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과학 - 세상을 움직이는 인간 행동의 법칙
피터 H. 킴 지음, 강유리 옮김 / 심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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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에 반하는 일이 없고, 신뢰하기까지 경계심이 크고, 사람 사귀는 일에 오래 걸린다. 그렇다고 늘 타인을 골똘히 의심하는 건 아니고, 매번 제대로 판단하는 것도 아니다.

 

조심스럽고 겁쟁이라서 좋은 점은 그렇기 때문에 빠른 판단도 덜 한다는 것이다. 선입견과 편견과 인지편향을 고루 갖췄지만, 눈치가 없어서 타인에 대한 인지구축도 차근차근 느리게.

 

저자가 조직행동학을 전공한 전문가이니. 개인은 물론, 관계, 단체, 조직, 사회에서 다양한 신뢰와 불신의 이유와 역학을 가르쳐줄 듯하다. 과학으로 배워보는 신뢰라는 주제가 반갑고 기대된다.



 



 

아주 적은 정보를 바탕으로 누군가를 선뜻 신뢰하는 행동은 예외가 아니라 표준이다.”

 

신뢰가 없이 가능한 게 뭐가 있을까.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조차도 한 개인에게 중요하다. 그러니 신뢰는 관계와 사회조직의 존망과 유지와 기능을 위해서는 필수요소다. 무엇보다 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에서 살고 싶지가 않다.

 

상충하는 원칙 앞에서 우리가 내리는 선택이 더 이상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옳음과 옳음의 문제일 때 발생한다.”

 

자국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살벌한 전쟁터인 외교에 있어서도, 결국 인간들이 하는 일이라서, 신뢰는 중요하다고 한다. 이렇게 중요하고, 문명사회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살아가지만, ‘신뢰성에 대한 판단은 너나없이 서툴고, 조직행동학으로 배워보는 것은 처음이다.

 

사회과학자들은 신뢰를 다른 사람의 의도나 행동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치를 바탕으로, 취약함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로 이루어진 심리 상태라고 정의했다.”*

 

* 1)심리 상태 2)취약함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 3)다른 사람에게 품을 수 있는 긍정적인 기대치에 따른 상관관계로서의 신뢰

 


오늘 처음 들은 불쾌하고 폭력적인 표현에는 나락보내기가 있다. 내게 직접 해를 입히지 않았다고 해도, 누군가의 실수나 잘못이 드러나면, 다 같이 달려들어 죽일 듯 구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제 삶에 대한 평가는 없다는 점에서 저열한 짓거리다. ‘사회현상이 되면 불신을 강화한다.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된다.

 

진정한 신뢰에는 남이 나를 실망시킬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취약함을 감수하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신뢰도를 판단하는 특성을 배우고, 신뢰하는 법도 배우고, 신뢰가 무너졌을 때도 회복하는 법을 배우는 이 책의 방향성이 좋다. 안도가 된다. 사례는 다양하고 문제는 복잡하지만, 매커니즘을 알려주고 모색 방법을 제시하며 인간 행동을 설명하는 책은 반갑고 고마운 가이드이다.

 

이 책을 읽기 전 내가 아는 최선은 진심과 빠른 사과 정도였다. 저자는 역량과 도덕성이라는 유형으로 분류해서 문제를 보고, 다른 회복 방법을 제안한다. 조직, 사회, 국가로 스케일이 달라지면, 결과적으로 효과적인 회복 방법이 속임수처럼도 느껴지는 경우도 있지만, 천차만별인 상황이 있다는 점에서, 각자에게 필요한 방법을 배워 기억하면 될 것이다.

 

회복을 통해 지키는 것이 최선이 아닌 경우도 많다. 특히 폭력범죄가 발생한 경우에는 단절과 처벌이 우선이다. 하지만 개인 관계와 가족 공동체를 넘어선 경우에, 특히 인류 역사 중에 전쟁이 없었던 시간이 300여년이라는 인류 문명을 생각하면, 완벽하지 않은 이 세계에서 신뢰를 구축하며 살아갈 방법 또한 배우고 싶어진다. 다른 방법은 없으니까.

