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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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가 공원이 되고 집이 기념관이 되는 행정 프로젝트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이사를 해야 했을 때, 어머니는 견딜 수 없는 이별을 하는 이처럼 많이 우셨다. 괜히 자식들은 제 잘못이 있는 것처럼 죄스러웠다.

 

누구나 장소가 있어야 생존을 할 수 있고, 그 장소는 곧 안전한 피난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마치 공간이 기억 자체를 담지한 각자의 삶의 고유한 존재가 되는 것처럼, 어디를 둘러보아도 살았던 이들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내가 다섯 살에 이사 온 단독 주택에서 동생을 낳고 우리를 키웠던 젊은 어머니는, 성장한 자식들을 다 떠난 보낸 뒤에도, 그 집을 쓸고 닦고 가꾸고 우리를 기다리며 거의 평생을 사셨다.

 

그 장소를 확장하면, 짐정리를 돕고 인사하러 나오신 오랜 이웃들과 어릴 적 자주 들락거린 너그러웠던 그들의 집이 있다. 더 확장하면 학교와 가게들과 다양한 공동의 공간들이 있다. 익숙한 거리조차 오랜 친구 같고, 너무 높지 않아 자주 올랐던 산과 계절별로 고운 풍경을 전하던 강변이 그립게 존재한다.

 

바쁘기만 한 성장한 자식들은 서둘러 서툰 위로를 건네며 이사를 마쳤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그날 목격한 어머니의 슬픔이 나는 두려워졌다. 마치 오래 삶을 견디고 견딘 이가 이사 - 장소를 빼앗김 - 를 계기로 어딘가 무너지신 건 아닌지, 불쑥 떠오르는 사념에 숨이 턱 막히곤 했다.

 

나이든 부모를 제대로 마주하고 돌보는 일을 잘 배우지 못한 나이만 찬 자식은 어머니의 울음을 통해 지킬 수 있을 듯한 작은 결심을 했다. 대단한 효도와 위로는 아니지만, 적어도 어머니에게 비상 알약처럼 복용할 수 있는 무언가를, 슬프고 아플 때도 한 알씩 꺼내 먹을 수 있는 기억을 같이 만들고 싶었다.

 

매주 방문해서 옛집이 변하는 모습을 같이 보면서 천천히 이별을 했다. 대부분의 이웃들도 이사를 가셔서 반가운 얼굴들은 적었지만, 아직은 옛 거리의 모습이 남은 동네를 천천히 걸었다. 함께 살 때 함께 걷는 일을 더 자주 했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에 식초를 잘못 삼킨 듯 마음이 쓰렸다.

 

모든 장소는 유일무이하며 다른 어디에서도 되풀이되지 않는다. 놓치는 순간 사라져버린다.”

 

전화 통화로 안부를 묻는 일 대신 직접 만나고 걸으며 얘기를 나누니 날씨와 계절의 변화도 함께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는 옛집과 이사에 대한 아픔을 얘기하는 대신,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어 들려주었다. 내가 만나본 적 없는 생기발랄한 어린이가 이야기 속 장소들에서, 다치고 놀고, 친구들과 싸우고, 심부름을 하고, 전쟁을 피내 피난을 가고, 사람들을 만나고, 동생을 돌보며 생존하고 성장했다. 그리고 나는 모르던 야생화의 이름을 매주 배웠다.



 

1950625일 전쟁이 일어났고 1953727일이 휴전이 체결되었다는 문장으로는 전혀 알 수 없는 풍경들이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생생한 색을 전혀 바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죽은 이들의 피가 줄기를 이루며 흐르던 날도, 쌕쌕이 비행기가 폭탄을 떨어뜨리며 날던 날의 공포도, 급히 피하다 찔레 가시에 찔려 피가 난 아이들의 얼굴도. 그리고 황폐해진 땅과 물에서 황망한 정신으로도 먹을 것을 찾아 뭐라도 먹으며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찬란한 감동과 지독한 고통이 함께 했던 어린 베리 로페즈의 서사는 눈물 속에서도 차분하게 끝까지 읽어낼 수 있는 감당할 수 있는 인연처럼 다가왔다. 그와 내 어머니와 내가 찾아가고 만나고 머물고 살았던 장소들은 겹치지 않지만, 각자의 눈에 새겨진 풍경들도, 각자가 반추한 것들도 다르지만, 나는 그가 낯설지 않았다. 너나없이 상처를 입고, 때론 흉터로 쉽게 아물지 못하는 상처를 입고도, 장소와 관계에 기대고 힘 입어서 삶의 연결을 놓지 않고 살아간다는 닮은 슬픔.

