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별의 시간 - 엄마랑 너는 가봤니? 딸이랑 나는 가봤다!
김미순.성예현 지음 / 지식과감성#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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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학교 교사로 33년째 일한 저자가 60을 바라보고 은퇴를 고민하다, 딸과 함께 산티아고 순례를 한 이야기다. 존경과 부러움이 함께 왔다. 나도 60쯤 되면, 은퇴를 하면, 보잘 것 없어진 체력을 회복할 방법이 있을까. 그땐 맘대로 멋대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보고 싶은 사람만 보면서 살 수 있을까.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될까.

 

이번 산티아고 순례하는 동안, 나는 NO 물집, NO 스틱, NO 선크림, NO 화장품 등을 실천하며 천연비누 한 장으로 충분한 자연인 순례자였다. (...) 산티아고를 다녀와 자가용을 없애고 뚜벅이 삶의 가치를 실천하며 여전히 버려야 채워지는 삶의 지혜를 공부하고 있다.”

 

매사에 너무 진지한 꼬맹이는 5학년까지만 내 여행에 동행해주겠다고 했다. 그 후엔 자신이 너무 바빠져서 힘들 거라고. 팬데믹 탓에 제대로 여행을 못 갔다. 출장을 따라가겠다고 했으나 고민 끝에 혼자 떠났다. 이제 중학생이 되었으니, 너무 바빠서 내가 부탁해도 거절을 할까. 재미없는 출장이라도 같이 갈 것을 그랬나 싶다.

 

순례는 휴식 같은 여행이 아님에도 떠나는 순간부터 휴식 같은 여행이라고 하셔서 마음이 짠했다. 그리고 다행이라고 함께 기뻤다. 저자가 속한 여러 관계 속의 이름들 - 특수학교 교사, 맏며느리, 아내, 엄마 - 이 나는 씩씩하게 다 못 할 것 같아서 더 그렇다. 에너지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나는 건 좀 많이 부럽다.

 

함께 평화롭게 살고, 환경을 지킬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세상을 위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아름다운 자연을 만날 때, 함께 살아가야 하는 동물들을 만날 때 부쩍 탄소중립’, ‘생태전환이라는 단어가 새삼 자꾸 떠오른다.”

 

나도 오랜 시간 산티아고 순례 여행을 바랐기에, 에세이도 많이 읽었다. 이제는 어떤 사진들을 보면 마치 걸어본 듯 정확한 위치와 명칭을 알아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새로운 것들은 적을 거라 생각했는데 또 다르다. 시선과 에너지가 다르니 풍경도 달라 보인다. 그리움으로 기억하는 추억들이라 나도 함께 애틋해진다.

 

각자의 방식과 각자의 생각과 각자의 순례가 달라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름이 주는 가치를 깨닫는 것이 진정한 순례의 가르침일 것이다.”

 

어느 계절에 가게 될지 나는 잘 모르겠다. 결국 가게 될 지도 가게 되어야 알 것 같다. 그럼에도 상상만으로도 한발 한발 걷기만 하면 되는 날들이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만성 두통도 식초를 잘못 삼킨 듯 쓰린 속도 다 나을 듯한 기분이 된다. 걷기만 하면 되는 삶... 그 길에서 나는 어떤 나를 만나게 될까.

 

단순하고, 자유롭고, 자연스럽고, 들숨 날숨 평안하고, 텅 빈 고요로 행복하고, ‘만 바라보여 충만하고, 자연의 숭고함에 순종하고, 존재 자체로 이미 너무 감사하고.”

 

다녀온 누구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점점 더 좋아진다. 힘들고 아프고 괴로울 텐데도, 순례를 마친 이들에게 채워진 힘이 느껴진다. 성취와 정복이 아니라 인간의 다리로 걷는 여행에 이토록 많은 이들이 계속해서 매료되는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본다. 고단한 우리가 간곡하게 그리는 것들은 정말 무엇인지 오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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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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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이 서로를 살아가게 하는 사랑의 기록이... 뜨겁고 아픈 고통도 눈물도 닦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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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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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가 공원이 되고 집이 기념관이 되는 행정 프로젝트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이사를 해야 했을 때, 어머니는 견딜 수 없는 이별을 하는 이처럼 많이 우셨다. 괜히 자식들은 제 잘못이 있는 것처럼 죄스러웠다.

 

누구나 장소가 있어야 생존을 할 수 있고, 그 장소는 곧 안전한 피난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마치 공간이 기억 자체를 담지한 각자의 삶의 고유한 존재가 되는 것처럼, 어디를 둘러보아도 살았던 이들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내가 다섯 살에 이사 온 단독 주택에서 동생을 낳고 우리를 키웠던 젊은 어머니는, 성장한 자식들을 다 떠난 보낸 뒤에도, 그 집을 쓸고 닦고 가꾸고 우리를 기다리며 거의 평생을 사셨다.

