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플라톤

플라톤의 경우, 한국에서는 대표적으로 3종류의 번역본이 존재한다.

 

첫번째는, 박종현 역본이다. 박종현 선생님은 국내 고대 그리스 철학계의 대부이시다. 플라톤 저작 전체 완역은 아니지만, 중요한 저작들은 모두 번역하셨다. 특히, <국가>는 정암학당에서 번역이 나오지 않는 한, 박종현 선생님의 <국가/정체>(서광사, 2005)가 가장 정확한 번역본이 아닐까 싶다. 고어투 문체가 읽기 힘들 수 있지만, 번역의 정확성만큼은 보장된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천병희 역본이다. 고전문학을주로 공부하신 천병희 선생님은 그리스어뿐만 아니라 라틴어에도 매우 조예가 깊으시다. 2019년 총 7권 볼륨으로 플라톤 전집을 완역하셨다. 특히, <국가>는 박종현 선생님 이후로 두 번째 완역이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법률>도 번역되어 있다. 천병희 역본의 가장 장점은 가독성이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 문학쪽으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기에 어느 정도 신뢰하고 읽을 수 있는 번역이다.

 

세번째는, 정암학당에서 나오는 플라톤 전집이다. 독일, 영국 등 해외 유학파 출신 등 권위있는 전공자들이 대거 활약하고 있는 정암학당에서 오래전부터 플라톤 전집을 발간하고 있다. 원래는 이제이북스에서 출판했으나, 현재는 아카넷에서 장정을 새롭게 하여 재출판하고 있다(내용을 보완하고 책의 구성이 조금 바뀌었으며, 양장본이 된 대신 판형이 조금 작아졌다) 전공자들의 번역이니, 각주와 해제가 본문보다 길 때도 있을 정도로 충실하다. 그리고 그리스어 단어 색인도 잘 되어있어 공부할 때도 매우 유용하다. 정암학당 플라톤 번역은 거의 아카넷과 이제이북스에서 나오지만, <법률>은 특이하게도 나남출판에서 나왔다. 

 

결론적으로 1. 정암학당->2. 천병희->3.박종현 순으로 추천할 수 있겠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기준입니다)

 

 

2.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아직 번역이 많이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우선 <정치학> <시학><니코마코스 윤리학> 등은 천병희 선생의 번역이 있다. 그러나 전집을 내지는 않았다.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정치학>은 도서출판 길에서 출간한 번역본도 있는데, 이쪽은 전공자들이 번역하였다. 특히, 김재홍 선생님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분이다. 전공자들의 번역을 원한다면, 도서출판 길에서 나온 것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면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을 읽어도 상관없겠다. (그런데 내가 다니는 대학의 고대 그리스 전공하신 교수님도 천병희 선생님의 <정치학>을 읽는데, 그런거 보면 크게 차이는 없는 건가 싶다)

참고로 저는 천병희 선생님 역본으로 읽습니다 (중고로 싸게 나와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악명높은 철학 저술 <형이상학>은 조대호 번역본(도서출판 길)과 김진성 번역본(이제이북스)이 있는데, 두분 다 정암학당 소속이다.

조대호 번역본이 일반적으로 많이 읽히는 것 같다. 김진성 번역본도 좋지만, 주로 한자로 번역되던 용어를 풀어쓴 한글 단어 옆에 괄호쳐서 한자어를 병기하는 등 읽기 조금 번잡스러운 면이 있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전집 발간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은 이제 갓 시작한 상태이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의 아카넷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을 발간하고 있는데, 현재 두 권이 나왔다. <영혼에 관하여>에서 <소피스트적 논박>까지 2년 걸렸는데, 이 속도면 역자분들이 죽기 전에는 나올 수 있겠다

 

 

여러 출판사 이름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는데, 아카넷-길-이제이북스 등의 출판사들은 사실 거의 믿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길에서는, 각 분야의 전공자들이 직접 번역에 참여하고 있어 높은 가격대임에도 소장할 만하다.

 

 

번외로 고대 그리스 철학을 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면, 도서출판 길에서 나온 <서양고대철학>1~2가 있다. 1권은 자연철학자에서 플라톤까지, 2권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서양 중세 철학까지. 각 분야의 권위자분들이 모여 집필한 책이므로 (많이 어렵지만) 이만한 개설서는 없을 것 같다.

