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번역본을 구매하면 기존에 산 책에 있는 필기를 옮겨놓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중요한 부분의 번역을 비교할 수 있게 된다. 최근 구입한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봐보자.


- 정치의 정의

오늘날에는 한 특정한 영토 내에서 - 이 점, 즉 '영토'는 현대국가의 특성 중의 하나입니다 -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을 (성공적으로) 관철시킨 유일한 인간 공동체는 곧 국가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오늘날 국가는 강제력을 사용할 '권리'의 유일한 원천입니다.

요약컨대, '정치'란 국가들 사이에서든, 한 국가 내 집단들 사이에서든, 권력에 참여하려는 노력 또는 권력배분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노력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 전성우 역, 나남, 29p


오늘날의 국가는 일정한 지역 내에서 - 이것, 즉 "지역"은 오늘날의 국가를 규정짓은 특징 중의 하나이빈다 - 정당한 물리적 폭력의 독점을 요구하는 (그리고 이 요구를 성공적으로 관철하는 인간 공동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국가는 폭력을 사용할 "권리"의 유일한 원천으로 간주됩니다.

요컨대, 우리에게 '정치'란 국가들 사이에서든, 한 국가 내의 인간집단들 사이에서든 권력의 일정한 지분을 차지하려는 노력이나 또는 권력배분에 영향을 끼치려는 노력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직업으로서의 과학/직업으로서의 정치>, 김덕영 역, 길, 93p

 

- 근대국가

근대국가는 공적 법인체의 성격을 띤 지배조직입니다. 이 지배조직은, 한 특정한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을 지배수단으로 독점하는 데 성공한 지배조직입니다. 근대국가는 이러한 독점을 위해 모든 물적 운영수단을 국가 운영자의 수중에 통합시켰고, 과거에 이 물적 운영수단에 대해 독자적 처분권을 가졌던 모든 자립적 지배층의 권한을 박탈하고 그들의 자리에 국가 자신을 그 정점으로 정립하였습니다.

전성우 역, 42p


근대국가는 기관적 지배단체로서 일정한 지역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을 지배수단으로 독점하려고 노력했으며 또한 독점하는 데 성공했고, 이러한 독점을 위해 한편으로 모든 물적 경영수단을 그 지도자의 수중에 집중시켰고 다른 한편으로 과거에 독자적인 권한을 갖고 이 물적 경영수단을 통제했던 모든 자주적인 신분적 기능 담지자로부터 그 경영수단을 몰수하고 그들의 자리를 장악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국가의 정점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김덕영 역, 104p

 

 

전성우 역과 김덕영 모두 전체적으로 크게 차이나는 부분은 없다. 어찌보면 당연한 사실이다. 성서나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같은 작품들과 달리, 막스 베버의 책은 번역자에 따라서 용어 선택 등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어도 느낌 자체가 달라질 일은 거의 없다. 전성우 역이 상대적으로 원문의 긴 문장을 보다 짧게 끊거나 원문에 없는 문장도 넣는 등 가독성을 염두에 둔 번역을 하였고, 김덕영 역은 원문에 더 충실하다. 두 번째 인용구만 봐도, 전성우 역이 3문장으로 번역되었는데, 김덕영 역은 한 문장으로 원문 그대로 번역했다. 이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앞서 말했듯 결정적인 차이는 없고 둘 다 좋은 번역이다. 단, 주해나 해제는 압도적으로 김덕영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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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좀비물일까? 좀비물을 촬영하다가 진짜 좀비가 나와서 현장은 엉망이 되고 생존자들끼리마저 서로 죽고 죽이는 데스게임이 펼쳐진다는 플롯 자체는 이상할 게 없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허접한 연기와 연출이다. 분명 익숙한 좀비물을 보는데도 이후 전개를 예상하기 어렵다. 게다가 37분만에 엔딩크레딧과 '컷!' 소리 때문에 당혹감은 배가 된다. 도대체 이 정체불명의 영화는 무엇일까?


