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와이너리 여행 - 식탁 위에서 즐기는 지구 한 바퀴
이민우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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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코너 앞에 서서 아무 와인도 못 고르고 헤매다가 그냥 나왔다대단한 와인을 사려던 것도 아닌데 눈 감고 아무거나 집어도 되는데무엇을 고민하는 지도 모른 채 고민하다 못 샀다집이 가까워질수록 이 무슨 신박하게 멍청한 짓인지 기가 막혔다간단한 판단도 불가능할 정도로 혈당이 떨어졌나……달달한 포르투 와인에 자꾸 눈이 가긴 하던데…… 정말 달짝지근을 싫어해서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단 거 안 단거 두 병을 사면 되었을 텐데……화가 나는데스스로에게 화를 내는 건 비참할 정도로 무의미한 짓이라 결국 화도 못 냈다.

 

와인을 못 마시니 와인 책이라도 읽자면면이 놀라운 점들이 참 많은 작가들을 드물지 않게 만나지만이민우 저자 역시 변화무쌍하고 역동적이고 성취 지향적인 이력이 대단하다변화를 시작한 시기의 위태함도내내 집중을 유지한 와인에 대한 열정과 애정도 그렇고관련 분야에 뛰어들어 기어코 전문가가 된 짧지 않은 시간의 모든 노력 역시 그러하다도멘 바롱드 로칠드의 한국 담당이셨다니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의 등장인물처럼 느껴진다.

 

이력에서 짐작해보면 저자의 첫사랑이자 진짜 사랑은 프랑스 와인일 것이다다른 와인 이야기를 할 수는 있지만 프랑스 와인을 빼곤 와인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점 정도는 와인 공부가 아무리 싫은 나라도 알고 있다단지 너무 많은 정보와 이야기와 찬양에 지쳐 다른 이야기도 듣고 싶을 뿐.

 

160년 동안 명예와 지위를 지키고 있는 그랑 크뤼 와인최고의 와인을 맛보기 위한 13가지 사유인간의 수명보다 긴 프리미엄 와인을 만드는 샤토 라피트 로칠드줄 서도 못 사는 로마네 콩티지나친 세계화와 상업화를 비꼬며 와인은 죽었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도마스 가삭을 시작으로 14세기부터 교황의 와인을 만들어온 샤토뇌프--파프나폴레옹이 패한 후 외교관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프랑스를 구한 샤토-오브리옹 등 프랑스 와인의 역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이야기들을 취할 듯한 유려한 표현들로 풀어 놓으시고,

 

프랑스의 와인 생산지에서는 다양한 품종의 포도나무를 한자리에서 보기가 쉽지 않다그 이유는 지역에 따라 심을 수 있는 포도 품종들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중략동시에 프랑스 정부는 교육과 연구의 목적이 아니라면 다른 포도나무를 심는 것을 규제하고 있다반면 관련 규정이 까다롭지 않은 미국이나 호주와 같은 신대륙의 경우다양한 포도나무를 하나의 포도밭에서도 볼 수가 있다.”

 

두 번째 아비뇽 교황인 요한 12세는 지역 와인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요한 12세는 샤토뇌프--파프 마을에 교황의 성을 짓도록 명령하였고 직접 포도밭도 조성하게 되는데바로 이때부터 샤토뇌프--파프의 와인이 교황의 와인으로 탄생하게 되었다샤토뇌프--파프는 와인의 황제 혹은 와인의 교황이라는 별명으로 전 세계 애호가들의 입맛을 지배한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가장 사랑하는 와인으로 알려져 있다.”

 

오랜 휴가를 보내기로 유명한 프랑스에서도평생 한 번도 휴가를 가보지 못한 농부들을 많이 만났다그리고 그들이 만드는 와인은 항상 훌륭했다농부들의 시간과 열정이 같이 블렌딩된 것처럼 말이다어떤 와인들은 와인 메이커의 성격을 닮기도 한다음악을 좋아하는 농부들은 종종 수확 철의 포도밭에 음악을 틀어 놓기도 하는데이들의 와인은 왠지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이 난다.“

 

나로서는 반갑고도 감사하게도 마지막으로 토착 품종과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와인을 만들어내는 스페인칠레이탈리아 등 세계의 대표 와이너리 12곳을 소개해 주신다재배된 포도를 60~120일 건조시켜 와인을 만드는 이탈리아의 아마로네와 레치오토’ 이야기를 읽으며 무력한 그리움에 시달리고 있었는데현대 회화 작품처럼 쿨하고 시크한 오퍼스 원’ 이야기를 해주셔서 순간 연상 기억이 번쩍어딘가 킬리카눈 킬러맨즈 런 카버네 소비뇽Kilikanoon Killerman's Run Cabernet Sauvignon과 Riesling이 있(어야 한).

