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황석희 - 번역가의 영화적 일상 에세이
황석희 지음 / 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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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반성에 자존심 같은 거 없어.”

 

저자가 번역한 영화 대사 같은 멋지고 유쾌한 문장이다. 잘못했다는 판단이 들면 가능한 빨리 사과하자는 결심을 유지하는 중이라 더 반갑다. 잘못을 저지르는 회수를 하나라도 더 줄이자는 목표가 있지만, 의지와 관계없이 무과실 삶은 불가능하다. 특히 어린이에게 사과할 때는 간곡하게 진심으로 빨리하고 용서 받을 때까지 또 한다.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잘해야지.”

 

계약한 일, 돈 받고 하는 일은 마무리하고 결과를 내는 것만이 맞다. 그게 직업의 본질이다. 혼자 다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으니, 협업할 동료는 일 잘하는 사람이 좋다. 놀랍게도 이메일 작성도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 신입사원이 어느 날 전달 사항을 모두 포함한 깔끔한 구성의 업무 메일을 보냈을 때 감격하기도 했다. 물론 누구나 배우면서 조금씩 성장한다. 문제는 제 일머리가 없음을 인지도 못하고 도움도 청하지 않고 경험을 통해 배우지 못하는 경우다. 없지…… 않다.

 

부디 내년엔 한국의 모든 영화 수입사가 50만 명 부근의 작품을, 더도 말고 한 편씩은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영화 수입사 사정을 덕분에 처음 배웠다. 사정이 힘들어진 원인은 저자도 말했듯 여러 주요한 것들이 혼재할 것이나, 나와 주변의 경험에 비추어 짐작해보는 한 가지 이유는 삶에 여유가 너무 없어서이기도 하다. 여유에는 체력과 시간도 주요하다. 만성피로에 절은 몸을 끌며 주중을 살고 나면 주말엔 꼼짝하기가 싫다. 외출은 심란하다. 영화라도 한편 극장에서 보자고 나서다보면 다양한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내 취향을 만들며 감상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안전하고 느긋한 작품으로 몰리지 않을까. 문화에게 여가란 토양이자 영양제다.

 

어떻게 하는 거니, 쿨한 번역가.”

 

이직을 세 번 하면서 휴식기가 생겼는데, 번역과 통역일이 알금알금 들어왔다. 다큐멘터리 번역일로 자막 번역의 어려움을 처음 실감했다. 커리어로 삼겠다는 절박함이 없어서였을까, 쿨한 번역가 아주 잘했다. 의뢰한 측에서 가격을 낮추자고 하면, 그러셔도 되는데 딱 받은 만큼만 일하겠다고 전했다. 저자가 대가없는 초과노동을 하며 정성을 들인 번역은 온기가 다를 것이다. 덕분에 나도 크게 웃으며 여러 편의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아들 영화잘밧어 스트레스 가 확 날리고 더운날씨에 시원하게 잘 보고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보내주었으먼해 고마워.”

 

저자의 어머니께서 자막을 다 읽지 못하셔도 신나고 즐겁게 영화를 보셨다는 이야기, 그날 이후로 글을 더 잘 배워서 자막을 더 잘 읽고 싶다고 하신 이야기. <스파이더맨> 나는 안 보았는데 급 궁금하다. <서울의 봄> 안 보고 싶다하시는 부모님 그만 졸라야하나 싶다. 신나고 재밌는 거 보고 싶으실 지도. 선입견은 사라지지도 약해지지도 않는구나. 덕분에 다시 반성한다.

 

이제 이견을 이견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좀처럼 없다. 이견은 나에 대한 공격, 더 나아가 나의 존엄을 짓밟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 이게 마냥 시대 탓일까. (...) 남들 얘기가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다. 점점 자극에 과민해지는 걸까.”