의문은 약 40분의 당혹스러운 무언가가 끝나면서 풀린다. 무려 영화의 1/3 이상을 지나서야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삼류 감독 히구라시에게 방송국에서 좀비물 제작 요청이 들어오고, 이 제안을 받아들인 그는 타이트한 스케쥴, 배우의 갑질 등 온갖 난관을 뚫고 영화를 제작해야 한다. 초반 시퀀스는 바로 그 좀비물 영상의 제작기였던 것이다. 이 듣도보도 못한 영화가 선사하는 신기한 영화적 체험을 최대한 온전히 향유하려면 이 정도 줄거리 정보만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초반 시퀀스에서 의아했던 요소들이 후반부에서 모두 풀리면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때부터는 감독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면서 이미 본 똑같은 상황인데도 처음본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감상하게 된다. 영화는커녕 예능을 보고도 크게 웃은 적이 거의 없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거미집>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거미집>이 김열이라는 한 예술가의 창작욕에 집중하는 영화라면,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한 편의 극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흘려야 하는 땀과 눈물, 애환(그리고 웃음)이 담겨 있다. 참 멀고도 긴 촬영을 끝내고 극을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감독과 배우들, 스태프의 짓는 홀가분한 얼굴에서 웬만한 감성영화 못지않은 감동이 벅차올랐다. 이 영화에는 대스타도 없고 유명 감독도 등장하지 않는다. 감독은 집에서는 아내와 딸에게 무시당하는 소시민적 인물에, 감독으로서도 변변찮다. 배우들도 재연배우거나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 뿐이다. 티브이에서 방영하는 30분짜리 단편이지만, 대부분의 인물이 처음 해보는 장르에 처음 해보는 모험이었다. 당연히 뜻대로 안 되고 돌발상황이 속출한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러한 위기상황을 히구라시를 비롯한 소시민, 아마추어가 하나하나 해결하여 결국 한 편의 작품을 만드는 그 과정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세계평화를 지키는 특수요원이나 슈퍼히어로보다 30분짜리 단편을 완성하려는 그 노력에 더 손에 땀을 쥐며 보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카메라를 멈추지마'라는 영화 제목에서는 아마추어의 열정과 꿈이 느껴진다. 열악한 환경에서 카메라를 멈추지 않겠다는 일념만으로 난관을 극복하는 모습이 영화 막바지의 정서적 파장을 깊게 해준다. 한마디로, 긴장감과 웃음과 감동이 억지스럽지 않게 한 작품 안에 모두 담겨 있으며, 좀비물이라는 단물 다 빠진 소재를 차용하면서도 이리도 참신하게 극을 이끌어간 능력에 혀를 내두른다. 저예산 B급 영화 특유의 감성 말고는 난 이 영화에서 별로였던 점을 발견할 수가 없다. 어설픔은 이 영화의 단점이 될 수 없다. 그 어설픔이야말로 영화의 매력이자 핵심이기 때문이다. 내세울 것 없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어설프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영화. 그게 이 영화의 최대 매력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보면 모든 게, 특히 의도적으로 설정된 아마추어들의 '어설픔'마저도 사랑스럽다. 무엇보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웃으면서 끝나는 좀비물이라는 것이 가장 좋았다.(개인적으로 좀비물은 그닥 즐기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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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사계절 만화가 열전 13
이창현 지음, 유희 그림 / 사계절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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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보다 보면, 독서 초보자인데 좋은 책을 추천해달라는 글을 종종 볼 수 있다. 과연 독서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어떤 책을 권해주어야 할까? 내가 독서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C.S.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였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 경험일 뿐이므로 독서가 처음인 사람에게 함부로 권하기 어려운 책들이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취향과 수준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가 주로 읽는 책들을 추천하기도 애매하다. 베스트셀러는 내가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고, 명사 추천 도서처럼 추천자들도 분명 안 읽었을 책들을 읽어보라고 하는 건 무책임하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다양한 책과 독서법에 대해 다룬 책을 추천하는 것이다. 그런 책을 읽으면서 좋은 책을 고르는 법과 책 읽는 법을 익힐 수 있고, 저자가 직접 읽고 추천하는 도서 목록을 보며 자신의 흥미를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익명의 독서중독자들 1>은 만화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위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독서 에세이다. 이 책에는 곧바로 적용할 수 있는 꿀팁들이 여럿 소개되어 있다. 가령, 완독에 집착하지 않는다, 저자 소개에 책 내용과 관련 없는 잡설이 많은 책은 거른다, 베스트셀러보다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책부터 읽어볼 것, 책은 사서 읽는다, 목차와 서문을 보고 책을 고른다 등등. 만화의 특성상 코믹하게 표현되기는 했지만, 실제 나도 책 고를 때 사용하는 방법들이고 다른 곳에서도 자주 강조하는 방법들이다. 물론 이 방법들은 문학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문학은 목차가 무의미한 경우가 허다하고, 특히 소설의 경우 반드시 처음부터 읽어야 하기 때문에 책을 이해하려면 어쩔 수 없이 완독을 해야 한다. 그러니 이 만화를 읽고서 좋은 소설 고르는 법은 알 수 없다. (사실 대문호라고 불리고 고전으로 취급받는 소설은 아무거나 읽어도 좋다. 난 현대소설보다는 그런 책들부터 읽는 걸 권하는 편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독서중독자들'을 전면적으로 주제로 삼고 있으니, 작중에서 이 독서중독자들이 언급하는 책과 작가들을 찾아보는 것도 은근히 재미있다. 사회과학, 역사, 소설 장르 가릴 것 없는 사람들이니 언급하는 책 종류도 다양하다. 그리고 직접 언급은 안 되고 표지만 뭉뚱그려서 나오는 책들도 있는데, 내공이 된다면 어디 출판사의 무슨 책인지 맞춰보는 것도 한 재미다. 이쪽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보면 유명한 책도 많이 나와서 책 이름이 나올 때마다 키득거리며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여기서 나오는 책 중에서 관심 가는 것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카프카 <성>처럼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책도 있으니 잘 알아보고 사시길)