 

이 섬뜩한 제목 - killerman's run - 의 호주 와인은 로버트 파커가 21세기 최고의 레드와인이라고 격찬했는데도 불구하고 롯데칠성에서 4만 원대에 판매를 시작했고실제 구입가는 2만 원대였던 미스터리한 유통의 와인이다유사품인가 의심하며 구입한 친구가 명절 선물로 한 세트 하사한감사히 받았지만 민트 초콜릿 맛이 포함되었단 설명에 화들짝 놀라 치약은 삼키는 거 아니라 배워서 민트 차도 못 마심 너무 잘 보관했다 잊어버린 와인이다그나저나 이 이름은…… 호주의 사냥 전통을 자랑스러워하신다는 뜻이신지…… 궁금했는데 리즐링 옆면에 설명이.



 맛은…… 다음번 와인 코너 앞에서 더 이상 망설이지 말 이유를 충분히 제공해 주었다. 너무 익어버린 무화과 향이 나는 듯한 메독, 작은 새처럼 가벼운 메를로, 흙내가 올라오는 키안티, 이 중에 뭐든 고민 말고 몇 병 사서 쟁여 두련다.

 

무라카미 류는 그의 소설 와인 한 잔의 진실에서그가 마신 칠레 와인이 남미 무용수의 모습과 같다고 했다와인은 병이 오픈되기 전부터 이미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여행한 파리의 골목을 상상하며 진열대의 프랑스 와인을 고르기도 한다진지한 와인 메이커들은 이런 소비자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다그들은 와인의 품질에 신경을 쓰는 것만큼이나 자신들이 만든 와인이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고민을 한다.”


이 글을 이 책에 담아 주신 이민우 저자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오늘 나의 동아줄이 되어 주었다. 어느새 이런저런 정체성이 생길 정도로 오래 많이 마셔 버릇했다.  21세기 최고의 레드 와인과 로버트 파커와 호주 국민들께 사과의 말씀을...... 그저 제 길들여진 입맛이 문제이며 온전히 취향의 문제라는 점을...... 모든 게 너무 새롭고 낯설어서, 저는 첫눈에 반하는 유형이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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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조선의 또 다른 풍경 - 풍문부터 실록까지 괴물이 만난 조선
곽재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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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괴물 백과>의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무척 재밌겠다 흥분했더니 이미 블로그 연재로 알만한 이들은 다 아는 유명한 SF작가였다어린 시절 전래동화에 충격을 받아 마음이 멀어진 내게 한국의 괴물들은 대부분이 새로운 내용들이라 충분히 재미있었다


그래도 백과사전 형식의 괴물 소개서란 캐릭터에 관심이 아주 많은 이들이 아니라면 이어지는 이야기가 없어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귀중한 자료라곤 생각되지만 SF작가의 작품으로 새롭게 창조된 세상 구경을 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기분을 나만 느낀 건 아니었는지이야기를 입어 살아난 괴물들이 태어났다너무나 차분하고 단정한 목차를 보고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백성왕조해외이 얼마나 순차적인 예상 가능한 괴물 소개 방식인가! - 드디어 좀 더 다채로운 괴물 이야기를 들어보자신나서 읽기 시작했다.

 

조선왕조실록부터 열하일기까지 각종 사료에서 발굴한 스무 괴물너무나 구체적이고 실증적이다조선에 괴물이 살았던 건 확실하다고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시니나는 부럽기만 하다괴물이든 귀신이든 나는 뭘 목격한 경험이 없다귀신 만난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데막 싫어하는데도 굳이 만난 이들도 많던데막 만나고 싶어 하는 나는 왜 여직 기회가 없는 것인지귀신도 꺼리는 성격적 결함이 있다는 건가 괜히 막…….



조선괴물지도 정말 멋지다!

마음 같아선 당장 짐 싸서 시동 걸고 지도 따라 여행을 떠나고 싶다.

 

위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1, 2, 3장의 주제는 백성과 괴물들’, ‘왕과 괴물들’, ‘외국에서 온 괴물들이다. 1장을 읽다 보면 재미와 흥분은 사라지고 마음이 아파지는데당시 수많은 백성들이 이해하고 예측하기 힘든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괴물들을 자꾸만 만나는구나 싶은 느낌이 든다왜 이렇게 힘든지 이유를 알아도 자신들의 힘으로 바꾸지 못하니 반복되는 힘든 시간을 위로하고 가혹한 현실을 잠시 잊고자 괴물을 아주 열심히 믿게 되는구나 싶기도 했다.

