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질서를 파괴하기보다 계속 재조정함으로써 가 질서가 배제의 질서가 아니라 포용의 질서가 되도록 지켜 나간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자아 안에 타자의 타자성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범죄한 타자에게 돌아오라고 초대하며 그들로 하여금 고백할 수 있도록 환대의 조건을 이루고 그들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는, 결코 파괴할 수 없는 사랑이 그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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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외침이 단순한 신학적 지식을 소개하는 것이 아닌 내면의 신앙고백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그의 외침을 호소력 있게 만든 이유였다. 그는 신학이 단순히 학문의 영역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P612

김재준은 정통과 자유, 양극단을 해결하는 소재를 그리스도 안에서 찾고 있다. 객관적인 계시를 강조하면서도 생명력을 상실한 정통주의, 기준 없이 자유하는 자유주의의 방자한 막연성에 대한 해답이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재준은 전형적인 실존주의 신학자였다.- P615

 따라서 박형룡 박사의 사상은 한글이라는 매체와 한국인의 심성의 여과를 통해 표현되기는 했지만, 많은 면에서 프린스톤의 신학사상과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사상과 일치하고 있었다. 워필드나메이첸이 강력하게 변호했던성경의 영감, 특별히 완전 유기적 축자 영감은 박형룡 신학의 중심이었다. 성경관에서의 이탈이 신학적 현대주의로 흐르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빅형룡은 성경의 무오성을 변호하는 일에 전투적일 만큼 강했던 것이다.- P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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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무아설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론의 이해 없이는 그 특성을 파악하기 어려우며, 아트만론 역시 무아설과의 차별을 통하여 그 정체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 P5

종래 객관주의가 범한 오류는 단순한  자료의  제공을 사상의 이해로 파악한데 있으며, 또한 주관적 접근으로는 객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근거 없는 신념에 있다.
- P10

불교 역시 본질적으로 ‘인도의 철학이다. 설사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전개된 불교라  할지라도  전체적으로는  현실과  이상, 다양성과 통일성, 현상과 실재, 거짓과 진실, 차별과 무차별, 나아가 마을(세속)과 숲(열반)의문제를 철학의 주제로 삼는 인도사유의 틀로써 해석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불교학의 보편화이고, 세계화라고 생각한다.-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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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후쿠자와 유키치를 생각하다.


이번 달은, 수업 과제 준비를 위해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소화), <후쿠자와 자서전>(이산), 야스카와 주노스케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 사상을 묻는다>(역사비평사)를 연달아 읽고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한국에서도 꽤 이름이 진 인물로, 일본 근대 사상 아버지 혹은 메이지의 스승이라고 불리는 등 근대 일본에서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정계에 입문하지는 않았지만, 저술이나 언론 활동으로 여론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었다. <서양사정>, <문명론의 개략>, <학문의 권장>, <후쿠옹자전> 등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가 설립한 게이오의숙은 현재까지도 일본 최고의 명문대 중에 하나로 꼽힌다. 이뿐 아니라, 그는 번역 작업도 활발히 진행하여 권리, 사회, 문화, 경쟁과 같은 번역어를 최초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초기 후쿠자와 사상의 핵심을 담았다고 평가받는 <학문의 권장>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학문 하기를 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학문이란 생활에 도움이 되는” “나아가서는 경험이나 실증에 바탕을 둔실학(實學)을 의미한다. 후쿠자와에게 실학은 인간이면 상하귀천 없이 누구나 쌓아야 할 소양이며, 학문을 쌓음으로써 일신독립하고 일가독립하여 일국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일신독립과 일국독립의 명제는 후쿠자와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학계의 덴노라는 별명이 있는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 구절을 통해서 후쿠자와가 개인적 자유와 국민적 독립, 국민적 독립과 국제적 평등이 완전히 같은 원리로 관철되고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평가하며, 후쿠자와가 최종적으로는 일본을 주권국가로 만들려 했다고 아름답게 표현한다.

 