 

예를 들어 가해자 치료와 교육이라는 방법에 대한 저항감은 크다, 나는 그렇다. 특히 피해자 구제와 치료와 일상회복이 제대로 되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가해자를 위한 예산배당 자체가 화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마련되어 있는 형사 사법 시스템에서는 속죄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 우리는 좀 더 인간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참 어려운 일이다. 연구와 공부가 필요하고 끈기 있는 시도와 실천이 필요하다. 가해자의 속죄가 먼저이지만, 가해자를 다 죽이는 게 대안이 아니라면, 함께 살 방법을 찾아야한다. 저자도 더 오랜 연구가 필요하다고 한다. 멈추지 않고 연구하고 설명하고 변화를 위해 애쓰는 모든 이들이 가장 확실한 희망이다.




 

듣고 싶었던 내용과 듣기 불편한 내용 모두가 차분하게 담긴, 그래서 더 고맙게 배운 책이다. 많이 읽고 많이 이야기해주시기를, ‘나락보내기대신 신뢰 사회에 대한 논의가 더 큰 목소리를 가지게 되길 바라고 응원한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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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사도행전 - 한 평신도 지식인이 설렘과 감동으로 쓴 개화기 조선 선교사들의 이야기
오두범 지음 / 지식과감성#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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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언더우드는 같은 뉴브런즈윅 신학교 학생이었던 알버트 알트만(Albert Altmans, 1854-1939)이 선교사 지망생들을 모아 놓고 조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선교 역사에 대해 읽은 적이 없어서 많이 궁금했다. 읽다 보니, 서울에 남은 문화유산들을 방문하며, 근대사에 대해 공부한 기분이 들었다. 100여 년 전이지만, 그리 멀지 않은 역사이고, 현대사와 연관이 많아서 옛일 같지는 않았다.

 

“1882년 한글 성경이 완성되었고, 로스 목사는 서상륜*을 권서인으로 임명하여 의주, 한양으로 파송했다.” * 세례 받은 조선인

 

설렁한 방문으로는 알 수 없었던 이야기들과 잊은 기록들을 한 권의 책으로 시간순으로 읽어볼 수 있어서 시대사 정리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종교가 없는 나는 선교라는 것을 좋은 것을 발견해서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한다. 친인척분들의 태도는 그러셨고, 내게 중요한 시기마다 기도를 해주셔서 늘 감사했다.

 

세계사에서 선교는 더 복잡한 목적이 있고, 때론 개인의 의도와는 결과가 달라지기도 했고, 당시로서는 큰 자본이 필요한 사업으로서 시작되기도 한다. 시작이 무엇이었든 역사의 일부가 된 일들과 유산을 살펴보고 배우는 일은 의미가 있다.

 

특히 현대사에서 사적 의미가 큰, 한국 YMCA 운동의 시작**, 정동제일교회 벧엘 예배당(명동 성당),*** 배재학당 이야기는 반가웠다. 선교에 중점을 둔 내용 전개이나, ‘교육이 당시 조선인들에게 어떻게 이해되고, 어떤 목표가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는 일이 의미 있었다.

 

** 언더우드(H.G.Underwood), 아펜젤러(H.G.Appenzeller) 등 선교사들이 1899년경부터 설립 추진

 

*** 1892년 선축 시작, 1897년 완공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활동하는 교육을 받은 배재학당 학생들은 민족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 배재학당 기숙사는 독립지사들의 은신처가 되었고, 3.1 운동 당시에는 거사를 계획하는 민족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셔우드 박사가 여성 환자를 돌보기 위해 여성(만의) 의료원을 만들고, 여성 의사 양성에 힘쓴 내용도 다시 반가웠다. 1900,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사인 김에스더(박에스더로 흔히 불림)의 사진자료와 이후 활동 자료가 귀하다.



