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백선희 옮김 / 책세상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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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부끄러움)’란 부정적이기만 할까요. 문맥에 따라 ‘수치’로 번역될 수 있는 영어 단어는 다양합니다 - shame, disgrace, humiliation. ‘수치’는 늘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의 탓(잘못)일까요. ‘수치’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중요한 지성이자 문명화된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수치심’에 관심이 큽니다. 


“우리에게 불복종할 힘을 주는 것, 나날이 확실히 최악으로 치닫는 세태에 체념하지 않고 저항할 능력을 온전히 간직할 힘을 주는 것은 프리모 레비의 표현대로 “세상에 대한 수치심”이다. 수치심은 슬픔과 분노의 혼합물이다.”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수치심의 ‘형성’과 ‘작동’ 기제에 대해 다각도로 다루는 학술연구서 같습니다. 가독성이 충분히 좋고 흥미롭고 친절한 책이라서 목마를 때 시원한 물마시듯 들이켰습니다. 작고 가볍고 혁명적인 철학서입니다. #강추


권력을 가진 가해자가 가스라이팅 하는 강력한 방법에는 언어를 선점하는 것이 있습니다. 약자이자 피해자에게 부정적 감정을 덧씌우는 방식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현재에도 진행 중입니다. 그러니 현실을 바꾸기 위한 방법에는 이런 언어(사유)의 해방이 필요합니다. 


“공화국을 보장하기 위한 라틴식 질문은 차라리 이러할 것이다. (...) 남성에게는 정의를, 여성에게는 수치심을 안겨라. 그러면 공화국은 탄탄할 것이다.”


새로운 언어(표현)을 만드는 것도 좋고, 이미 존재하는 역사 속에서 잘 살펴서, 근거를 찾아내는 작업도 힘이 됩니다. 수치심이 도덕과 윤리의 중요한 근거이자 동력이 될 거라 생각하는 저는 그런 기제가 있는지 궁금해 하며 읽어보았습니다.


“철학은 진실의 테러리스트들에게 수치심을 안기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기능도, 어떤 다른 공적 효용성도 갖고 있지 않다.”


작금의 시절은 위선조차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거침없는 태도로 거짓, 기만, 조작, 부정, 부정의, 무원칙, 불법, 무례, 차별, 혐오, 폭력이 천박하게 자행되고 조장되는 위기의 시간입니다. 조심하고 절제하고 고민하고 주저하고 부끄러워하는 태도가 조롱당하는 시간입니다. 이런 세상을 바란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서 끔찍합니다. 돈과 권력과 이익을 위해 못할 것이 없는 사회란 저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고통입니다.


“수치심을 가져야 할 건 우리가 아니라 바로 당신들이다!”


기대한대로 저자는 ‘수치심’을 소재로 역사를 톺아보고, 개념의 변화를 포착하여 부정적이고 악랄하게 작동된 유형을 찾아 분석합니다. 바로 ‘그 수치심’을 바꾸어야 새롭고 다른 관계와 사회를 만들 동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니, 수치심 자체가 동력이 됩니다.


“수치심이 혁명적일 수 있는 건 그것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에 속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이 상상력으로 작동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좋은 상상력은 불꽃의 호출에 일어서고,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그리고, 새로운 정체성들을 지어내고, 연대의식을 창조하고, 격노를 빗는다. 그것은 지형을 다시 그리는 힘, 투사의 힘이다.”


수치심의 다양한 종류를 구분해서 상세 설명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대상과 상황’, ‘수치심을 촉발한 이유’, ‘수치심이 발현된 형태’에 대해 사회가 내면화시킨 내용이 아닌, 생각과 분석과 대화가 사회에 존재하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가해자를 보호하고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쏟아 부어서. 범죄의 본질도, 처벌의 합당성도 흐리고 망치는 방식을 이미 많이 보았습니다. 사회적으로 인지가 확대되고 있다고 낙관합니다. 피해자다움과 주의(조심성) 부족, 혹은 ‘생각 없이 놀러 가서 죽었다’는 식의 명백히 악의적인 발화와 언론질을 목격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불의한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 수많은 사례가 증명하듯, 굴종하면 변화의 여지는 사라집니다. 함께 느끼는 수치심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내면화와 강요를 거부하고 밝히는 연대가 필요합니다. 그럴 수 있다면, 수치심이 강할수록 변화의 동력도 클 것이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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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짓것의 제주 문화 읽기 - 제주 해민정신의 이해
최미경 지음 / 지식과감성#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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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방문하고 기억하는 제주는 80년대의 모습이다. 아버지 친한 친구분이 제주에서 살기로 결정하신 후에 친척집이 생긴 듯 제주가 가까워졌다. 너무 어려서 제주의 지리와 역사를 보고 배우고 알지는 못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대화하는 제주분들 목소리를 가만히 듣는 시간이 늘 재밌었다.