 

 

 

 아 그리고 최근 현대지성사에서 박문재 선생님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과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향연>을 번역하셨다. 주로 기독교 계열의 서적들을 번역하셨고 전공자는 아니지만, 20년 넘게 번역 일을 해오고 매번 양질의 번역을 하신 분이니, 여러 권을 사서 읽는 것보다는 단권으로 읽고 싶다면 이러한 번역본도 읽을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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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사회는 ‘평등‘을 전제로 한다.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이 정치, 경제, 문화를 지배하는 상류 사회가 엄연히 존재하고, 하층과의 사이에 명확한 단결이 있는 계급 사회에서는, 일단 노동자의 자식이 대학 진학을 꿈꾸는 일은 없었다. 일본에서는 경제적인 조건은 차치하더라도 ‘학력‘만 있다면 소작농이나 노동자의 자식이라도 도쿄대학에진학할 수 있었다. 거꾸로 만약에 성공할 수 없었다면 그것은 신분과같은 외재적인 제약의 탓이 아닌, 본인의 ‘실력‘ 이나 ‘노력‘ 이 부족한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학력주의야말로 기회의 평등, 우승열패,자기 책임이라는 자유 경쟁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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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로써 자기를 증명하려 하지 말고, 인격으로 우리를 증명해야 합니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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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에 이런 일화가 있다. 언젠가 당신께서 한 월간지에 글을 기고하였는데, 한 스님이 그 기고문을 보더니, 자신을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것이었다. ‘자신과 생각이 같다니’, ‘잘 통한다느니’ 하며 법정 스님을 극찬했던 그 사람은 바로 다음 달 같은 잡지에 게재된 스님의 글을 보더니, 이번에는 ‘당신이 그렇게 안 받는데’ 운운 하면서 욕을 하더란다. 이에 대한 법정 스님의 반응. ‘내 그럴 줄 알았지. 역시 당신은 나를 오해하고 있었구만.’ 이러한 일화를 얘기하며 스님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란 불가능하며, 이해한다고 말하거나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조차도 실상은 상대방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는 텁텁한 결론을 내리셨다. 그가 자신의 방에 붙여 매일 보았다던 법구경의 유명한 구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도 어쩌면 이러한 결론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감히 추측해본다.

 

 

영화 ‘완벽한 타인’(2018, 감독 이재규)은 법정 스님의 결론을 뒷받침해주듯이 매우 찜찜한 마무리를 보게 된다. 영화의 줄거리와 설정을 봐보자.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모두 3쌍의 부부(석호-예진/태수-수현/준모-세경)와 영배, 이렇게 총 8명이다. 그중에서 영배를 포함하여 남자들은 말 그대로 어렸을 때부터 40년 넘게 우정을 쌓은 죽마고우다. 당연히 서로의 배우자들끼리도 친하다. 40년지기 우정과 배우자. 얼핏 보면 서로가 서로를 전부 다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 영화는 이 8명의 인물이 석호의 집에서 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하면서 시작한다. 식사 자리 중, 핸드폰으로 오는 모든 연락 내용을 서로에게 공개하자는 게임을 시작하게 된다. 문자나 카톡이 오면, 남들이 들을 수 있게 읽고, 전화가 오면 스피커폰으로 전환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각자 자신이 평생 감추고 싶어했던(심지어 배우자와 친구들한테까지) 비밀들이 드러난다. 처음에는, 작고 사소한 비밀이, 다음에는 남들이 알면 부끄러운 사실들이, 마지막에는 자신 이외에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될 비밀들이. 하지만, 반전은 하나 더 있었다. 영화는 ‘핸드폰 게임을 하지 않았을 경우’의 결말을 보여준다. 그 결말에는 모두가 좋아 보인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관객은 안다, 그 같은 평온한 관계는 전부 허위이고 거짓임을. 진실한 관계란 있는 것일까.