 

또한 1886년 지어진 이화학당의 모습과, 뵐 때마다 마음 아픈 유관순 열사의 짧은 생을 다시 만나 거듭 경애를 보낸다. 유관순을 체포하는데 열일한 반역자 정춘영은 그 후 어떻게 살다 죽었는지 문득 궁금하다.





 

수없이 죽으면서도 이어졌던 조선 독립운동, 고종황제의 헤이그 특사였던 헐버트는,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연에서 말로 글로 조선의 상황과 독립열망을 알렸다. 종교가 신념이 인간을 어떻게 단련하고 행동의 마중물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경외심으로 목격하고 배운다. 즐거운 역사 공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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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턱 - 인생의 정체 구간을 돌파하는 힘
애덤 알터 지음, 박선령 옮김 / 부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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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에서 사는 여러 해 동안, Feeling stuck, 이란 표현을 드물지 않게 들었다. 그런 표현이 느낌일 뿐이라면 좋겠지만, 결과로서의 느낌이라면 그 강력한 원인을 잘 살펴야 한다.

 

살아보니 꼼짝 못할 기분을 느낄 상황은 드물지만은 않았다. 일단 stuck이 되면 그 고착을 끊거나 없애기가 몹시 고되기도 하다. 여러모로 궁금하고 유용할 내용 찾기가 즐거울 듯한데, 최인아책방 대표님이 추천하시니 더욱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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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원칙은 앞이 아닌 옆으로 움직이더라도 어쨌든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심리개발 전략서, 이 책은 구성도 내용도 논조도 그렇다. 세상 많은 일들을 책을 통해 배우고 해결하려는 버릇이 있는 나는, ‘고착과 관련된 책도 여러 권 읽었다. 그래서 새로운 책에서 알고 있는 내용이 나오면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역시, 이 방법이 해법이구나, 하는 안도감과, 알고도 행동하지 못하는 나,의 상황에 대한 갑갑함.

 

어쨌든 이전의 상황은 지금의 상황과 다르고, 내 경험도 대응 감정도 다르다. 물론 외부 상황도 다르다. 그러니 새로 배우는 일은 도움이 된다. 특히, ‘감정적, 정신적, 행동적 도구를 적절히 조합하는 가이드는 반갑다.

 

고착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그런 장벽이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읽는 중에, ‘의사소통의 문제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생각해보았다. 책의 사례와는 다르게, 나는 자신과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걸까.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걸까. 그래서 말로는 이걸 원한다고 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 걸까 싶다.*

 

* 가짜 이해도의 함정 pseudo-intelligibility trap. 의견이 일치한다고 계속 믿는, 흔하면서도 위험한 함정.

 

가장 흔한 함정에 다수의 사례들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저자는 고착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자신만의 특수한 상황들이라고 생각하는 조건들에 묶인 독자를 일단 안도시킨다. 다들 겪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어깨 경직이 좀 풀리는 기분도 든다.

 

물론 그래도 결론은 같다. 내가 선 자리에서 내가 향하는 방향이 보이지 않는다면, 자리를 옮겨야 한다. 그 움직임 - 행동 - 만이 새로운 시야를 확보해준다. 아는데, 내 한 몸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 행동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게 느껴진다. 나의 고착 문제는 여전히 거기에 있다.

 

배움도 교육도 중요하지만 자기가 배운 걸 실행에 옮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보를 소비하는 수준에서 행동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

 

이렇게 거듭 배운 것들, 확인한 것들이 차곡차곡 쌓인 근력이 될 거라 믿고 싶다. 그래서 너무 늦지 않게, 묵직한 발걸음을 드디어 옮길 때, 넘어지지 않고 도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거라고 상상하고 싶다. 난해하지 않은 책이라서, 즐겁게 읽고 고맙게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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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본 것 - 나는 유해 게시물 삭제자입니다
하나 베르부츠 지음, 유수아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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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내가 헥사에서 일한 수개월간의 경험을 말해줄게요.”