“일부 인류학자들은 ‘중층 기술(think ddescription)’로서의 문화를 강조하며, 사람이 일상적인 삶의 과정에서 행하는 모든 생활 방식을 문화하고 하기도 한다. 한 사회의 가치, 실천, 상징, 제도, 인간관계 등이 모두 문화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20대에 학과 친구들과 제주에 놀러가곤 했지만 - 아버지 친구분이 재워주고 먹여주고 여행안내도 해주셔서 가능, 신세를 많이 졌다 - 여전히 제주에 대해 배워볼 생각은 못했다. 그렇게 휴가, 여행, 관광으로 방문하고 소비하는 장소로 제주를 대했던 시간이 길었다.


“제주는 어느 지역보다 문화의 다양성을 많이 간직한 곳이다. 해양문화적 요소, 독자성과 토착성, 민중성 등이 그것이다. (...)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에서 나타난 독특한 문화는 그 어느 지역보다 척박한 자연환경을 터전으로 나타난다.”


30대에 오랜 친한 친구가 ‘제주 사람’과 결혼했다. 제주에 사는 건 아니었지만, 시댁이 제주라는 것이 친구들 사이에서 일종의 화제였달까. 역사를 전공하고 이야기를 재밌게 잘 해주는 친구라서, 만날 때마다 전혀 모르던 ‘제주’ 이야기를 듣고 놀라며 배우게 되었다. 


“지리학에서 ‘지역’이란 단순히 토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토지에 사람들이 상호 작용을 주고받으며 상관자로서 존재하게 되면, 그 과정에 독특한 지역성이 나타난다.”


팬데믹 전후 몇 년 간 제주로 이주하는 친구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나는 이전에 배로도 비행기로도 가던 제주를 가지 않은 채 살고 있다. 이 책은 그동안 방문한 제주와 듣고 배운 제주의 여러 이야기들과, 모르던 지리학과 민속학과 인류학과 사상도 배우게 해주었다.


“‘신들의 고향’이라고 불리는 제주에는 수많은 신화와 민요가 전해진다. 제주의 독특한 자연경관에 깃든 1만 8,000여 신을 벗 삼아 제주인들은 상상력을 키워 나갔다. (...) 수많은 신이 제주인의 삶 속에 좌정하고 있다.”


학술논문서처럼 내용이 풍성하니 짧은 글로 소개하기란 어렵다. 재밌는 많은 이야기들 중에 나는 이어도연구회의 ‘해민사상’ - 제주인의 지역 정신은 해민정신이고 제주를 선도해 온 세력은 해민이었다는 주장 - 에 집중해서 정리소개 해보려한다. 


“제주인의 삶 속에서 해민 문화를 빼고 제주 문화를 논할 수 없다. (...) 제주에서는 해산 활동을 하는 사람을 ‘보자기’라 칭했다. (...) 국어사전에 ‘보재기’는 “바닷속에 들어가서 조개, 미역 따위의 해산물을 따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 명시되어 있는데 남녀를 구분하고 있지 않다.”


“바다를 배경으로 살아온 (...) 농민에 대비되는 해민(海民)이라 정의하면 (...) 해민에는 해상 상인뿐 아니라 선단의 선주, 고기잡이 어부, 포작인, 해녀 등이 포함된다. 이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해 주는 ‘심방(무속인)’ 등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온 바다 생활자들을 해민이라 정의할 수 있다.”