 

누구나 아무리 가깝고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말하지 못하는(혹은 말하지 않는) 비밀 한 두 개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고 감추는 것일까? 가장 근본적인 기저에는, 비밀이 밝혀져 일어날 인간관계의 붕괴와 사회적 자아의 변화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 등장인물 영배는, 자신이 동성애자란 사실을 밝히자마자 바뀐 자신을 향한 친구들의 시선에 상처를 받고 40년 우정을 잃는다. 아마 그 시선의 의미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쟤는 알고 보니 저런 놈이었구나.” ‘알고 보니’ ‘그런’ 사람이었다...아마 이것이 가장 피하고 싶던 결과 아닐까? 여기 있는 나는 변한 것이 없건만, 몰랐던 사실 하나 더 알게 된 것으로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버린다.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일까 두렵다. 그래서 점점 숨김으로써 전혀 다른 두 자아가 공존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영화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도 바로 이것이다. 타인은 영원히 ‘완벽한 타인’으로만 남는 것일까?

 

2018년에 방영한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이러한 ‘완벽한 타인’의 결말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이 드라마는 이지안과 박동훈의 유대감 형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지안은 중학생 시절 자신의 할머니를 폭행하는 빚쟁이를 죽였다. 물론 그 정당방위가 인정되었지만, 그녀는 평생 살인 전과범이라는 낙오를 지니고 살게 된다. 말도 안 되는 액수의 사채 빚 때문에 안 해본 일이 없으며 돈 되는 일이라면 도청이나 미행 같은 위험한 작업도 수시로 했을 것이다. 그녀는 타인의 호의에도 비관적으로 나온다(사실 호의다운 호의도 거의 받아본 적이 없다). 이런 지안의 인간관계관을 표현하자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내가 사람 죽인 걸 알아도 잘 대해줄까?’

 

 

그런 지안의 인생을 변화하게 만든 인물은, 그녀가 일하는 회사의 부장 박동훈이다. 처음에는 박동훈이 회사 정치에 연루된 것을 알게 되자, 회사 대표 도준연이 박동훈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척하고 박동훈을 퇴사하게 하는 조건으로 도준연과 거래를 한다. 박동훈과 회사 내 반(反)도준연파의 계획을 알아채고 약점을 잡기 위해 이지안은 박동훈의 핸드폰에 도청 장치까지 설치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듣게 된다. 그러나 박동훈에게 다가갈수록 평생 받은 적 없던 따뜻한 호의와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진정한 어른’ 박동훈에게 마음을 연다. 그것 말고도, 지안이 동훈과 정서적으로 가까워지는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박동훈의 핸드폰 도청이 있었다.

 

 

드라마 최후반부에서 박동훈은, 이지안이 그동안 몰래 자신을 도청해왔음을 알게 된다. 보통이라면 배신감에 치를 떨고, 그동안 자신이 가장 밝혀지길 원하지 않던 것(아내의 불륜)을 모두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이지안과의 관계를 끊어버려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당장 이지안을 고용했던 도준연도 그녀를 욕하며, 회사의 다른 상무들은 도청 사실을 구실로 이지안과 도준연을 보내버릴 계획을 짰다. 그렇지만 정작 당사자인 박동훈은 이지안을 경멸하지도, 내치지도 않는다. “그 사람을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상관없어. 내가 널 알아.” 자기가 안 밉냐는 지안의 질문에 박동훈이 한 말이다.

 

 

‘완벽한 타인’과 ‘나의 아저씨’는 얼핏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작품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완전히 상반된다고 말할 수 있다. 전자가, 아무리 가깝고 친밀한 사이더라도 우리는 타자의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며, 오히려 그 내면까지 알게 된 순간, 타자는 타자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반면에, 후자는 ‘타자에 대한 사실’을 더 앎으로써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타자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함을 드러내어 준다. 이런 의미에서 법정 스님의 생각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 사랑은 오해나 착각이 아니다. 타자는 ‘완벽한 타인’으로만은 머무르지 않는다. 인격적 교제와 친밀한 관계를 통해 타자는 내 안의 일부가 되고 나도 그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형성되면, 상대방이 ‘알고 보니’ 나를 도청한 스파이였단 ‘사실’조차 그 관계를 뒤집을 수 없게 된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배제와 포용>에서 탕자의 비유를 해설하면서 탕자를 용서하고 끌어안은 아버지의 행동이 “관계가 모든 규칙보다 우선한다는 믿음(260p)”이 전제되었다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믿음이 박동훈의 대사를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볼프는 계속해서 말한다. “우리에겐 유익한 규칙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 규칙을 깨뜨린 사람을 다시 받아들여야 할 ‘의무’도 있다. 이미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기뻐할 뿐만 아니라 돌아오고 싶어하는 이들과도 더불어 기뻐해야 한다(259p).” 어떠한 도덕이나 윤리 원칙에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깊은 교제를 맺은 이들(안에 있는 이들)과의 관계 유지도 그만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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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day1120zz 2020-09-03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계는 참 어려운거 같아요.
차라리 완벽한 타인이면 무관계로 설정해 두면 되는데....^^
비슷한 취향의 두사진...
요즘 사춘기와 나의 관계가 아주 힘들기에....^^