 

자기 시련이 이례적이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구원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더 넓은 인식을 직조해냈다.”

 

성취 지향적 삶을 사느라 부모와 집과 고향을 떠나 오래 살았다. 생의 반환점은 여러 해 전에 돌았다. 내 어머니는 어느새 예순이다. 오래 전 영국에서 논문 지도를 해주선 교수가 글을 쓰다 고민이 되면, 강에 관한 건 강에 가서 물아보라고 했다. 위로와 격려를 담은 농담이라고 생각한 점이 많이 아쉽다. 그때 강에 가서 물어볼 것을. 오래 강을 보고, 자주 보고, 끈질기게 물어 볼 것을. 답을 얻거나 힘을 받아 안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누구도 혼자 생존이 가능한 존재로, 현명한 지혜를 갖춘 채 태어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태어났다는 것은 많은 존재들이 바라고 도왔기 때문이다. 내 삶은 나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다 셀 수도 없는 알거나 알지도 못하는 다른 존재들의 노동과 사랑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사랑을 한다는 것은, 사랑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구체적인 연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분리되고 쪼개지고 떨어져나가고 헤어지면서 우리가 이룬 많은 것들이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좋을 실패들이다. 그러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깊이 들여다볼수록 문명 전체의 문제가 되고 만다. 그러나 나는 훌쩍거리며 이 책을 읽는 동안 거대한 절망과 발작 같은 공황 대신 조곤조곤한 위로를 받았다. 특별한 여행지가 아닌 동네 산책만으로 내 어머니와의 연결점을 차곡차곡 늘려 나가는 것처럼.

 

개인으로서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 낼 수는 없을 거라는 무력함과 무기력 대신, 나는 베리 로페즈의 미풍처럼 소곤거리는 다정한 말을 따라보기로 한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절망 속에서 죽기보다 앞에 놓인 가능성을 위해 사는 것이 내게도 중요하다.

 

인간이 우주에서 유일한 집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알게 된 후의 충격과 이후의 끝없이 반복되는 희망의 좌절과 대응 부재는 생존의 위태로움을 발작 같은 불안으로 경험하게 한다. 미래세대 걱정을 할 일이 아니었다. 통계 숫자들은 이미 늦었다고 한다.

 

하지만 낙관하며 살아야하는 것인지 묻는 친구들 덕분에 나는 오래 고민했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희망하기로 했다. 다른 선택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선택은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살아 있으면 아무리 적어도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뭐라도 하면 뭐라도 달라질 것이니까.




 

고령의 부모와 아직 십대인 아이들 어느 쪽을 보아도, 감당해야 할 책임과 두려움이 불쑥 짓쳐들지만, 마음가짐을 제대로 세우고 행동하는 것은 공포를 수용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이 반백(半白)의 반백(半百)이 되고서야 이제 배운 사랑을 길러나가는 법이라고. 아직 남아 있는 여기살아 있는 것들이 아주 많다고. 힘이 없지 않다고. 얼마가 되었든 이울어가는 몸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생명이라는 선물을 만끽할 것이라고지금,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이 서로를 살아가게 하는 사랑의 기록이... 뜨겁고 아픈 고통도 눈물도 닦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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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단어 -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
르네 피스터 지음, 배명자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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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다, 정치적 올바름도 정체성 정치도... 관련 분석과 비판의 내용들도.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고도 이미 하고 있는 행태를 인지하는 것도. 옳은 것보다 쉬운 것만 선택하는 것은 문제지만, ‘옳다’는 것이 전가의 보도나 무적 방패가 되는 것도 문제다. 미국 진보 엘리트주의가 민주주의를 망쳤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러니 기회가 있다면 정확히 잘 배워서 파악해 봐야한다. 자신이 차별주의자란 것을 모르던 이가 책을 읽고 구체적인 사례와 통찰력 있는 설명을 통해 비로소 깨닫듯이.