“해민은 자연에 순응하기도 했지만, 자연에 도전하고 맞서 싸우며 용감하고 자유롭게 살았다. (...) 바다에서의 삶은 개인의 능력을 중요시하면서도 협동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


“‘대동 사회’는 유토피아와도 같은 의미가 있다 하겠다. 본향당의 사제는 주로 ‘평화’, ‘관용’, ‘포용’의 성인 여성 심방(무당)이었다. 어떤 특권도 종속 의무도 존재하지 않고 (...) 모두 자연으로 묶였기에 (...) 누구나 평등했다. 그 지역 공동체의 체온을 따뜻하게 하는 본향당 신앙은 결국 평등주의 이념의 본향이기도 한 것이다.”


주어진 환경이 녹록치 않고, 외부의 탄압도 지독했던 환경에서, 제주의 토속신앙은 분명, 그 모든 것을 견디는 삶의 구심점 역할을 했을 것이다. 1402년 조선 태종 때, 탐라가 제주가 되며 탐라국은 사라졌지만, 신화와 문화는 그렇게 일순 사라지지 않는다. 이야기는 살아남았다. 더 오래 읽고 더 깊이 배우고 싶어진다.


“보수의 핵심적 진리는 사회의 성공을 결정짓는 것이 정치가 아니라 문화이고, 진보의 핵심적 진리는 정치가 문화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대니얼 패트릭 모니이헌(Daniel Patrick Moyni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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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카스 수업의 장면들 - 베네수엘라가 여기에
서정 지음 / 난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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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고 가본 적 없는 ‘카라카스의 학생’이 되어볼 결심을 한다. 겉표지 속표지만 보고 서정 작가의 다정한 편지를 먼저 천천히 읽었다. 카라카스로 데려가줄 선물 같은 특등석 항공티켓이자 가이드북이자 지도이자 그 이상일 거란 기대.


국호만 아는 남미 국가 베네수엘라. 아는 바가 없는 수도 카라카스. 낯섦이 주는 힘센 설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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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낯선 어떤 것은 완전히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읽기 시작하며 스르륵 그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 좋은 몰입은 안내하는 저자 덕분이다. 이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모르고 살았을 장소들로 신나게 떠났다. 


“우리의 ‘미지’란 실은 특정한 톤을 지닌 판타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 인정해야 하는 건가? 우연한 위험보다는 당연한 친절을 기대해왔다는 것을.”


나는 그렇게 가벼웠지만, 저자는 밥벌이로 정주하는 시간이었다. 언어조차 전혀 익숙하지 않은 상태였다니. 치안은 매우 불안하고, 직항 비행편이 사라지던 정치 경제적 환경이라니. 심장이 조금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말의 세계가 열리자 도시 풍경의 겉모습에 머물던 내 두 눈에서 두려움이라는 허물이 천천히 벗겨져나가기 시작했다. 귀에서도 비늘이 떨어져나갔다. 걷다보니 보고 듣게 된 것인지 보고 들을 마음이 생겨 걷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오늘의 들을 이유는 내일의 말할 이유가 되고 도시 풍경은 사람 풍경이 되었다.”


현실이 고되고 몸이 지칠수록 책 속으로 도망가는 버릇을 지닌 - 실은 중독 수준의 의존증 - 나는, 여러모로 낯선 정글 같은 곳에서, “인간에게서 나온 소리 자체가 드문 상태”에서, 저자가 책과 작가를 소환하며 삶의 경계를 넓혀가는 많은 순간들이 경이로웠다.


“내일은 말이야. 그 내일이라는 말, ‘마냐나(내일)’에 얽힌 저주와 꿈을 나는 겨우 이해하기 시작했다. 희망을 품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인간이 아직 오지 않은 추상의 시간을 저당 잡아 지금을 지키겠다는 것.”


문장의 다채로움 속에 빠져 홀린 듯 읽다보니, 판단도 생각도 사라지고, 기꺼이 나도 학생이 되어 카라카스 수업을 듣자했던 순간을 다시 떠올린다. 한참 필사를 하며, 가장 천천히 읽는 방식으로 수업이 줄어드는 것을 아까워한다. 