Redman 2020-09-03 10:12   좋아요 0 | URL
네 아예 차라리 나 혼자만 있었다면 안 했을 고민도 하게 되면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어지지만, 말처럼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네요..ㅎㅎ 좋은 하루 되세요!

막시무스 2020-09-03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가 보고싶어 지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ㅎ

Redman 2020-09-03 10:04   좋아요 1 | URL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폭력과 배제의 문제에 기독교는 답이 될 수 있을까? 최근 보수 기독교계의 혐오 발언과 정부 통계로도 잡히지 않을 정도로 교단이 분열된 한국 교회의 분리주의적 성향을 보면, 답은 매우 비관적이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따로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예수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인 용서(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와 비폭력(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의 가르침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듯하다. 특히, ‘용서의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힘들다. 발칸에 주목하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 20세기 발칸의 역사는 용서포용가장 강력하게 시험받는 곳일 것이다. 19~20세기 발칸은 폭력, 야만, 원시성과 같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부정적 의미를 온전히 실현한 역사를 썼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발칸 또는 발칸으로 상징되는 폭력의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19세기 이전의 발칸에는 뚜렷한 배제와 차별의 기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듯하다. “발칸은 하나의 종교적 단일체나 언어적 단일체가 되기에는 산세가 너무 험하고, 취약하며, 분리돼 있었다.” 정교회가 지배적이기는 했으나, 보스니아에서는 보고밀교가 오스만 지배 이전까지 존속했을 정도였다. 오스만제국이 발칸을 지배한 이후에도 오스만 유럽에서는 인구의 태반(80퍼센트)이 기독교로 남아 있었다.” 오스만 정부가 기독교도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려 하였으나, “대규모로 개종하는 것은 발칸의 몇몇 지역에 한정되었다.” 또한, 높은 세금을 물고 있던 기독교인들의 집단 개종으로 인한 재정 약화 우려 등의 이유로 개종에 크게 열의를 보이지도 않았다. 이렇듯, 오스만이 종교간 공존과 관용을 기본 방침으로 삼았기에 마케도니아의 한 농부는 우리는 성모마리아를 믿는 무슬림입니다라고 답할 수 있었고, 일상생활의 영역에서도 신학적 경계를허물 수 있었던 것이다. 발칸인들은 민족적 구분에 대해서도 무관심하였다. “술탄의 신민들에게는 민족성(nationality)’라는 개념이 없었고, 기독교는 인종적 결속보다는 신도들의 공동체에 더 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때의 발칸은 아직 자아와 타자의 정체성 구분이 엄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만제국 치세 말기, 개혁을 통해 근대 국민국가 체제로 전환되면서, 다층적 정체성 의식에서 나온 오스만 제국의 특유의 유연성이 사라지는 결과를 낳았다(<오스만제국>,까치,2020). 발칸의 계몽적 지성인들이 민족의 역사라는 관념을 도입하면서 근대 민족주의가 시작되었고, 민족성으로 타자를 나누고 때로는 억압하였다. 약해진 오스만의 영향 아래, 세르비아,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이 독립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였다. 신생국들은 정치적으로 영토 확장에 대한 열망과 실지(失地) 회복이라는 명분 하에 팽창주의 노선을 표명하였고, 대중은 강대국의 개입을 극도로 혐오하였다. 여기에 인종성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주의의 문제도 결합되어, 자국 내 이민족(그 기준이 대단히 모호하고 자의적이지만) 처리에 대해 극단적 폭력과 낙관적 생각이라는 두 가지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와 같은 극단적인 민족주의 분출이 1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화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모두 아는 바이다. 그러나 민족자결권으로 인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민족성의 문제는 발칸에서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다수 민족은 소수 민족에 대해, 주민 교환 심지어는 학살 등의 방법을 통해 이들을 배제·동화하였다. 발칸의 깊은 갈등의 역사는 전후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뿌리내리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이데올로기로 더욱 첨예해졌다.”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할 즈음에는 다시 민족주의가 부흥했으며, 21세기의 발칸은 민족성이나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국제경제로부터 오는 위험이 발칸을 위협하고 있다.