 

소문으로 떠돈 괴물 이야기들은 임금님과 대신들을 중심으로 기록된 역사나영웅을 찬양하는 서사시가 담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삼구일두귀(三口一頭鬼)’ 이야기에서는 조선 전기 전라도에 살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재미로 하는 게임’ 캐릭터들이 아니라농업이나 어업과 관련된즉 생계와 관련된 괴물 이야기들이 많다간혹 도움을 주는 삼구일두귀와 같은 괴물이 등장하는데, “부자 되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일기예보만 누가 알려줘도 좋겠단 소박한 바람에 속이 상한다굶지 않고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만 살면 좋겠다왜 이런 인간 같지 않은 괴물이 할 법한 짓들을 하냐고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조선 시대 중기의 이야기책 어우야담에는 고려 임금 우왕이 죽기 직전 자신도 용의 자손이라며 그 증거로 웃옷을 벗어 용 비늘이 돋은 피부를 보여주었다는 전설이 실려 있다이성계 일파가 고려 임금의 자손이 아니라 신돈(辛旽)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처형하려고 하자자신은 고려 임금의 자손이라고 항의하며 용 비늘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사는 일이 녹록하지 않은 것은 왕가의 임금도 마찬가지였는지권력이 집중된 곳이라 오히려 더욱 무시무시한 괴물 같은 짓들이 남발했는가 싶다비참하기 그지없는 짧은 생을 살고제 아비에게 죽임을 당한 기막힌 비극적 인물인 사도세자의 경우에는 그럴법하다 싶기도 하지만성종과 같은 조선왕조를 통틀어 성군이라는 임금들 중 한 분의 시대에도 괴물의 기록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도깨비는 무당이 섬기거나 무언가를 부탁하는 귀신또는 신령 같은 대상이다심지어 임금의 아들을 해치는 음침한 주술까지 들어주는 듯하다…… 영조 시대 무당과 추종자들은 도깨비를 전염병 귀신과 비슷한 괴물로 믿었다고 추측해볼 만하다.

 

영화 물괴를 본 적이 없어 모르지만그 괴물의 연원이 연산군과 그의 사냥개라는 점 역시 설명이 흥미로워 몰입해서 읽었다친자식처럼 키웠지만 결국 남보다 못한 태도로 연산군을 쫓아낸 정현왕후의 죄책감과 더불어왕가 역시 권력 다툼에 언제든 실각하고 쫓겨나고 죽임을 당할 수 있었던누구라도 안전망이라곤 없는 삶을 살았던 시대의 불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저자는 한 가지 더 유의미한 지적을 하는데왕가가 이 지경일 때원래도 살기 힘들었던 백성들의 형편은 어땠을 거냐고 그렇게 묻는다어쩌면 집권을 위해 다투던 서로가 서로에게 괴물 같은 존재였을 터이고이 모든 세력집단들은 자신들이 외면하고 잊어버린 백성들에게 괴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조선에 괴물이 살았던 것은 확실하다라고 한 저자의 말이 의심할 여지가 없어진다.

 

부족하고 익숙하지 않은 괴물 지식이지만 3장을 읽다가 금두꺼비가 한국이 아니라 고대 중국의 항아(嫦娥)’ 설화가 원조라는 사실에 좀 놀랐다금두꺼비는 해외파 괴물이었다그래도 이 설화는 짐작할 수 있듯이 혼란하고 힘겨운 상황이 아니라 적어도 금으로 만든 두꺼비를 상상해볼 여유 정도는 있었을 때 만들어낸 것이라 짐작되니여가 시간이면 이야기 정교한 상상과 거짓말 를 만들고 들려주는 인간만의 그 독특함이 사랑스럽다.

 

그리고 우연히 며칠 전 읽은 소설 속에서 조선 태조와 세종의 여진족과의 외교 정책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바로 그 세종의 북방으로의 영토 확장 침략 으로 여진족 계통의 북방 이민족 원주민 -에서 유명하던사람 1만 명을 잡아먹었다는 만인사(萬人蛇)’ 괴물이 조선에 소개되었다 한다. 1만 명의 피가 뭉친 만인혈석(萬人血石)’을 품은 괴물은 그 지역에 얼마나 처절한 전투가 계속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들려주었다.

 

어쨌거나 역시 재미있는 소재들이다곽재식 작가 이전에는 한국의 괴물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멋진 모습들로 모이는 일이 없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쓸쓸해지기도 한다식민지와 전쟁이란 어느 한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뭉텅 베어내는 대단한 단절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삽화들이 참으로 고상하고 유려하고 아름답고 생명력이 넘치고 묘하게 그리운 기분이 든다아주 어릴 적 조부모님이 입혀 주신 꼬까옷을 입고 아얌에 운혜까지 야무지게 차리고 친지들 댁에 인사를 다니던명절과 의복으로 한 조선 체험 시절이 기억나서 그런가보다.

 

인간만이 번성하고 무서운 것 없어 온갖 패악을 저지르며 인간답지 못하게 사는 세상이 신나지도 즐겁지도 않다코로나가 의료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총체적 대응이 필요한 일이듯쉬운 일 별로 없는 모두의 삶에도 인간 말고 더 다양한 많은 존재들이 함께 어울려 살면서 대화도 위로도 나누면 좋겠다인간의 상상 속에서만 태어나고 힘을 갖추지만인간에게 꾸짖음과 가르침을 줄 수도 있는 괴물들도 더 많아지면 좋겠다 싶다.