 

소설인데, 중대 발표문을 듣는 것처럼 입 꾹 다물고 문자에서 전해지는 육성을 들었다. ‘유해게시물을 분류하는 기준들이 너무나 세세해서 오히려 그물의 구멍이 넓게도 느껴진다. 문득 내가 생각한 유해성과 법에서 규정한 내용이 어떻게 다른지 한국의 상황이 궁금해지곤 했다.

 

애초에 왜,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아셔야 할 것 같아요.”

 

주인공이 입사한 회사의 사례들을 읽으며 때론 심장이 격해져서 피가 어디론가 솟구치는 기분이 오가곤 했다. 중간 중간 책갈피를 잠시 끼우고 눈을 떼고, 이건 사실이지만 소설이라고 이상한 격려를 자신에게 했다. 슬프고 아픈 이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걸까. 얼마나 방치되는 걸까.

 

하루 종일 유해게시물과 관련 단어들을 삭제하는 이들이, 차별주의적인 유머를 사용하는 것은 소설이라 더 현실감이 있는 아이러니다. 윤리와 도덕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서 PC에 대한 지독한 비난을 농담 삼아 하는 이들이 있듯이. 더구나 자극에 무감해진 그들이 더 자극적인 영상을 찾는 이야기는 문제의 복잡성을 더 잘 느끼게 한다.

 

그냥 더 이상 인간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뿐이야.”

 

유해게시물이 생성되는 속도와 분량만 따지다보면, 세상에는 이런 게 너무 재밌거나, 구매자가 너무 많아서 엄청난 자본이 유통되거나, 인간관계에서 신뢰란 어떻게 신뢰받을 수 있는지 정신이 멍해지곤 한다. 규정에 따라 게시물을 삭제하거나 위험 신고를 하는 직업이 생겼다는 건 개선일까 광기일까,

 

그 금요일에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고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를 말씀드릴게요.”

 

영리한 작품은 일상적인 듯 무심하게 전개되면서, 서서히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는 경계를 어느새 허물고, 독자는 천천히 중독되어 호흡이 거칠어져서야 유독성을 깨닫게 된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버추얼 세계는 필요 없을 만큼,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세계는 어느새 경계를 허물었다.

 

내가 아는 한 너무 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이에요. 아니, 오히려 너무 별 게 없었죠.”

 

삭제자와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도 마찬가지다. 매일 유해게시물을 보고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정신건강을 지켜야할까. 이렇게 짧은 소설, 작은 책에서 두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큰 경고음을 듣는다. 나는 점점 더 무섭다. 단순하고 폭력적인 발언이 힘을 얻는 현실이, 정상과 비정상이 굳건하게 분류되는 사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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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심 -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경이의 순간은 어떻게 내 삶을 일으키고 지탱해주는가
대커 켈트너 지음, 이한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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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we’라는 단어를 신기해하고 좋아한다. 'some' 적당하면 좋지만awesome, 'full' 가득이면 곤란하다aweful. 읽기 전엔 경외심이란 특별한 놀라움을 목격하고 인간이 겸손하게 두려움을 느끼는 정서라고만 알고 있었다.

 

어릴 적엔 우주의 비밀 같은 것을 주로 떠올렸지만, 지금은 다른 'awe'에도 관심이 많다. ‘경외심을 과학으로 학문으로 다룬 책,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즐겁고 행복하게 읽을 기대에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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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알던 세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신비를 마주하고 경외심을 느꼈던 때는 언제였나요?”

 

예상대로다. 이 책은 경이에 대한 다채로운 재밌는 연구들과 이야기들로 가득했고, 나는 스물다섯 장의 필사 앞에서 좌절감을 느꼈다. 잘 정리할 자신이 없어서 그렇고, 스물다섯 장으로는 제대로 소개할 수가 없어서 그렇다.

