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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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전쟁사는 "모두 남자들이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준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은 전쟁 국가 중 여성 전투원이 가장 많은 국가였다. 그런데 여자들의 전쟁 서사는 침묵당하고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억압받았다. 저자는 이러한 여성들의 전쟁 체험과 증언을 기록하면서 일종의 대안적 서사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여자의 전쟁". 거기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로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저자는 참전 여성들의 회상을 있는 그대로, 녹음 테이프에 녹음된 그대로 망설임 하나까지 살려서 서술하였다. 저자는 이런 서술방법을 택함으로써 영웅주의적 서사에 가려진 전쟁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한 조각인 개별자들의 "감정"과 "저마다 자신의 진실"을 생생히 되살려내려 하였다. 회상은 문학도, 역사도 될 수 있다. "과거가 생생히 반추되는 그 목소리 속에" 원초적인 인간의 감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저자가 성취하려는 최종적 목표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복원된 "감정의 역사"를 쓰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저자는 개개인의 일상적 삶의 경험가지 있는 그대로 묘사해내는 것을 역사 서술의 완성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2.

저자의 서술방법론을 판단하기 이전에 역사 서술에 관한 기본적인 논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역사서술은 사료를 소재로 삼아 이루어진다. 사료로 기록된 사실의 보고를 통해 역사가를 역사를 서술할 수 있다. 사료 없는 역사서술은 허구의 창작에 가깝다. 이로부터 "인간의 행위와 고통에 대한 역사가의 보고가 진실에 입각해야 한다"(라인하르트 코젤렉, <지나간 미래>)라는 역사가의 첫 번째 의무가 부여된다. '사실에 입각한 보고'라는 소박한 사실주의적 역사 서술은 자신의 서술에 근거를 부여하여 신뢰성과 설득력을 높이려는 모든 역사가의 방법론적 자기약속이다. 이 입장에 서서 역사를 대하는 이들은 '사실'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즉, 코젤렉이 지적한 것처럼 "목격자의 보고는 18세기까지 아주 신빙성 있는 주요 문헌이었다. 이전 시대에 일어난 일을 전해주는 전래된 역사의 높은 사료가치가 여기에 있다." 사실은 생생하기 때문에 사료적으로 가치가 높다. 일어난 일을 꾸밈없이 역사적 사실이 그 스스로 말하게 해야 한다는 소박한 사실주의자들, 이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랑케이거니와, 이들은 일어난 일을 묘사하는 사료와 사실들에 근거하여 사실의 기록으로서의 '역사'(Historie)를 다룰 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인식한 역사가 바로 이러한 사실주의적 역사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역사가 취급하는 것은...모든 사건이 것이며, 각 사건은 상호 간에 필연적인 연관이 없어도 무방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알렉시예비치의 서술은 사실들의 생생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다는 점에서 사실주의의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겠다.

3.

그런데 단순한 사실들의 집적으로 '역사'(Geschichte)를 구성할 수 있을까? 단적으로 말해 불가능하다. 지역, 성별, 인종, 사회적 위치에 따라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체험한 정도가 너무도 크며, 이것은 하나의 균질적 서사로 엮는다는 것은 애초에 달성할 수 없는 목표이다. 저자가 남성들의 서사에 가려진 여성들의 서사를 강조한 것은 개인이 처했던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체험 구술을 상기시키는 강점이 있으며, 저자가 비판하는 소련의 역사 서술보다 훨씬 역사적 서술에 가까운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저자의 이 책은 저자의 바람과 달리 역사(Geschichte)로 나아가지 못했다. 사실과 체험을 생생히 옮겨적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이는 헤겔이 <역사철학강의> 서문에서 분류한 역사 고찰의 종류 중 최하위에 속하는 '근원적 역사', 즉 "직접, 간접으로 보고 들은 사건, 행위, 상황을 기록하는 데 머무르는 것으로서 역사가 자신이 사건의 정신에서 살고 이것을 넘어서지 않는"(<헤겔 사전> 중 역사) 즉자적 서술이다. 위 인용문을 두 부분으로 정리해보자. '직접, 간접으로 보고 들은 사건...을 기록하는 데 머무르는 것'. 이것이 사실의 객관적 기록으로서의 역사이며 사실주의자들이 역사를 대하는 태도이다. 객관적 기록은 역사 서술의 소재가 되기는 하지만, 아직 사태에 대한 전체적 조망을 갖지 못한다. 이것이 '역사가 자신이 사건의 정신에서 살고 이것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역사가는 사실을 충실히 기록할 뿐만 아니라 그 사건으로부터 벗어나 사태를 객관적으로 관조하고 재구성하여 대자적 서술을 쓸 수 있어야 한다.

