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배제의 문제에 기독교는 답이 될 수 있을까? 최근 보수 기독교계의 혐오 발언과 정부 통계로도 잡히지 않을 정도로 교단이 분열된 한국 교회의 분리주의적 성향을 보면, 답은 매우 비관적이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따로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예수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인 용서(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와 비폭력(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의 가르침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듯하다. 특히, ‘용서의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힘들다. 발칸에 주목하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 20세기 발칸의 역사는 용서포용가장 강력하게 시험받는 곳일 것이다. 19~20세기 발칸은 폭력, 야만, 원시성과 같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부정적 의미를 온전히 실현한 역사를 썼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발칸 또는 발칸으로 상징되는 폭력의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19세기 이전의 발칸에는 뚜렷한 배제와 차별의 기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듯하다. “발칸은 하나의 종교적 단일체나 언어적 단일체가 되기에는 산세가 너무 험하고, 취약하며, 분리돼 있었다.” 정교회가 지배적이기는 했으나, 보스니아에서는 보고밀교가 오스만 지배 이전까지 존속했을 정도였다. 오스만제국이 발칸을 지배한 이후에도 오스만 유럽에서는 인구의 태반(80퍼센트)이 기독교로 남아 있었다.” 오스만 정부가 기독교도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려 하였으나, “대규모로 개종하는 것은 발칸의 몇몇 지역에 한정되었다.” 또한, 높은 세금을 물고 있던 기독교인들의 집단 개종으로 인한 재정 약화 우려 등의 이유로 개종에 크게 열의를 보이지도 않았다. 이렇듯, 오스만이 종교간 공존과 관용을 기본 방침으로 삼았기에 마케도니아의 한 농부는 우리는 성모마리아를 믿는 무슬림입니다라고 답할 수 있었고, 일상생활의 영역에서도 신학적 경계를허물 수 있었던 것이다. 발칸인들은 민족적 구분에 대해서도 무관심하였다. “술탄의 신민들에게는 민족성(nationality)’라는 개념이 없었고, 기독교는 인종적 결속보다는 신도들의 공동체에 더 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때의 발칸은 아직 자아와 타자의 정체성 구분이 엄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만제국 치세 말기, 개혁을 통해 근대 국민국가 체제로 전환되면서, 다층적 정체성 의식에서 나온 오스만 제국의 특유의 유연성이 사라지는 결과를 낳았다(<오스만제국>,까치,2020). 발칸의 계몽적 지성인들이 민족의 역사라는 관념을 도입하면서 근대 민족주의가 시작되었고, 민족성으로 타자를 나누고 때로는 억압하였다. 약해진 오스만의 영향 아래, 세르비아,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이 독립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였다. 신생국들은 정치적으로 영토 확장에 대한 열망과 실지(失地) 회복이라는 명분 하에 팽창주의 노선을 표명하였고, 대중은 강대국의 개입을 극도로 혐오하였다. 여기에 인종성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주의의 문제도 결합되어, 자국 내 이민족(그 기준이 대단히 모호하고 자의적이지만) 처리에 대해 극단적 폭력과 낙관적 생각이라는 두 가지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와 같은 극단적인 민족주의 분출이 1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화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모두 아는 바이다. 그러나 민족자결권으로 인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민족성의 문제는 발칸에서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다수 민족은 소수 민족에 대해, 주민 교환 심지어는 학살 등의 방법을 통해 이들을 배제·동화하였다. 발칸의 깊은 갈등의 역사는 전후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뿌리내리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이데올로기로 더욱 첨예해졌다.”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할 즈음에는 다시 민족주의가 부흥했으며, 21세기의 발칸은 민족성이나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국제경제로부터 오는 위험이 발칸을 위협하고 있다.

 


크로아티아 출신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의 <배제와 포용>은 이와 같은 20세기 발칸의 역사, 그중에서도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배경으로 할 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일어난 민족적·인종적 갈등은 근본적으로 정체성과 타자성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였다. 근대적 자아나 전근대적 자아는 푸코의 주장처럼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구성된다.” 나치의 인종주의 정책이나 발칸의 국가들이 행했던 편협한 소수민족 정책은 순수성이라는 허구적 논리로 돌아갔다. 혈통, 영토, 기원, 역사 모든 것은 순수해야 하며, “다원성과 이질성을 동질성과 통일성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은 앞에서 말한 바 대로이다.

