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출발점은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는 가능한 중심점, 곧 견디고 투쟁하고 행동하는 인간,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늘 그랬고, 앞으로도 늘 그럴 인간이다. 따라서 우리의 관찰은 어느 정도는 병리적인(pathologish) 성격을 갖는다.(인간이 병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역사철학자들은 과거를 현재의 발전된 우리에 대한 대립이나 전단계로 여긴다. 그에 비하면 이 책에서는 되풀이되는 것, 항상 있는 것, 전형적인 것이 우리 속에도 있기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역사철학자들은 시작에 대한 사변에 붙잡혀 있고, 따라서 미래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시작의 이론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고, 따라서 종말의 이론에 대한 요구도 없다. - P28

여기서는 독자를 학문적 의미에서의 역사 탐구로 안내하지 않고, 정신적 세계의 여러 영역에서 역사적인 것(역사성)을 탐구하도록 자극하고자 한다. 나아가 체계를 모조리 포기한다. 우리는 ‘세계사적인 이념들‘을 탐색하는 게 아니라 지각하는 것에 만족하며. 가능한 한 많은 방향에서 역사를 통한 가로 단면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특히 역사철학을 제시하지 않는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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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상사- 과거를 통해 미래를 응시하다
스에키 후미히코 지음, 김수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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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 쓰루미 슌스케의 전시기 일본 정신사 강의 1931-1945
쓰루미 슌스케 지음, 최영호 옮김 / 논형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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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hilosophy of the Enlightenment: Updated Edition (Paperback, Revi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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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카를 만하임 지음, 임석진 옮김, 송호근 해제 / 김영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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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6
카스 무데 외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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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은 단일한 번역어로 정착시키기에는 그 뜻이 너무도 포괄적이고 모호하여 남발되기 쉬운 단어이다. 카스 무데와 크리스토발 로비라 칼트바서의 <포퓰리즘>은 이 모호한 단어에 대한 유익한 정의를 내린다. 저자들의 정의는 포퓰리즘이 가지는 다양한 양상을 포괄하면서도 명확하게 비포퓰리즘적인 현상들을 배제한다는 실용적 측면도 있다. "포퓰리즘이란 사회가 궁극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동질적인 두 진영으로, 즉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로 나뉜다고 여기고 정치란 민중의 일반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심이 얇은 이데올로기다." 이 정의를 차근차근 정리해보자.

저자들의 정의에는 포퓰리즘의 세 가지 핵심 개념이 모두 들어가 있다. 바로 민중, 엘리트, 그리고 일반의지다. 포퓰리즘은 '민중'과 '엘리트'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데, 이때 기준은 도덕성이다. 민중과 엘리트는 도덕뿐 아니라 종족 면에서도 구분될 수 있는데, 이럴 경우 포퓰리즘은 민족주의와 완전히 융합하며 민중의 적은 이제 외국인 자체로 간주된다. 그리고 엘리트들이 토착 민중보다 외국인의 이해관계를 더 중시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민중이 결속하여 세운 공동체가 공통의 이익을 강제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일반의지 관념은 포퓰리즘의 선악이원론적 심상지도를 더 강화한다. 포퓰리스트들은 기존 정치인들이 민중의 이해관계를 온전히 대변하지 못했다며 기득권층에 소외된 집단의 의지를 고려하여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기득권층을 싸잡아 부패한 무리로 비난하고 엘리트에 의해 소외를 받아온 민중의 의지대로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이 있다면, 그가 바로 포퓰리스트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포퓰리즘은 '중심이 얕은 이데올로기'인데, 포퓰리즘은 단독으로는 현대 세계를 체계적이고 포괄적으로 분석하지도 못하고 그에 따른 구체적 실천 프로그램도 내놓지 못하여 "현대사회가 낳는 정치적 문제들에 복잡한 해답도, 포괄적인 해답도 내놓지 못"하는 까닭에 언제나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중심이 두꺼운 이데올로기에 기생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유심히 읽은 부분은 5장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이다. 익히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소외된 민중의 일반의지를 강조하는 포퓰리즘은 본질적으로 민주적이다. 오히려 포퓰리즘은 자유민주주의의 원리와 충돌한다. 자유민주주의는 "표현의 자유와 소수자 보호 같은 기본권을 보호하는 데 특화된 독립 기관들까지 수립하는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순수한) 민중의 의지'를 제약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포퓰리즘과 대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포퓰리즘의 핵심 원리인 이원론과 일반의지는 권위주의로 쉽게 흐를 수 있다. 동질적 민중의 일반의지는 선하고 절대적이기에, 이에 반하는 모든 것을 배제해버리기 때문이다. 다수의 순수한 민중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 태도는 자칫 '다수의 폭정(Tyranny of the Majority)'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에 긍정적인 영향도 줄 수 있고 부정적인 영향도 줄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포퓰리즘은 "공적 경쟁의 측면에서는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정치 참여의 측면에서는 민주주의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기존 정치권력이 주목하지 않은 집단의 이해관계를 의제화하여 민주화의 동력이 되기도 하는 이 이념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기본권 보호 제도의 약화를 초래하고 도리어 권위주의로 추락하는 위험까지 내포하는 양날의 검인 것이다. '다수'라는 폭군이 군림하여 소수자의 인권을 탄압하고 배제할 때 민주주의 이념은 퇴색된다.