 


크로아티아 출신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의 <배제와 포용>은 이와 같은 20세기 발칸의 역사, 그중에서도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배경으로 할 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일어난 민족적·인종적 갈등은 근본적으로 정체성과 타자성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였다. 근대적 자아나 전근대적 자아는 푸코의 주장처럼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구성된다.” 나치의 인종주의 정책이나 발칸의 국가들이 행했던 편협한 소수민족 정책은 순수성이라는 허구적 논리로 돌아갔다. 혈통, 영토, 기원, 역사 모든 것은 순수해야 하며, “다원성과 이질성을 동질성과 통일성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은 앞에서 말한 바 대로이다.

 

배제는 크게 세 가지 양상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제거에 의한 배제다. 둘째, 동화에 의한 배제다. 이는 분리를 지워 버리는 것을 수반한다...그 결과 타자는, 자아처럼 만들어져 동화되거나 자아에 종속되어야 할 열등한 존재가 된다.” 마지막 세 번째 형태는, 유기에 의한 배제, 즉 무관심이다. 나는 고통받는 약자를 지나쳐야만 한다. 무관심은 그런 생각을 만들고 또한 실제로 우리가 그런 생각을 성취하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타자를 배제하는가? 우선 안정적인 외부정 정체성을 선호가 때문이다. 이에 의하면 타자는 집단에서 씻어 버려야 할 더러움이며, 인종적 공간이라는 생태계를 위협하는 오염원이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의 그늘을 지우기 위해서다. 그러나 볼포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세 번째, “타자가 가진 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패권적 자아가진 바를 지켜내고 타자로부터 권력을 빼앗고 싶어 하기 때문에타자를 정복하며 소유한다. 여기에 정체성을 향한 욕망이 결부되면서, 폭력 성향도 강화된다.

 

배제는 증오라는 감정을 수반하며, 이 증오의 감정은 폭력의 연쇄를 부른다. 특히, 제거와 동화의 배제를 생각해보라.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교사였던 한 이슬람 여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들(자신이 가르쳤던 학생)에게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그러는 동안 그들은 정교회 신앙이 아닌 모든 것을 파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하드전쟁(그녀는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이 길밖에 없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도 하며,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피해와 가해의 중첩의 상황 속에서는, 갈등의 골은 더 깊어질 뿐이며, 유죄한 사람과 무죄한 사람의 경계가 희미해지며, 바울이 말한 바, “다 같이 죄 아래에 있음을”(3:9) 발견하게 된다(물론 이것이 모든 죄가 동등하다는 결론으로 이끌어지지는 않음에 유의해야 한다). 배제의 세상을 변혁하기 위해 우리는 완전히 순수하고 무죄한 공간은 없음을 폭로하며, ‘무조건적인 포용의 의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드러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를 내어주시는 사랑을 누구에게나, 심지어는 악마처럼 보이기까지 한 그들에게도 보여줘야 한다. 배제의 사슬을 끊는 첫 열쇠는 하나님의 받을 자격 없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경륜으로부터 시작한다.

 

타자의 배제 문제와 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타자를 제거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을까? 혹은 에반게리온처럼 모든 인류를 하나로 통합하는 제3인류 계획이 답일까? 이 두 방법은 모두 공통으로 배제에 의한 해결이다. 그러나 볼프는 다른 방법을 얘기한다.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포용이다. 그렇지만, 초반에도 말했듯이, ‘진정한 용서는 가장 인기 없는 가르침일 것이며, 그리스도인에게도 힘든 가르침이다. 무엇보다 용서가 망설여지는 이유 중 하나는, 용서한다 하더라도 또 새로운 갈등이 일어날 것이라는 우리의 암울한 경험적 전망 때문이다. 여순 사건 때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좌익 학생 두 명을 용서하고 회심시킨 손양원 목사가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로 보인다. 99%의 경우, ‘최종적 화해란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볼프가 지적한 대로 우리의 바른 물음은, 어떻게 최종적 화해를 이룰 것인가가 아니라, 최종적 화해의 부재 속에서도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어떤 자원이 필요한가이다.