 

그 장소를 확장하면, 짐정리를 돕고 인사하러 나오신 오랜 이웃들과 어릴 적 자주 들락거린 너그러웠던 그들의 집이 있다. 더 확장하면 학교와 가게들과 다양한 공동의 공간들이 있다. 익숙한 거리조차 오랜 친구 같고, 너무 높지 않아 자주 올랐던 산과 계절별로 고운 풍경을 전하던 강변이 그립게 존재한다.

 

바쁘기만 한 성장한 자식들은 서둘러 서툰 위로를 건네며 이사를 마쳤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그날 목격한 어머니의 슬픔이 나는 두려워졌다. 마치 오래 삶을 견디고 견딘 이가 이사 - 장소를 빼앗김 - 를 계기로 어딘가 무너지신 건 아닌지, 불쑥 떠오르는 사념에 숨이 턱 막히곤 했다.

 

나이든 부모를 제대로 마주하고 돌보는 일을 잘 배우지 못한 나이만 찬 자식은 어머니의 울음을 통해 지킬 수 있을 듯한 작은 결심을 했다. 대단한 효도와 위로는 아니지만, 적어도 어머니에게 비상 알약처럼 복용할 수 있는 무언가를, 슬프고 아플 때도 한 알씩 꺼내 먹을 수 있는 기억을 같이 만들고 싶었다.

 

매주 방문해서 옛집이 변하는 모습을 같이 보면서 천천히 이별을 했다. 대부분의 이웃들도 이사를 가셔서 반가운 얼굴들은 적었지만, 아직은 옛 거리의 모습이 남은 동네를 천천히 걸었다. 함께 살 때 함께 걷는 일을 더 자주 했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에 식초를 잘못 삼킨 듯 마음이 쓰렸다.

 

모든 장소는 유일무이하며 다른 어디에서도 되풀이되지 않는다. 놓치는 순간 사라져버린다.”

 

전화 통화로 안부를 묻는 일 대신 직접 만나고 걸으며 얘기를 나누니 날씨와 계절의 변화도 함께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는 옛집과 이사에 대한 아픔을 얘기하는 대신,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어 들려주었다. 내가 만나본 적 없는 생기발랄한 어린이가 이야기 속 장소들에서, 다치고 놀고, 친구들과 싸우고, 심부름을 하고, 전쟁을 피내 피난을 가고, 사람들을 만나고, 동생을 돌보며 생존하고 성장했다. 그리고 나는 모르던 야생화의 이름을 매주 배웠다.



 

1950625일 전쟁이 일어났고 1953727일이 휴전이 체결되었다는 문장으로는 전혀 알 수 없는 풍경들이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생생한 색을 전혀 바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죽은 이들의 피가 줄기를 이루며 흐르던 날도, 쌕쌕이 비행기가 폭탄을 떨어뜨리며 날던 날의 공포도, 급히 피하다 찔레 가시에 찔려 피가 난 아이들의 얼굴도. 그리고 황폐해진 땅과 물에서 황망한 정신으로도 먹을 것을 찾아 뭐라도 먹으며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찬란한 감동과 지독한 고통이 함께 했던 어린 베리 로페즈의 서사는 눈물 속에서도 차분하게 끝까지 읽어낼 수 있는 감당할 수 있는 인연처럼 다가왔다. 그와 내 어머니와 내가 찾아가고 만나고 머물고 살았던 장소들은 겹치지 않지만, 각자의 눈에 새겨진 풍경들도, 각자가 반추한 것들도 다르지만, 나는 그가 낯설지 않았다. 너나없이 상처를 입고, 때론 흉터로 쉽게 아물지 못하는 상처를 입고도, 장소와 관계에 기대고 힘 입어서 삶의 연결을 놓지 않고 살아간다는 닮은 슬픔.

 

자기 시련이 이례적이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구원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더 넓은 인식을 직조해냈다.”

 

성취 지향적 삶을 사느라 부모와 집과 고향을 떠나 오래 살았다. 생의 반환점은 여러 해 전에 돌았다. 내 어머니는 어느새 예순이다. 오래 전 영국에서 논문 지도를 해주선 교수가 글을 쓰다 고민이 되면, 강에 관한 건 강에 가서 물아보라고 했다. 위로와 격려를 담은 농담이라고 생각한 점이 많이 아쉽다. 그때 강에 가서 물어볼 것을. 오래 강을 보고, 자주 보고, 끈질기게 물어 볼 것을. 답을 얻거나 힘을 받아 안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누구도 혼자 생존이 가능한 존재로, 현명한 지혜를 갖춘 채 태어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태어났다는 것은 많은 존재들이 바라고 도왔기 때문이다. 내 삶은 나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다 셀 수도 없는 알거나 알지도 못하는 다른 존재들의 노동과 사랑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사랑을 한다는 것은, 사랑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구체적인 연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분리되고 쪼개지고 떨어져나가고 헤어지면서 우리가 이룬 많은 것들이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좋을 실패들이다. 그러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깊이 들여다볼수록 문명 전체의 문제가 되고 만다. 그러나 나는 훌쩍거리며 이 책을 읽는 동안 거대한 절망과 발작 같은 공황 대신 조곤조곤한 위로를 받았다. 특별한 여행지가 아닌 동네 산책만으로 내 어머니와의 연결점을 차곡차곡 늘려 나가는 것처럼.