“이른바 포용의 언어는 저학력 폭도보다 우월해지는 수단이자 먹고살기 바빠 진보적 담론의 최신 흐름을 미처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수단이 되고 만다.”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PC’란 표현은 25년 전 영국에서 처음 들었다. “PC가 재미를 다 망쳤다”라고 한 이가 백인 영국 남성 교수였기에, 나는 잘 모르고도 PC편에 서자고 혼자 생각했다. 짐작일 뿐이지만, 그가 재미를 느끼는 표현에는 저보다 약자를 조롱하고 엄중한 사회적 조건들을 냉소하는 내용일 거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랬다.


그래서 PC한 표현을 배워서 사용하려 노력했고 기회가 생기는 대로 주변에도 잘 알리고 싶었다. 그 후 이십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건 내가 느끼기에나 긴 세월이지, 초기에 제안된 PC한 표현들도 그다지 일상 통용이 잘 되고 있지는 않다. 거기에 새로운 표현들은 계속 늘어났다.


언어는 강고한 사유라서. 언어 표현은 화자에 관해 많은 것들을 알려 준다. 차별주의적 언어를 사용하면 차별주의자로서 사유하는 것이다. 변명의 여지는 없다. 그렇다고 “이 차별주의자!”라고 비난하자는 뜻이 아니다. 인지하지 못한 채, 교육받고 사회화된 생각들이 여러 층을 이루고 있다는 것, 그러니 잘 고민해보고 바꾸는 게 더 나은지 함께 얘기하자는 권유다.


그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이고, 아마 평생 고치고 바꿔도 끝이 없을지 몰라서 그렇다. 그래서 새로운 표현들을 알게 되면 반갑기도 하고, 바로 고쳐지지 않아서 간혹 버겁기도 하다. 그리고 누군가 내가 알고 있는 PC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 그 사람의 의견을 참을성 있게 듣는 일이 좀 힘들어졌다. 마치 상한 재료로 요리한 음식은 건강하지도 맛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내가 선의로 무엇을 한다고 해도, 설명과 전달은 다른 훈련을 필요로 한다. 어렵다. 스스로 깨달으면 저항감이 덜하지만, 타인의 지적은 수용에 더 힘이 든다. 매번 같은 설명을 반복하는 것도 힘이 든다. 인내심이 적어서이겠지만, 2단 구구단을 계속 외워야하는 벌을 받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아마 먼저 알았기에 갖는 이런 태도가 때론 고압적이거나 훈계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지적하듯이 잘못 말할까 두려운 누군가를 침묵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내용보다 표현에 더 집중하는 어리석은 경향을 부추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독일 언론인이 저자라서 상황이 많이 다를 수도 있겠단 생각했는데, 공감되는 내용도 적지 않았다. 물론 새롭게 배운 내용도 많았다. 그리고 너무나 다른 각국의 정치사회적 환경을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어떤 부분은 반론하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기도 했다. 


침묵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말해야할 것이 있는 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사회, 정확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인지하고, 드러난 표현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회를 희망한다. 항상 잘 할 자신은 없지만 검열보다 표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 오만하지 않은, 가족, 동료, 친구로 사는 것이 나의 큰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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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니를 뽑다
제시카 앤드루스 지음, 김희용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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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니’란 표현이 낯설다. 기억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지만 어릴 적엔 ‘유치’라고 불렀던 듯하다. 어쨌든, ‘젖니’가 흔들리고 어쩔 수 없이 뽑아야하는 모든 순간이 눈 뜨고 꾸는 악몽처럼 싫었다.