 

선하거나 악하게집 안처럼 가까운 곳이거나 외국처럼 머나먼 곳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괴물들은 어떤 한 가지 기준이나 편견을 따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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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람들
박솔뫼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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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잘 쉬고 여기로 돌아와 일을 열심히 하고 마음을 다잡고 주어진 일에 감사하고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경마장의 말처럼 달리는 사람이 될 수가 없나 나는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데 쓸 힘이 없었고 점심을 먹고 저녁에 뭐 먹지 생각하는 것처럼…….

 

여전히 회사에 가기 싫었고 회사에서 별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회사에 가기 싫었고 비슷하게 말도 잘되지 않았고 생활을 위해서라면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그래도 겨울보다는 여름이 훨씬 나았으므로 여름은 정말 좋다고 생각했다방금 전 바에서 만난 여자는…….

 

[건널목의말]을 처음으로 읽으며문장에 담긴 기분이 전혀 공감이 안 된다는 건 아니지만프린트가 잘못된 것인지 난독증이 온 것인지 실컷 당황하며 일단 끈질기게 글자들을 읽어 보았다이야기의 방향이 휙휙 바뀐 모양을 화살표로 표시하면 중소 도시에 표지판을 다 세울 수 있겠다 싶었다누군가의 혼잣말을 따라 읽기란 이렇게 어려운 도전이란 걸 처음 배웠다그러고 보면 남의 혼잣말을 따라 읽을 것 자체가 처음이다뭐랄까불편하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농구하는사람]에는 다짜고짜 최인훈의 광장’ 속 인물들이 등장한다참고도서를 다 읽고 다시 오란 말인가오래 전 읽었지만 내 일상과의 접점이 적어 많은 내용이 기억에 남지 않았다고 해서 심통이 더 나는 것인지이 단편을 읽어 나갈 수 없다는 판단에 뇌가 멈춤’ 신호를 내려 멍한 것인지그런 극도의 불친절함을 가능성이라고 짚어 보기도 할 만큼 정신이 나갔다그 와중에도 특정 문학 작품들을 이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은 재밌고 신기해 보였다.

 

[이미죽은열두명의여자들과]......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처절한 직접적인 처벌생각은 많지만 어떤 것도 말로 글로 남길 수는 없는 기분이다.

 

[자전거를잘탄다]를 읽으며 덕분에 자전거를 배우던 때를 떠올렸다마지막으로 덤불 속으로 넘어지던 순간이 지나고 잘 타게 된 전환의 순간비로소 잘 타게 되었는데 잘 안 타게 되었다한국의 도시들은 자전거 타기에 참 별로다의외로 기후도 별로다.

 

[매일산책연습]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무수한 장면들 중에서 사건의 명칭만 남은정말 오랜만에 들춰본 역사적 사건이 등장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의 고신대 학생들이 미국 정부가 5·18 광주 학살을 용인했다고 비판하며 부산미문화원을 방화한 사건.

 

오래 전 근현대사 공부를 할 때 요약된 몇 줄로 읽고 넘어간 것이 전부라서처음으로 단일 사건으로 찾아보았다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미국에 대한 기대와 선망이 한 점의 오점도 없었을 시대에, 1980년 광주학살을 자행하고 쿠데타로 일으킨 신군부를 저지하기는커녕지지와 동맹을 강화하고 제5공화국의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고 충격과 배신감에 비판을 넘어 여러 미문화원에 방화하는 격렬한 사건들이었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시기에 미국이 신군부의 군대 동원을 용인했다는 정황이 알려지고 있는 상황에서버마의 실시간 상황은 어떨지 불안하고 걱정이 된다그칠 줄 모르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식인과 형제살해를 자행한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들인 우리들은 그 조상의 뇌로부터 거의 진화하지 않아서 뇌 자체는 여전히 아주 보수적이라고 뇌과학자들은 말한다그래야 하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특별히 더 야만적인 사회의 모습을 볼 때면 수치스럽고 절망적이고 답답한 기분은 어쩔 수 없다.

 

8개의 이야기들길지 않은데 짧게 읽히지도 않는다소설집에 정식 논문의 분위기를 풍기는 해설과 참고도서가 붙어 있고본론으로 바로 들어갑시다!하며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쭉 전개하더니 막상 글로 전할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빼버리고 남긴 마음의 심상만 담겨 있는 전시회에 서 있는 기분이다내게도 예술경영을 전공한 친구가 있다그러니 선입견은 갖지 않겠다.

 

읽히는 것만 읽으면서도 무엇을 읽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으니 지치기도 하고 나른해지기도 한다.

 

[우리의 사람들]에서 저자는 자신이 말과 추위를 힘들어하는 사람이라고 하며삽을 들고 차라리 말을 묻는 상상을 한다그렇게 말들을 흩어버리고 자신은 따뜻한 곳에서 추위가 사라질 때까지 동면을 하고 싶다고몇 문장을 따라 읽었느냐는 정확한 수치와는 관계없이 이쯤에서 나는 갑작스레 무언인지 이해가 된다(는 착각이나 위로가 생긴다). 갈팡질팡엉망진창을 멈추고 차라리 동면을 할 수 있다면스스로는 멈추지 못하는 활동들을 그렇게 멈출 수 있다면그 한 때의 삶의 기록은 깨끗할 수 있겠다 싶은 기분모든 힘든 과정은 다 지나가고 찬란한 봄 날맑은 물과 반짝이는 풀과 잎들이 산들거리는 그런 완벽한 날에 잠에서 깨고 싶다는 기분.