 

배제는 크게 세 가지 양상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제거에 의한 배제다. 둘째, 동화에 의한 배제다. 이는 분리를 지워 버리는 것을 수반한다...그 결과 타자는, 자아처럼 만들어져 동화되거나 자아에 종속되어야 할 열등한 존재가 된다.” 마지막 세 번째 형태는, 유기에 의한 배제, 즉 무관심이다. 나는 고통받는 약자를 지나쳐야만 한다. 무관심은 그런 생각을 만들고 또한 실제로 우리가 그런 생각을 성취하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타자를 배제하는가? 우선 안정적인 외부정 정체성을 선호가 때문이다. 이에 의하면 타자는 집단에서 씻어 버려야 할 더러움이며, 인종적 공간이라는 생태계를 위협하는 오염원이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의 그늘을 지우기 위해서다. 그러나 볼포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세 번째, “타자가 가진 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패권적 자아가진 바를 지켜내고 타자로부터 권력을 빼앗고 싶어 하기 때문에타자를 정복하며 소유한다. 여기에 정체성을 향한 욕망이 결부되면서, 폭력 성향도 강화된다.

 

배제는 증오라는 감정을 수반하며, 이 증오의 감정은 폭력의 연쇄를 부른다. 특히, 제거와 동화의 배제를 생각해보라.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교사였던 한 이슬람 여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들(자신이 가르쳤던 학생)에게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그러는 동안 그들은 정교회 신앙이 아닌 모든 것을 파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하드전쟁(그녀는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이 길밖에 없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도 하며,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피해와 가해의 중첩의 상황 속에서는, 갈등의 골은 더 깊어질 뿐이며, 유죄한 사람과 무죄한 사람의 경계가 희미해지며, 바울이 말한 바, “다 같이 죄 아래에 있음을”(3:9) 발견하게 된다(물론 이것이 모든 죄가 동등하다는 결론으로 이끌어지지는 않음에 유의해야 한다). 배제의 세상을 변혁하기 위해 우리는 완전히 순수하고 무죄한 공간은 없음을 폭로하며, ‘무조건적인 포용의 의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드러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를 내어주시는 사랑을 누구에게나, 심지어는 악마처럼 보이기까지 한 그들에게도 보여줘야 한다. 배제의 사슬을 끊는 첫 열쇠는 하나님의 받을 자격 없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경륜으로부터 시작한다.

 

타자의 배제 문제와 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타자를 제거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을까? 혹은 에반게리온처럼 모든 인류를 하나로 통합하는 제3인류 계획이 답일까? 이 두 방법은 모두 공통으로 배제에 의한 해결이다. 그러나 볼프는 다른 방법을 얘기한다.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포용이다. 그렇지만, 초반에도 말했듯이, ‘진정한 용서는 가장 인기 없는 가르침일 것이며, 그리스도인에게도 힘든 가르침이다. 무엇보다 용서가 망설여지는 이유 중 하나는, 용서한다 하더라도 또 새로운 갈등이 일어날 것이라는 우리의 암울한 경험적 전망 때문이다. 여순 사건 때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좌익 학생 두 명을 용서하고 회심시킨 손양원 목사가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로 보인다. 99%의 경우, ‘최종적 화해란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볼프가 지적한 대로 우리의 바른 물음은, 어떻게 최종적 화해를 이룰 것인가가 아니라, 최종적 화해의 부재 속에서도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어떤 자원이 필요한가이다.

 

첫 번째는 회개다. 회개란 죄를 범했음을 인정하는 심층적 내면적 전환이다. 배제와 폭력을 행한 이들이 회개하라는 말은 당연히 수긍할 수 있지만, 희생자들마저 회개하는 것은 일견 부당해 보인다. 그러나 죄인이라는 말이 악인이라는 말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왜 회개하라는 부르심의 대상이 억압받는 이들을 포함되는가?...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비인간적인 증오로부터 해방될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희생당한 이들이 회개해야 한다는 말은 그들이 악인과 똑같은 죄를 저질렀다는 말이 아니다(앞의 죄의 동등성 거부를 유의하라). 회개는 증오의 고리를 끊고, 희생자들이 압제자들의 행동을 모방하고, 스스로 원수의 거울 이미지가 되도록내버려두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회개한 자아는 참된 사회 변혁에 동참할 수 있는 사회적 행위가 될 수 있다.

