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의 무능한 탐정들 두 번째 원고
김혜빈 외 지음 / 사계절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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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로 긴 색다른 판형의 책이다. 표지 일러스트도 재밌다. 작가마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떤 공간에 닿을까... 순서대로 읽을까 표제작부터 읽을까 즐거운 고민을 하며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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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맙소사... 이건 이 책을 읽는 동안 떠오른 입 밖에는 내지 않은 말들이다. 별별 일들, 별별 인간들을 겪으면서도 내 세대와는 다르게(일반화의 위험 주의!) 반응하는 면면이 놀랍기도 하고, 그래서 더 복잡하게 힘들어졌겠구나 싶은, 새삼스럽게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고단함이 느껴져서도 그렇다.

 

늑대인간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그 존재를 자신의 일상을 틀을 깰 계기로 보고, 납작하고 단순하게 저 혼자 좋을 대로 분명하게 가른 관계를 태연하게 거부하며, 기성세대보다 밝은 눈으로 특정할 수 없는 분류될 수 없는 존재들을 인정하는 대화.

 

포용력 있고 깊이 있는 사고를 하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가 더 외롭다. 비슷한 동류들은 모이지 않고, 불문율처럼 각자가 홀로 맴돌며 조용히 살아가거나 사라지는 편을 택할 지도 모른다.

 

결국 모든 건 외로움이 문제인 것 같아.”

 

그 외로움은 신체활동이 제한된 풍경과, 열렬한 믿음의 공간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느껴진다. 뜨거울수록 처절하게 외롭다. 진심이라서 강박이 되고, 외부를 향하면 상대를 숨 막히게 하는 금기와 제약이 된다. 실패와 상실은 무례와 욕설과 적의를 품게 한다.

 

남들이 보기에 불쌍한 것이 명백한데 이모는 스스로를 박복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럼 별 수 없었다. 동정이 공포와 혐오로 넘어가는 건 쉬운 일이었으니까.”

 

함께 견뎌야 하는 시간을 견디는 방법은 무엇일까. 처음에는 선명했던 저항의 대상이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도록 대면하는 시간은 누군가를 무언과 무기력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다른 작가의 다른 작품들인데, 읽어갈수록 형태가 다른 포장 속 같은 내용물인 외로움이 여기저기서 삐져나온다. 새로운 단편이 궁금해서 계속 읽고 싶은 마음과 짐작할 수 없는 방식의 외로움을 만날 두려움이 교차했다.

 

원래 이 세상이란 게 말이야. 어질어질하고 복잡한 거야. 토할 것처럼.”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이들, 그래서 자신이 정말 존재하는지 무섬증이 드는 이들, 휘발되는 시선과 관심은 어떤 순간에 어떤 의미라도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토록 외롭고 멀어지는 사람들 사이의 사랑과 연대란 무엇일까.

 

그러니 같이 걸어볼까요. 마음이 엇갈려도 괜찮으니까. 짠짜라짜잔 하고.”

 

기성세대의 것은 결국 그들의 것이었으니 얼마든지 의심해도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자신들의 진짜를 찾아야한다. 낯설더라고 고민이 되더라도 아무리 허약해보이더라도.

 

서늘하게 외롭지만 진짜를 찾는 통증, 처음 만난 작가들 모두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진다는 것으로... 무겁고 아프게 읽은 시간 모두가 좋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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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쇼맨과 운명의 바퀴 블랙 쇼맨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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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의 마지막, 운명의 바퀴가 돌아가듯 속도감과 긴장감 있는 전개로 후련한 결말에 이르는 단편들일 거란 기대! 미스터리 추리 장르 책의 보라색 표지는 우선적으로 투구꽃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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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성에 관해서라면 이렇게 잘 읽히는 작가도 드물 거란 생각이 이번에도 들었다. 작은 공간에서 소곤거리는 급할 것 없는 대화처럼 진행되는 이야기는 시간을 잊은 채 계속 듣게 되는 기분이랄까.


첫 번째 작품은 현실에 워낙 자극적인 사건들이 난무해서인가, 갈등과 사건의 내막이 도리어 인간적이고 소박하고 선하게까지 느껴진다. 물론 낯선 정서도 있다. 그 거리감이 나도 타인도 차분히 관찰하고 수용할 여지를 준다.


