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영광사(후쿠나가 미츠지), 이동철, 임헌규 옮김, <장자: 고대중국의 실존주의>, 청계, 1999

"참혹한 현실" "위태로운 인간" "미혹된 인간" "진실재의 세계" "자유로운 인간"으로 깔끔하게 이어지는 정연한 목차가 상당히 마음에 든다. 장자 연구에 세계적 권위자인 저자의 수준 높은 장자 이해를 볼 수 있는 부분. 유려한 문장과 함께 풍부한 <장자> 원전 인용으로 장자 해설서의 역할을 다하면서 유가, 노자 등 사상가와의 차이점도 볼 수 있으며, 그가 살던 시대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장자 철학의 지성사적 맥락을 짚을 수 있다. 장자를 읽어보려고 한다면, 꼭 읽어볼 책이다.



노나카 이쿠지로 외, 박철현 옮김, <일본 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 주영사, 2009 (원제: <실패의 본질>)

경영학, 조직론을 전공한 노나카 이쿠지로와 테라모도 요시야, 근대 일본의 군사를 연구하는 도베 료이치 등 여러 저자가 공저한 <일본 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는 일본제국군의 무기력한 패배의 원인을 조직론의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일본의 군대 조직은 러일전쟁에서의 성공에 근본을 두어 만들어졌다. 일본군은 '백병전' 전술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과거의 승리의 기억이 조직의 발목을 잡아 조직의 근본적인 자기혁신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백병전 전략만이 강조되다보니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전략을 수립하지도 못하고, 물질적 역량의 차이를 병사의 정신력으로만 극복하려는 정신주의에 빠졌다.


경영학 서적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역사적 사례를 통해 경영학을 배우니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었던 신선한 독서경험이었다. 조직경영에 대한 통찰과 역사적 지식 모두를 충족시켜주는 좋은 책이다.



요시다 유타카, 최혜주 옮김, <일본의 군대>, 논형, 2005

'병사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병사의 생활사와 사회사를 통해 재구성한 근대 일본 통사이다. 이 책은 읽는 내내 고통을 안겨준 책이었다. 한국어판 서문을 보자. "한국은 전전의 일본과 같이 징병제를 채용하고 있고, 군대는 특히 젊은이가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존재이다. 그리고 한국군의 건군과정에서 일본의 군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조선인 장병이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의 군대와 한국의 군대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군대는 제국 일본 사회구조 전체를 지탱해온 조직이었고, 그 조직의 원리와 경험을 흡수한 조선인 장병들은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에 깊은 관련을 맺었다. 가깝게는 한국 군대의 모습, 더 나아가서는 한국 사회에 근대 일본의 군대 문화는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서 근대화는 군대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 근대화는 시간, 신체, 언어의 사용 변화를 요구한다. 먼저 시간에서 "군대는 공작. 학교와 함께 인간을 근대적 시간질서에 맞추어 훈련시키는 중요한 장소"였다. 군에 입대한 사람은 '시간적 규율화'를 경험한다. 아홉시가 아니라 '21시 정각'이라고 말하는 법을 익혀야 하며, 엄격한 시간 질서 속에서 생활해야 한다. 다음 신체의 측면에서 군대는 질서정연한 근대적 신체를 만드는 장이었다. 근대적 신체는 제식훈련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각을 맞추어서 걷고, 각을 맞추어서 움직이고, 각을 맞추어서 경례를 한다. 나도 훈련소에서 처음 받은 훈련이 제식이었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익히는 과정에서 개인은 규율된 신체로 변용되어 갔다. 마지막으로 군대에서는 언어 역시 표준화된다.


이런 군대의 질서와 규율원리는 일본 사회에서 별다른 거부없이 받아들여졌다. 이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다. 사회상승의 통로, 기술훈련 기관으로 인식되었던 점 등등. 그런데 일본에서 징병검사를 받은 것이 '한 사람의 남주'로 간주되는 조건이며 군입대는 인생의례로서의 의미를 가졌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군대를 다녀와야 남자 대접을 받는다'는 기분 나쁜 말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것은 근대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군대가 일종의 남성의 인생의례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리라. 여기까지 읽었을 때,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졌던 나의 불쾌함이 무엇 때문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제국 일본의 군대문화는 기분 나쁠 정도로 한국의 군대문화와 닮아있다. 그리고 그 군대에 의한 근대화 경험도 상당한 친연성을 갖고 있다. 과거의 다른 나라를 통해서 본 현대 한국의 모습은 너무도 고통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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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08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 ~당선 축하드려요.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Redman 2022-09-08 15:2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즐거운 추석연휴 되시길!