 

개인으로서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 낼 수는 없을 거라는 무력함과 무기력 대신, 나는 베리 로페즈의 미풍처럼 소곤거리는 다정한 말을 따라보기로 한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절망 속에서 죽기보다 앞에 놓인 가능성을 위해 사는 것이 내게도 중요하다.

 

인간이 우주에서 유일한 집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알게 된 후의 충격과 이후의 끝없이 반복되는 희망의 좌절과 대응 부재는 생존의 위태로움을 발작 같은 불안으로 경험하게 한다. 미래세대 걱정을 할 일이 아니었다. 통계 숫자들은 이미 늦었다고 한다.

 

하지만 낙관하며 살아야하는 것인지 묻는 친구들 덕분에 나는 오래 고민했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희망하기로 했다. 다른 선택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선택은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살아 있으면 아무리 적어도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뭐라도 하면 뭐라도 달라질 것이니까.




 

고령의 부모와 아직 십대인 아이들 어느 쪽을 보아도, 감당해야 할 책임과 두려움이 불쑥 짓쳐들지만, 마음가짐을 제대로 세우고 행동하는 것은 공포를 수용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이 반백(半白)의 반백(半百)이 되고서야 이제 배운 사랑을 길러나가는 법이라고. 아직 남아 있는 여기살아 있는 것들이 아주 많다고. 힘이 없지 않다고. 얼마가 되었든 이울어가는 몸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생명이라는 선물을 만끽할 것이라고지금,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이 서로를 살아가게 하는 사랑의 기록이... 뜨겁고 아픈 고통도 눈물도 닦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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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단어 -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
르네 피스터 지음, 배명자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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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다, 정치적 올바름도 정체성 정치도... 관련 분석과 비판의 내용들도.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고도 이미 하고 있는 행태를 인지하는 것도. 옳은 것보다 쉬운 것만 선택하는 것은 문제지만, ‘옳다’는 것이 전가의 보도나 무적 방패가 되는 것도 문제다. 미국 진보 엘리트주의가 민주주의를 망쳤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러니 기회가 있다면 정확히 잘 배워서 파악해 봐야한다. 자신이 차별주의자란 것을 모르던 이가 책을 읽고 구체적인 사례와 통찰력 있는 설명을 통해 비로소 깨닫듯이.


“이른바 포용의 언어는 저학력 폭도보다 우월해지는 수단이자 먹고살기 바빠 진보적 담론의 최신 흐름을 미처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수단이 되고 만다.”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PC’란 표현은 25년 전 영국에서 처음 들었다. “PC가 재미를 다 망쳤다”라고 한 이가 백인 영국 남성 교수였기에, 나는 잘 모르고도 PC편에 서자고 혼자 생각했다. 짐작일 뿐이지만, 그가 재미를 느끼는 표현에는 저보다 약자를 조롱하고 엄중한 사회적 조건들을 냉소하는 내용일 거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랬다.


그래서 PC한 표현을 배워서 사용하려 노력했고 기회가 생기는 대로 주변에도 잘 알리고 싶었다. 그 후 이십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건 내가 느끼기에나 긴 세월이지, 초기에 제안된 PC한 표현들도 그다지 일상 통용이 잘 되고 있지는 않다. 거기에 새로운 표현들은 계속 늘어났다.


언어는 강고한 사유라서. 언어 표현은 화자에 관해 많은 것들을 알려 준다. 차별주의적 언어를 사용하면 차별주의자로서 사유하는 것이다. 변명의 여지는 없다. 그렇다고 “이 차별주의자!”라고 비난하자는 뜻이 아니다. 인지하지 못한 채, 교육받고 사회화된 생각들이 여러 층을 이루고 있다는 것, 그러니 잘 고민해보고 바꾸는 게 더 나은지 함께 얘기하자는 권유다.