그런데 한국에 후쿠자와하면, <학문의 권유>에서 보이는 문명개화를 이루려 노력한 사상가 후쿠자와가 아니라, <탈아론>이라는 글을 통해 나타나는 아시아 멸시론자, 침략주의자로서의 후쿠자와다. 이상하다. <학문의 권장>에서 미국 헌법을 인용하며 모든 사람을 학문을 배워 일신독립하여 일국독립해야 된다는 사람이 <탈아론>에서는 전혀 다른 인물인 것처럼 변신한다. 마루야마 마사오나 이전에 한국 학계는 탈아론을 갑신정변의 실패에 따른 낙담으로 쓰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예외적인 글이라고 해석하여 충돌을 피하려 하였다. 그런데, 야스카와 주노스케는 <탈아론>의 후쿠자와 유키치야말로 그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야스카와 주노스케는 초기의 계몽주의적 사상가 후쿠자와와 중후기의 제국주의적 사상가 후쿠자와가 모순되는 두 인물이 아니라 사상적으로 일관된 인물임을 논증하였고, 이러한 주장을 담은 책이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 사상을 묻는다>(원제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인식)이다. 그가 봤을 때, 초기 후쿠자와와 중후반기의 후쿠자와의 사상은 본질적인 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 후쿠자와가 일국독립의 우선 확보는 문명개화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일신 독립도 아울러 달성한다는 문명의 본지의 과제를 추구할 것을 공약한 것은 초기 후쿠자와의 위대한 점이었다. 그가 평생을 이 공약 실현에 헌신했다면, 그에 대한 평가도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후쿠자와는 “‘선진자본주의 제국이 낭패를 당해 방향을잃게 만든 자본주의사회의 계급대립, 계급투쟁, 공화주의사상 및 운동, 사회주의 사상 및 운동이 일본에서도 일어날 것을 경계하여(당시 일본에서 일어난 자유민권운동은 그 같은 우려가 현실이 되었던 사건이었다) 이상과 공리를 추구하는 방향에서 역사적 현실주의로 전환했으며, ‘문명의 본지의 공약은 내팽겨둔 채 “1882년의 임오군란과 1884년의 갑신정변을 계기로 아시아 멸시와 침략의 선두에 서게 된다”.

 

중후반기 <시사신보><호우치신문> 등 언론에 게재한 그의 논설은, 어떤 면에서 러일전쟁(1904~1905) 이후 일본이 나아갈 방향을 예증하는 듯이 보인다. 그의 아시아 인식과 국제관계 인식의 특징을 7개로 정리하면, 1) 아시아 멸시사상 형성의 선두 2) 선험적 국가론의 기원 3) 만몽 일본 생명선론의 원형 4) 국민정신총동원 운동의 3대 슬로건 중 진충보국주장 5) 절대 복종의 황군 병사상 조각 6) 권모술수적 침략 사상 7) 성노예제 등 찬동 가능으로 정리할 수 있다.

 

후쿠자와는 메이지 유신 이전, 두 차례의 미국 여행과 한 차례의 유럽 여행을 갔다온 적이 있었다. 이때의 체험으로 그는 아시아 제국에 대한 차별과 침략을 적극적으로 합리화하는 문명사관을 형성하였다. 그 증거로, “초기 계몽기에조차 후쿠자와는 아시아와 연대하려는 자세나 구상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임오군란 직후에도 그는 논설을 통해 개화파 지원을 명목으로 조선 출병을 주장했으며, 그가 깊숙이 관여했던 갑신정변 때는 천황이 친정할 것까지 호소하였다. 전쟁을 불사르는 대외 강경론은 그가 평생을 고수한 입장이었으며, 청일전쟁 개전 앞두고서는 조선 중립화론에 대한 논의가 있었음에도 그는 “‘보국회를 조직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액수의 군사헌금까지 제공했다. 이러한 그에게 <탈아론>이 예외적인 글이었을까?

 

일본제국의 사상적 아버지답게(?) 후쿠자와는 일본에 불리한 내용은 전면 침묵하거나 부인·은폐하는 모범까지 선보였다. 동학농민운동으로 조선이 청에 파병을 요청하자 일본도 조선에 출병하였는데, 이 일본군의 첫 활동이 바로 2차 동학농민운동의 원인이 되는, 경복궁 점령이었다. 그는 일본군의 왕궁 점령과 흥선대원군 괴뢰 정부 수립에 대해 단 한 편의 논설도 기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흥선대원군은 그가 일찍이 지지해온 개화파의 정적인 보수파의 우두머리였는데도 말이다. 또한, 일본군의 뤼순 학살 사건 때는, 일본군은 문명의 군대이고 공명정대하기 때문에 학살은 근거도 없는 도보라며 학살 자체를 전면 부정하였다. 이후의 을미사변도 운림 학살 사건 때도, 후쿠자와는 침묵하거나 그 책임을 부정하였다. 여기에 천황의 배려와 은전이 전사자에게도 베풀어지도록 야스쿠니 사상까지 장려하였다.

 

자신이 내건 공약을 실현하려 하지 않은 채, 제국주의자와 아시아 침략주의자로서의 길을 걸어간 그는 말년에 지은 자서전 <후쿠옹자전>(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잔, 이산)에서 자신의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한층 크게 서양문명의 공기를 불어넣어, 전국의 인심을 밑바닥에서부터 뒤집음으로써 머나먼 동양에 새로운 문명국가를 이룩한다면, 동쪽에서는 일본, 서쪽에서는 영국이 서로 경쟁을 벌이며 상대에게 뒤지지 않도록 노력할 날도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이것을 두 번째 소원으로 삼아보기로 한다...나라 전체의 대세는 오로지 개진과 진보로 기울어 차츰 그 결실을 맺게 되고, 수년 후에는 그 성과가 청일전쟁에서 관민일치의 승리로 나타났으니, 유쾌하고 고맙기 그지없다. ‘살아 있다 보니 이렇게 좋은 구경도 하는구나’...신일본의 문명부강은 모두 선인유전(先人遺傳)의 공덕에서 유래하며, 우리는 마침 좋은 시절에 태어나 조상님 덕분에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니, 나에게는 두 번째 큰 소원성취라 할 수 있겠다.”(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363~364)