 

매번 할 수 있을까이걸 왜 하는 걸까하는 고민을 한다안 해도 나에게 아무 지장이 없는데 왜 하는 것일까매번 왜 하는지 어떻게 가능하게 할지 생각하면 괴롭다.”

 

어느해인가 어쩌면 여러해 동안 그랬다고 들은 것도 같은데 쓰는 것에 대한 압박이 너무 심해 뜰의 잡초를 다 뽑고 있었다고 했다중략맞아 맞아 그때 그 넓은 곳 전체를 다 뽑아버렸지뭔가를 강한 신념을 가지고 오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매번 끊임없이 이걸 왜 하나 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을 그때 직접 듣게 되었다.

 

저자가 아주 유능한 의사라면 나는 아주 말 잘 듣는 환자가 된 기분이다이 작품은 내 가독성과 문해력으로 감당할 수 없을 거란 결론을 내려는 무렵그 대신 나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설핏 감지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결론과 정리가 없는 상태를 못 견디느라 왜곡된 결말일 가능성도 많지만.

 

아주 익숙한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새로운 형식으로 다시 들려주는 게임과도 같은 방식에 휘둘려서 그렇지, ‘어쩌면’ 저자는 단순한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 주고 있었는지 모른다. ‘을 안다고 확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그것이 누구의 삶이라도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확언할 수 있는 사람은 있는가내일이 미래가 모르는 시간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사는 일은 누구라도 비슷한 반복이 반복되는 일이 아닌가……그러니 우리는 이토록 느슨하지만 같은 운명에 속해있지 않은가라고.

 

가끔 나는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다고 생각한다저를 위해 무언가를 한순간 포기해주십시오저의 고민을 떠안아주십시오나 역시 아주 가끔 누군가의 불덩어리를 삼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물론 곧 사라지는 생각이다그 때문에 나는 한동안 먼 곳으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누군가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고 그러나 그것을 어두운 마음 없이 받아들인다. [농구하는 사람]


이 소설은 정신을 뒤흔들고 균열을 내는 독한 술이자 큰 망치이다.

마음을 단단히 하고 읽으시길.
무지하고 무능하고 미미한 존재인 자신을 여러 차례 만나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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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2-27 2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아주 유능한 의사라면 나는 아주 말 잘 듣는 환자가 된 기분이다... 균열을 내는 독서...도전할까 말까 망설여지기도 하네요^^

poiesis 2021-02-28 17:46   좋아요 1 | URL
쉽게 술술 읽히진 않았습니다. 여러 모로...
그래도 읽고 나니 뭔가 알듯 말 듯 남은 것들이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솔뫼 작가님 작품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참 반가워 하시기도 하더군요.
저는 처음이라 많이 낯설긴 했습니다. ^^
 
언어력 - 자주 말문이 막히는 당신에게
이도영 지음 / 창비교육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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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좋아하는 두 분 변영주 감독과 정준희 교수가 뉴스타파에서 만든 영화 족벌 두 신문 이야기를 보고 관련 이야기를 나누는 영상을 보고 나서 어쩌다보니 바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언어력에 관한 정확하고 상세한 나만의 정의는 없지만그렇다고 하더라도언어력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두 분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라읽는 내내 기분은 양 극단의 방향으로 줄다리기를 했다.

 

인간의 언어력이 예술의 경지라 해도 과할지 않을 정도로 인간 정신의 아름다운 완결적 형식미를 갖춘 전달 능력인 한 방향과이 나이에도 가장 하고 싶은 말조차 간명하게 전하지 못하는 내가 서 있는 방향으로.

 

우리 모두는 어떤 형태로든 언어의 세계에 살고 있다. 혹시 장애가 있다면 직접 경험의 범위가 한정될 수도 있지만눈을 뜨면서 다시 잠들 때까지 온갖 종류의 언어들에 노출되고 언어활동을 계속하며 살고 있다심지어 꿈에서조차 언어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그렇다고 평생 연습하고 사용한 언어에 모두가 능숙하지만은 않다는 기막힌 현실이다억울한 마음이 먼저 들지만호소를 하거나 화를 낸다고 바뀌는 것은 없으니 능력이든 기술이든 필요한 것들을 갖추어야 원하는 삶이 가능해진다.

 

뒤늦게 모국어를 제대로 배워 보겠다고 한 나에게 지인들은 정답을 가르쳐 주었다많이 읽고 많이 쓰라고.

 

무슨 배짱인지 그 정답을 두고 나는 한국어능력시험준비를 시작했다그러다 한자능력시험도 보고 한국어강사자격시험도 보고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자격증은 늘어났지만 언어력은 요지부동더 어색해지기만 했다거의 모든 문장이 비문 폭탄이랄까.