 

정말 왜 그럴까. 나는 왜 이럴까. 답답해서 정체성 정치 관련 책과 뇌과학 책도 읽어 보았지만, 듣고 싶고 알고 싶은 이야기만 먹이로 제공하고, 제 이익을 계산대로 챙기는 공급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정보공개와 의견공유보다 확증과 편견을 강화하는 기능만 거세질 듯하다.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나 싶다.

 

생각 없이 하소연인양 쓰다 보니 무용한 제 글만 길어집니다. 함께 고민할 소재들이 다양하고 많습니다. 대화하듯 읽고 더불어 생각해보기 참 편안하고 다정한 책입니다. 웃음 포인트도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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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 그리고 가정 - 평등을 향한 여성들의 기나긴 여정, 2023 노벨경제학상
클라우디아 골딘 지음, 김승진 옮김 / 생각의힘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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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여전히’라는 ‘또 하나의 이름 없는 문제’에 관한 경제학자의 탄탄한 분석과 제언. 역사적 흐름을 살펴 치밀한 분석을 제공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직업들과 여러 세대를 아우르며 살펴볼 기회를 제공하고, 경제학의 방식으로 문제를 추적하여 숙고하게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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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 그리고 가정 - 평등을 향한 여성들의 기나긴 여정, 2023 노벨경제학상
클라우디아 골딘 지음, 김승진 옮김 / 생각의힘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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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와 가정을 이유로 뇌리를 스치는 반백년의 세월이 모두 지난 기억임에도 뜨거운 손아귀에 멱살을 잡힌 기분이다. 동시에 커리어가정이라는 접속사의 연결이 무엇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힘 있는 응원처럼도 보인다.

 

산업화와 경제 성장, 집중된 교육 서비스 혜택을 받고 자란 내 세대의 경험과 현재가 일그러지고 뭉개진 반죽 덩어리처럼 보인다. 그래서 2023년에 이 주제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단 소식이 얼떨떨하게 놀라우면서도 반가웠다. 계속된 타협으로 눅눅해진 눈빛으로도 줌을 켜고 함께 읽자고 책모임을 꾸렸다.

 

시작은 설렜지만, 고등학생이거나, 수험생이거나, 재수생이거나 한 아이들 수발과 각종 돌발로 전원 참석이 더 어려워졌고, 수능일 이후로 소식을 전하지 않은 친구들이 세 명이다. 함께 읽은 곳에 멈춘 책갈피를 한참 보다가, 모임을 재개하자는 독려 대신 남은 내용을 혼자 읽으며 친구들의 형편을 짐작하고, 가정이 생기기 전 그들의 모습과 커리어에 대해 복기해본다.

 

두 명을 제외하면 모두 대학에서 만났고, 모두가 직업을 가졌다. 교대와 사범대에 진학해서 정규직 교사가 된 친구들, 박봉의 대학 강사로 살아온 친구들, 유학 갔다 전공을 바꿔 변호사가 되었으나 일자리 찾기가 어려워 다른 자격증이 필요했던 친구, 남편 근무지 따라 독일에서 살며 번역일 하다 귀국 후 번역 아르바이트 하는 친구까지. 우리는 대체, , 여전히숨 막히게 바쁘나 가용 소득은 참담하고 책 한 권 함께 읽을 시간조차 마련하기가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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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가 가득한 단단한 문장들 덕분에 감탄과 부러움이 어지럽게 교차함에도 차분하게 읽어 나갈 수 있었다. 시간과 정체성을 갈아 넣는 것은 물론 더한 것도 요구하던 밥벌이 노동과 가정 사이의 함정 같은 구조와 커지던 소득격차를 어설픈 변명이 통하지 않도록 분석한다.

 

이런 요인 모두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의 근원인가? 이 요인들을 다 합하면 남녀 사이에 발견되는 소득과 커리어상의 차이가 거의 다 설명되는가?”

 

1-5세대의 100년간의 데이터는 역사 도표처럼 흐르고, 돌봄 노동을 포기하지 않은 개인들의 분투를 어리석다 지적하는 대신, 커리어와 가정을 분리하고 차별하고 폄하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세계로 한 걸음이라도 걸었던 많은 여성들의 역사를 솔직하고 진지하게 명시한다.