4.

"사료는 우리가 오류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지만,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코젤렉) 서술된 역사는 절대로 이 역사의 재료가 되어 역사를 증명하는 사실들과 동일하지 않다. 내재적 사료 해석만으로는 한 사건이 가지는 장기구조, 과정, 인과를 알 수 없으며 사료가 말하는 사건이 가지는 의의 또한 알 수 없다. 아주 간단한 예로 사실은 '혁명'과 '쿠데타', '민족해방전쟁'인지 '침략전쟁'인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이를 판단하는 것은 사실을 재구성하는 역사가의 사회적 올바름과 이론, 즉 당파성에 달려 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제2차 세계대전, 그중에서도 독소전쟁 기간의 여성들의 전쟁 체험을 다루고 있다. 앞서 논한 역사 이론을 이 책에 대입해보자. 그녀들의 수많은 증언과 회상을 집적하면 과연 저자가 원하는 대로 여성의 '감정의 역사'를 쓸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 책은 전쟁 당시 소련 사회사적, 사상사적, 구조적 연관의 충족이라는 요구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저자가 끄집어내는 '생생한 원초적 감정'은 시각적, 청각적 증인에 의존하고 "역사의 진리 스스로 말하게 해야 한다"(코젤렉)는 사실주의적 역사 서술의 생각을 현대적으로 다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할 수 있다.(그런 점에서 알렉시예비치의 글이 "창조적 혼종"을 보여줬다는 정희진의 추천사의 찬사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그녀들의 고통스러운 기억에 슬퍼하고 분노하고 동감할 수 있지만, 그 모든 체험을 조망하여 보다 넓은 범위에서 여성의 전쟁 체험을 해명하는 설명은 접할 수 없다. 그것을 쓰려면 저자가 간과한 전술, 무기, 전장의 영웅들에 대한 지식도 요구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생생함, 영웅주의적 전쟁 서사에 대한 통렬한 비판, 전쟁으로 고통받은 이들에 대한 저자의 동정적 시선, 참혹한 전쟁에 대한 비판, 인간에 대한 사랑과 평화에 대한 강렬한 지향이라는 매력적인 강점들에도 불구하고 아직 본격적인 경험 단위를 넘어서는 역사적 서술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그녀들의 증언을 진심으로 의미 있는 역사로 만들고자 한다면, 단순한 증언의 나열에 그쳐서는 안 된다. 사료가 생생히 말하게 하려면 역사의 이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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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7-28 18: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민우님의 역사적 서술에 관한 관점에 공감하지만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애초에 기존 방식의 역사를 쓰려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 부분에서 목적을 충분히 완수했고, 차별화되었고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Redman 2022-07-28 19:15   좋아요 3 | URL
맞습니다 이렇게 비판적으로 평가했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저작인 것 같아요

다락방 2022-07-28 18: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다 읽으면서 좋은 책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책은 아니다, 라고 친구에게 말했는데 친구는 어느 지점에서 그랬냐고 제게 물었어요. 저는 어떻게 말해야할지 몰라 ‘일어난 일들의 나열만 있고 더 나아가지 못함’ 이라고 애매하게 얘기했는데, 제가 느낀게 민우님의 지적과 같은 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다만, 저는 이 책이 이 책 그 자체의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참전했던 여성들 그리고 거기에 대해 침묵(을 강요당)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것만으로도 이미 큰일을, 세상에 없던 일을 했다고요.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일단 시작을 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아주 큰, 높은 시작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Redman 2022-07-28 19:13   좋아요 3 | URL
다락방님의 생각에 저도 적극 동의하고,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라 생각합니다. 이 책이 나온 1983년이라면 저도 저자의 시도 자체만으로도 큰 찬사를 보냈을 테지만 벌써 출간된지 40년이 되었고 여성사 분야에서도 의미 있는 발전이 이루어진 현재에 와서는 비판적 평가도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이란 논지의 서평을 써보았습니다 ㅎㅎ 그럼에도 읽어볼 책이라는 것엔 변함이 없지만요
 


불침번 근무 중에 독서할 때는 한손으로도 들기 쉽고 아무곳이나 펴서 읽을 수 있는 책이 적당하다. 그래서 <고백록> <십이야> <이 시대의 사랑> <소크라테스의 변명> 중에 고민하다가 한동안 읽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집었다.