그렇다면 포퓰리스트와 포퓰리즘적 집단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저자들은 포퓰리스트들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를 허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며 이런 대응방안을 단호히 거부한다. 저자들은 수요와 공급 측면으로 나누어 이 문제를 분석하는데,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사회에 내재된 포퓰리즘적 태도가 포퓰리즘 정치를 나오게 한다는 것이다. 정책 실패, 정치권의 체계적 부패, 정치기득권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느낌은 포퓰리즘적 태도를 활성화하는 핵심 요인이다. 포퓰리스트 정치인은 이러한 잠재되어 있던 반기득권 정서를 공공의 영역으로 끄집어내어 기득권층이 충분히 다루지 않았던 이들의 이해관계를 정치적 쟁점으로 삼는다. 그들이 설득력 있는 위기 서사를 만들어낸다면, 선거와 정책 모두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어떻게 하면 포퓰리즘적 태도를 막을 수 있을까인데, 저자들은 여러 방안을 제시하면서도 교육에 주목한다. "가장 중요한 전략 중 하나는 시민교육으로, 그 목표는 자유민주주의의 주된 가치를 가르치고 극단주의적 도전자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시민 사회화다...전반적으로 보아 시민교육은 민주적 신념을 강화하고 다원주의의 타당성을 설명함으로써 포퓰리즘적 태도를 막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교육은 민주주의 가치와 신념 보존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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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8-14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방법은 시민교육이네요.^^

Redman 2022-08-15 15:58   좋아요 1 | URL
뻔한 말인 듯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수긍하게 되는 결론입니다 ^^

mini74 2022-09-08 0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 축하드립니다 ~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그레이스 2022-09-08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Redman 2022-09-08 15:2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9-08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한가위 되세요.^^

Redman 2022-09-08 15:2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님 즐거운 추석연휴 되십쇼

서니데이 2022-09-08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세요.^^
 


애초 이 책을 읽은 내 관심사는 중국 고대사상의 사회적 맥락을 짚는 것이었으므로, "제8장 패자와 무사: 춘추시대의 사회 변모"부터 "제10장 정치인 사상가: 최근 발견된 문헌을 통한 조명"만 집중적으로 보면 될 터이지만 좋은 책이 늘 그렇듯 다른 주제와도 연결해서 읽을 부분이 상당히 많다. 저자의 머리말에서 한 단락을 뽑아보겠다.