 

우선 경외심이 종교적인 체험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정리해줘서 가장 기쁘다. 처음부터 내게 부재했던 종교적 경외심을 제외하고, 과학을 통해서, 타인을 덕분에, 음악과 미술과, 구도에 다르지 않는 치열한 고심을 통해 얻은 작은 통찰들에서 느끼는 경외감이 번듯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행복하다.

 

경외심이란 세상에 대한 기존 이해를 뛰어넘는 거대한 무언가와 마주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 우리가 삶의 거대한 신비와 맺은 관계에 대한 정서다.”

 

경외혹은 경외심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도, 왜 다루는지, 왜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지, 경외심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이런 질문들에 나처럼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재밌는 교과서같이 반가울 책이다.

 

경외심의 종류도 다양하고* 사람에 따라 반응의 양상도 그럴 것이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경험은 내겐 없지만, 흔한 표현인 것으로 미루어 그런 경험을 한 부러운 이들도 많은 듯하다. 내게 가장 흔한 경험은 심장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느낌인데, 나이가 드니, 경외심의 효능(?)도 다양해졌다.

 

* 경험담들은 경외심만의 특정한 분류체계로 유형화될 수 있다. 삶의 여덟 가지 경이.

 

감탄과 자각과 절감과 행동양식에 변화를 가져오는 그런 계기가 어리고 젊은 날에 내가 느낀 경외심이 내게 미친 영향이었다면, 지금은 주로 구원과 도움을 받는다. 특히 평생 소리에 민감했고, 청력은 약화되어도 감각은 더 예민해지는 이 불편한 시기에, 어떤 음악은 내게 비상약처럼 치유와 진정의 효과가 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조성진의 연주를 듣고 있다. 아니 독서를 위한 처방책처럼 도움을 받았다. 수십 수백 번 들은 연주가 많다. 평생 처음 단 한 순간도 불편하지 않은 연주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경이롭고 경외심이 든다.

 

다른 연구들도 인간은 경외심을 느끼면 기본 상태의 자기가 사라지면서 (...) 경쟁적인 마음가짐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 상호 의존적이고 협동적인 개체들로 이루어진 관계망의 일부임을 지각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특히 흥미로운 내용은 경외심이라는 정서경험을 한 후, 어떤 변화가 생겼는가,이다. 세상을 보는 방식이 변하고, 행동이 바뀌고... 언어도 아닌 경험이 이 정도의 힘을 가졌다는 것이 경이롭다.

 

그런 경험을 한 이들은 그것을 전하고 싶어 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아름다운 유산들은 전해주려 애쓴 이들이 남긴 것들이다. 나는 그 노력 자체에 경외심이 든다. 쓰레기 말고 나도 무언가를 남겨줄 수 있기를.

 

거듭 예상대로 잘 줄여 소개하기가 안 된다. 17장 필사를 앞에 두고, 환기를 위해 책에서 소개받은 경외심 걷기awe walk”**를 하러 나간다.말이 거창하지 사실은 그저 걷기 명상, 순례, 등산, 배낭여행, 저녁 식후 산책 등에서 경외심을 찾던 보편적인 인류 전통이란 설명에 행복하다. 바로 따라할 수 있는 오래 하던 걷기.

 

매번 새로운 존재를 마주하고, 변화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걸으러 나가는 행위자체가 경이로운 존재 방식이다. 다른 존재들이 살아가는 풍경은 늘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타인이든, 인간 아닌 존재들이건 다를 바가 없다.

 

보드라운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늘 편지를 받은 듯 반가운 기분이 든다. 저 바람 속에 섞인 수많은 소식들, 나 이전에 살았던 수많은 존재들. 호흡이 신성한sacred 이유 중 하나는 지구 역사의 증거이자 흔적이자 어쩌면 새로 탄생할 생명들의 여행 같은 이 공기를 마시고 내뿜기 때문이지 않을까.

 

산책하면서도 여러 문장이 떠올라 즐거운, 이렇게 재밌는 심리학(?) 책은 처음이다. ‘경외심을 공감하는 많은 동료 독자들이 생기면 좋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울 것이다. 온통 경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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