젖니를 뽑는 건 모두의 공통 경험인데 저자만의 고유한 경험 속에서 어떤 서사와 의미가 있을지 궁금하다. 강화길 작가와 이소호 시인의 추천이라 큰 기대감에 설레며 펼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주는 단어, 내가 붙잡고 매달릴 수 있는 명칭이 필요했다.”


28살이란 어떤 것이었는지 내 경험에 미루어 생각해볼 수밖에 없으니 열심히 기억하고 상상했다. 28살 생일에 나는 사진을 너무 많이 찍는 친구 때문에 빨리 지쳤다. 고단함조차 친구는 사진에 담았다. 그날 나는 소원을 빌었나, 아님 다짐을 했나.


‘나다워지는 것’ 왜 뻔뻔함이 필요한지 생각해보면 인간 사회가 마음에 들지 않다가, 나이 무게만큼 곧 수긍하고 만다. 그럴 필요도 있는 것이지. 어쨌든 나는 하루 빨리 내가 살던 세계를 떠나고 싶었고, 그건 결국 나답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한 선택이었다.


젖니는 이미 다 뽑았고, 사랑니(wisdom teeth)는 아직 나기 전이었으니, 어정쩡한 상태의 인간이었다. 사랑니가 나고 발치를 한 후에도 지혜란 좀체 생기지 않았지만. 20대의 불안과 죄책감과 복잡한 울렁거림을 이해한다. 지금은 그조차 부럽고 눈부시지만, 당시엔 잠을 빼앗고 몸을 아프게 하던 감정들.


“나는 토할 것 같았다. 내가 부족하고, 내게 거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봐 너무 두려웠다.”


태어난 조건이 물질적으로 덜 부족하면 덜 힘들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결핍, 휘둘리는 대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정체불명의 감정들, 대부분이 실패인 원인 분석들. 갖가지 멍청한 시행착오들. 성장은 고통이다.


어쩔 수 없다. 용기를 내어 한 발을 옮겨보거나, 그 자리에 선 채로 보이지 않는 곳을 그리워만 하거나. 그것이 처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 식사 주문이할 지라도, 모든 용기의 순간들이 조금씩 쌓여 나만의 힘이 된다.


역사의 후대는 선대보다 똑똑하고 현명할 수밖에 없다(고 믿고 싶다). 선례라는 시행착오의 데이터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다치게 하면서까지, 요구사항에 맞춰간 억지를, 때론 허망한 삶을, 더 젊은 세대는 더 일찍 간파하고 거부할 수 있을 것이다.


가진 것이 적거나 없어서, 욕망은 더욱 관능적으로 날카롭게 느껴지고 표현되는 걸까 싶게 화려하다. ‘나는 무엇이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화자의 대답이, 사건들을 건너며 읽는 내내 궁금했다. 답을 찾으면 명칭도 비로소 갖게 되려나.


“나는 아무것도 원하고 싶지 않았지만 당신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당신이 내 삶을 활짝 열어젖혔고, 내 모든 욕망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풍미와 풍요로움을 원하고, 충만하며 개방적이고 싶다. 이 모든 것을 원하고, 그 모두를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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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한 번쯤 절 여행을 떠난다면
김영택 지음 / 좋은땅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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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주말에 가족들과 사찰 방문하는 걸 좋아하셨고,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청소년기의 나는 이제 그만 같이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자주 가셨다. 지식도 없고 반쯤은 내키지 않은 방문이었으니 아쉽게도 그 시절에 배운 바는 참 없다.

 

나중에 혼자서 혹은 친구와 함께 내가 직접 운전해서 어느 사찰을 방문하다보면, 예전 생각에 웃기기도 하고 예전 모습을 더 많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깝기도 했다. 특히 늘 친절하던 스님들과 뭔가 낯설고 맛있는 걸 찾아주시던 공양주 보살님들의 안부가 문득 대책 없이 궁금하고 죄송스럽기도 했다.