 

언어 구사력이 문제인데 어휘력만 늘려보려 했으니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수년이 지나고 테스트로 할 수 있는 방법이 고갈되니 대안이 없어서 읽고 쓰기를 시작했다올 해는 매일 읽고 쓰는 것을 새해 결심으로 삼았다.

 

여전히 번역된 책들 중 일부는 영어책 원본이 더 쉽게 읽히는 경우가 꽤 있다한국어는 참 어렵다감을 못 잡는 것인지 맞춤법은 아무 진전이 없고 서너 번을 읽어도 늘 오타가 남는다.

 

시간을 보내지 않은 분야들의 책을 많이 읽다보니 용어들에 적응하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리는 분야들도 많다인문/사회과학 전공자 분들 많이 부럽습니다. 언어가 정리되지 않으니 그 분야에 대한 사고 역시 갈팡질팡누덕누덕하다어쨌든 훈련 중이다그러니 이런 효과가 있다는 말에 귀가 온통 솔깃하다.



 

갑론을박 끝에 현재는 언어와 사고는 같지 않되언어가 사고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에는 다들 동의합니다우리는 특정한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그러다 보니 그 언어에 영향을 받아 그 언어의 사고법을 부지불식간 받아들입니다.”

 

편하든 불편하든우리는 대화할 때 상대방의 나이지위직업친밀감 등을 고려해서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상대방을 의식하는 거죠그러다 보면 존경비하겸양차별수직적 관계’ 등과 관련된 사고가 내면화됩니다한국어 사용자의 숙명이라고나 할까요.”

 

특정한 단어를 계속해서 사용하지 못하면 그 단어가 의미했던 개념도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언어를 사용하여 사고를 갈고 닦을 수밖에 없습니다우리말이 소중한 이유죠거의 유일한 사고의 도구가 아닌가요?”

 

현재 교육학을 가르치는 분이라서인지책 내용이 친절하고 배려가 넘친다아주 친근한 매체들가요 가사나 문학의 구절을 소개하며 조용히 독자를 이끈다혹시나 집중력이 떨어질까 중간에 무척 기분 좋게 풀고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문제들을 풀어 보도록 배치해 두었다테스트에 익숙한 세대라 정말 기분이 좋아진다.

 

한 조사에 따르면듣기는 우리 언어생활의 50퍼센트 정도를 차지한다고 해요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85퍼센트는 들어서 안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죠듣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에너지도 꽤 많이 소비하고 고도로 집중해야 하는 일이지요


전문적으로 말하면능동적 이해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영어에서는 들리기’(hearing)와 듣기(listening)를 구분하고 있습니다사람들이 손쉽게 잘하는 듣기는 hearing이죠. listening을 잘 해야 하는데 말이지요


잘 들으면 인생 전환도 가능합니다.”

 

수다와 유머로 위장한 새로운 정보들이 가득하고 도전 욕구를 채워주는 난이도의 내용들이 뇌를 자극한다내 언어력에 집중하기보다 자연스레 느껴지는 저자의 언어력에 감탄하며 읽는다이 책을 교재로 한 학기 정도 수업을 받으면 더없이 좋겠다는자꾸만 체제 교육으로 향하고픈 기분이 또 들었다.

 

유익한 정보와 팁을 제공하는 실용서의 수준을 훌쩍 뛰어 넘어자신의 언어생활을 민감하게 살피고 남에게 차별을 행하고 있는지 고민하는 저자의 글이라 마음이 편하고 행복해진다.

 

장애우라는 단어의 차별적 내용에 대해서는 십여 년전 활발한 토론에 참여한 기억이 나는데맙소사아직 사용 중인 줄 몰랐다역시 사회 전체의 변화란 획기적인 계기로 소문이 크게 나지 않으면 참으로 더디게 이루어지는구나 새삼 절감한다.

 

가장 새롭고 특이한 용어는 집사람아내와이프 대신 현려자(현재 반려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신다는 것이었는데뭔가 세상 현실적이고 적확한 표현에 웃음이 크게 났다폭력과 혼란을 지양하고 책임감 있는 언어생활을 하자고 독려하고더 따뜻한 공동체를 같이 만들어 보자는 말을 재밌게 조용히 차분하게 따뜻하게 하는 분의 언어이니당분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소개해보려 한다#현려자

 

언젠가 다른 책에서 말이란 원래 적과 아군을 판단하기 위해 탄생한 도구라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난다문화사회적 배경을 이해해야하지만 일부는 동의한다어쨌든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이 책의 저자 이도영 교수는 물리적 폭력 없이 모든 문제를 언어로 해결하는 사회를 꿈꿔봅니다.”라고 뜻을 밝히셨는데나는 물리적 폭력 이외에 다른 폭력도 한 번에 다 없어졌으면 하고 정월대보름을 맞아 큰 꿈을 바라본다물론 물리적 폭력은 확실히 가장 먼저 없어졌으면 한다.