“친생자 추정이라고 해서 여성이 이혼한 날부터 삼백 일 안에 낳은 자녀는 법으로 전남편의 아이임을 인정하지. 이혼해도 친권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태어나지 않은 배 속 아이에게도 상속권이 생겨.”


“출산한 여성 본인이 아이의 아버지가 전남편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출생 신고서를 제출하면 아이는 전남편의 아이로 등록돼. 여성이 진실을 말하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아이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누구라도 아버지로 등록해야 하고 , 그건 전남편으로 한다고 정한다. 이걸 친생자 추정이라 하지.”


‘천사의 무릎베개’와 ‘천사의 선물’이라는 르카도드랑주의 설정이 매력적이다.


모녀가 등장하는 두 번째 작품은 어쩔 수 없이 좀 아프고 슬펐다. 애증의 내용과 강도에 따라 유사한 상황의 모두가 다른 선택을 하겠지만, 기억을 잃어가는 작고 늙은 어머니란 세상에서 가장 복잡하고 무거운 감정을 부르기도 하니까.


“나나에는 안 죽었어, 그건 내 딸이 아니었다고요.”


“딸이 있었어요, 외동딸이. 노후에는 그 애하고 둘이서 살려고 했죠. 하지만 갑자기 자살했어요.”


어머니가 모녀관계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자 겨우 한 인간으로서의 과거와 사연을 듣게 되고 이해의 진전이 생기지만, 너무 쉽고 너무 빠른 화해를 그리지 않는 점이 슬프지만 마음에 든다.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그래도 한없이 슬프고 쓸쓸한 마지막 장면에 눈이 붉어진다. 


세 번째 작품은 다소 불편한 기분으로 읽었다. 나름의 이유와 선의가 있다고 해도 이런 방식으로 조정당하고 속는 건 정말 싫으니 사양이다. 다케시의 사람을 간파하는 능력이 급 퇴조하거나 사라진 건가 싶게 당황한 설정이기도 하다.


“이대로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을 것 같은 상황에서 나타난 게 구리쓰카였다. 이번에야말로 행운의 여신이 웃어주기를, 미나는 그렇게 바랄 뿐이었다.”


어쨌든 세 개의 단편을 읽으며 기대하지 않던 일본 사회와 문화와 감수성에 대해 새롭게 배우고 비교해볼 기회가 좋았다. 덕분에 이런 내용의 시스템을 통해 일본사회가 만들고 지키려한 사회적 가치들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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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사상과 종교공부 - K사상의 세계화를 위하여
백낙청 외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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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쯤 전, 주로 서양생태사상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 한국에서도 ‘생명사상’이라는 사상과 여러 역사적 전통 속의 생태주의 혹은 철학에 대한 연구와 논문과 책들이 출간되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동양철학과 한자에 무지한 상태라서 잘 읽어 내지는 못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 연구자들이 주최한 세미나에 한번 참여했고, 멋진 연구자를 만나 그분이 인터뷰한 김지하의 생명사상에 대해 많이 물어볼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학위 받고 연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분은 암으로 돌아가셨고, 나도 유학준비를 하며 내용을 잊어갔다. 거의 30년 만에 그때보다 포괄적인 개벽사상을 다시 만난다. 백낙청 TV가 생기고, 그때 모두 젊던 분들이 원로가 되어 나누는 이야기를 이제 중년의 내가 듣고 읽는다.






개벽開闢이란 세상이 처음으로 생기고 열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뜻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 세상이 어지럽게 뒤집힌다는 조건도 있다. 비슷한 의미로 더 자주 사용되는 ‘혁명’보다는 지구 자전축이 움직이는 건가 싶게 스케일이 큰 표현이다. 


“여기서 말하는 개벽은 물론 후천개벽인데 (...) 사람의 정신과 마음에 일어나는 근본적 변화와 더불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대변혁을 ‘후천개벽’으로 규정하고 추진한 것은 유독 한반도에서 시작된 현상이요 사건이다.”


그러니 어렵다. 국가 단위의 혁명조차 사라진 시절에 인류 문명의 성격과 삶이 양식 자체를 바꾸는 정신, 도덕, 윤리의 토대를 전환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생존이 가장 간절한 욕망이자 동력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할 것도 같지만, 어째 현생 인류의 행보는 이대로 살다 죽는 길로만 걸어가는 듯하다.