 

첫 번째는 회개다. 회개란 죄를 범했음을 인정하는 심층적 내면적 전환이다. 배제와 폭력을 행한 이들이 회개하라는 말은 당연히 수긍할 수 있지만, 희생자들마저 회개하는 것은 일견 부당해 보인다. 그러나 죄인이라는 말이 악인이라는 말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왜 회개하라는 부르심의 대상이 억압받는 이들을 포함되는가?...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비인간적인 증오로부터 해방될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희생당한 이들이 회개해야 한다는 말은 그들이 악인과 똑같은 죄를 저질렀다는 말이 아니다(앞의 죄의 동등성 거부를 유의하라). 회개는 증오의 고리를 끊고, 희생자들이 압제자들의 행동을 모방하고, 스스로 원수의 거울 이미지가 되도록내버려두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회개한 자아는 참된 사회 변혁에 동참할 수 있는 사회적 행위가 될 수 있다.

 

회개의 다음은 타자를 위한 공간 만들어주기가 필요하다. 타자/가해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채로는 평화롭게 살 수 없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는 역전되어야 하는데, 폭력을 통한 역전이 아닌 삼위일체의 페리코레시스, 다른 말로 자기 내어줌을 통한 역전이다. 교부 시대 이래로, 전통적인 삼위일체는 이렇게 이해되어왔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각 위격이 모두 독립적인 개체이지만 그 위격은 타자의 내주함을 통해서만 위격이 된다. 성자는 성부와 성령이 그분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성자이시다.” 십자가를 통한 원수(인류) 포용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어주심과 내주하심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내어주시며, 상호 내주하기는 하나님의 위격들의 춤추는 자아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이루신 일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타자를 나의 자아 정체성 안에 받아들이는 작업이 요구된다.

 

화해와 용서의 최종적 단계는 기억하지 않기. “과거는, 기억되는 한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양상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기억되는 상처는 경험되는 상처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일을 잊되, “하나님의 품 안에서잊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는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21:4)라며 종국의 망각을 암시해주고 있다. “칼이 없는 곳에는 발패도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용서하신 죄를 잊어버리실 것이며, 그것은 또한 약속이기도 하다(다음을 보라. 이사야 4318~19, 25).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십자가는 또한 우리의 죄를 잊어버린다. 하지만, ‘망각의 과정은 우리의 정의 감수성과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손이 피로 물든이들에게 희생된 자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이 말은 옳다. 따라서 아직 메시아가 영광 중에 오시지 않았기에, 희생자들을 위해 우리는 그들의 고난의 기억을 계속 살아있게 해야 한다.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외쳐야 한다.” 그러나 이 기억이 다시 증오와 분열로 이어지지 않도록 구속(救贖)의 소망으로 통제되어야 한다.”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복음은 폭력과 배제의 역사를 종식시키고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사실, 회개, 자기 내어줌, 기억하지 않기를 다 완수하더라도 포용은 완성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나는 타자를 향하여 손을 벌려도, 타자는 손 벌리기를 거부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나를 안는 척하면서 내 등에 칼을 꽂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궁극적인 스캔들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포용은 은총이며, ‘은총은 언제나 도박’”이라는 볼프의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을 듯하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이 세상에 은총이라는 도박을 하고 계신다. 실패할 확률이 극악으로 더 높고, 실제로 번번이 은총을 거절당하였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멈추지 않으신다. 따라서 우리도 타자와 원수를 향하여 두 팔을 벌려 포용의 의지를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언제나 십자가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궁극적으로 십자가가 승리할 것임을 믿기에, 구원하심이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음을 믿기에. C.S. 루이스는 <용서>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용서할 수 없는 부분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영광의 무게>>, 188p).우리는 과연 원수조차 용서하고 포용하여 내 이웃처럼 지낼 수 있을까? 볼프의 말을 빌리자면, “아니요, 못할 겁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로서 나는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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