그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이고, 아마 평생 고치고 바꿔도 끝이 없을지 몰라서 그렇다. 그래서 새로운 표현들을 알게 되면 반갑기도 하고, 바로 고쳐지지 않아서 간혹 버겁기도 하다. 그리고 누군가 내가 알고 있는 PC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 그 사람의 의견을 참을성 있게 듣는 일이 좀 힘들어졌다. 마치 상한 재료로 요리한 음식은 건강하지도 맛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내가 선의로 무엇을 한다고 해도, 설명과 전달은 다른 훈련을 필요로 한다. 어렵다. 스스로 깨달으면 저항감이 덜하지만, 타인의 지적은 수용에 더 힘이 든다. 매번 같은 설명을 반복하는 것도 힘이 든다. 인내심이 적어서이겠지만, 2단 구구단을 계속 외워야하는 벌을 받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아마 먼저 알았기에 갖는 이런 태도가 때론 고압적이거나 훈계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지적하듯이 잘못 말할까 두려운 누군가를 침묵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내용보다 표현에 더 집중하는 어리석은 경향을 부추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독일 언론인이 저자라서 상황이 많이 다를 수도 있겠단 생각했는데, 공감되는 내용도 적지 않았다. 물론 새롭게 배운 내용도 많았다. 그리고 너무나 다른 각국의 정치사회적 환경을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어떤 부분은 반론하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기도 했다. 


침묵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말해야할 것이 있는 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사회, 정확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인지하고, 드러난 표현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회를 희망한다. 항상 잘 할 자신은 없지만 검열보다 표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 오만하지 않은, 가족, 동료, 친구로 사는 것이 나의 큰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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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니를 뽑다
제시카 앤드루스 지음, 김희용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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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니’란 표현이 낯설다. 기억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지만 어릴 적엔 ‘유치’라고 불렀던 듯하다. 어쨌든, ‘젖니’가 흔들리고 어쩔 수 없이 뽑아야하는 모든 순간이 눈 뜨고 꾸는 악몽처럼 싫었다.


젖니를 뽑는 건 모두의 공통 경험인데 저자만의 고유한 경험 속에서 어떤 서사와 의미가 있을지 궁금하다. 강화길 작가와 이소호 시인의 추천이라 큰 기대감에 설레며 펼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주는 단어, 내가 붙잡고 매달릴 수 있는 명칭이 필요했다.”


28살이란 어떤 것이었는지 내 경험에 미루어 생각해볼 수밖에 없으니 열심히 기억하고 상상했다. 28살 생일에 나는 사진을 너무 많이 찍는 친구 때문에 빨리 지쳤다. 고단함조차 친구는 사진에 담았다. 그날 나는 소원을 빌었나, 아님 다짐을 했나.


‘나다워지는 것’ 왜 뻔뻔함이 필요한지 생각해보면 인간 사회가 마음에 들지 않다가, 나이 무게만큼 곧 수긍하고 만다. 그럴 필요도 있는 것이지. 어쨌든 나는 하루 빨리 내가 살던 세계를 떠나고 싶었고, 그건 결국 나답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한 선택이었다.


젖니는 이미 다 뽑았고, 사랑니(wisdom teeth)는 아직 나기 전이었으니, 어정쩡한 상태의 인간이었다. 사랑니가 나고 발치를 한 후에도 지혜란 좀체 생기지 않았지만. 20대의 불안과 죄책감과 복잡한 울렁거림을 이해한다. 지금은 그조차 부럽고 눈부시지만, 당시엔 잠을 빼앗고 몸을 아프게 하던 감정들.


“나는 토할 것 같았다. 내가 부족하고, 내게 거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봐 너무 두려웠다.”


태어난 조건이 물질적으로 덜 부족하면 덜 힘들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결핍, 휘둘리는 대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정체불명의 감정들, 대부분이 실패인 원인 분석들. 갖가지 멍청한 시행착오들. 성장은 고통이다.


어쩔 수 없다. 용기를 내어 한 발을 옮겨보거나, 그 자리에 선 채로 보이지 않는 곳을 그리워만 하거나. 그것이 처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 식사 주문이할 지라도, 모든 용기의 순간들이 조금씩 쌓여 나만의 힘이 된다.


역사의 후대는 선대보다 똑똑하고 현명할 수밖에 없다(고 믿고 싶다). 선례라는 시행착오의 데이터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다치게 하면서까지, 요구사항에 맞춰간 억지를, 때론 허망한 삶을, 더 젊은 세대는 더 일찍 간파하고 거부할 수 있을 것이다.


가진 것이 적거나 없어서, 욕망은 더욱 관능적으로 날카롭게 느껴지고 표현되는 걸까 싶게 화려하다. ‘나는 무엇이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화자의 대답이, 사건들을 건너며 읽는 내내 궁금했다. 답을 찾으면 명칭도 비로소 갖게 되려나.


“나는 아무것도 원하고 싶지 않았지만 당신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당신이 내 삶을 활짝 열어젖혔고, 내 모든 욕망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풍미와 풍요로움을 원하고, 충만하며 개방적이고 싶다. 이 모든 것을 원하고, 그 모두를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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