들 시중에 음식 간수를 끝내어도 제 자신의 치장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 바람에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 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 <토지 1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3105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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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는 오크 나무 그늘에 주차된 태비의 빨간색 폭스바겐 비틀 뒤에 차를 댔다. 차에서 내린 태비는 보라색 닥터마틴 부츠, 찢어진 청반바지, 조의 오래된 주황색 일리노이대학교 로고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코에는 자수정 피어싱을 하고 갈색 머리에 파란색과 보라색으로 하이라이트 염색을 했지만 조가 거의 보지 못한 얌전한 차림이었다.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155

"사람. 줄리엣과 햄릿한테 나쁜 일들이 생기기 전에, 마법의 숲에서 만나게 할 거야. 그러면서 운명이 바뀌는 거지. 희극이고 마지막에 누구나 행복해지는 해피엔딩이야."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195

"전 아무 말 안 할게요. 적합한 말이 가장 필요한 상황에서 말실수를 하게 마련이거든요."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된 적 없어요."

"알아요. 언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도의 수단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린 여전히 소통하고 싶은 생각들은 뇌 속에 가둬 두고, 꿀꿀대는 거로만 표현하는 유인원에 불과하죠."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206

"당신의 인생이 있다는 걸 누나에게 보여 줘요. 어머니도 아셔야 해요. 어머니는 당신이 좀 쉴 수 있게 세인트루이스에서 누나와 지내시면 안 되나요? 아니면 어머니를 도와줄 사람을 고용하면 되잖아요. 누가 당신이 평생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고 정했나요? 그런 짐을 짊어지기에는 너무 젊다고요."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216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얼사 옆에 놓인 책을 들어보았다.

"『제5도살장』이로군요."

그가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양장본은 처음 봤어요. 얼마나 오래된 거예요?"

"책이 출간된 1969년 판이에요."

그가 놀란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원본 표지에다가요? 값어치가 상당하겠는데요."

"상태가 별로 좋지 못하지만, 대단히 귀중한 책이에요. 할아버지부터 아빠, 동생, 그리고 저한테로 대물림되었거든요. 엄마도 이 책을 적어도 한 번 이상 읽으셨고요."

그녀가 얼사 몸 위로 손을 뻗어 그에게 책을 받아서, 양반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이 책이 화젯거리로 자주 올라왔었죠."

조가 표지를 손으로 쓸며 말했다.

"우리 가족 모두가 제일 좋아한 책이에요."

"우리 아빠가 좋아했을 것 같네요."

"무엇을요?"

"책을 매개로 부모님과 이어지는 거요."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244

조는 불현듯 느껴지는 놀라운 감각에 먹는 것을 잠시 중단했다. 그것은 그녀가 이성에게 매력을 느꼈을 때 몸 안에서 느껴지던 따뜻한 기운과 비슷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여전히 이러한 느낌을 받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어쩌면 몸이 아니라 대체 호르몬인지도 모르지만.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257

"죽음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와 난 모든 것을 공유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처럼 사랑했어요. 결국에는 내 일부가 엄마와 함께 죽어 버렸죠. 지금까지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난 엄마와 함께 어둠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스스로 선택 한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은 대부분 후회한다고 말해요.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할 걸, 혹은 더 사랑할 걸, 하고 말이죠. 전 일말의 후회도 없어요. 정말로요."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284

"과연 그럴까요? 여기서 머물던 마지막 날, 당신 누나는 당신에게서 행복을 전부 빼앗아 가는 데 성공했어요. 오늘 아침 얼사와 내가 당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고요. 이런 일,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일을 두려워한다면 결국 누나처럼 모질게 변할 거고, 그게 바로 당신 누나가 원하는 일이에요."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286

얼사도 물론 찾아야 하겠지만 두 사람도 얼사만큼 길을 잃은 게 아닐까? 어쩌면 얼사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그들 자신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먼저 풀어야 할지도 몰랐다.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306

"당신이 말한 그 느낌 기억해요? ‘영혼에 가해지는 끔찍한 인간성의 말살’ 말이에요. 그건 어쩌면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면 그들로 인해 상처 받을 것이 두렵다는 거와 일맥상통하지 않을까요."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306

7월 첫째 주가 지나가면서 조는 완전한 환상의 세계로 진입했다. 그리고 얼사의 소용돌이, 그러니까 게이브가 ‘무한 둥지’라고 이름 붙인 영원한 별들의 회전에 결국 항복하게 되었다. 끝없는 사랑의 소용돌이에서 세 사람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과거도. 그들의 미래도. 조는 실종 아동 찾기 홈페이지를 배회하는 것을 그만두었고, 게이브도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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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조는 겁에 질렸었다. 아마도 수술 후 처음으로 이성과 교감을 나누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그만 뒤죽박죽된 신호를 보내면서 가여운 그 남자를 혼란에 빠뜨렸고, 설상가상으로 그는 자신의 우울증 고백으로 그녀가 자신을 거부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만일 그녀가 이성에게 암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했는데 그가 갑자기 거절했다면 그녀 또한 상처 입었을 터였다. 그녀가 낮게 신음했다.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149

"얼사, 내일 내가 살던 곳에 가봐야 해."

얼사가 돌멩이를 줍는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섐페인–어배너라는 데?"

"맞아." - <숲과 별이 만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8053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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