"중국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나는 항상 중국 역사를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비교론적 틀로 인류 보편적 경험의 일부로 연구하는 것이라고 믿어왔다...농경 생활 방식의 시작, 지역에 기반을 둔 사회조직-수장사회의 형성, 도시 문화의 출현. 국가의 발생, 관료제와 행정기관의 출현, 그리고 제국의 형성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구절은 즉각 <옥스퍼드 세계사> "Part.2 점토와 금속으로: 농업의 출현부터 '청동시 시대 위기'까지 발산하는 문화들-기원전 1만 년경부터 기원전 1000년경까지"를 떠오르게 한다. Ch.4 "농민의 제국들"이란 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기원전 제5천년기부터 제3천년기까지 서로 멀리 떨어진 세계 각지에서 우리는 공통 경험을 통해 발산을 추적할 수 있다. 그런 공통 경험으로는 정착지의 조밀화, 인구 밀도의 증가, 사회적 범주와 정부 기능의 증가, 국가의 출현과 제국으로의 변모, 그리고 갈수록 다변화되고 전문화되는 경제 활동 등이 있다."

리펑의 책은 양사오 이전 (BC 6500~)부터 시작하고, 서주시대가 1045~771BC이므로 <옥스퍼드 세계사> "Part 2 점토와 금속으로"의 시기와 겹친다. 그렇다면 리펑의 책 머리말에서 추릴 수 있는 주제는 '농경 사회에서 제국으로의 이행', '국가의 발생' '관료제와 행정기관의 발달' 등인데, 우리는 <옥스퍼드 세계사>를 통하여 같은 시기 다른 국가의 사례는 어떤지 정리할 수 있겠다.

'제국으로의 이행'이라는 주제는 또 헤어프리트 뮌클러의 <제국>과 비교할 수 있는데, 뮌클러는 '아우구스투스의 문턱'이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역사상 국가들이 어떻게 제국으로 불릴 수 있는 요소들을 갖추게 되었는지를 분석한다. '국가의 발생'이라는 주제는 <옥스퍼드 세계사> Part 3. 제국들의 진동 중 "Ch.7 성장: 사회조직과 정치조직 - 기원전 1000~기원후 1350년"과 비교해서 읽을 수 있다. 이언 모리스는 "저가 국가"라는 개념을 통해 이집트, 주왕조 등을 분석한다. 저가 국가란, 수입을 많이 얻지는 못했지만 국가 운영에 필요한 비용도 적었던 국가를 지칭한다. 국가가 지출하는 비용이 적었다는 사실은 국가가 수행하는 일이 적었다는 것과 국가가 약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언 모리스가 지적하듯 "국가가 약하다는 것은 농민들이 정부에 세금을 적게 내거나 전혀 안 낸다는 뜻이었다." 주가 이런 저가 국가에 속했다. 주의 "신임 제후들은 왕에게서 받은 영토를 직접 다스리며 각자 원하는 대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왕의 요구 사항은 자신이 전쟁을 벌일 때 '많은 제후들'이 각 제후국의 분견대를 거느리고 참전하는 것이 전부였다. 전쟁은 마친 뒤 왕은 제후들에게 약탈품을 분배했다." 국가의 역할이 적으므로 국가와 백성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춘추시대는 이러한 경향이 뒤바뀐 시대였다. 현(縣)이라는, 주의 봉건제와 같은 혈연적 네트워크망이 아니라 국가의 최고통치자가 관리를 보내 직접 관리하는 행정 단위가 확산되면서 "국가는 이전 어느 때보다 농민에 가가이 갈 수 있었고 농민도 그러했다." 국가와 백성 사이의 가까워진 거리는 "개별 농민들이 직접 부담하는 일반적인 조세와 군사 복무"로 이어진다. 현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경지역에 설치되었는데, 국가는 이런 지역들을 개척함으로써 조세 수입과 노동력의 공급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춘추시대는 전쟁과 개발 등으로 국가가 지출하는 비용이 주와 다르게 급격히 늘어난 반면 현 제도를 통해서 벌어들이는 수입도 그만큼 늘어난 시대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춘추시대 이후 중국은 '고가 국가'로 진입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고가 국가의 특징은 군사적 승리로 취하는 전리품에 의존하는 약탈경제 대신 "관료제를 창안해 세금을 거두고 병력을 직접 고용함으로써 전리품을 모두 국가 소유로 거두"(옥스퍼드) 것이다. 이로써 고가 국가는 확장 가능성도 훨신 커졌는데, "가장 큰 저가 국가였던 기원전 14세기 이집트와 9세기 아시리아는 각각 면적이 100만 제곱킬로미터에 인구가 300~400만 명이었지만, 기원후 175년경 로마와 중국은 각각 면적이 500만 제곱킬러미터에 인구가 5000만 명이었다." 제국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춘추시대 고가 국가로의 변모가 제국으로 가는 기틀을 놓았자고 할 수 있다.