 

회개의 다음은 타자를 위한 공간 만들어주기가 필요하다. 타자/가해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채로는 평화롭게 살 수 없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는 역전되어야 하는데, 폭력을 통한 역전이 아닌 삼위일체의 페리코레시스, 다른 말로 자기 내어줌을 통한 역전이다. 교부 시대 이래로, 전통적인 삼위일체는 이렇게 이해되어왔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각 위격이 모두 독립적인 개체이지만 그 위격은 타자의 내주함을 통해서만 위격이 된다. 성자는 성부와 성령이 그분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성자이시다.” 십자가를 통한 원수(인류) 포용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어주심과 내주하심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내어주시며, 상호 내주하기는 하나님의 위격들의 춤추는 자아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이루신 일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타자를 나의 자아 정체성 안에 받아들이는 작업이 요구된다.

 

화해와 용서의 최종적 단계는 기억하지 않기. “과거는, 기억되는 한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양상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기억되는 상처는 경험되는 상처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일을 잊되, “하나님의 품 안에서잊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는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21:4)라며 종국의 망각을 암시해주고 있다. “칼이 없는 곳에는 발패도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용서하신 죄를 잊어버리실 것이며, 그것은 또한 약속이기도 하다(다음을 보라. 이사야 4318~19, 25).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십자가는 또한 우리의 죄를 잊어버린다. 하지만, ‘망각의 과정은 우리의 정의 감수성과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손이 피로 물든이들에게 희생된 자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이 말은 옳다. 따라서 아직 메시아가 영광 중에 오시지 않았기에, 희생자들을 위해 우리는 그들의 고난의 기억을 계속 살아있게 해야 한다.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외쳐야 한다.” 그러나 이 기억이 다시 증오와 분열로 이어지지 않도록 구속(救贖)의 소망으로 통제되어야 한다.”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복음은 폭력과 배제의 역사를 종식시키고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사실, 회개, 자기 내어줌, 기억하지 않기를 다 완수하더라도 포용은 완성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나는 타자를 향하여 손을 벌려도, 타자는 손 벌리기를 거부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나를 안는 척하면서 내 등에 칼을 꽂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궁극적인 스캔들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포용은 은총이며, ‘은총은 언제나 도박’”이라는 볼프의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을 듯하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이 세상에 은총이라는 도박을 하고 계신다. 실패할 확률이 극악으로 더 높고, 실제로 번번이 은총을 거절당하였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멈추지 않으신다. 따라서 우리도 타자와 원수를 향하여 두 팔을 벌려 포용의 의지를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언제나 십자가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궁극적으로 십자가가 승리할 것임을 믿기에, 구원하심이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음을 믿기에. C.S. 루이스는 <용서>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용서할 수 없는 부분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영광의 무게>>, 188p).우리는 과연 원수조차 용서하고 포용하여 내 이웃처럼 지낼 수 있을까? 볼프의 말을 빌리자면, “아니요, 못할 겁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로서 나는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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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서도 군사적 기득권 세력들이 고결한 민족화해와 일치대단결의 대의명분에 얼마나 동의해주느냐가 아주 중요해질 것이다. 우리 겨레에게도 분단체제의 희생자인 사람들의 원한과 억울함이 남남 갈등 혹은 북한 대남강경파 득세의 온상이되고 있다. 이 문제를 어떤 모양으로든 해결해 주지 않고 급속하게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민족화해만 외치면 분단체제에 희생당한 가족들을 가진 사람들의 멍든 가슴을 어루만지는 데 실패할 것이다.-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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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하고, 동등하게 만들고, 법을 만들고, 보편화하는 순서로 행동해서는 정의를 이룰 수 없다. 정의를, 오직 정의만을 원한다면, 불의가 다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불의가 없는 정의를 원한다면, 사랑을 원해야 한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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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원효 선생님. 평소 철학자의 주장을 음미하려면 타인의 연구나 해석 대신 본인이 직접 원전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원효의 저술을 직접 읽으려고 하였다.

첫 번째는 <대승기신론소>였고 두번째는 <금강삼매경론소>였다.

읽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10페이지 읽었는데, 웬만한 서양 현대 철학자 뺨치게 난해했다.

 

 

 

 

 

 

 

 

 

 

 

 

 

대승기신론소는 마명의 대승기신론을 먼저 읽어야 한다고 들어 마명을 읽어보기로 하였다. 읽기는 했으나 매우 어렵게 독파했었다. 그러나 이해는 잘 안 되었다.

 

 

 

 

 

 

 

 

 

 

 

 

두 번의 독서 실패 끝에 기본으로 되돌아가기로 하였다. 그래서 불교의 기초부터 공부할 수 있는 책들을 골라보았다. 우선, 나는 용어와 주요 개념조차 모르니 최대한 이를 채울 수 있는 책으로.

