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여자 명진 읽어주는 시리즈 1
한젬마 지음 / 명진출판사 / 1999년 9월
평점 :
절판


그림이 나에게 속삭인다. 아니 그림이 속삭인다기보다는 한젬나가 나에게 그림을 읽어준다. 그림에 가까이 선 그녀가 다가오라 자꾸 손짓한다. 나는 그림에 완전 문외한인데... 그림이라면 풍경화 정도에 눈길이 가고 인물화의 세밀한 사실묘사에 그저 감탄한 정도일 뿐인데... 그래! 그녀의 부름에 응해보자. 이참에 나의 무식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무엇보다 초보자의 눈높이에서 그림을 설명해 준다고 하니 바로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책이리라.

이런 심정으로 이 책은 나와 인연을 맺었다. 나의 기대감은 애초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충족되었다. 그녀는 단순히 그림을 읽어주는 게 아니었다. 그림을 느끼도록 해 주었다. 그림의 기교적 측면을 세세히 설명하기보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작가의 삶과 그 삶에 동참하는 감상자의 태도를 일러주었다. 그녀의 정감있는 속삭임을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이미 어느 화랑의 전시된 그림 앞에 있는 착각에 빠졌고 그림의 세계에 나도 기꺼이 함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그림이 내 삶의 가까이에서 기쁨을 더욱 고양시키고, 슬픔을 누그러뜨리고 , 삶의 깊이를 더해주고, 외로움을 달래줄 친구가 되고, 인생의 동반자가 될 수 있음을 알려 주었다. 이것은 그녀가 그림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온 인생을 들려줌으로써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유언처럼 말한다. "나의 모든 흔적들을 읽지 말고 버려라." 하지만 누군가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이 싫다는 그녀가 이토록 당당하게 자신의 내면을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은 역시 그림의 힘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인생이 단단히 얽힌 대듭처럼 그림으로 확고하게 뭉쳐 있기에 결코 그녀는 그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그림이 혼자만의 향유물이 아닌 타인과 공유해야할 영역이기에 대중과의 교감은 필연이었다는 생각이다. 어쨌든 독자로선 머리 숙여 감사할 따름이다. 자신만의 흔적에 그치지 않고 내 앞에 자신의 발자취를 열정적으로 진솔하게 보여주었다는 고마움. 그 열정이 그림에 문외한인 나를 한걸일망정 그림 곁으로 끌어당겨 주었다는 고마움.

이제는 이전과 다른 눈으로 그림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림에 다가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 전에 김창열 화가의 물방울 전시회를 간적이 있었다. 오래 전의 일이라 가물가물하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감동이 있다. 티 없이 맑은 어린 아이의 눈망울 같기도 하고, 슬픈 여인의 한 없이 쏟아지는 눈물 같기도하고,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 내 마음이 촉촉히 젖어드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감히 전시장에 계셨던 그 분과 대화를 나눌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제는 다를 것이다. 전시회에서 그가 누구든 자신의 작품에 관심을 가져준다면 화가에게 반가운 일이라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비록 그림은 잘 모르지만 내가 보고 느낀 만큼을 주고 내가 느끼지 못한 부분을 되받는다면 전시장에 가는 것이 이전보다 훨씬 즐거운 일이 되리란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엔 몇 가지 영상이 떠돈다. 제각기 다른 방향에서 보면 다른 모습으로 다가선다는 피카소의 그림 '눈물흘리는 여인', 가을바람에 하늘거리는 갈대 사이로 언뜻 보이는 연인들의 속삭임 '김성호님의 가을의 복병'. 사각으로 분할된 각기 다른 크기의 면 위에 힘차고 간결하게 처리된 사각 색상들의 집합 '몬드리안의 컴포지션' 등 .

예전엔 TV 화면처럼 그냥 흘려보냈을 영상들이 이처럼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한젬마의 속삭임이 곁들어 있기 때문이리라. 그녀의 언어로 재구성된 그림은 그냥 나의 시선만으로 입력된 영상보다 훨씬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그림을 볼 일이 있는 분들은 꼭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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