“내가 이 자리를 좋아하는 것은 푸른 도자기 램프 하나 때문이다. 코발트블루하고 해야 할까 (...) 거기서 나는 존 버거가 그랬던 것처럼 각자가 꾸는 꿈은 다르지만 서로를 자극하고 위로하는 존재들에 대한 희망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카라카스라는 조건화와 어떤 체념과 망각, 그리고 분명한 참혹함이, 마치 ‘재난 유토피아’(리베카 솔닛)처럼 “인간성의 불씨를 확인”하게 하고, “소극적 생의 긍정으로 이어지고”, 놀랍게도 “일상을 허무에서 일시적으로 건져낸다.”


점점 더 교묘하게 무거워지는 내 현실에서의 허무와 무소용은, 현재에 존재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미지근한 여유와 거리감에서 불어나고 있다는 생각을 잠시 한다. 버티고 견디는 삶이 고단할 때, 사태를 낙관하는 ‘버릇’이 내게도 필요하다. 


“집에 가지고 못하고 씻지도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시중드는 골프장에서 씻고 먹고 골프채를 휘두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는 광경은 생각만 해도 아찔해서, 잔디에 뿌려대는 물줄기를 보며 직원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지러운 인간 사회의 풍경이, 카라카스에서도 더 정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모두 잠시 발만 담그다 이내 떠날 수밖에 없는 곳. 그 정도밖에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는 곳”과 대비되어, “일상적 습관”도 ‘문명’도 돌아보게 한다. 


고요하고 건조한 겨울을 좋아하는 나는, 비염과 알레르기와 미세먼지와, 진짜 봄이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오는 계절을 두려워하며, 3월을 살아가고 있다. 수업 필기가 하염없이 길어진다. 세찬 빗소리가 듣고 싶어진다.


“지붕만 있는 곳에서 빛도 통신도 없이 누워 흔들리는 밤은 때마침 줄기차게 내리는 새벽 빗소리에 한층 다채로워졌다. 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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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의 무능한 탐정들 두 번째 원고
김혜빈 외 지음 / 사계절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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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로 긴 색다른 판형의 책이다. 표지 일러스트도 재밌다. 작가마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떤 공간에 닿을까... 순서대로 읽을까 표제작부터 읽을까 즐거운 고민을 하며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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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맙소사... 이건 이 책을 읽는 동안 떠오른 입 밖에는 내지 않은 말들이다. 별별 일들, 별별 인간들을 겪으면서도 내 세대와는 다르게(일반화의 위험 주의!) 반응하는 면면이 놀랍기도 하고, 그래서 더 복잡하게 힘들어졌겠구나 싶은, 새삼스럽게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고단함이 느껴져서도 그렇다.

 

늑대인간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그 존재를 자신의 일상을 틀을 깰 계기로 보고, 납작하고 단순하게 저 혼자 좋을 대로 분명하게 가른 관계를 태연하게 거부하며, 기성세대보다 밝은 눈으로 특정할 수 없는 분류될 수 없는 존재들을 인정하는 대화.

 

포용력 있고 깊이 있는 사고를 하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가 더 외롭다. 비슷한 동류들은 모이지 않고, 불문율처럼 각자가 홀로 맴돌며 조용히 살아가거나 사라지는 편을 택할 지도 모른다.

 

결국 모든 건 외로움이 문제인 것 같아.”

 

그 외로움은 신체활동이 제한된 풍경과, 열렬한 믿음의 공간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느껴진다. 뜨거울수록 처절하게 외롭다. 진심이라서 강박이 되고, 외부를 향하면 상대를 숨 막히게 하는 금기와 제약이 된다. 실패와 상실은 무례와 욕설과 적의를 품게 한다.

 

남들이 보기에 불쌍한 것이 명백한데 이모는 스스로를 박복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럼 별 수 없었다. 동정이 공포와 혐오로 넘어가는 건 쉬운 일이었으니까.”

 

함께 견뎌야 하는 시간을 견디는 방법은 무엇일까. 처음에는 선명했던 저항의 대상이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도록 대면하는 시간은 누군가를 무언과 무기력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다른 작가의 다른 작품들인데, 읽어갈수록 형태가 다른 포장 속 같은 내용물인 외로움이 여기저기서 삐져나온다. 새로운 단편이 궁금해서 계속 읽고 싶은 마음과 짐작할 수 없는 방식의 외로움을 만날 두려움이 교차했다.