절망도 좌절도 무기력도 무력감도 지겨워서, 이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어른들이 많이 떠나셨고 계속 떠나실 것이라, 애틋하고 반갑게 아홉 분의 토론을 천천히 듣고 읽었다. 기록과 가이드가 있다면 언젠가 필요한 누군가가 쓰겠지, 막막함이 덜하겠지 싶은 사상의 유산을 만난다.


“하루에 꽃 한송이 피네. 이틀에 꽃 두송이 피네. 삼백육십일 지나면 꽃 또한 삼백육십송이 피겠지.” 수운 최제우


서양학문을 한 나로서는 여전히 쉽지는 않다. 동학, 천도교, 원불교, 그리고 기독교 사상도. 이론만이 아닌 실천 사상으로서 조망도 연마도 제안도, 수운 최제우, 해월 최시형, 증산 강일순, 소태산 박중빈 등 어려운 시도를 했던 사상가들도 모두 묵직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내 기우보다 문헌자료가 많다는 것이다. 낭비적이고 파괴적인 자본주의는 이미 대실패를 했다. 기후재난과 생태위기가 그 결과이자 증거다. 살던 대로 살면 수많은 경고를 담은 과학자들의 예측이 현실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말기국면을 살고 있는 현대인으로서, 사람다운 삶을 쟁취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노선이 무엇이고 덜 효과적인 노선은 무엇인지를 판별하는 기분이 필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문제를 야기한 방법으로는 해법을 찾을 수 없다는 통찰이 옳다면, 우리는 문명을 샅샅이 뒤져 쓸 만한 사상을 찾거나, 새로 만들어야만 한다. 탐구하는 치열함은 살던 대로 사는 것보다 훨씬 도덕적, 윤리적, 희망적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행동하게 하고, 변화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한 사회운동을 촉박하는 사유와 역량은 무엇이며 어떻게 연마하는지를, 평생을 연구와 토론과 논문과 저서활동을 하며 살아온 분들의 간절하고 뜨거운 육성으로 만난다.


“오늘의 현실은 모두 각자위심(各自爲心)하고, 불순천리(不順天理)하고, 불고천명(不顧天命)하는 위기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공동체 윤리의 상실,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위기 상황이 다시개벽의 요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를 만들어내는 일에 종교와 사상은 가장 강력하고 큰 무기가 된다. 문명은 종교와 사상을 공유하는 이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현실이다. 그래서 공부가 중요하다. 어쩌다 시험이 더 중요한 협소하고 시시한 세상이 되었지만, 학습은 인류 문명의 탄생과 영속을 위한 근본적인 인간 활동이다.






이 책이 담은 내용들은 사상적 논쟁만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발생한 수많은 사회운동의 사례들을 확인하며 우리 이전의 사람들이 어떤 세상을 꿈꾸고 어떤 시도를 했는지를 새롭게 배울 ‘역사이야기’이기도 하다. 생각보다 가까운 역사의 풍경들이 이 모든 것과 이어져있다.


“3.1독립만세혁명이나 그 이후의 즉각적인 임시정부의 성립, 공화제 선포, 독립운동가들의 활약, 건준의 성립, 이후의 인민위원회의 활약 등등 이 모든 것이 동학이라는 거대한 민족체험을 떠나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반드시 동학의 뿌리를 언급했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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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을 꿈꾸다 - 우리의 삶에서 상상력이 사라졌을 때
배리 로페즈 지음, 신해경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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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신으면 죽을 때까지 멈추지 못하고 춤을 추게 된다는 빨간 구두처럼, 읽기 시작하니 영원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 미사여구가 없는 마법서 같다. 과학자의 관찰기에 더 가까운 문장들인데, 한없이 공교工巧한 판타지 같은 현실 세계로, 짐작할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없었던 세상으로 안내해준다. 


“나는 밤 산책을 하면서 절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 외딴곳에서 마주친 예상치 못한 생명의 풍성함 때문에, 숨결처럼 한숨처럼 땅을 내리덮는 고요한 북극의 빛 때문에,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새들과 둥지에 든 생명의 증거들을 향해 슬며시 고대를 숙이곤 했다.”


생태계의 다양성, 인간 문화의 다양성, 사회의 다양성이란 표현을 자주 썼지만, 실체적인 경험은 부족한 독자에게, 600쪽이 아쉬울 정도로, 놀라운 실체 규명의 기록처럼 실존하는 생명과 땅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책과의 조우가 과분한 행운처럼 감사하다. 얼음과 물빛으로만 떠오르던 북극이 한없이 다채로워진다.