 

커리어 투자를 위한 시간과 출산을 위해 놓치면 안 되는시간이 충돌하는 문제, 출산 후 가정 돌봄과 양육에 참여하는 여성과 더 많은 시간을 근무하고 온콜까지 남성이 담당하면서 벌어지는 소득 격차, 한 쪽의 희생이 요구되지만 결과적인 경제적 이득, 학위나 전문성과 무관한 여성의 경력 단절. 방대하고 묵직한 데이터와 사료를 잘 엮어서, 자신의 논지를 끝낼 때까지 부족함이 없는 근거 자료로 활용한다.

 

시간은 위대한 평준화 기제다. (...) 근본적으로, 성공적인 커리어와 행복한 가정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고전하는 여성이 직면하는 문제는 시간 충돌의 문제다. (...) 이러한 선택들은 이후의 삶을 크게 좌우하며, 한번 선택을 내리고 나면 무르거나 고칠 수 없다.”

 

성공담이 화려하게 전시되는 사회지만, ‘탐욕스러운 일을 해나가는 사람에게 큰 보상을 줌으로써 최대한 노동자의 시간을 갈아 넣는 성장 방식을 고수하는 경제는 자체의 한계와 더불어 여성과 남성 모두의 삶에도 불가역적인 내용 손실을 초래한다.



 

미국 대졸 여성들의 이야기를 만나는 중간 중간에, 못지않게 노력하지만 취업 기회는 더 적고, 사회안전망은 더 부재한 상태로 출산과 양육과 살림(가정 경제)를 전담한 한국 여성들의 삶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침몰선처럼 그려진다.

 

커리어의 시계가 생물학적 시계와 동시에 시한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생물학적 시계의 시한을 맞추려면 (...) 주요 승진 심사를 통과해서 커리어가 안정되기 전에 가정을 꾸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정을 영영 꾸리지 못할 지도 모른다.”

 

20-30대 여성들의 형편과 선택이 절박하고 아프다. 한 걸음 내딛기는 지난하고, 퇴행은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다. 우리에겐 어떤 데이터가 있을까. 기록으로 우리 존재와 역사를 증명할 수 있을까. 한국 여성들이 살아온 역사는 어떤 통계로 상세히 저장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소득 격차는 하나의 숫자로 말할 수 있다기보다는 동태적인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면서 남녀 간 소득 격차는 커진다. (...) 직종에 따라서도 크게 차이가 나며 대졸자들 사이에서는 더 그렇다.”


 


경력단절 여성이 취업할 곳은 콜센터 밖에 없다는 자조적인 말이 떠도는 한국에서, 사고 실험의 기회마저 없이 붕괴되는 출생률을 따라 소멸할 지도 모를 사회에서, 여성은 혼자인 적이 없으니 함께 방해물을 걷어내고 지향하는 길로 한 걸음 나아가자는 제언을 만난다. 경제학 책이라는 것이 낯선 행운 같다.

 

성차별과 성별 소득 격차 1위 국가에서, 삶을 규정하는 방해물을 당장 치워주지도 못하고, 통증이 많은 몸과 눅눅해진 눈빛으로, 이 책을 권하고 싶은 것은 너무 손쉬운 면제부일까. 여성 서사와 역사는 늘 고단한 오래달리기였다. 힘들어 걷더라도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왔다.



 

기억해야 할 것은 저자가 해법과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요구 조건들이 모두 채워지더라도, 성별 소득 격차를 동일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니, 또 다른 원인을 찾고 현실에 적용하여 해결하고 함께 고민하자는 것이다. 다른 많은 문제처럼, 가능한 많이 참여해야 이룰 수 있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가진 노동 구조를 고쳐나가면서 지난 한 세기의 여정이 전진해 온 길에 우리 몫의 길을 닦아야 한다. 나의 학생과 그 밖의 많은 여성들이 커리어도 가지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남자도 만날 수 있게 말이다.”