 

원래 이 세상이란 게 말이야. 어질어질하고 복잡한 거야. 토할 것처럼.”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이들, 그래서 자신이 정말 존재하는지 무섬증이 드는 이들, 휘발되는 시선과 관심은 어떤 순간에 어떤 의미라도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토록 외롭고 멀어지는 사람들 사이의 사랑과 연대란 무엇일까.

 

그러니 같이 걸어볼까요. 마음이 엇갈려도 괜찮으니까. 짠짜라짜잔 하고.”

 

기성세대의 것은 결국 그들의 것이었으니 얼마든지 의심해도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자신들의 진짜를 찾아야한다. 낯설더라고 고민이 되더라도 아무리 허약해보이더라도.

 

서늘하게 외롭지만 진짜를 찾는 통증, 처음 만난 작가들 모두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진다는 것으로... 무겁고 아프게 읽은 시간 모두가 좋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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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쇼맨과 운명의 바퀴 블랙 쇼맨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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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의 마지막, 운명의 바퀴가 돌아가듯 속도감과 긴장감 있는 전개로 후련한 결말에 이르는 단편들일 거란 기대! 미스터리 추리 장르 책의 보라색 표지는 우선적으로 투구꽃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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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성에 관해서라면 이렇게 잘 읽히는 작가도 드물 거란 생각이 이번에도 들었다. 작은 공간에서 소곤거리는 급할 것 없는 대화처럼 진행되는 이야기는 시간을 잊은 채 계속 듣게 되는 기분이랄까.


첫 번째 작품은 현실에 워낙 자극적인 사건들이 난무해서인가, 갈등과 사건의 내막이 도리어 인간적이고 소박하고 선하게까지 느껴진다. 물론 낯선 정서도 있다. 그 거리감이 나도 타인도 차분히 관찰하고 수용할 여지를 준다.


“친생자 추정이라고 해서 여성이 이혼한 날부터 삼백 일 안에 낳은 자녀는 법으로 전남편의 아이임을 인정하지. 이혼해도 친권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태어나지 않은 배 속 아이에게도 상속권이 생겨.”


“출산한 여성 본인이 아이의 아버지가 전남편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출생 신고서를 제출하면 아이는 전남편의 아이로 등록돼. 여성이 진실을 말하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아이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누구라도 아버지로 등록해야 하고 , 그건 전남편으로 한다고 정한다. 이걸 친생자 추정이라 하지.”


‘천사의 무릎베개’와 ‘천사의 선물’이라는 르카도드랑주의 설정이 매력적이다.


모녀가 등장하는 두 번째 작품은 어쩔 수 없이 좀 아프고 슬펐다. 애증의 내용과 강도에 따라 유사한 상황의 모두가 다른 선택을 하겠지만, 기억을 잃어가는 작고 늙은 어머니란 세상에서 가장 복잡하고 무거운 감정을 부르기도 하니까.


“나나에는 안 죽었어, 그건 내 딸이 아니었다고요.”


“딸이 있었어요, 외동딸이. 노후에는 그 애하고 둘이서 살려고 했죠. 하지만 갑자기 자살했어요.”


어머니가 모녀관계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자 겨우 한 인간으로서의 과거와 사연을 듣게 되고 이해의 진전이 생기지만, 너무 쉽고 너무 빠른 화해를 그리지 않는 점이 슬프지만 마음에 든다.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그래도 한없이 슬프고 쓸쓸한 마지막 장면에 눈이 붉어진다. 


세 번째 작품은 다소 불편한 기분으로 읽었다. 나름의 이유와 선의가 있다고 해도 이런 방식으로 조정당하고 속는 건 정말 싫으니 사양이다. 다케시의 사람을 간파하는 능력이 급 퇴조하거나 사라진 건가 싶게 당황한 설정이기도 하다.


“이대로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을 것 같은 상황에서 나타난 게 구리쓰카였다. 이번에야말로 행운의 여신이 웃어주기를, 미나는 그렇게 바랄 뿐이었다.”


어쨌든 세 개의 단편을 읽으며 기대하지 않던 일본 사회와 문화와 감수성에 대해 새롭게 배우고 비교해볼 기회가 좋았다. 덕분에 이런 내용의 시스템을 통해 일본사회가 만들고 지키려한 사회적 가치들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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