“내 관습적인 인식으로 보자면 말도 안 되지만, 한밤중에소 태양이 빛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너그러운가. 수 세기 동안 이어진 겨울의 증거를 그처럼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땅이 사방으로 넘쳐흐르는 연민이라니.”


모르기 때문에 오래 유지한 북극에 대한 선입견은, 이 책을 읽는 동안 한편으로는 인간의 삶과 북극을 마침내 연결 짓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부재한 본래의 땅과 생명의 모습을 더 강렬하게 보고 싶다는 생각에 차츰 변해갔다. 


인간의 제외한 다른 생명의 삶이 생존이라면, 주류 문명사회의 인간의 삶은 위험천만하고 무례한 파괴력에 다름 아닌 욕망으로 느껴진다. 인간의 삶은 너무 요란하고 파괴적이고 낭비적이고 더럽고 쓰레기를 많이 남긴다.


어쩌면 이미 대부분의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며 미리 회복해야할 것들을 회복하고 새롭게 배우지 못한다면 결코 자연의 일부가 될 수 없을 거란 생각을 한다. 그건 자연의 지배력을 벗어나길 원했던 인간의 소망이 이루는 과정에서, 그 무엇도 자제할 수 없는 인간 속성을 따라 자멸하는 조건마저 만들어온 부작용의 결과일 것이다.


“인간도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같은 생물계 안에 살고 있지만 (...) 같은 진화 법칙의 적용을 받는 것은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고향과 가족이라는 이상향을 그리는 망상처럼, 어느 곳에 아직도 ‘순수하고 본원적인’ 형태로 남은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방식은 이제 마지막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을 것만 같다. “경제적 능력만 어마어마할 뿐 지역에 대한 지리적 감각은 형편없는 사람들의 손에 권력이 점점 더 집중되고 있”기 때문에.


지구의 많은 장소들에서, 우리는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못한 변화와 변동을 목격한다. 작년보다 올 해가 더 우울하다. 좌절은 가깝고 절망은 쉬워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은 경고를 더해 우울을 깊게 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지의 존재’에 대해, 그 무게감을 진실로 느끼며 알아보는 성실하고 아름다운 증언이다.





지상 생물인 우리가 대지를 어떻게 상상하고 있는지, 욕망과 지식에 대해 어떻게 사유하고 성찰할 수 있을지, 시사적인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깊이 다룬다는 건 무엇일지, 괴로움 속에서 뜨거워지는 머리를 견디며 아파했을 질문들을, 저자와 학자들과 함께 책 속으로 긴 여행을 다니며 ‘자연스럽게’ 배워본다.





아홉 번의 문화인류학 여행이 끝나자, 북극, 해빙, 카약, 에스키모, 물범, 북극곰, 수많은 새들, 별빛, 바다, 눈, 대기. 낮과 밤, 태양... 책에서 만난 존재들이 서늘하고 부드럽게 물어온다. 인간이 알게 된 “길고 단호한 진화의 길”이 무엇이었는지, 인간이 믿는 편견과 선입견과 해로운 ‘사고와 지식들’은 무엇인지를. “대지”를 이용만 하고, 무엇이든 착취하려는 “욕망”은 무엇인지, “부유해진다”는 것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배운 것은 아니다. 배웠다고 맞게 사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 생각하고 기억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반목과 절망과 지독한 쓸쓸함을 떠올린다. 이 책에서 만난 ‘자제’, ‘생태계의 생물학적 요구’, ‘비판적 지성’ ‘인류가 열망해 온 지혜’. ‘실질적인 희망’, ‘감사’... 를 생각해본다.


“물리적인 증거가 동일하다고 해서 모든 관찰자가 동일한 세계를 그리는 것은 아니다” 1936. 언어인류학자 워프(Benjamin Who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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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 판사란 무엇이며, 판결이란 무엇인가
손호영 지음 / 동아시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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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은 판사가 고민한 과정과 결론을 알려주는 ‘목소리’이자 이를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할까.”


법은 가장 늦게 바뀐다는 점에서 법이 가진 한계는 그 사회가 가지는 한계이다. 그러니 가능한 그 한계를 정확히 알아야 조금이라도 바라는 방향으로 넓혀볼 수 있다.


