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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아! 슬프도다. 오랑캐의 말발굽 아래 유린된 산하. 그 무참히 짓밟힌 삶의 터전 앞에 울부짖는 백성들.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민초들. 그들은 전쟁터에서 아까운 생명을 던져야 했고, 가족을 잃고 한없는 슬픔에 잠겨야 했고, 삶의 터전을 잃고 방황해야 했다. 이들에게 임금은 기댈 수 있는 의지처가 되지 못했고, 국가는 쓸모없는 권력에 불과했다. 백성들을 사지로 내몰아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데 연연하는 임금은 자격 없는 임금이요, 백성의 생명과 삶의 터전을 지켜내지 못한 국가는 정당성을 상실한 국가이다.
백성이 곧 국가요, 임금이다. 하늘이 내린 임금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자신의 권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허울에 불과하다.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라면 백성이 곧 하늘이다. 그렇다면 백성의 아픔은 하늘의 아픔이다. 그 아픔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임금이 되어야 하늘도 감동하여 그를 따른다. 국가 운영의 실패로 혼란이 가중되는 것은 하늘의 마음이 이미 떠났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비하지 않은 임금은 임금으로서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청의 침략으로 도성을 버리고 남한산성에 의지해야만 했던 조선 제 12대 인조 임금, 그는 이미 하늘로부터 버림받았다. 시대의 아픔을 직접적으로 느끼며 살아야 하는 민초들의 마음은 냉혹하다. 피부에 와 닿는 고통을 내부로 삭히기보다는 겉으로 곧바로 드러낸다. 그 고통의 인내를 요구하기 위해선 임금이나 국가 권력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초들의 고통은 곧바로 무능력한 임금이나 부패한 국가 권력에 화살이 되어 날아간다. 즉 권력의 기초이자 하늘인 민초는 더 이상 그들을 위한 희생양이 되기를 거부하고 그들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임금이 그들을 버리는 게 아니라 하늘인 그들이 임금을 버리는 것이다.
민초들은 임금이나 국가 권력보다 훨씬 강인하다. 아무리 힘들어도 꿋꿋하게 질긴 목숨을 연명해가며 완전히 사라지는 법이 없다. 홑겹의 옷가지에 찬비가 스미는 혹한의 추위에도 찬 기운을 견디지 못한 손발이 동상에 걸려 잘려 나가도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모질게 견디어낸다. 간혹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배고픔과 추위로 쓰러지기도 하지만 이어지고 이어지는 잡초 같은 인생은 결코 절멸되는 법이 없다. 따라서 이 전쟁의 패배자는 민초들이 아니라 바로 임금일 뿐이다. 자신의 생명과 권좌에 연연하는 나약한 임금일 뿐이다. 하늘의 마음을 잃어버린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강자 앞에 치욕적으로 무릎을 꿇는 일 외엔 달리 선택의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민초들이 정말 감내하기 힘들었던 것은 추위와 배고픔이 아니라 고통의 정당성이다. 평소 자신들의 의지처가 되지 못했던 임금과 사대부, 그들의 권력과 그들만의 나라를 위해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적과 싸워야 하는 것인가? 내적 자발성이 분출하지 않는 한 그들에게 이 전쟁은 자신들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무능한 정권을 지켜내기 위해 더 소중한 자신들의 목숨과 가족을 버려야 하는 가치 없는 싸움에 불과한 것이다. 아마도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무너져 가는 명나라가 구세주라도 되는 양 황제를 향하여 예를 갖추고 춤을 추는 임금 앞에서 민초들이 느끼는 심정은 의리에 대한 칭송보다는 무능한 정권에 대한 분노일지 모른다.
반성하지 않는 역사는 가망이 없다. 깊은 상처를 남긴 역사일수록 반성은 더욱 절실하다. 과거의 슬픔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우리는 잘못된 과거를 곱씹고 곱씹어야 한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늘 주변의 정세변화를 살펴야 했던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외부의 힘에 의지해 내 영토를 지키려했던 안이함은 또 다른 외부의 힘을 불러들이게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 점을 망각한다면 남한산성의 치욕의 역사는 을사늑약과 한국전쟁에서 이미 겪은 것처럼 또다시 반복될 것이다. 지금의 우리가 처한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간섭은 그 역학 구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본질은 그다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시든 나뭇잎 차디찬 북풍에 나불대는 황혼녘 남한산성의 성루에 섰다. 슬픈 역사의 흔적은 세월의 풍파에 자취 없이 사라졌지만 지긋 눈을 감고 아득한 역사의 현장으로 달려가 본다. 지금은 음식점들이 난립해 장사치들의 천국이 되었지만 먼 옛날 너른 들판에 수만의 청병들이 진을 치고 노려보고 있었으리라. 그들의 말발굽 아래 스러져간 선조들의 애달픈 부르짖음이 들려온다. 귓전을 울리는 선영들의 절규는 후손들의 평화를 바라는 영혼의 경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