서니데이 2022-09-08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세요.^^

초원 2023-02-11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장자를 검색하다가 추천하신 책을 보게 되었는데요. 절판이라서 아쉽습니다. 혹시 더 자세한 서평을 올릴 계획은 없으신가요?

Redman 2023-02-11 17:16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장자 서평 초안을 쓴 게 있는데, 그만 날아가 버려서 단평으로 대체하였습니다..ㅎㅎ 나중에라도 또 기회가 되면 올리겠습니다

초원 2023-02-11 19:38   좋아요 0 | URL
답변 감사해요. 잘 읽고 갑니다. 주말 편안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출발점은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는 가능한 중심점, 곧 견디고 투쟁하고 행동하는 인간,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늘 그랬고, 앞으로도 늘 그럴 인간이다. 따라서 우리의 관찰은 어느 정도는 병리적인(pathologish) 성격을 갖는다.(인간이 병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역사철학자들은 과거를 현재의 발전된 우리에 대한 대립이나 전단계로 여긴다. 그에 비하면 이 책에서는 되풀이되는 것, 항상 있는 것, 전형적인 것이 우리 속에도 있기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역사철학자들은 시작에 대한 사변에 붙잡혀 있고, 따라서 미래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시작의 이론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고, 따라서 종말의 이론에 대한 요구도 없다. - P28

여기서는 독자를 학문적 의미에서의 역사 탐구로 안내하지 않고, 정신적 세계의 여러 영역에서 역사적인 것(역사성)을 탐구하도록 자극하고자 한다. 나아가 체계를 모조리 포기한다. 우리는 ‘세계사적인 이념들‘을 탐색하는 게 아니라 지각하는 것에 만족하며. 가능한 한 많은 방향에서 역사를 통한 가로 단면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특히 역사철학을 제시하지 않는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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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상사- 과거를 통해 미래를 응시하다
스에키 후미히코 지음, 김수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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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6
카스 무데 외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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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은 단일한 번역어로 정착시키기에는 그 뜻이 너무도 포괄적이고 모호하여 남발되기 쉬운 단어이다. 카스 무데와 크리스토발 로비라 칼트바서의 <포퓰리즘>은 이 모호한 단어에 대한 유익한 정의를 내린다. 저자들의 정의는 포퓰리즘이 가지는 다양한 양상을 포괄하면서도 명확하게 비포퓰리즘적인 현상들을 배제한다는 실용적 측면도 있다. "포퓰리즘이란 사회가 궁극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동질적인 두 진영으로, 즉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로 나뉜다고 여기고 정치란 민중의 일반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심이 얇은 이데올로기다." 이 정의를 차근차근 정리해보자.

저자들의 정의에는 포퓰리즘의 세 가지 핵심 개념이 모두 들어가 있다. 바로 민중, 엘리트, 그리고 일반의지다. 포퓰리즘은 '민중'과 '엘리트'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데, 이때 기준은 도덕성이다. 민중과 엘리트는 도덕뿐 아니라 종족 면에서도 구분될 수 있는데, 이럴 경우 포퓰리즘은 민족주의와 완전히 융합하며 민중의 적은 이제 외국인 자체로 간주된다. 그리고 엘리트들이 토착 민중보다 외국인의 이해관계를 더 중시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민중이 결속하여 세운 공동체가 공통의 이익을 강제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일반의지 관념은 포퓰리즘의 선악이원론적 심상지도를 더 강화한다. 포퓰리스트들은 기존 정치인들이 민중의 이해관계를 온전히 대변하지 못했다며 기득권층에 소외된 집단의 의지를 고려하여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기득권층을 싸잡아 부패한 무리로 비난하고 엘리트에 의해 소외를 받아온 민중의 의지대로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이 있다면, 그가 바로 포퓰리스트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포퓰리즘은 '중심이 얕은 이데올로기'인데, 포퓰리즘은 단독으로는 현대 세계를 체계적이고 포괄적으로 분석하지도 못하고 그에 따른 구체적 실천 프로그램도 내놓지 못하여 "현대사회가 낳는 정치적 문제들에 복잡한 해답도, 포괄적인 해답도 내놓지 못"하는 까닭에 언제나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중심이 두꺼운 이데올로기에 기생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유심히 읽은 부분은 5장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이다. 익히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소외된 민중의 일반의지를 강조하는 포퓰리즘은 본질적으로 민주적이다. 오히려 포퓰리즘은 자유민주주의의 원리와 충돌한다. 자유민주주의는 "표현의 자유와 소수자 보호 같은 기본권을 보호하는 데 특화된 독립 기관들까지 수립하는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순수한) 민중의 의지'를 제약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포퓰리즘과 대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포퓰리즘의 핵심 원리인 이원론과 일반의지는 권위주의로 쉽게 흐를 수 있다. 동질적 민중의 일반의지는 선하고 절대적이기에, 이에 반하는 모든 것을 배제해버리기 때문이다. 다수의 순수한 민중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 태도는 자칫 '다수의 폭정(Tyranny of the Majority)'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에 긍정적인 영향도 줄 수 있고 부정적인 영향도 줄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포퓰리즘은 "공적 경쟁의 측면에서는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정치 참여의 측면에서는 민주주의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기존 정치권력이 주목하지 않은 집단의 이해관계를 의제화하여 민주화의 동력이 되기도 하는 이 이념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기본권 보호 제도의 약화를 초래하고 도리어 권위주의로 추락하는 위험까지 내포하는 양날의 검인 것이다. '다수'라는 폭군이 군림하여 소수자의 인권을 탄압하고 배제할 때 민주주의 이념은 퇴색된다.