 

역사적 흐름을 살펴 치밀한 분석을 제공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직업들과 여러 세대를 아우르며 살펴볼 기회를 제공하고, 경제학의 방식으로 문제를 추적하여 숙고하게 돕는 이 책은, 미국 여성 경제학자가 2021년 기록하고 2023년에 도착한 한국 여성들의 필독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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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1-30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의 기혼 여성 취업자들도 여전히 큰 성차별을 겪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poiesis 2023-11-30 21:45   좋아요 0 | URL
네. 속상하게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로마 이야기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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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언어를 달리함으로써 스스로 언어와 문학과 문화의 가장자리로 이동한 용감한 작가를 작품으로 더 많이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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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해님
노석미 지음 / 창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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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지식 덕분에 지구에 살고 있는 것이 태양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햇빛이 내게 닿으면 일어나고 어두워지면 잠드는 그런 일상을 살고 있다면, 해가 절대신처럼 유일신처럼 느껴질 것이다.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서 어릴 적엔 해가 좀 싫었는데, 영국에 살 때 배운 소위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부족의 노래가 무척 인상적이라 외우고 있다. 요가를 하는 친구가 가르쳐준 태양숭배자세를 하고 아침에 해를 보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비가 오다 말다 또 오는 영국 기후가 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키웠기도 했다.

 

Morning Sun Morning Sun Come my way Come my way

Come my way Come my way Take my pain Take my pain

Take my pain Take my pain Down below Down below

Down below Down below Cool water Down below

 

팬데믹과 마스크는 날이 참 좋은 날에도 고개를 들고 하늘을 기쁘게 바라보게 돕지 않았다. 인간의 시간은 얼어붙은 채로 계절이 바뀌고 꽃이 피고 다른 모든 생명체들이 왁자한 것이 산책길에도 좀 쓸쓸했다.

 

여전히 마스크를 벗진 못했지만, 희망과 기대도 부족하지만, 새해에 표지만 봐도 기분 좋은 그림책이라 도착한 날부터 내내 큰 도움을 받고 있다. 좋아하는 노란색과 다채로운 다른 모든 색들. 채식이 어렵지 않은 이유에는 채소와 과일들의 아름다운 색감도 있다.

 

인간이 만든 최고 발명품이 쓰레기인 것에 비해, 자연은 놀랍도록 낭비가 없다. 우울해하지도 좌절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 거듭되는 진화와 적응이 부럽고 두렵다. 아파트의 베란다에서도 활짝 피어나주는 꽃들이 내내 고마웠다. 햇빛으로 태어나 사는 생명들은 찬란하다.

 

겨울이고 아침은 매일 반갑지는 않지만, 오늘도 해님 덕분에 살아 있고, 살아 있으면 웃을 일도 즐거운 일도 만난다. 햇살처럼 따스하고 아름다운 누군가의 이야기도 들리고 눈부시게 활짝 웃는 아름다운 얼굴들도 본다.

 

2월에 오고, 튤립의 구근을 심는 날이 오면, 올 해는 해님에게 잘 부탁드린다고 기도를 올려봐야겠다. 햇빛, 바람, 구름, , 달빛, 낮과 밤... 필요한 모든 것을 튤립에게 데려다 달라고, 햇빛을 닮은 꽃을 만나게 해달라고.



 

곧 설 명절이고 이동이 짧지 않을 시기에, , 한파, 대설, 강풍 소식이 들린다. 무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도와주세요, 해님. 힘들고 아프게 하는 거칠고 못된 생각들이 따끈하고 몰랑해지도록 도와주세요.

 

모두들 다사로운 빛이 가득한 아침과 새해를 맞으시기 바랍니다.


 

<Sunrise in Åsgårdstrand>, 

created by Edvard Munch in 1893-94, 

a time when he found a voice 

that would change forever 

the foundations of Moder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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