*언젠가 3권이 나온다면 독서 도구에 대한 얘기도 나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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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칼 바르트 지음, 문성모 옮김 / 예솔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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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20세기 신학의 거두 칼 바르트가 모차르트에 대하여 쓴 글들을 묶은 아주 얇은 소책자다. 칼 바르트가 썼다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는 것이, 바르트의 신학을 전혀 모르더라도 매우 쉽게 읽을 수 있다. 바르트의 신학과는 무관하게 모차르트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드러내는 글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쓴 책'이라는 것에 관심을 둔 사람이면 실망할 수 있지만, 모차르트를 좋아하거나 '바르트가 모차르트에 대하여 쓴 책'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 책에는 4편의 글이 포함되어 있다. '모차르트에 관한 고백' '모차르트에 대한 감사의 편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자유'가 실려 있는데, '고백'과 '감사편지'는 제목 그대로 바르트가 모차르트에게 전하는 사적인 고백과 감사가 담겨 있다. 기억나는 건 천국에 가면 자신은 모차르트를 누구보다 먼저 만나고 싶다는 것. 모차르트에 관심이 있다면 바르트가 모차르트 음악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 있는 3장과 4장이 좀 읽을 만한데, 두 장의 내용이 다소 겹치는 것이 많다.


바르트가 보는 모차르트 음악의 핵심은 '자유분방함'이다. 모차르트는 프랑스혁명과 같은 당대 정치적 사건과 직접적인 접촉이 거의 없었으며, 심지어 괴테도 거의 읽은 적 없을 정도로 독서를 하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음악에 '천착'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는 자연계나 정신계에서 단지 그의 음악에 필요한 사건이나 자료나 과제들을 찾고 발견해 낸 것 뿐"이며 "하나님에 대해서도, 자신에 대해서도, 하늘과 땅에 대해서도, 삶이나 눈앞에 닥친 죽음에 대해서도, 그는 귀와 가슴에 아무런 갈등 없이 살아간 진정한 자유인"이었으며, 이런 자유분방함이 모차르트의 음악을 특별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바르트의 설명이다.


또 염두에 둘 만한 설명은 모차르트는 자신의 감정이나 존재 같은 주관적인 것을 음악의 테마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베토벤처럼 자신의 삶을 음악으로 고백하려 하지도 않았고 바하처럼 음악에 어떤 메시지를 담지도 않았다. "모차르트는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노래하고 연주하는 것뿐입니다." 이러한 바르트의 설명을 따른다면,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때 올바른 감상 태도는 그 안에서 구태여 종교적인 메시지나 역사적 맥락 등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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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춘 신부의 단테 신곡 강의
김산춘 지음 / 문학수첩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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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편만 좀 읽어볼 만했지만, 전반적으로 이마미치 도모노부 <단테 신곡 강의>가 더 상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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