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는 기본적으로 장면 묘사에 뛰어난 작가여서 그냥 묘사대로 읽어나가는 재미만 해도 상당하다. 대사 역시 노동자들의 말투가 그대로 드러나 생생함을 전달한다. 여기에 얹어지는 중요한 작가적 시각이 있는데, 바로 졸라가 취한 ‘자연과학자의 시선’ 이다. 그는 냉정한 과학자의 시선으로 인간과 세상살이를 바라봤다. 요컨대 인간의 운명에는 개인의 의지나 열정, 선한 마음 같은 것보다 유전과 환경 같은 자연법칙 훨씬 중요하고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본 것이다.
독자가 될 수밖에 없으며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에밀 졸라는 자연과학자의 눈으로 세상과 인간을 보았는데, 그의 관점은 어떤 한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회 전체라는 관점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 아래 졸라는 19세기 중후반 프랑스 사회의 풍속, 가치관,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 곧 시대상 전체를 상세히 묘사한다. 이런 면에서 졸라의 소설들을 ‘예술’ 보다는 ‘사회과학’에 더 가깝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목로주점⟧에서 졸라는 ‘자본의 시대’를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생활상을 때로는 사실적으로, 때로는 비유와 암시를 통해 묘사 한다. 이른 아침, 제르베즈의 시선은 시문을 통과하여 파리 시내로 향하는 노동자들의 행렬에 가닿는다. 이 행렬은 맥이 빠진 채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그들을 집어삼킬 입을 활짝 벌리고 있는 “괴물 같은 파리”향한다. 그런데 시문 옆에는 주점이 있고, 노동자들은 아침부터 일터가 아닌 주점으로 향한다.
읽은 책을 다시 읽게 될 때가 있다. 찾아볼 게 있어서 일부러 볼 때도 있지만, 좋아하는 책같은 경우에는 괜히 꺼내 들고 여기저기 뒤적이기도 한다. 특히 고전의 반열에 오른 세계문학은 다시 보는 경우가 드문 것 같다. 왜일까? 노래나 만화, 영화는 기꺼이 다시 보고 듣는데, 왜 문학 작품 다시 읽기는 고역처럼 여겨지는 걸까? 생각해 볼 문제다. 다시 읽기의 묘미는 역시 처음에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디테일들이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한 번은 ⟦안나 카레니나⟧를 뒤적이다 위 인용 대문이 눈에 딱 들어왔다. 안나가 기차 안에서 소설을 읽는대목인데, 지하철에서 책을 읽을 때가 종종 있는 우리로서는 관심을 가져볼 만한 대목이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버지니아 울프까지 막독 리스트를 알아본다. 진실되고 단호한 박치기 돈키혼테, 안나를 대표하는 두 단어 simpie과 spirit안나 카레나, 누구라도 어디든 갈 곳이 한 군데는 있어야 한다.
죄와 벌 속내를 드러내지 말 것, 골짜기의 백합, 독서하는 괴물, 프랑켄슈타인, 인간의 심연을 관찰한다.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위장과 역할놀이를 통해 사랑의 정의를 탐색한다. 좋을 대로 하시든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선 참마죽, 소통을 말한다. 상자속의 사나이, 산딸기, 권력에 맞서는 카프카적 방식 변신, 어느 계약직 직장인 선언은 “일을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필경사 바틀비, 독서를 통해 획득한 저항의 말들 제인 에어, 착한 딸들, 아버지의 질사에 반기를 들다.
댈러웨이 부인, 혁명 속에 개인 두 도시이야기, 노동자의 생활을 최초로 그렸다. 목로주점, 도움을 주기에는 장소가 좋지 않다 산시로, 극한 알바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안나의 기차 안 책 읽기 안나 카레니나, 한 줄의 시구를 얻기까지 말테의 수기, 책 읽기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버지니아 울프 독서 에세이등 이렇게 소설의 내용이 있었다. 이 책에 나오는 소설들은 거의 다 읽은 것들인데 다시 읽으니까 정리가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