 

철학자 헤겔의 통찰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인간으로서 삶에 지치거나 상처 받은 이후에나 비로소 가능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종교가 없지만, 여행 일정에 어느 사찰을 하나 꼭 넣었던 이유는, 속세와의 잠시 이별을 보장해주는 듯한 고즈넉함이 한없이 편안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좋아한다고 배움이 당장 깊어지진 않는다. 체계적인 공부가 좋고, 넓고 깊은 지식과 사유를 늘 배우고 싶은 내게, 이 책은 저자의 평생이 모이고 담긴 귀하고 유익한 책이다. 역사를 전공하고 가르치고, 퇴직 후 불교대학에서 공부하고 사찰을 연구한 기록이다. 읽는 내내 역사해설 전문가와 문화 도슨트와 함께 가보는 여행 같았다.

 

이 책은 사찰 여행을 좋아하거나 관심이 있거나, 혹은 관련 역사와 문화지식을 배워서 새롭고 깊이 있는 여행을 다시 하고 싶은 누구나에게 도움이 될 한국사찰 문화해설서이다. 문장이 쉽고 정보가 가득하다. 공부하듯이 필기도 하고 외워보고도 싶어지는 알찬 책이다.

 

대충 단편적으로 배운 지식들을 이 책 덕분에 잘 정리해보았다. 불보(부처님)와 법보(부처의 가르침, 교법), 그리고 승보(가르침에 따라 화합하고 수행하는자)라는 삼보부터, 예불문과 그 뜻, 칠정례, 무엇보다 이란 장소가 불교에서 가지는 의미까지.

 

시난고난한 역사로 상처투성이인 한반도의 반쪽에, 불보를 상징하고 정골사리를 봉안한 사찰도 있고, 경전이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는 절도 있고, 고려 시대부터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절도 있다는 것은, 후손으로서 생존과 보전에 대한 애틋함과 존경심을 동시에 품게 한다.

 

통도사의 무풍한송길 이야기를 읽을 때면, 더운 여름 천천히 그 숲길을 걸었던 추억이 감각으로 돌아오고,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그 길을 걸어간 수많은 다른 이들의 삶의 궤적을 상상해보게 된다.

 

그저 사찰이 시작되는 입구라고만 생각해서 가벼운 합장을 하며 들어섰던 일주문 이야기에는, 불법을 수행하는 자로 살고자, 수백 개의 계율을 지키겠다는 단단한 결심을 하고 산문을 넘은 이들을 생각하였다.

 

불교 철학을 몰라서, 육화당六和堂이란 건물의 용도를 이제 배운다. 욕하고 싸우고 물리적 폭력을 가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지금에, 상대와 마음이 합해지도록 여서 가지 화합의 방법을 수양하고 상대를 공경하는 여섯 가지 조건을 배우는 곳이라니 영성을 갖추지 못한 세속인으로 울울하고 부끄럽다.

 

적멸을 뜻하는 열반은 죽음이라는 소극적인 의미로만 사용하지 않는다. (...) 불을 불어서 끄다, 불이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 즉 타오르고 있는 번외의 불꽃이나 갈애의 불꽃이 완전히 꺼져 고요한 상태다.”

 

감탄스러운 목차에는 아름다운 천년 고찰의 이름들이 초대장처럼 적혀있다. 좀 더 느긋한 봄이 되면, 나도 느긋하고 고요한 여행을 떠나 고요한 시간을 보내다 소란한 속세를 견딜 힘을 얻어 오고 싶다. 그냥 가도 좋겠지만, 저자가 정성스럽게 전하는 지식을 배우고 떠나는 것도 참 의미 있는 여행이 될 것이다. 사찰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의 다정한 길잡이가 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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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203호 - 2024.봄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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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무력함을 더 묵직하게 하는 일들은 스케줄표가 있는 것처럼 이어졌다. 원래도 깜냥이 작은 나는, 큰 애씀도 저항도 없었는데 미리 지치고 말았다. 이번에 그 피로감을 핑계 삼아 최대한 열심히 외면했다.