 

1. 곽철한, <불교의 모든 것>,행성b

 

 

 

 

 

 

 

 

 

 

 

 

목차를 보자. 1장에는 석가모니를 먼저 다룬다. 그리고 2장에서는 대승불교의 출현과 경전사를, 3장에서는 대승불교의 다양한 종파(?)들을 다룬다. 특히 대승불교의 유식학파와 중관학파는 마명의 대승기신론과 원효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니 이 부분은 정독해야겠다.

그 뒤에는 불교의식과 사찰, 기초 용어를 담고 있으며 주요 불교 경전 다이제스트와 짧은 한국불교사까지. 책의 제목처럼 불교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2. 김용옥,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통나무

 

 

 

 

 

 

 

 

 

 

 

 

 

도올옹은 고희가 넘으신 연세에도 지치줄 모르는 열정으로 저술과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신다. 이 책은 누구나 이름은 알고 있을 <반야심경> 강해다. 총 2부로 나뉘는데, 1부에서는 반야심경을 이해하기 위한 요소들을 설명하고 있고, 2부에서는 앞의 제반요소들을 바탕으로 폭풍처럼 반야심경을 해설한다. 도올옹의 항상 지나치게 단정적인 평가와 서술은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지만, 어려운 개념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는 능력은 탁월한 듯싶다. *<금강경 강해>(통나무)도 한번 시간나면 읽어보려 한다.

 

3. 데미언 키온, <불교>, 교유서가

  믿고 보는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특히 서양 학자가 쓴 불교 입문서라는 점이 흥미롭다. 붓다 - 불교 교리 - 불교사를 다루는 듯하고, 기독교와의 비교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4. 권오민, <인더철학과 불교>, 민족사

 

 

금번, 대학에서 <불교철학>이라는 수업을 듣는데, 그 수업의 주교재라서 구입하였다. 저자는 제목에도 드러나듯이, 인도철학의 맥락에서 불교를 이해함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우파니샤드 등의 인도철학을 다룬 다음 본격적으로 불교의 사상을 논하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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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동아시아 근대사
미타니 히로시 외 엮음, 강진아 옮김 / 까치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본서는 일국사적 관점을 넘어서서 한중일 거기에 류큐와 대만, 러시아와 미국까지 포함하는 동아시아 지역 전체의 역사상을 설명한 교양 역사 서적이다. 각각 동아시아 국가들(조선, 에도 막부, 청, 류큐)의 근세 시기부터 시작하여 청일전쟁(1894)까지의 19세기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가장 마지막 챕터인 27장은 일종의 총론 같은 것으로, 자유무역과 국민국가 개념이 동아시아에 확산되면서 ˝제도적인 측면이나 결제 네트워크를 한 ‘점과 선의 글로벌화‘˝가 이루어짐을 강조하며 19세기 동아시아에서 공통으로 나타난 국가 공공재의 형성을 다룬다.

이 책의 내용상 특징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 책은 한국사 - 일본사 - 중국사 각국의 역사를 설명하고 단순히 짜맞추지 않는다. 필진들은, 동아시아사라는 맥락에서 일국사를 기술하더라도, 여러 플레이어들의 상호 관계와 내외적 갈등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최대한 중점적으로 그려낸다. 그 때문인지 19세기 일본이 가장 두려워했던 나라 중 하나인 러시아가 상당히 비중있게 나온다. 개국 이전 일본은 사할린 문제를 두고 러시아의 실력 행사를 겪어본 적이 있어서 항상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군비 확장 목표는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에 맞추어 일본과 청의 대결에서 영국과 러시아의 갈등에 대응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무단 점거했던 사건이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의 영향력 약화를 위해 청과 협력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리고 각 챕터 마지막에는 꼭 다른 필진들의 짧은 논평들이 들어가 있다. 본문과 다른 관점에서 주제를 바라본다거나 본문을 보완하고 있어 읽을 만한 논평이 상당히 많았다.

이 책의 원제는 <어른을 위한 근현대사 19세기편>이다. 역자인 강진아님께서 사람들이 모를 만한 단어에 대해 역주도 잘 달아주셨다. 다만, 서술 방식이 다소 딱딱해 어렵게 느낄 수는 있지만, 얻어가는 것도 많고 유익한 독서가 될 것이다.

*김시덕 선생님의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와 같이 읽으면 매우 알찬 독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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