어차피 시간은 충분하기에 역자의 각주까지 꼼꼼히 읽어가는데, 한 단어에 시선이 꽂혔다.

Nomizein

'믿는다'라는 말로 옮겨진 이 단어는 '숭배하다' '인정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며 '관습' '규범' 등을 뜻하는 '노모스'nomos와는 동근어 관계이다. 어원적으로 볼 때 고대 아테나이 사회에서 신을 믿는다(nomizein)는 행위는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하나, 우리가 종교를 믿는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주관적 내적 확신과 수양으로서의 믿음이다. 둘째, 제사나 기도 등의 수행을 통해 신을 숭배한다는 것을 외적으로 보여주는 외적 예배의 수행이다. 즉, 소크라테스 시대 아테나이에서 신을 믿는다는 것이란 내면적 수양과 함께 사회적 관습의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소크라테스 재판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고발장의 내용을 보자.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망치고, 국가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들을 믿음으로써 불의를 행하고 있다."(24c)

같은 고발장이 크세노폰의 <회상>에서는 미묘하게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들을 끌어들임으로 해서 불의를 행하고 있으며, 그는 또한 젊은이들을 망침으로써 불의를 행하고 있다."(1.1.1)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보고한 고발장에 따르면, 소크라테스 재판의 주요 쟁점은 소크라테스가 국가가 믿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멜레토스 등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나이의 전통과 사회적 관습을 따르지 않았기에 그를 고발했다. 아테나이 사람이라면 신에게 외적으로라도 경건을 표할 의무가 있건만, 소크라테스는 이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가의 신을 믿지 않는 소크라테스는 위험한 존재이며 사형에 처해야 한다.

사실 이 고발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사회적 관습으로서의 종교 행위는 양립할 수 없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처럼 소크라테스는 사회 속의 자아보다는 내면적 자아의 성찰을 주장했다.<변명>에서는 이것이 "검토 없이 사는 삶은 인간에게 살 가치가 없다."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나 자신까지도 캐물음으로써 올바름을 추구하는 윤리적 개인을 만드는 것. 이것에 소크라테스가 일생을 바쳐 추구한 목표였다. 반면 사회적 관습으로서 외적으로 수행되는 믿음 행위는 윤리적 성찰이나 내면의 검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면의 경건함만 유지되면, 다시 말해 외적으로 부여된 사회적 의무와 관습만 열심히 수행하면 내면의 문제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의미의 믿음을 거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을 믿지 않는다는 고발은 (적어도 적들의 입장에서) 타당하다.

하지만 동시에 이 고발은 틀렸다. 소크라테스는 분명 신을 믿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가 사형 판결만은 피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했다고 믿지 않는 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신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재판의 두 번째 논점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들을 믿음'에 대해 논의해야만 한다. '믿음'(플라톤)과 '끌어들이다'(크세노폰)의 차이에 대하서는 상세히 논할 수 없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고발장에 쓰인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다.

소크라테스는 정치인, 시인, 장인들과 만나며 그들과 논박을 벌였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이 일을 "신의 일" "신에 대한 봉사"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그가 믿는 신은 어떠한 신인가? '새로운'이라는 고발장의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그의 신은 낯선 존재처럼 보인다. 그리스 신화 속 아폴론이나 제우스 같은 신은 아님은 명백해 보인다. 다시 Nomizein으로 되돌아가보자. nomizein의 첫 번째 의미는 주관적 믿음이다. 소크라테스의 믿음은 첫 번째 의미의 믿음과 유사하다. 그 믿음은 단순한 외적 수행으로 끝나지 않는다. 신을 믿음으로써 삶의 문제를 반성하고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신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소크라테스가 개인의 내면의 성찰을 촉구했다는 것은 앞서 말했다. 이를 nomizein의 의미와 결합하면 소크라테스가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들'을 믿었다는 고발의 내용이 이해된다. 아테나이인의 신과 달리 소크라테스의 신은 내 삶에 의미를 주고 나를 더 나은 자신으로 살기를,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돌보라고 요구하는 신이다. 이는 아테나이인들이 관습적으로 믿던 신앙과는 매우 다른 성질의 신이었다. 제우스는 윤리적으로 살라는 정언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신은 정반대이다. 이를 내면적 확신으로서의 신이라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이 내면의 확신을 따르며 살았다. 그 내면에는 올바름에 대한 확신이 중심을 차지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돌보지 않고 쾌락에만 빠져든 아테나이 및 그들의 종교와 논박을 했다. 곧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소크라테스는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그는 아테나이인 전체를 자신의 대화 상대자로 삼고, 그들이 믿는 신이란 얼마나 하찮은지 그리고 그 신에 기대어 사는 아테나이인의 탐욕과 삶이란 것도 얼마나 하찮은지 증명하고자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에 자신을 돌보라고 말하는 새로운 신을 소개했다. 이는 자기 자신을 마주하라는 그의 명령과 다르지 않다. "묻고 검토하고 논박"(29e)하는 일은 그 명령에 따른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실천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믿는 신을 존중하지 않고 새로운 종류의 신을 믿었다.

