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이야기 1
모리 카오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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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하고 달달한 로맨스 이야기의 정석. 거기다 장인 정신으로 수놓은 꼼꼼한 사물 작화로 시각적 즐거움은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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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앎 -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 다시 보기 로완 윌리엄스 선집 (비아)
로완 윌리엄스 지음, 민경찬.손승우 옮김 / 비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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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피조물을 위해 죽었다는 거대한 역설을 붙들고 몸부림친 그리스도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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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역사 - 지금껏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소비하는 인간의 역사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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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해 보이고 일상적인 것들의 소비의 역사, 그리고 그 이면에 있는 젠더갈등, 제국주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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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로 태어나서 - 닭, 돼지, 개와 인간의 경계에서 기록하다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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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개개인의 선함과 악함이 아니라 구조와 시스템. 비건이 되는 건 아니더라도 육식을 줄일 필요가 있겠다.
다 읽으면 며칠 고기 트라우마 앓을 수 있으니 주의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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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사랑>은 사랑에 대한 에세이다. 서양 고전 전통에서 사랑에 관한 가장 고전적인 논의는 플라톤의 <향연>에서 나온다. <항연>은 아가톤이라는 작가의 비극 경연 대회 우승 후 열린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와 여러 연사들이 에로스를 찬미하는 연설을 아폴로도로스가 전해들어 이야기해주는 구성을 취한다. 이 이야기에서 핵심은 당연히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론이지만,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이다.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그리는 에로스와 인간은 어딘가 '비극'적이다. 그는 사랑의 힘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태초에는 세 종류의 인간, 즉 남성, 여성, 자웅동체가 있었다. 머리는 하나인데, 얼굴이 두 개였고 네 팔과 네 다리, 두 개의 생식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오만하여 제우스의 격노를 사고 말았다. 제우스는 천벌을 내려 이들을 반으로 잘라 하나의 얼굴, 두 팔과 두 다리만 지닌 반쪽의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그들의 본성이 둘로 잘렸기 때문에 반쪽 각각은 자신의 나머지 반쪽을 그리워하면서 줄곧 만나려 들었네. 서로 팔을 얼사안고 한데 뒤엉켜 한 몸으로 자라기를 욕망하다가 결국에는 상대방과 떨어진 채로는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굶어서 혹은 다른 아무 일도 하지 않음으로 해서 죽어갔네...바로 그래서 오래전부터 내내 서로에 대한 사랑이 인간들에게 나면서부터 들어 있게 되고, 그것은 옛 본성을 함께 모아 주며, 둘에서 하나를 만들어내어 인간 본성을 치유하려 노력하네. 그러기에 우리 각자는 한 인간의 부절()이네. 마치 넙치들 모양으로 하나에서 둘로 잘라져 있으니까 말일세. 각자는 자신의 부절을 하염없이 찾아다닌다네."(강철웅 역, <향연>, 이제이북스)


에로스란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을 찾아서 이전의 온전한 존재로 돌아가려는 열망이다. 즉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사랑이란 인간의 불완전, 자신의 결핍으로부터 시작한다. 타인에게 호의나 사랑을 느끼는 것은 상대방 안에 자신에게 결핍한 무엇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가 아직 소유하고 있지 못한 것을 소유하고자 한다. 다른 인간을 소유하려는 욕망은 사랑받는 대상이 갖고 있는 특성이 사랑하는 쪽의 사람에게는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한자인 인간의 사랑은 결핍에 대한 자각이므로, 인간은 사랑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필요의 사랑이다. 따라서 무한자, 즉 신은 필요의 사랑을 하지 않으며 그가 사랑을 한다면 언제나 무엇을 주는 이타적 사랑일 것이다.


C.S.루이스 역시 처음에는 사랑을 위와 같이 이해했던 듯하다. "들어가는 말"에서 그는 원래 저술 구상 계획을 고백한다. "저는 인간의 사랑이란 사랑 자체이신 분의 사랑을 닮은 한에서만 비로소 사랑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고 말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필요의 사랑Need-Love'과 '선물의 사랑Gift-Love'이라는 개념을 구분한다. 필요의 사랑은 "무력한 존재"인 인간이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지적으로 타인을 필요로" 하며 "무엇을 알기 위해선, 또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할 때조차 다른 이들"을 필요로 하는 사랑이다. 이는 <향연> 속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을 염두에 둔 개념 구분임이 분명하다. 루이스는 이 필요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과 전적으로 다르며, 선물의 사랑만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실상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루이스가 봤을 때, 필요의 사랑은 '이기심'이 아니며 진정한 이기주의자는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인간은 사실상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에 필요의 사랑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나아가 필요의 사랑과 선물의 사랑이 철저하게 분리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한 구절("최하층 없이는 최상층이 없다")을 인용하며 루이스는 필요의 사랑이 없는 선물의 사랑은 "악마적인 환상"이 된다고 경고한다. 실상 필요의 사랑은 "인간의 가장 높고 가장 건강하며 가장 실제적인 영적 상태...그 주된 요소"가 된다. 따라서 이런 결론이 도출된다. "인간은 하나님과 가장 유사하지 않을 때 오히려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게 된다."


"인간의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영광스러운 형상일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의 사랑과 신의 사랑은 서로서로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사랑=필요의 사랑=소유하려는 사랑/신의 사랑=선물의 사랑=주기만 하는 사랑'이라는 도식은 상당히 편협한 사랑론이다.


p.s.

나는 C.S.루이스가 존 밀턴과 성서의 충실한 독자였던 만큼이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충실한 독자였다고 믿는다. 비록 루이스의 문학비평서(<실낙원 서문><폐기된 이미지> 등)에서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는 경우는 매우 적지만 말이다.


플라톤의 <향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같은 책들이 루이스와 별 관련 없어 보여도, 실제로 루이스는 이들을 의식하며 글을 썼을 것이다. <네 가지 사랑>에는 <향연>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여러 곳 있었다. 그래서 <네 가지사랑>은 부분적으로 'C.S.루이스의 <향연> 독해의 산물'로도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규정은 인상론이다. 그리고 루이스는 그리스도교의 층위에서 사랑을 논하고 있다는 점, 루이스의 얘기와 <향연>의 얘기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다는 점 때문에 어디까지나 '부분적으로'다. 


그래도 두 책을 같이 읽으며 비교해보는 것도 좋은 독서가 될 것이다. 그 어렵고 난해한 <향연>을 읽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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