그렇게 살아서일까, 아무리 인간끼리 한 약속일뿐이지만, 새해가 되었는데도 이전처럼 헛된 결심을 하고 애써 반갑게 새해를 맞는 일도 어려웠다. 그래도 봐주는 법 없는 시간은 흘러 3월의 마지막 주다. 곧 4월이다.


10.29 이태원 참사,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위해 발의된 특별법을 하롭번째 거부한 대통령, 해병대 채수근 상병 사망사건, 박정훈 대령 항명죄 기소, 사법농단으로 기소된 전 대법원장 무죄판결, 부당 합병과 분식회계에 관여한 재벌홍수 무죄판결, 부끄러운 일 한 적 없다는 탄핵된 전직 대통령, 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풀려나는 관련 하수인들, 오로지 사익을 위해 남용되는 권력, 공방론과 중립과 팩트체크 뒤로 숨은 편향된 주류 미디어 환경, 기사로는 제목도 보기 싫었는데, 계간지를 보며 정리 필사하니 뜻밖에 마음이 평온하다. 


“말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으며, 인간을 위한 세상은 인간이 살고 있는 지금에 이미 현시되고 있다고. 뚫어지게 바라보고 지독하게 질문을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만이 ‘잊지 않겠다’라는 말을 아무 것도 아닌 소리로 남겨두지 않는 방법이다.”


그러면, 새로운 국내 세상 - 한국사회 - 은 어떻게 만들어야하고, 아무 실익이 없는 외교와 정책만 가진 현 정부로 세계정세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나. 봄호는 ‘세계서사’라는 큰 주제와 질문에 대해서도 여러 분야의 의견을 들려주니 고마울 뿐이다. 나처럼 매일 화만 내는 이들의 담론과 의견은 충분히 들었다. 말하고 듣다 서로 지쳤다.  


‘질문’도 현황도 정세도 이슈도 “어떻게 서사화할 것”인지 질문하는 글이 흥미롭다. 그걸 잘 못하니, 논의와 대화와 협의로 가지 않고, 소리 지르고 화내다 그만 두고 만다. 어떤 주제이든 역사적 흐름을 모르면, 맥락도 필요성도 이해하지 못하고 말꼬리나 잡게 되니, 박노자 교수에게는 매번 역사적 팩트체크와 통계를 통해 한국을 배운다. 누가 외노자인지 헷갈린 지가 오래다. 감사하고 부끄럽다. 


“한국처럼 여론조사 응답자의 81%나 중국에 대한 ‘비호감’을 나타내는 서구사회는 어디에도 없다. 마찬가지로 20, 30대 남성의 5.5%만이 페미니즘 지지에 동의한다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역시 한국 이외에 없다. 최근 대구에서 일어난 이슬람사원 건설반대운동은 세계적으로 봐도 상당히 높은 수위의 이슬람 혐오 현실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 인당 탄소배출량은 세계평균보다 거의 2배나 많다. (...) 주류 진보정당의 경우에도 기후나 난민 문제 등은 결코 의제의 중심에 있지 않다. (...) 이스라엘 등 최악의 인권침해를 감행하고 있는 국가를 포함해 한국산 무기의 해외 수출에 대개 침묵하거나 아예 ‘K-방산의 성공’을 같이 기뻐하기도 한다.” 


상상해보는 진짜 봄은 아닌 듯해도, 어제부터 내리던 비는 그친 후 오랜만의 햇살은 반갑다. 늘 종합선물세트 같은 계간지를 한참 골라 읽었지만, 소설 여러 편과 시가 남아있다. 대학생이 되고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한자도 빼놓지 않고 읽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함께 살아남은 친구 같다. 여전히 문해력은 부족하지만, 다양한 견해를 함께 만나는 기회 자체가 요즘엔 더 소중하다.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무능력과 혐오가 현재와 미래를 꼼짝없이 속박하는 하나의 서사처럼 느껴질 때, 우리에게는 반드시 ‘다시 쓰는 방법’이 필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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