이 모순적 말은 이렇게 이해할 때 성립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소크라테스가 아예 국가 체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또 맹목적으로 자신의 확신만을 따르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첫 번째 문제와 관련해서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나이의 법에 따라 재판을 받았고, <크리톤>에서 보여주듯 합법적 절차에 따른 결정을 자의적으로 뒤집지 않았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소크라테스가 최종적으로 주장하고자 한 바는 정치체제, 구체적으로 아테나이의 민주정은 체제의 구성원들이 올바름을 지향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강유원, <소크라테스, 민주주의를 캐묻다> 참조) 이를 제대로 파악하면 두 번째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소크라테스는 언제나 올바름, 덕, 좋음(선한 목적)을 중심이 놓고 사유했기 때문이다.

멜레토스 등 소크라테스의 적들은 그가 들여온 믿음이 아테나이에 유해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체제의 전통을 거부하는 그의 믿음을 위험분자로 분류했다. 그런 그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반문한다. "가장 훌륭한 양반, 당신은 지혜와 힘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명성이 높은 국가인 아테네 사람이면서, 돈이 당신에게 최대한 많아지게 하는 일은, 그리고 명성과 명예는 돌보면서도 현명함과 진실은, 그리고 영혼이 최대한 훌륭해지게 하는 일은 돌보지도 않는다는 게 수치스럽지 않습니까?"(29e)

영혼을 돌보는 삶.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이 삶을 살았으며, 그런 삶은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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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9o8p7h6i5s4t 2022-07-27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2-08-10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Redman 2022-08-11 17:3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초란공 2022-08-14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의 죄는 주류 세력을 거슬리게 한 ‘괘씸죄‘였던 건가봅니다.

Redman 2022-08-15 15:5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렇죠..괘씸죄.. 그래서 흑백선전으로 소크라테스를 몰아붙이고
 