그렇다면 포퓰리스트와 포퓰리즘적 집단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저자들은 포퓰리스트들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를 허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며 이런 대응방안을 단호히 거부한다. 저자들은 수요와 공급 측면으로 나누어 이 문제를 분석하는데,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사회에 내재된 포퓰리즘적 태도가 포퓰리즘 정치를 나오게 한다는 것이다. 정책 실패, 정치권의 체계적 부패, 정치기득권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느낌은 포퓰리즘적 태도를 활성화하는 핵심 요인이다. 포퓰리스트 정치인은 이러한 잠재되어 있던 반기득권 정서를 공공의 영역으로 끄집어내어 기득권층이 충분히 다루지 않았던 이들의 이해관계를 정치적 쟁점으로 삼는다. 그들이 설득력 있는 위기 서사를 만들어낸다면, 선거와 정책 모두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어떻게 하면 포퓰리즘적 태도를 막을 수 있을까인데, 저자들은 여러 방안을 제시하면서도 교육에 주목한다. "가장 중요한 전략 중 하나는 시민교육으로, 그 목표는 자유민주주의의 주된 가치를 가르치고 극단주의적 도전자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시민 사회화다...전반적으로 보아 시민교육은 민주적 신념을 강화하고 다원주의의 타당성을 설명함으로써 포퓰리즘적 태도를 막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교육은 민주주의 가치와 신념 보존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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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8-14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방법은 시민교육이네요.^^

Redman 2022-08-15 15:58   좋아요 1 | URL
뻔한 말인 듯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수긍하게 되는 결론입니다 ^^

mini74 2022-09-08 0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 축하드립니다 ~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그레이스 2022-09-08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Redman 2022-09-08 15:2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9-08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한가위 되세요.^^

Redman 2022-09-08 15:2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님 즐거운 추석연휴 되십쇼

서니데이 2022-09-08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세요.^^
 


애초 이 책을 읽은 내 관심사는 중국 고대사상의 사회적 맥락을 짚는 것이었으므로, "제8장 패자와 무사: 춘추시대의 사회 변모"부터 "제10장 정치인 사상가: 최근 발견된 문헌을 통한 조명"만 집중적으로 보면 될 터이지만 좋은 책이 늘 그렇듯 다른 주제와도 연결해서 읽을 부분이 상당히 많다. 저자의 머리말에서 한 단락을 뽑아보겠다.

"중국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나는 항상 중국 역사를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비교론적 틀로 인류 보편적 경험의 일부로 연구하는 것이라고 믿어왔다...농경 생활 방식의 시작, 지역에 기반을 둔 사회조직-수장사회의 형성, 도시 문화의 출현. 국가의 발생, 관료제와 행정기관의 출현, 그리고 제국의 형성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구절은 즉각 <옥스퍼드 세계사> "Part.2 점토와 금속으로: 농업의 출현부터 '청동시 시대 위기'까지 발산하는 문화들-기원전 1만 년경부터 기원전 1000년경까지"를 떠오르게 한다. Ch.4 "농민의 제국들"이란 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기원전 제5천년기부터 제3천년기까지 서로 멀리 떨어진 세계 각지에서 우리는 공통 경험을 통해 발산을 추적할 수 있다. 그런 공통 경험으로는 정착지의 조밀화, 인구 밀도의 증가, 사회적 범주와 정부 기능의 증가, 국가의 출현과 제국으로의 변모, 그리고 갈수록 다변화되고 전문화되는 경제 활동 등이 있다."