여담으로 '국가의 발생'이라는 주제에 학자마다 다양한 견해를 품고 있는데, 이는 국가가 무슨 역할을 수행하는지와 관련이 있다. 국가는 사회 내부 투쟁 조정의 수단으로 보는 것, 외부의 위협에 대응하여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수단으로 보는 것, 마지막으로 의례체계를 집중화하기 위해 사회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내적 지향의 최종 산물로 보는 것. 이는 필연적으로 국가론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국가론을 연구한 밥 제솝의 <국가 권력>이나 <전략관계적 국가 이론> 등이 국가론의 기본 서적으로 읽어볼 만하겠다. 이 분야에 완전히 문외한이라면,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로 기본 주제들을 다잡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물론 유시민의 책은 기본 그 이상의 역할은 충족하지 못하므로 다른 책으로 가기 위한 발판 정도로 삼아야 하지만)



이렇게 연관된 독서로 주제가 점점 확장되는 것은 책을 읽는 이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 아닐까. 혹은 쓸모도 없는 지식 채우기라는 최악의 절망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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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대사 한강문화재연구원 학술총서 5
리펑 지음, 이청규 옮김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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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Early China>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이 책은 원서 출간 당시까지의 최신 고고학 성과를 반영한 중국고대사 개설서이다. 개설서답게 이 책은 서론에서 "중국의 지리"와 북미에서의 고대중국사 연구사를 다루고, 제2장부터 14장까지는 양사오 사회부터 한제국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전공자 혹은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은 연구사를 비롯하여 각 장 말미에 수록된 참고문헌 및 고대 문헌에 대한 설명, 주요 고고학 유적에 대한 설명을 꼼꼼하게 읽을 것이나 나처럼 제자백가 사상의 사회적 맥락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제8장 "패자와 무사: 춘추시대의 사회 변모" 부터 "제10장 정치인 사상가"를 유심히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상은 특정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형성된다. 혹은 사상은 그 사상이 나오게 되는 시대적 상황이 있다. 물론 시대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상도 있으므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사회적 맥락에 온전히 종속시키는 환원주의적 태도는 지양해야 할 것이나, 사상사를 공부할 때는 반드시 그 사상이 나오게 된 특정한 사회적 맥락을 동시에 파악할 필요가 있다. 고유한 사회적 맥락 속에 사상체계를 위치시킬 때, 오독의 가능성을 줄이고, 더 나아가 현 시대 및 사회와 비교하여 재구성함으로써 현대적 관점에서도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류쩌화의 <중국정치사상사>를 비롯한 대다수의 사상사 서적들은 사회사를 간과했다는 한계가 있다. 류쩌화의 책을 보자. 3권 분량의 방대함을 자랑하는 이 책은 풍부한 원전 인용이 장점이나 중국의 사상가들이 살았고 사상의 대상으로 삼던 사회에는 놀랍도록 무관심하다. <중국정치사상사> 1권은 선진 제자백가의 사상을 다룬다. 제자백가는 춘추전국시대 출현한 중국사상사에서 핵심 개념과 범주들을 개발하였지만, 왜 이런 지적 르네상스가 춘추전국시대에 나타났는지에 대해서는 모호하고 추상적 설명만 나열할 뿐이다. "중국 역사상 대변동의 시기"라고 하나,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 구체적 정보에 대해서는 서술한 바가 매우 적다.