허세와 타협 - 임진왜란을 둘러싼 삼국의 협상 동북아역사재단 교양총서 11
김경태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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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탐구란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적하는 것이 기본 목적이요, 여기에 더해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즉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떠한 방식을 통해 발생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다. 학자에 따라서 ‘왜’와 ‘어떻게’ 중 어느 것에 더 중점을 둘지는 달라지겠다. 이것은 전쟁에 대해서도 동일하다.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와 ‘전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두 질문의 문제의식은 비슷하고 공유하는 부분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도 있다. 만약 ‘왜’에 더 집중할 경우, 전쟁에 대한 논의는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지에 대한 책임론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원인을 빌헬름 2세와 독일이라는 특정 국가, 특정 개인에게 돌린 프리츠 피셔의 ‘피셔 테제’가 이런 책임론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태 이해와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반면에 후자인 ‘어떻게’에 집중할 경우, 우리는 전쟁을 불러온 핵심 행위자들의 결정을 시계열적으로 파악하게 되고, 개인과 국가 간 상호작용의 연쇄를 바라보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국제관계에서 특정 국가의 유책성, 개인의 행위능력과 구조적 제약의 관계 같은 문제에 주목하여 전쟁을 불러일으키게 한 흐름과 사건의 연쇄를 볼 수 있다. 이것이 임진왜란을 이해하는 데 어떤 유익을 줄 수 있을까? 김경태의 <허세와 타협>에서 어느 정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을 발발 이전부터 전쟁의 종결까지 다룬 책이지만, 저자는 전투의 흐름을 상세하게 기술하기보다는 조선, 명, 일본 사이의 교섭에 초점을 맞추어서 임진왜란을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목차는 1부 <전쟁 전야> 2부 <전쟁과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 3부 <협상 결렬, 다시 시작된 전쟁>으로 구성되었는데, 1부에서는 선조, 도요토미 히데요시, 만력제의 생애와 조일명의 관계사를 간략하게 다룬다. 이런 구성도 국제정치적 접근을 중시하는 저자의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저자의 이와 같은 관심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임진왜란에서 실제 전투 대결 기간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가 전면 공격에 나선 1592년 4월 중순부터 1593년 6월 하순 진주성 학살까지 1년 남짓한 기간, 정유재란이 시작된 1597년 5월부터 이듬해 1월 초 울산 전투까지와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의 전면전이 벌어졌던 8월부터 11월 말까지 약 2년 정도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은 전투가 있었던 기간보다 조선, 명, 일본 사이의 강화 협상과 외교 접촉이 있었던 기간이 더 길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에 대한 탐구는 이순신이나 김시민 등의 영웅적 행적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정치적 관점에서 접근할 때, 보다 의미 있는 탐구가 이뤄질 것이며, 이 책을 읽는 우리의 관심도 이 전쟁의 방향과 종결을 둘러싸고 어떠한 논의들이 어떠한 배경에서 행해졌는지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대중적 관심사는 임진왜란이 ‘왜’, ‘누구에 의하여’ 일어났는가였다. 책임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 전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이다. 이런 사실은, 조선이 부당하게 비난받는 것에 반발하여 전쟁으로 인한 피해에서 조선을 면책하고자 하는 견해에 의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한 개인의 위험한 망상과 침략 의지로 일어난 전쟁이었다. 조선이 어떻게 행동했건 이 전쟁은 일어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책임론에만 집중하여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을 극도로 단순화한 견해이다. 전쟁 의지로 충만한 개인이 있으면 다른 행위자의 의사결정과 관계없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이러한 견해가 얼마나 이론적으로 타당하고 정합성을 가지는지와는 별개로, 이런 견해가 가지는 최대의 문제점은 바로 전쟁의 원인을 한 개인에게 귀속시키는 관점 그 자체에 있다. 과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의지는 임진왜란에 대한 완정(完整)한 설명이 될 수 있을까? 그보다는 히데요시의 침략적 야망이 어떠한 정세를 만나 결국 동아시아 세계를 전쟁으로 이끌고 갔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최우선이지 않을까? 이것이 개인의 행위능력과 구조적 제약이 국제관계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이다.

물론 이 얇은 책은 그 복잡한 질문에 충분한 답을 제공해주지는 못한다. 저자는 역사적 사건에서 추상적인 테제를 이끌어내는 대신 구체적인 사건의 경과를 따라가며 서술할 뿐이다. 중간중간 저자의 평가가 들어가기는 했지만, 이는 극소수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임진왜란 입문서이다. 이것은 임진왜란이라는 국면을 이끌어간 주요 행위자들(선조, 만력제, 도요토미 히데요시, 소 씨 가문, 송응창,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심유경 등)에 대한 정보와 임진왜란에 접근할 기본적인 관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지만, 이론적 통찰에는 유용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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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8-10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Redman 2022-08-11 17:36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도 편안한 하루 되시길!!

mini74 2022-08-10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유익하고 좋은 글 고맙습니다 ~ 축하드려요 *^^*

Redman 2022-08-11 17:3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미니님~~!

그레이스 2022-08-10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작 축하드려요

Redman 2022-08-11 17:3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8-10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김민우님^^
기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Redman 2022-08-11 17:36   좋아요 0 | URL
이하라님 매번 감사드립니다 ㅎㅎ
 
사기를 읽다 - 중국과 사마천을 공부하는 법 유유 고전강의 3
김영수 지음 / 유유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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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는 52만 6,500자에 열전만 70권으로 이루어져 그 방대한 체계를 이해하기도 어렵거니와 일독 자체도 버거운 책이다. 더욱이 사마천은 한자 한 단어에도 미묘한 함축을 부여하여 자신의 속뜻을 숨겨두기도 하였으므로, 이 역사서를 완전하게 독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점 때문에 <사기>를 읽으려는 이들은 필수라고 할 정도로 입문서나 해설서를 읽어야 겨우 이 거대한 저작의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희미한 줄기라도 잡을 수 있게 된다.