 

무척 재밌게 읽었지만 내 언어력이 환골탈태한 효과는 아직더 잘 이해해서 기억하고픈 문장들만 잔뜩 생겼다그나마 밑줄 긋는 버릇이 없어 책이 멀쩡하게 살아남았다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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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1년
이인화 지음 / 스토리프렌즈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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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스릴러라지만예상을 아예 못한 바는 아니지만이 소설의 스케일은 일독으로는 자괴감을 피할 수 없는 수준이다역사, SF, 판타지스릴러 장르 불문 안 읽어본 작품이 거의 없는데도 이동 구간들을 잘 기억하고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역사를 기반으로 한 추리 소설로 명성이 자자하고오랜 세월 구축된 스토리들이 특기로 정형된 이인화 작가의 노련한 작품이다추리소설을 즐기기 위해 아주 날 선 지능과 지성이 필요하다면이 소설은 잘 작동하는 날 선 지능만이 아니라 풍부한 지식 정보와 지치지 않는 지적 호기심도 요구한다.*

 

등장인물들 중 부계 조상 한 분이 등장하시는데소설 장치라 창작된 것인지 의도가 있어 그런 것인지 남의 집안일이라 단순 실수인지어쨌든 집 안이 달리 나온다화가 나는 건 전혀 아니지만 살짝 묘한 기분으로 읽었다.

 

이야기 줄거리는 언급하지 않는 편이지만워낙 방대하고 복잡해서 일부 나를 위해서 정리해보았다그래봐야 전체 분량의 극히 일부이고 스포일러를 염두에 두고 이리저리 피한 내용일 뿐이지만.

 

우리의 희망과는 별개로 2061년 그 치사율이 흑사병 수준에 이른 바이러스는 코로나 61이란 새로운 명칭을 얻는다최악의 코로나 바이러스로 예측되는 존재의 이름은 아바돈이다한글을 사용하는 인공지능이 등장해서 한국인을 지배하게 된 세상주인공 심재익은 한글을 수호하고 훈민정음해례본을 지키기 위해 시간 여행을 떠난다. 1443, 1896년의 인물들이 선택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따라 2061년의 사람들의 삶이 결정된다는 얼개이다.



재익은 의병들에게 성난 눈길을 돌렸다. “책 어디 있나세종 장헌 대왕께서 지으신 어제 훈민정음 어디 있냔 말이다!” 초조한 나머지 목소리가 잠겨 들었다중략재익은 마음이 너무 괴롭고 울적했다수 없이 탐사를 했지만 이렇게 파렴치한 짓거리는 처음이었다인생의 물밑은 얼마나 깊은가몰락의 밑바닥이 감옥살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아버지도 어머니도 태어나지 않은 부모미생전의 시간에 더 깊은 나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창 밖은 어두웠다한때 한국인들의 것이었던 사라져버린 삶이 저 어둠 어딘가에 스며있었다그리고 재익은 홀로 남겨졌다추호도 용서 없이 흐르고 또 흐르는 시간과 함께.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기대나 희망보다는 과거에 대한 후회를 압도적으로 더 많이 느끼면 살기 때문인지다른 시간 여행처럼 이 책에서도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가 현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장면들에 수정을 가하고 싶어 한다과거를 수정하는 순간바뀔 미래는 미래에서 온 주인공이 겪어 보지 못한 또 다른 미래일 터인데그 때의 판단은 오류가 전혀 없는 것인지나는 언제나 그 지점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이 소설만의 독특장 장치로서 현대과학과의 불필요한 논쟁조차 피하려는 영리한 의도인지시간이동의 방식은 육체를 이동시키지 않는 정신이동 방식이다.

 

홀로그램인공지능기계와 인간 사이의 혼종뇌에 전자칩을 이식해 몸을 인공지능에 임대한 인체 혼종 등의 다양한 SF 판타지 장치들로 등장한다새삼스럽지만 딱히 불가능한 기술 수준은 아니다 싶은 기분에 변화 속도가 참 숨 가쁘게 빨라졌구나 싶다그와는 별개로작가의 메시지를 전하는 인문학적 성찰이 넘치는 문장들은 2021년 독자인 내가 충분히 따라 갈 수 있는 내용들이고 시사성과 현실성을 갖춘 통렬한 비판들이 적지 않은 분량 나오기 때문에 진지하게 읽고자 하는 독자라면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상당히 느려질 법도 하다.

 

탐사자들이 서로 적이 될 수는 있어하지만 우리 사이엔 어떤 규칙이 있다고우린 권력의 개가 아냐과학자들이지서로에 대해 기본적인 존경심을 가지고 있단 말야이번 일은 하면 안 되는 일이야.” “되는지 안 되는지그걸 너와 내가 결정할 수 있어?”