 

일신 독립이라는 국내 민주화의 과제는 끝까지 방기한 사상가 후쿠자와는 청일전쟁의 승리라는 유쾌하고 기쁜소식에서 신일본의 문명부강을 보았고, 자신의 두 번째 소원을 성취한 것이라고 말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시민적 자유주의자도 아니며 단순한 보수적 사상가가 아니다. 그는 근대 일본이 아시아에 대한 멸시와 침략의 길로 나아가도록 보수우익 측에 서서 일본 사회와 메이지 정부를 격려/유도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사상가였다.” 그럼에도 전후 민주주의의 이론적 리더마루야마 마사오는, 후쿠자와 유키치를 가리켜 전형적인 시민적 자유주의자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시도하였다. 그는 왜 이러한 평가를 내렸을까? 야스카와는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맥락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질 때, 마루야마는 후쿠자와를 민주주의의 선구자로 내세움으로써 민주화의 계몽을 일으키려 했다고 판단했다. 민주화라는 목적을 위해 마루야마는 대상에 대한 철저한 내재화와 일정한 거리 확보를 통한 총체적·통일적 파악이라는 학문적 자세를 갖추지 못했고, 당연히 그의 후쿠자와 평가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를 긍정적으로 보려는 학계의 모든 해석을 철저히 비판하고 바로 잡으려는 시도는 직접 책을 읽으며 판단해 보시길 바란다.)

 

전후(戰後)”라는 것은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 인식과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야스카와가 예리하게 지적하듯이, 애매하게 마무리 지어버린 전후 처리 문제가 현대 일본 사회를 규정하였다. 중요한 문장이라고 판단하기에 좀 길지만, 전체 인용을 해보겠다.

 

1) 세계적인 냉전구조, 2) 식민지배의 책임을 방치/누락시킨 도쿄재판’, 그리고 3) 그 최대 책임자인 히로히토의 전쟁책임 불문/은폐 등은 일본의 전후사를 오랫동안 제약/규정해온 요인이었다. 이런 중층적 요인에 의해 전후 일본 국민의 전쟁인식은 침략전쟁을 현장에서 수행한 무수한 참전병사가 귀국했음에도 4) 본래 그들은 징병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쟁터로 나아가 5) “상관의 명을 받드는 것, 실은 짐의 명을 받는 것임을 알라라는 군제(軍制) 아래에서 전쟁을 벌였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6) 여기에 아시아에 대한 모멸의식이 일본인의 마음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에 침략자로서의 죄의식을 결여하게 되었다. 오히려 7) 국제법 위반의 원자폭탄 투하와 도쿄 대공습, 오키나와전과 중국 잔류 고아 등의 비극을 몸소 체험했다는 요인이 복잡하게 작용해 피해자 의식에 압도적으로 사로잡혔다. (야스카와, 77~78)

 

또한, 제니스 미무라의 연구에서도 드러나듯이, 전후 일본은 헌법의 명문만 바뀌었을 뿐 제국주의 시절 관료들이 그대로 전후 일본 정계의 중추를 이루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군국주의 행보와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기대하기 힘들다.

 

얼마전은 815, 75번째 광복절의 날이다. 이 날은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미국이나 유럽인에게는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일이다. 한국인에게는 무엇보다 뜻깊은 광복의 날이다. 하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815일은 가슴 아픈(?) 패전의 날이다. 대만을 무력 침략하고,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고 동학농민군을 잔혹하게 학살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본의 제국주의적 행보는 태평양전쟁기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허상의 억압적 체제로 절정을 맞았지만, 미국의 2차례에 걸친 핵 공격을 받고 히로히토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막을 내렸다. 그 시기 동안, 일본제국은 대외적으로 위안부, 강제징용, 생체 실험과 같은 전쟁 범죄를 일삼았다. 조선의 경우만 놓고 봐도, 조선총독부 및 일제의 저질스러운 통치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이 기간 동안, 위에서 언급한 문제 중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으며, 반전(反戰) 움직임에 있어서도 현재의 일본은 패전 직후보다 훨씬 떨어진다.

 

KBS1 광복절 특집 다큐에 나온 통계에 의하면, 일본 국민 56%가 침략 전쟁 의식하지만, 84%의 일본인은 이에 대해 충분히 사죄했다고 인식하고 있다. 저자가 2000년까지 나고야대학교 신입생들에게 개인적으로 행했던 설문에 의하면, 대학생들은 태평양전쟁의 패전일은 비교적 잘 기억하고 있는 반면, 개전일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불균형한 역사 인식 속에서 후쿠자와는 1만엔 지폐에 당당히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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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당시의 고대인들이 상상도 못할 윤리를 3000년 앞서서 미리 강요하지 않는다. 인간의 도덕적 인지 능력과 윤리 의식의 성장 속도애 맞추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인간현실 적응노력(divine condescension) 이라고 부른다.-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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