사마천 <사기>를 읽기 전, 이 텍스트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그 핵심을 지적하는 책에는 한자오치의 <사기 교양 강의>가 있다. 이 책은 <사기>의 중요 인물 12명만을 추려서 사마천이 인물을 평가하는 관점, 태도, 그 역사적 사실에 주목하면서도 <사기>가 가진 문학성에도 초점을 맞추었다. 사기를 전체적으로 조망하지는 못하고 구조적 이해를 심화시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한자오치의 책은 읽어볼 가치가 있다.

김영수의 <사기를 읽다>는 "30년 가까이 <사기> 공부에 매진"한 한국인 학자에 의해 쓰인 "<사기> 입문서"이다.

저자는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모든 것'이라는 두 권짜리 책도 썼고, 150여 차례 이상 중국 현장 답사를 하였다고 자부하므로, 이 책은 <사기> 읽기에 착수하기 전에 읽어볼 기본서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기대를 가지고 책을 손에 쥐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내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책이었다.

일단 목차에서부터 의아한 지점이 많다. 1강에서는 왜 사마찬과 <사기>를 알고 읽어야 하는지를 밝히고 있고, 2강에서는 사마천이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고 있다. 3강에선 사마천의 생애를 조명한다. 이미 1~3강을 통해 이 텍스트가 가진 의의를 지루할 정도로 설명해놓고서는, 4강에서 드디어 <사기>에 대해 본격적인 해설을 시도하나 싶더니, 저자는 이 '절대 역사서'의 위대함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5강에서는 또 이 책의 매력(정확히는 영향력이지만)에 대한 장황설을 늘어놓는다. 흥미로운 내용이기는 했지만, 과연 <사기>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지식이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나머지 6~8강도 본격적인 텍스트에 대한 침잠이 아니라 일종의 부록 같은 느낌으로 사마천의 문학성과 언어, 경제관, 사마천의 현장답사를 다룬다. 6강은 <사기>의 문학적 위대함과 흥미로운 고사들을 나열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이 책의 매력을 설명한다. 이쯤되면 이 책은 <사기>의 매력에 대한 입문서가 아닌가 싶다. 이렇게 본다면, 김영수의 이 입문서에서 정작 사마천 <사기> 자체를 해설한 부분은 4강, 6~7강, 8강 일부이고 다른 부분은 대부분 텍스트 외적인 것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룬다. 구성도 치밀하지 못하다. 4강에서 텍스트의 기본 사항에 대해 설명하고는, 바로 다음 강의에서 이 텍스트의 영향사를 나열하고, 흥미로운 고사와 기사들, 경제관, 현장답사로 이어지는 강의의 흐름은 잘 이해가 안 된다. 사마천과 <사기>의 훌륭함만 주구장창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서술과 중구난방한 구성으로 정말 입문서가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가장 의아한 것은 <사기> 입문서를 자처하는 책이 정작 사마천의 <사기> 원전을 직접 인용하며 해설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있어도 <사기> 속 고사나 기사를 설명하면서 관련 부분을 인용하는 정도지, 이 텍스트의 특징을 보여주고 사마천의 사상이나 관점과 의도가 드러나는 부분을 직접 짚어가며 해설하는 부분은 6강과 7강을 제외하고는 거의 찾을 수 없다. 다른 고전 입문서와 비교해보자. 강유원의 '고전 강의' 시리즈도 일종의 고전 입문/해설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은 저자가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텍스트가 형성된 역사적 배경, 사상사적 배경도 짚는 동시에 텍스트의 구조도 설명하면서도, 원전에서 중요한 부분을 직접 인용하고 해설하는 방식을 통해 매우 밀도 높은 텍스트 독해를 한다. 그래서 독자는 원전 텍스트를 직접 읽고 그에 대한 강유원의 해설도 접하면서 독서력을 높일 수 있다.( 나 역시 그의 책을 통하여 호메로스, <신곡>, 마키아벨리, 데카르트, 논어 등과 같은 어렵다는 고전 텍스트를 직접 읽을 수 있었다.)