 

시간여행은 상용기술인 듯기술사용에 따른 어려움이나 부작용은 전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성공적으로 1896년으로 이동하면 독자는 SF 판타지 픽션의 세계로부터 순식간에 친일파친러파독립운동가독립협회의 무대가 차려진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마치 실제 현실의 인물들이 카메오 출현을 하는 드라마 풍경처럼 픽션의 존재감을 지워버릴 듯한 사실성으로 전개된다게다가 책 중간 중간의 정성스런 삽화들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자료들처럼 느껴지는 지라 이 작품이 소설인지학문적 귄위가 있는 연구 자료인지 재밌는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작가가 얼마만한 공을 들여 이 작품을 만들었는지 모든 것에서 느껴진달까.

 

1896년에 발생한 아바돈의 치명적 옛것 치사율이 너무 높아 숙주를 너무 빨리 죽였던 바이러스 -의 이름은 데모닉이다바이러스가 일곱가지 영역에서 보이지 않는 변화를 보이게 하는 기술은 이도의 무지개라 명명된다구체적 역사적 사실들을 기억하는 것에 취약한 독자로서 제물포에서 여러 세력들이 격돌하는 장면은 역사 판타지물 게임처럼 박진감있고 구체적으로 느껴졌다이도(세종대왕우파좌파반이도파의 탐사자들로 나뉘는 각 세력들이이 원하는 것은 바이러스의 원형 균주와 훈민정음 해례본이다판데믹도 종식시키고 인공지능관련 산업 패권도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니 이 모든 소란이 다 납득이 간다.

 

초라하고 애처로운 사람들이었다그러나 누군들 대단한 값어치가 있겠는가인생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데누군들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받을 수 있겠는가.

 

기계 혼종인인체 임대인철벅이유곽 창녀만인계 노름꾼세계공동어 운동가아편쟁이부두 하역 인부 그리고 시간여행탐사자들 등 흥미진진한 역할을 맡은 인물들이 가득하고판타지 픽션으로서의 새로움과 흥미진진함이 부족하지 않고역사 기록에 충실하게 토대를 둔 역사 판타지로서의 이야기들이 지루할 틈 없이 이어진다특히 1895년에서 1896년 구한말의 시기에조선왕조의 태조와 세종이 각각 여진족과 맺은 관계의 구체적 내용들이 역사적 사건들의 이면으로서 설명되는 내용은 무척 흥미로웠다이제는 명칭으로만 남은 청일전쟁 역시인천 제물포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다시 생생하게 이야기로 경험하고 나니역사서를 읽는 기분으로 몰입이 되기도 했다.

 

조선인들은 여진족을 팔천(八賤)이라 부르면서 백정무당노비광대 같이 대접했다서북 사람에겐 벼슬도 주지 않았다말로만 동족이었다여진은 조선에게 문명의 이름으로 복속당했다조선이 일본에게 당한 것과 똑같은 수치를 겪었다내가 문명이다더러운 반편들아게을러터진 무지랭이들아너희는 나를 규범으로 받아들이고 나를 흉내 내어야 해그러면 나와 같아질 수는 없지만 언젠가 비슷해질 수는 있을 거야 ……오만한 대동주의와 장형의식의 끝은 언제나 최악의 결별이었다.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이인화 작가가 이야기를 엮어 내는 기막힌 재능과 사회적으로 평가 받은 명성을 생각하면 별 일도 아니겠지만새로운 아이디어와 깊이 있는 통찰이 공존하는 점은 여전히 인상적이고 부럽기도 하다특히 감정의 과소비나 감정적 사치라는 표현을 문맥 없이 가끔 사용하는 나로서는 문자학적 사치라는 표현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궁금하고 반갑기도 했다가장 발달한모두가 꿈꾸는 알파벳인 한글을 문명의 주변국인 조선에서 만들고 한국인이 사용한다는 사실이 사치라 하는 저자의 말을 읽으니사치와 낭비를 유쾌하게 느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기분이 들뜨고 사치스러워진다.

 

인간의 발음하는 분절음은 겨우 3천여 종인데 로마자는 그것조차 완전하게 표기하지 못했다인공지능 시대가 되자 각양각색의 발성 기관을 가진 기계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기계들의 현란하리만큼 다양한 흡착음당김음기식음떨림음공명음 앞에 로마자는 무용지물이었다중략그 불어내고 빨아들이고 쯧쯧거리고 쉣쉣거리고 뢱뢱거리고 왤왤거리고똙똙거리는 소리를 표기할 수 있는 문자는 지구상에 단 하나이도 문자뿐이었다세종 이도(?)가 1443년에 발명한 이 문자는 초성 중성 종성을 결합하여 398억 5677만 2340종의 분절음을 표기할 수 있었다.

 

벨은 이도 문자의 출발점을 알았다고 생각했다모든 언어는 근원모음 아에서 시작되고 감탄사와 의성어로 이어진다전혀 다른 언어도 비슷한 감탄사와 의성어를 가지고 있다어미가 새끼를 보살피는 소리위험을 알리는 소리서로 좋아해서 함께 있고 싶은 소리서로 닮고 싶어 하는 소리소리는 생명이 우주에게 바치는 제물인 것이다 …….

 

동의하시나요근원모음이 라는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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