리펑의 책은 양사오 이전 (BC 6500~)부터 시작하고, 서주시대가 1045~771BC이므로 <옥스퍼드 세계사> "Part 2 점토와 금속으로"의 시기와 겹친다. 그렇다면 리펑의 책 머리말에서 추릴 수 있는 주제는 '농경 사회에서 제국으로의 이행', '국가의 발생' '관료제와 행정기관의 발달' 등인데, 우리는 <옥스퍼드 세계사>를 통하여 같은 시기 다른 국가의 사례는 어떤지 정리할 수 있겠다.

'제국으로의 이행'이라는 주제는 또 헤어프리트 뮌클러의 <제국>과 비교할 수 있는데, 뮌클러는 '아우구스투스의 문턱'이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역사상 국가들이 어떻게 제국으로 불릴 수 있는 요소들을 갖추게 되었는지를 분석한다. '국가의 발생'이라는 주제는 <옥스퍼드 세계사> Part 3. 제국들의 진동 중 "Ch.7 성장: 사회조직과 정치조직 - 기원전 1000~기원후 1350년"과 비교해서 읽을 수 있다. 이언 모리스는 "저가 국가"라는 개념을 통해 이집트, 주왕조 등을 분석한다. 저가 국가란, 수입을 많이 얻지는 못했지만 국가 운영에 필요한 비용도 적었던 국가를 지칭한다. 국가가 지출하는 비용이 적었다는 사실은 국가가 수행하는 일이 적었다는 것과 국가가 약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언 모리스가 지적하듯 "국가가 약하다는 것은 농민들이 정부에 세금을 적게 내거나 전혀 안 낸다는 뜻이었다." 주가 이런 저가 국가에 속했다. 주의 "신임 제후들은 왕에게서 받은 영토를 직접 다스리며 각자 원하는 대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왕의 요구 사항은 자신이 전쟁을 벌일 때 '많은 제후들'이 각 제후국의 분견대를 거느리고 참전하는 것이 전부였다. 전쟁은 마친 뒤 왕은 제후들에게 약탈품을 분배했다." 국가의 역할이 적으므로 국가와 백성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춘추시대는 이러한 경향이 뒤바뀐 시대였다. 현(縣)이라는, 주의 봉건제와 같은 혈연적 네트워크망이 아니라 국가의 최고통치자가 관리를 보내 직접 관리하는 행정 단위가 확산되면서 "국가는 이전 어느 때보다 농민에 가가이 갈 수 있었고 농민도 그러했다." 국가와 백성 사이의 가까워진 거리는 "개별 농민들이 직접 부담하는 일반적인 조세와 군사 복무"로 이어진다. 현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경지역에 설치되었는데, 국가는 이런 지역들을 개척함으로써 조세 수입과 노동력의 공급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춘추시대는 전쟁과 개발 등으로 국가가 지출하는 비용이 주와 다르게 급격히 늘어난 반면 현 제도를 통해서 벌어들이는 수입도 그만큼 늘어난 시대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춘추시대 이후 중국은 '고가 국가'로 진입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고가 국가의 특징은 군사적 승리로 취하는 전리품에 의존하는 약탈경제 대신 "관료제를 창안해 세금을 거두고 병력을 직접 고용함으로써 전리품을 모두 국가 소유로 거두"(옥스퍼드) 것이다. 이로써 고가 국가는 확장 가능성도 훨신 커졌는데, "가장 큰 저가 국가였던 기원전 14세기 이집트와 9세기 아시리아는 각각 면적이 100만 제곱킬로미터에 인구가 300~400만 명이었지만, 기원후 175년경 로마와 중국은 각각 면적이 500만 제곱킬러미터에 인구가 5000만 명이었다." 제국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춘추시대 고가 국가로의 변모가 제국으로 가는 기틀을 놓았자고 할 수 있다.

여담으로 '국가의 발생'이라는 주제에 학자마다 다양한 견해를 품고 있는데, 이는 국가가 무슨 역할을 수행하는지와 관련이 있다. 국가는 사회 내부 투쟁 조정의 수단으로 보는 것, 외부의 위협에 대응하여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수단으로 보는 것, 마지막으로 의례체계를 집중화하기 위해 사회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내적 지향의 최종 산물로 보는 것. 이는 필연적으로 국가론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국가론을 연구한 밥 제솝의 <국가 권력>이나 <전략관계적 국가 이론> 등이 국가론의 기본 서적으로 읽어볼 만하겠다. 이 분야에 완전히 문외한이라면,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로 기본 주제들을 다잡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물론 유시민의 책은 기본 그 이상의 역할은 충족하지 못하므로 다른 책으로 가기 위한 발판 정도로 삼아야 하지만)



이렇게 연관된 독서로 주제가 점점 확장되는 것은 책을 읽는 이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 아닐까. 혹은 쓸모도 없는 지식 채우기라는 최악의 절망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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