이건 어찌보면, 이 책이 "재미 위주"로 구성된 강의를 글로 풀어 쓴 것이라는 한계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쉽기만 하면 입문서의 역할은 끝났다고 보는 저자의 관점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저본이 되는 강의는 사람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내용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그 강연을 글로 옮긴 이 책도 비슷한 구성을 취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아들도 읽을 수 있도록 최대한 쉽게 쓰는 것이 이 저작의 목표이다. 물론 저자는 깊이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고 하지만, 저자의 포커스는 쉬움에 맞춰져 있다.

입문서하면 쉬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반만 옳은 말이다. 입문서의 궁극적 목표는 독자로 하여금 원전 텍스트를 읽게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입문서에는 독자가 원전을 직접 읽을 때 꼭 알아야 하는 기본적인 사항들을 알려줘야 한다. 여기에는 저술 동기와 의도, 텍스트의 구조, 역사적/사상사적 맥락, 해당 텍스트의 핵심 개념에 대한 설명, 핵심 주장 등이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읽어야 하는지, 입문서 저자가 생각하는 고전의 중요 부분을 원전 인용으로 볼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따라서 고전 입문서는 평이한 서술과 쉬움이 미덕이 아니다. 얼마나 기본에 충실한지가 입문서의 탁월함을 가늠한다. 독자로서도 쉬운 해설서는 이후 독서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금 어렵더라도 기본에 충실한 책을 읽어야 더 어려운 책을 독해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진다. 따라서 쉬운 책 여러 권이 아니라 단 한 권의 책을 반복적으로 꼼꼼하게 독파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이 책은 권하고 싶은 책은 아니다. 만약 <사기>와 관련된 기본 사항들을 알고 싶다면, <사기>의 구조를 설명하고 '보임안서'를 통해 저술 동기를 설명하는 4강만 읽으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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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07-13 08: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4강에 관련해서 궁금한 게 있습니다.
세상의 명문장인 <보임소경서>를 보면, 임안 또는 임소경任小卿이 ˝불측의 죄˝를 안고 있어서 사형선고를 받아 대기중인데 혹시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설명을 하고 있나요? 있다면 도서관에서라도 찾아 읽어봐야겠습니다. 물론 그 부분만입니다.

Redman 2022-07-13 14:26   좋아요 3 | URL
아쉽게도 그건 없습니다.. 책에선 ˝究天人之際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에 대한 설명만 있습니다

그레이스 2022-07-14 01:09   좋아요 2 | URL
후한서 <임안전>에
임소경은 주둔 사령부의 관리로 태자에게서 위조된 명령서를 받았으나 성의 군문을 닫고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사건이 수습되는 과정에서는 임소경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으나 나중에 부하의 밀고로 연좌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만다. 관망하던 태도가 기회주의적인 처사로 판결받았던 것.
<기록자의 윤리, 역사의 마음을 생각하다> 40p에 인용하고 있네요.

사기 열전 권104에서 세번째 인물 임안편에도 나와 있습니다.

Falstaff 2022-07-14 07:33   좋아요 2 | URL
아, 한무제 때 사람으로 열전에도 나왔군요!
ㅎㅎㅎ 제가 열전 2권은 좋아하지 않아서 설렁설렁 읽었더니. ㅋㅋㅋ 지금 읽어봤습니다. 그레이스님, 답글 고맙습니다!
 

나의 가설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혹은 인류학적으로 말해서 경험과 기대 사이의 차이규정 속에서 역사적 시간‘ 이라는 것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듦에 따라 경험과 기대의 관계도 변한다는 점, 하나가 커지면 다른 하나는 작아진다는 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통해 보상된다는 점, 내면적이거나 외면적인 생물학 외적 지평이 있으며 이 지평을 통해 개인의 삶이라는 유한한 시간이상대화된다는 점은 생물학적으로 규정된 인간의 성질이다. 그러나역사적 세대들의 연쇄 속에서도 분명히 과거와 미래의 관계는 변화해왔다.
이 글들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어떠한 시간이 새로운 시대로, 즉 ‘근대(Neuzeit)‘로 경험될수록, 미래의 도전은 점점 커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현재와 지금은 어느덧 지나가버린 그 당시의 미래가 고찰대상이 된다. 어떤 시대의 사람들이 주관적으로경험을 소화해내는 가운데 미래의 비중이 커진다면, 그 세계는 틀림없이 새로운 경험을 모으고 점점 빨라지는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인간에게 점점 짧은 시간간격을 강요하는 기술적·산업적으로 고도로 형식화된 세계이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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