고고학 자료를 통해 고대 중국의 물질문화와 사회상을 재구성한 리펑의 책은 류쩌화 책의 빈곳을 채워준다. 서주의 붕괴는 급격한 제도적 변화가 나타난 중요한 요인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춘추시대 사회적 변화의 핵심은 "현(縣)"이라는 새로운 행정 단위의 등장에 있다. 현은 국가간 전쟁의 결과로 탄생하였는데, 주로 인구와 조세 확보를 목적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경 지역에 설치되었다. 현은 서주와는 전혀 다른 매커니즘에 의해 운영된 행정단위였다. "현은 서주의 초기 왕실 행정 시스템과는 직접 연관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서주 시대에는 혈연구조를 통해 국가 통치자가 귀족에게 토지를 재분배하였지만 현은 국가 최고 통치자가 임명한 지사에 의해 직접 통제되고 관리되었다. 현의 출현은 중국 사회정치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현 제도가 창안되고 확산되면서 "종족 조직에 토대를 고대 중국 사회"가 파괴된 것이다. 서주에서는 왕실의 사무와 정무를 하급 귀족 가문이 맡았지만, 심각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은 뒤에는 종족과 가문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국가나 권력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임무의 수행이 더욱 중요해지게 되었다.


전국시대에는 사회경제적으로 "현 제도가 이전 국가의 중심지에 멀리 떨어진 주변 지역에도 확산 적용되면서, 자연스럽게 영토 국가를 형성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즉, 그나마 남아있던 종족적 혈연망이 완전히 붕괴된 시대가 전국시대였다. 영토 국가는, 군대에 의해 보호되는 경계가 명백한 영토적 실체를 단순화되고 통일된 정치권력이 다스리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영토 국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새로운 영토의 획득이고 이는 전쟁으로만 달성되었다. 영토 국가는 이 목적을 무엇보다 우선시하였기에, 이 시대 중국은 대규모의 희생을 수반하는 군사적 승리를 중요한 발전으로 여겼다. 그리고 이 영토국가를 지탱하기 위한 근간으로서 '소규모 농민' 가구를 재편성하였다. 이들은 "전통적인 종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독립적이고...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 새로운 국가 시민"이었다. 이것은 전국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으로, 제자백가 사상가들과 정치가들은 이 새로운 소농 가족을 논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처럼 중국 고대 사회에서의 급격한 변화란 종족적 질서의 해체이고, 전국시대는 그 사회적 전환의 영향이 확장된 시기였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 역시 다른 사회적 맥락을 가지므로 관습적으로 춘추전국시대라 구분없이 지칭하는 것은 부적절하겠다. 다른 사회적 맥락은 곧 상이한 문제의식으로 나타난다. 이를 제례에 대한 공자와 맹자의 차이점에서 알 수 있다. 공자는 종족적 혈연망이 무너진지 얼마 안 된 시대에 살았다. 그는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적절한 예의 실천을 통해서 바른 사회정치적 질서를 세울 수 있다고 보았다. "'임금', '신하', '아버지', 그리고 '아들' 등 이미 결정된 사회적 위계 속에서 각 구성원이 자신들의 이름에 걸맞는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할 때 비로소 그 결과로서 바람직한 사회 질서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제사나 예가 실천되지 않는 현실에 분개했고 제례를 기반으로 정명이 실천되던 서주의 시스템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반면 "공자 이후 약 100년이 지난 뒤 제례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시기에 살았기 때문에 맹자는 '제례'가 손상되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또한 주 왕실이 오래전부터 희망이 없음이 드러"났기 때문에 "공자와 달리 서주 시스템을 복원하는 데에도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제례에 대한 이 같은 차이는 공자와 다른 결론으로 이어진다. 맹자에게는 제례와 정명의 확립 대신 '인'과 '의'를 갖춘 어진 통치자를 찾아내 전쟁을 끝내고 사회질서를 재건하는 것이 더 시급했다. 사상가들의 문제의식이 그 시대 사회경제적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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