판사와 판결이란 단어가 무겁게 느껴지는 제목이지만 저자는 ‘재잘거려보고 싶다’고 한다. 짐작 보다 훨씬 더 친절하고 재밌고 흥미로운 판결의 언어를 만날 것 같은 기대로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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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대법원 재판을 연구하는 판사이자 법학박사다. 대법원 판결이 최종심이라는 점에서, 연구 자료는 우리 사회의 최종 결정, 즉 물러날 여지없는 ‘한계’의 기록이다. 그러나 멈출 필요는 없다. 그 가장자리를 넓히려는 고민도 함께 한다. 


“‘이것은 정의인가?’와 같은 구체적 질문에 실질적인 답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 내가 얻어낸 답이 ‘법’이라는 뿌리에 단단히 서 있길 바라는 동시에, 그 답이 ‘시대적 요청’이라는 말 뒤에 숨기를 바라지 않는다.”


친절한 강의처럼 전해지는 깊은 고민이 숨쉬기 편해지는 마법을 부린다. 길고 천천히 호흡하며 무척 즐겁게 읽었다. 세상을 더 나아지게 만들려고 애쓰는 이들의 존재가 무엇보다 큰 위로와 힘이 된다. 만나서 기쁜 책이다.


“법은 다른 학문의 담론을 연결해 낼 수 있는 허브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릇을 채우기 위해 법조인은 법만이 아닌 다른 학문까지 모두 섭렵할 필요가 있겠다.”


며칠 전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랑과 믿음이 없다면, 애쓰지 않으면,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고민하게 하는 글을 읽었다. 직업윤리를 가진 직업인이 일에 대한 책임과 자부심만이 아니라, 경계하고 두려워하고 조심하며, 결국엔 사랑을 품고 해나가는 모습이 멋지고 경건하다.


“나는 판결에서 판사의 자존심이 녹아든 문장을 좋아한다. (...) 그 뒤에 숨겨진 책임감을 무겁게 여긴다. (...) 자존심, 아니 책임감 덕분에 판사들이 더 치열하게 생각하고 논의한다면 그 혜택은 우리 모두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적복수를 믿지도 지지하지도 않는 나는, 법을 섬세하게 다듬고 정확하게 벼리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여러 선결 조건이 필요하다. 특히 법관이 과도한 사건을 배당받아서 시간에 쫓겨 결정을 해야 하는 실태도, 법과 원칙과 양심에 따른 판결로 보복을 당하거나 화를 입는 일도 없어야 한다. 


지향하는 법치에 관한 생각을 부족한대로 한번 정리한 후에, 현실과 지식을 위한 공부로 책을 읽으면, ‘판결 언어’를 배우고, 그 의미와 해석을 이해하는데 이 책이 구체적인 도움이 된다는 것을 더 잘 느끼게 된다.


“합의는 허심탄회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 고상하고 점잖은 합의보다는 오히려 신랄하고 투쟁적이어서 뜨거운 합의가 바람직하다. 그래야 꼼꼼하고 정돈된, 차가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내가 존경하는, 전공이 법학이 아니었던 한 변호사는 사법고시 공부할 때, 알아들을 수 없는, 암호 같고 비문 같은 문장들에 화가 났다고 한다. 같은 이유로 일반 독자가 느끼는 거리감을 줄이고 흥미로운 퍼즐처럼 암호를 풀어가는 힌트를 주는 소중한 책이다. 


또한 우리가 상식과 법감정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판결들에 대해서, 왜 이런 시각의 차이가 생기는 지도 현행법의 한계와 더불어, 부제의 질문 - 판사란 무엇이며 판결이란 무엇인가  - 과 관련하여 설명해준다. 


“나는 그때 사회 평균인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판단이 ‘합리적인 판단’에서 너무 멀어질 때 경고음을 울려 줄 수 있는 것. 판사가 사회 평균인의관점을 새삼 들여다보면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멀리 와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마시고 관심이 있는 분들은 많이 읽으시길 바란다. 의외로(?) 재밌고 뜻밖에 크게 웃을 대목들도 있다. 무엇보다 으레 짐작하는 법학자의 문장이 아니다. 바른 길을 고집하고 애쓰는, 만나보고 싶은 판사를 만날 기분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실수에는 ‘뒷수습’이 아니라 ‘앞수습’이 중요하니까. 실수에 책임을 묻기보다 실수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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